“영원한 사제”

‘영원한 사제’ 강론은 가톨릭 성직자의 본성과 필요성, 존엄성, 미사와의 관계,그리고 교회 안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합니다. 원레 이 강론은 성인이 선종하기 전에 따로 출간되었으며, 1985년에 ‘교회를 사랑하다’라는 스페인어 제목으로 재편집되어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1973년 4월 13일, 수난 금요일(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일곱 가지 통고 기념일”)에 드리는 강론


며칠 전 미사를 거행하던 중 잠시 멈춰서 시편의 한 구절을 묵상했습니다. 전례에서는 이 구절을 영성체송에 넣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1. 이 영성체송은 다른 시편의 구절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 두 번째 시편은 예전에 삭발식 예식에서 낭송되었습니다: “제가 받을 몫이며 제가 마실 잔이신 주님…”2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사제들의 손에 자신을 맡기십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이 됩니다.3

다가오는 여름에는 약 50명의 오푸스데이 일원들이 사제품을 받게 됩니다. 1944년부터 오푸스데이의 일부 일원들은 사제품을 받아왔으며, 이는 교회에 대한 은총과 봉사의 현실로 전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서로 놀라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성공과 약속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서른, 마흔, 쉰 명의 남성이 어떻게 사제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몇 가지 사항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말씀드릴 내용이 아까 언급한 분들을 더 놀라게 할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왜 사제인가요?

사제품을 받을 이 오푸스데이 일원들은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건축가 등 다양한 직업 분야에서 귀중한 경험과 때로는 장기간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 영역에서 그 경험과 관련된 전문 직책을 가지실 수 있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사제 서품을 받아 봉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들은 명령하거나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수품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묵묵히 모든 영혼을 섬기는 데 자신을 바치도록 사제가 될 것입니다. 그분들은 사제가 되기 전에 사회에서 쌓았던 경험들 덕분에 영원히 평신도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지금까지의 경험 덕분에 평신도의 직업과 일을 잘 이해하고 있지만, 사제로서 그 직업을 계속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 자연 과학, 심리학, 법학, 사회학 등 인문 지식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그들의 능력은 평신도 정신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으로 인해 심리학자-사제, 생물학자-사제 또는 사회학자-사제로 자신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100% 사제, 즉 “진짜 사제”가 되기 위해 사제품을 받습니다.

그분들은 아마도 많은 일반인보다 현세적이고 인간적인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성직자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기도로 자신을 계속 단련하고, 오직 하느님에 대해서만 말하고,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거행하기 위해 기꺼이 이 세속적인 능력에는 침묵합니다. 그분들의 새로운 임무는 신학을 지속해서 연구하고, 많은 영혼을 영적으로 인도하며, 다수의 고해성사를 듣고, 지치지 않고 설교하고, 항상 감실에 마음을 고정하며 많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감실 안에서는 그분들을 자신의 소유로 선택하신 분이 참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이 사제 활동에 하루 종일 시간을 바칩니다. 비록 모순이 있을 수 있지만 이 부르심은 기쁨이 가득한 놀라운 선물이기도 합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모순 없는 피조물은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항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놀라움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왜 이 땅에서 선하고 깨끗한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며, 어떤 이유로 훌륭한 전문 직업을 포기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세속적인 문화, 교육, 경제 또는 다른 시민 활동 분야에서 모범을 보여주며 사회에 그리스도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계속해서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 많은 곳에서 신부님의 역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신부님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논의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서 신부직을 통해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미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세상의 직업과 일의 문제를 해결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사제 성소가 부족한 현재 시기에 새로운 사제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제들과 평신도들

이로 인해 일부 사람들이 놀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제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만약 동의한다고 말하면 저는 거짓말을 한 것과 같습니다. 이 신부님들은 자유라는 매우 초자연적인 이유로 인해 사제품을 받아들이며, 사제품을 받는 것이 특별한 자기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이미 오푸스데이의 성소를 받아 교회와 모든 영혼을 위해 봉사하는데 전념하였습니다. 그분들은 평신도로서 이미 완전하고 신성한 성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상적인 일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 일들을 통해 자신도 거룩해지며, 그분들이 전에 가졌던 전문적인 직업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거룩함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사제든 평신도든 오푸스데이의 일원은 언제나 평범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성 베드로의 다음과 같은 말씀의 수신자입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4

