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2«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몬시뇰과의 대화»에 성직주의 →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의 현존 항이 있음.

또한 교회 역사가 진전하면서, 평신도에 관한 모든 것을 왜곡하고 그들에게 숨은 의도를 부여하려는 특정한 성직주의를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오푸스데이가 실천하고 선포하던 것이 다름 아닌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성소이며, 구체적인 초자연적 헌신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더 쉬워졌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들이 사회 각계에 침투한다’는 말이 더 이상 쓰이지 않고, 모두가 그것이 성직주의적인 표현임을 깨닫는 때가 오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말은 오푸스데이의 사도직에는 전혀 해당하지 않습니다. 회원들은 현세의 구조에 침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똑같은 평범한 시민이므로 이미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공장이나 병원, 의회에서 일하는 사람을 오푸스데이로 부르신다면, 이는 그 사람이 이제부터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신의 직업을 성화하기 위한 수단을 마련하기로 결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받은 고유한 성소에 따라 복음의 메시지가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바를 자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자각이 평범한 삶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contemptus mundi, 곧 세상의 것들을 멀리하고 가볍게 여기는 수도 성소를 하느님께 받은 이들에게만 정당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을 떠나는 일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나 정점으로 삼으려는 것은 분명히 엄청난 잘못입니다.

따라서 회원들을 특정 환경에 들여보내는 것은 오푸스데이가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들은 이미 그곳에 있었고 떠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은총과 앞서 말씀드린 우정과 신뢰의 사도직에서 생겨나는 오푸스데이 성소는 모든 환경에서 나타납니다.

어쩌면 오푸스데이의 본질과 활동 방식이 이처럼 단순하다는 것 자체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하여 참되고 올바른 것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사람들에게는 어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오푸스데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당신 제자들에게 이런 어려움을 예고하시며 non est discipulus super Magistrum (Mt 10, 24), 곧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게 보아 주기를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또 하느님의 자녀로서 모든 사람에게 존중받을 권리는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생각을 전체주의적으로 강요하려는 광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푸스데이 회원들이 언제나 개인적 책임을 지면서, 먼저 다른 사람의 개인적 자유를, 그다음 자신의 개인적 자유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일화가 생각납니다. 이름을 밝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므로 어느 도시라고만 하겠습니다. 그 시의회는 오푸스데이 회원들이 지도하는 한 교육 활동에 재정 지원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그 활동은 오푸스데이가 수행하는 모든 단체 사도직 활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공익에 분명히 기여하고 있었습니다. 시의원 대다수는 지원에 찬성했습니다. 사회주의자인 한 의원은 찬성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그 시설의 활동을 직접 알아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활동의 특징은 운영자들이 개인의 자유를 매우 사랑한다는 점입니다. 그 기숙사에는 온갖 종교와 이념을 지닌 학생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시의원들은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자신의 반대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 사회주의 의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반대한 것은 사정이 그렇다면 그 기숙사가 가톨릭 신앙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거나 교회에 반대하려는 사람은 사도직 활동을 좋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저는 인간으로서 그를 존중하고 진리로 이끌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자는 결코 자신이 교회를 대표해서 성당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왔다고 믿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결정이 문제에 대한 “가톨릭적 결정”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결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성직주의’이고 잘못된 "공식적인 가톨릭"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름을 붙이건 좌우간, 사실의 본성에 왜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곳에서 올바른 "평신도 정신"을 전해야 합니다. 이 정신은 세 가지 결과를 낳습니다. 첫째, 매우 정직해짐으로써 각자의 책임을 가지고 행동하게 됩니다. 둘째, 충분히 ‘그리스도교적’이 되어, 자유롭게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생각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는 교우들을 존중하게 됩니다. 셋째, 충분히 ‘가톨릭적’이 되어, 인간적 갈등에 어머니이신 교회를 이용하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에서 비롯된 자유, 교회가 기꺼이 인정하는 그 자유를 누리지 않는다면 결코 일상생활을 성화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 자유는 그리스도교의 생활에 본질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자유는 책임을 동반하는 자유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책임 있는 자유

제 영적 자녀들은 다른 시민들과 결코 다를 게 없습니다. 이에 반하여, 같은 믿음을 제외하면 수도자들과는 같은 점이 없습니다. 저는 수도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사도직, 그들의 수도 생활, 세속을 외면하여 (contemptus mundi) 세속을 떠난, 그들의 삶을 존경하며 그들이 거룩한 성교회의 거룩함의 또 다른 표지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주님께 받은 성소는 수도자의 성소가 아니기 때문에, 제가 수도 성소를 원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이 땅의 어떤 권위자도 저를 억지로 결혼하게 할 수 없듯이 어떤 권위자도 저에게 수도자가 되라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저는 재속 사제입니다. 이 세상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