그리스도인들, 사제 및 평신도의 상태는 하나이며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사랑의 충만함과 거룩함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5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 상태에 있고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신성한 전투에서 패배할 것입니다. 2 등급의 거룩함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각자의 상태에서 거룩해지도록 초대하십니다. 개인적인 실수와 불행에도 불구하고 오푸스데이에는 거룩함을 향한 열정이 있습니다. 이 열정은 성직자든 평신도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게다가 사제는 전체 일원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사제직에 이르렀을 때 포기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사제직을 얻는다고 해서 오푸스데이에 대한 성소의 절정을 이룬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거룩함은 독신, 기혼, 미망인, 사제 등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은총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습니다, 즉 평온, 평화, 인류 전체에 대한 희생적이고 즐거운 봉사로 자신을 단장하는 법을 배웁니다.6

사제직의 품위

신부가 되는 것은 그 자체로 다른 사람보다 더 낫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사제직에 대한 성소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능가할 수 없는 품위와 존엄성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네가 (성직자들을) 변함없이 존경하는 것이 내 뜻이라고 말한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네게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네가 그들에게 보여주는 존경은 사실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의 사목으로 일임한 성혈 때문에,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너는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는 수준 정도로만 그들을 존경하면 되지 그 이상은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그렇게 될 경우 너는 그들을 거슬러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나를 거슬러 죄를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렇게 하지 말도록 금했던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손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뜻이라고 말했던 것이다.”7

어떤 사람들은 말하듯이 사제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가 남긴 이 말씀은 얼마나 명료합니까! 사제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된다는 특수성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Ipse Christus)’이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사제의 경우에는 성사적인 방식으로 즉시 일어납니다.

“이토록 큰일(구원 사업)을 완수하시고자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교회에, 특별히 전례 행위 안에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미사의 희생 제사 안에 현존하신다. ‘당신 친히 그때에 십자가에서 바치셨던 희생 제사를 지금 사제들의 집전으로 봉헌하고 계시는 바로 그분께서’ 집전자의 인격 안에 현존하시고, 또한 특히 성체의 형상들 아래 현존하신다.”8 사제품 성사를 통해 사제는 주님께 자신의 목소리와 손, 온몸을 효과적으로 바칠 수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한 미사에서 축성의 말씀을 통해 빵과 포도주의 실체를 즉시 그분의 몸, 그분의 영혼, 그분의 피, 그분의 신성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사제의 비교할 수 없는 존엄성의 기초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받은 위대함, 내 작음과 양립할 수 있는 위대함입니다. 저는 모든 사제들이 거룩한 일을 거룩한 방식으로 행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우리 주 하느님께 간구합니다. 우리 삶에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반영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수난의 신비를 기념하는 우리는 자기희생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직접 성체가 되면 그 성체가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할 것입니다.9

겉으로 보기에 복음에 따라 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제를 만나더라도 일단 그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사제가 축성할 의도를 가지고 미사 성체를 올바르게 거행한다면, 비록 존경할만 하지 않은 사제라고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손에 내려오신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그 사제에게 더 많은 자기포기와 더 많은 비우심 가능할까요? 다시 말하면 베들레헴과 갈바리아산보다 더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인류의 구원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하며, 그분께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을 찾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우연히 만난 것처럼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즉, 사랑 때문입니다! 다른 설명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설명하는 데는 말로는 언제나 부족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며, 신성모독에서부터 많은 이들의 냉담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상처 입은 가슴 속에서 뛰는 정성스러운 마음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적어도 한 사람에게라도 주기 위해 이렇게 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사제의 정체성입니다. 사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얻으신 구원의 은총을 즉시적이고 일상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고 기도의 침묵 속에서 묵상했다면, 어떻게 사제직을 포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포기가 아니라 측정할 수 없는 이익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을 제외하고는 가장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오직 한 번만 예수님을 세상에 내려오게 하셨습니다. 그에 반해 사제들은 매일 예수님을 이 지구에, 그리고 우리의 몸과 영혼에 계시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제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양을 주시며, 부활시키시며,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되기 위해 오시기 때문입니다.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

인간이든 신자이든, 사제는 평신도보다 더 뛰어난 것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제는 겸손한 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이렇게 사제는 자신의 경우에도 성 바오로의 말씀이 어떻게 특별한 방식으로 성취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10 사제가 받은 것은... 바로 하느님이십다! 사제가 받은 것은 성체성사, 즉 거룩한 미사를 거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사제서품의 주된 목적입니다. 사제가 또 죄를 용서하고, 다른 성사를 집행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선포하여 다른 신자들에게 하늘 나라와 관련된 일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제들의 사제직은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전제하지만 개별 성사로 수여된다. 이 성사로써 사제는 성령의 도유로 특별한 인호가 새겨지고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동화되어 머리이신 그리스도로서 행동할 수 있다.”11 교회는 사람의 변덕이 아니라 설립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뜻에 따라 존재합니다. “제사와 사제직은 하느님의 안배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 둘은 신약과 구약 안에 존재했었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는 주님의 제정에 따라 신약 안에서 가시적으로 성찬례의 거룩한 제사를 받았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에는 가시적이고 외적인 새로운 사제직이 존재하며, 옛 사제직은 새로운 사제직으로 변하였다고 고백해야 한다.”12

사제서품을 받은 사람의 경우, 이 직무 사제권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 사제권에 추가됩니다. 그러므로 사제가 다른 신자들보다 더 깊은 의미로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실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제가 더 깊은 의미로 사제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사제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된 사제적 백성입니다. 더욱이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는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13 다른 직무 사제직의 인호를 받았습니다.

저는 일부 사제들이 자신을 평신도로 변장해서 자신이 서품을 받아서 교회에서의 특별한 사명을 잊거나 소홀히 하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제를 그저 다른 일반 사람의 모습으로 보고 싶어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해, 정의, 일의 삶 (성직자의 경우 사제적 사목), 사랑, 예의,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온화 등 모든 그리스도인이나 정직한 사람에게 적합한 미덕을 사제가 갖추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 외에도 사제적 특성이 분명하게 강조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사제가 기도하고, 성사를 거행을 거부하지 않으며, 어떤 종류의 인간 파벌의 지도자나 무장 세력이 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기를 기대합니다.14 그들은 사제가 거룩한 미사를 거행하는 데 사랑과 헌신을 쏟고, 고해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병자와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들은 사제가 어린이와 성인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를 기대합니다. 그들은 사제가 완벽하게 알고 있더라도 인간의 과학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하기를 기대합니다. 그 과학은 구원을 주고 영생에 이르게 하는 과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제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조언과 사랑을 베풀기를 기대합니다.

한마디로 신자들은 사제가 특히 성체와 성혈의 희생을 바칠 때와 청각적이고 은밀한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할 때 그리스도의 현존을 방해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을 기대합니다. 이 두 성사를 집행하는 것은 사제의 사명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이 이 성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설교와 교리를 가르치는 다른 사제의 임무가 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지 않는다면 근거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사랑스러운 참회의 심판인 고해성사와 피를 흘리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골고타의 희생인 거룩한 미사에서 그분을 만납니다.

거룩한 미사 희생에 대해 조금 더 말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자 뿌리라면,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사제의 삶의 중심이자 뿌리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제대의 희생을 자발적으로 자청하지 않고 매일 실천하지 않는 사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거의 드러내지 않습니다.15 그 사제는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열망을 공유하지 않는 것 같고 영혼의 양식으로 자신을 바치려는 예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에게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거룩한 미사를 위한 사제

죄인이든 성인이든 사제가 거룩한 미사를 거행할 때 제대 위에서 그분의 거룩한 골고타 희생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끈질기게 주장하며 상기해야 합니다. “사제들이 그 주요 임무를 수행하는 성찬의 희생 제사의 신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활동이 계속 이루어지므로 성찬례를 날마다 거행하기를 적극 권장한다. 비록 신자들이 참석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행위이며 교회의 행위이다.”16

트렌트 공의회는 “미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신적인 희생 제사 안에는 십자가의 제단 위에서 단 한 번 자신을 피 흘리시며 봉헌하신 같은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며 피 흘림 없이 (봉헌됩니다...) 왜냐하면 그 희생 제물은 동일한 한 분이시며, 그분은 당시 십자가에서 자신으로 봉헌하시고 지금은 사제들의 직무를 통하여 봉헌되는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봉헌의 방식만이 다를 뿐이다.”라고 가르칩니다.17

신자들이 미사에 참석하거나 불참한다고 해서 신앙의 진리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한 신자이지만, 무엇보다도 제대 위의 그리스도입니다! 저는 골고타의 신성한 희생을 피없이 갱신하며 “그리스도의 위격과 그분의 이름으로 (in persona et in nomine Christi)” 축성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 몸과 목소리, 손 그리고 때때로 더럽혀진 가난한 마음을 그분께 바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이 제 마음을 정화해 주시기를 동시에 원합니다.

봉사자 한 분과 함께 사제가 거룩한 미사를 거행할 때에도 모든 신자들이 미사에 함께 합니다. 저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 모든 그리스도인,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저와 함께 있다고 느낍니다. 땅과 하늘, 바다, 동물과 식물 등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이 있으며, 모든 피조물들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말씀에 따라 “성찬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는 우리는 천상 교회의 예배와 밀접히 결합되고 일치되어, 영광스러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 비롯하여 성 요셉과 복된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모든 성인을 기억하고 공경한다.”18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제들을 위해 많이 기도해 주시고, 거룩한 방식으로 거룩한 희생을 거행하는 방법을 알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자들은 거룩한 미사에 대한 섬세한 사랑을 발휘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사제들이 미사 때 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품위와 우아함을 갖추어, 전례복과 전례 물품들을 청결하게 하고, 헌신적으로, 서두르지 않고 거룩하게 집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시오.

미사 때에 뭐가 그리 급하신가요? 서로 사랑하는 애인 사이라면 작별 인사에 서두릅니까? 그들은 가려고 하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같고,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오고, 방금 만난 것처럼 평범한 대화를 합니다... 고귀하고 깨끗한 인간 사랑의 모범을 하느님의 일에 적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만날 때에는 주님과의 이 사랑의 만남을 서두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제들은 여유를 가지고 독서, 공지, 권고를 하면서 사람들이 지칠 때까지 시간을 끌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인 희생이 이루어질 때, 그들은 너무 서두릅니다. 이렇게 함으로 다른 신자들이 사제이자 희생자이신 그리스도를 정성껏 경배하지 못하게 합니다. 게다가, 이런 이유로 인해 그러한 사제들은 신자들이 우리 가운데 다시 오시길 원하시는 분께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감사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모든 애정과 필요는 거룩한 미사 안에서 최고의 방법, 즉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도달하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사제는 모든 신자들이 이 진리를 알고 그대로 살수 있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활동 중에서 성체 성사를 사랑하고 존경하도록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사제는 두 가지 행위를 행사합니다: 하나는 참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주된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대한 보조적인 행위입니다. 두 번째 행위 또는 직무는 첫 번째 행위에 의존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아닙니다.”19 그렇기 때문에 사제 직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더욱 순수하고 겸손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거룩한 희생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제가 이 일에 노력한다면 그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며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거룩한 미사에 우리는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말씀을 즐거이 이행하며 경배합니다.20 이것은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첫 번째 의무입니다. 차갑고 외향적이며 섬기는 경배가 아니라 아들의 친밀한 사랑인 친밀한 존경과 존중입니다.

거룩한 미사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과 모든 사람의 죄를 속죄할 수 있는 완벽한 기회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성 바오로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당해야 할 일을 우리 육신 안에서 성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21 이 세상에는 아무도 혼자 걷지 않습니다. 원죄의 결과이자 많은 개인죄의 총합인 이 땅에서 범한 나쁜 행동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희생을 사랑하고 속죄를 추구합시다. 어떻게 할까요? 거룩한 미사 안에서 사제이시며 희생자이신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여러분과 저와 모든 피조물들의 불충실의 무거운 짐을 지실 것입니다.

골고타의 희생은 그리스도의 관대함을 무한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기도할 때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그분께 미사 시간에 요청할 때 그 이기심에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요청할 것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 이 병을 기억하소서…” “주님, 이 슬픔을 기억하소서…” “주님, 당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 모욕을 견디어야 합니다.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 도와 주소서…” 우리는 우리 가정의 선과 행복과 기쁨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빵과 정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의 운명에 억눌려 있습니다. 우리는 외로움의 쓰라림을 경험하는 사람들, 또는 삶을 마감할 때 사랑이나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가장 큰 불행,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죄입니다. 즉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외, 영혼들이 영원히 지옥으로 갈 위험입니다. 골고타에서 목숨을 바친 예수님처럼, 우리가 미사를 거행할 때의 근본적인 열망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사람들을 영원한 영광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고한 희생자로서, 미사에서 사제의 손에 내려오실 때, 우리는 이와 같은 진심을 담아 주님과 대화하는 데 익숙해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에 대한 신뢰는 우리의 영혼을 민감하게 할 것입니다. 이 민감성은 언제나 선의와 사랑을 베풀게 하고 이해심을 높여 줄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들과 인위적인 행동으로 잠시 만족감을 느끼다가 곧 슬픔으로 변하는 이들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갈 준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에 감사합시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시는 놀라운 행위를 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강생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가슴에 오신다는 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께서 연약한 우리 속에 담기시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잠깐만 생각해 보십시오: 성모 마리아께서 그리스도를 태중에 품기 위해 원죄 없이 잉태되셨습니다! 은총의 영향은 선물과 공로 차이에 비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루를 계속되는 성체, 즉 “유카리스티아”(감사 행위)로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성체 성사를 모시고 나서 성당에서 바로 나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데 10분도 할애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일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나요? 인색하지 맙시다. 사랑은 사랑으로 보답합시다.

영원한 사제

사제가 거룩한 미사를 다음과 같이 진행한다면, 경배, 속죄, 간청, 감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가 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의 희생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과 뿌리로 삼도록 가르친다면, 그 사제는 자신의 성소의 위대함, 즉 영원히 잃지 않을 인봉된 인호의 위대함을 진정으로 보여줄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일부 신부님들이 하느님의 성직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신부라는 신분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불행하게도 그들은 인간적으로나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실패자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직무를 포기하고 평신도를 흉내 내고 두 번째 직업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소명과 사명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점차 대체하게 되어 부끄러운 일입니다. 종종 그러한 신부들은 영혼을 돌보는 일에서 벗어나 평신도에게 적합한 영역, 즉 사회적 리더십과 정치에 대한 개입으로 대체되는 경향이나 유사한 일들을 언급합니다. 이후 진정한 사제의 사명에 대한 병리적인 “성직자주의”가 나타납니다.

비관론처럼 들릴 수 있는 이런 어두운 이야기로 마치고 싶지 않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적 사제 직무는 하느님의 교회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교리는 예수님의 신성한 입술로 가르친 불변의 교리입니다. 전 세계에는 수천 명의 사제들이 자신의 부르심에 화려함 없이 온전히 응답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처음부터 교회에 있던 거룩함과 은총의 보물을 버리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이런 형제 사제들의 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존엄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어 기쁩니다. 세상에서 그들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우정과 도움, 애정으로 둘러싸여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신부님들이 하느님 앞에 서 있어야 할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들을 만나러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의 관리자로서 받은 은총을 적절한 시기에 관대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준 그분들에게 영원한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이번 여름에 사제가 될 오푸스데이 일원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분들이 항상 충실하고, 경건하고, 학식 있는, 헌신적이고, 매우 기쁜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 특히 그분들을 성모님에게 맡겨 주세요. 성모님은 성모님의 아드님을 섬기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이분들을 위해 어머니로서 예수님께 열심히 기도하십니다. 이는 성모님의 아드님이 바로 영원한 사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목차
1

시편 23,1; 사순 시기의 4째 주 토요일의 영성체송

2

시편 16,5.

3

1코린 4,1.

목차
4

1베드 2,9-10.

5

에페 1,3-4.

6

로마 13,12 참조.

목차
7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대화', 116장; 시편 105,15 참조, 바오로딸, 1997.

목차
8

제2차 바티간 공의회, 전례 헌장 "거룩한 공의회", 7; 트렌트 공의회, 성체성사에 관한 교령, 제2장, 참조.

9

성 대 그레고리오, 대화 4,59.9, 참조.

목차
10

1코린 4,7

목차
1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령 "사제품", 2.

12

트렌트 공의회, 성품성사에 관한 교리와 법규들, 제1장, 덴칭고, 1764.

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헌장 "인류의 빛", 10.

목차
14

같은 곳, 교령 "사제품", 6, 참조.

목차
15

같은 곳, 13, 참조.

목차
16

같은 곳.

17

트렌트 공의회, 미사성제에 관한 교리와 법규, 덴칭고, 1743.

목차
1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헌장 "인류의 빛", 50, 참조.

목차
19

토마스 아퀴나스, 대사전, 추가. 36,2,1 참조.

20

신명 6,13; 마태 4,10.

21

콜로 1,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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