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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이 분명해졌으니 여쭙고 싶습니다. 회원들이 받는 영적 양성에는 어떤 특징이 있어서, 오푸스데이에 속한다는 사실에서 어떠한 현세적 이해관계도 배제될 수 있습니까?
순전히 영적인 것이 아닌 모든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배제됩니다. 오푸스데이는 이탈과 희생, 자기 포기, 영혼을 섬기기 위한 쉼 없는 노동 등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세적 이익의 차원에서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영적 삶의 차원에서는 많은 것을 줍니다. 수덕적 투쟁에서 싸우고 승리할 수단을 주고, 기도의 길로 이끌며, 예수님을 형제처럼 대하고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을 뵙는 법을 가르칩니다. 또한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이며, 따라서 그분의 가르침을 전할 책임이 있음을 자각하도록 가르칩니다.
내적 생활의 길에서 나아가 온전히 자신을 내어 주고 자신의 삶을 주님을 섬기는 데 바치는 것이 가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푸스데이에서 항구할 수 없습니다. 성덕은 이름표가 아니라 깊은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푸스데이에는 정치적·경제적·이념적 목적을 위한 활동이 없으며, 어떤 현세적 활동도 없습니다. 오직 회원들의 초자연적 양성과 사도직 활동만이 있습니다. 곧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끊임없이 영적으로 돌보는 일과, 돌봄·자선·교육 등의 단체 사도직 활동입니다.
오푸스데이 회원들은 오직 분명하게 정해진 성덕의 길을 따르고 특정한 사도직 활동에 협력하기 위해 결합되어 있습니다. 서로 간의 약속은 모든 현세적 이해관계를 배제합니다. 이 영역에서 모든 회원은 자유롭고, 따라서 각자 서로 다르며 때로는 상반되기도 하는 목적과 관심사를 가지고 자기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오푸스데이의 목적은 오직 하느님을 향하므로, 그 정신은 자유의 정신, 모든 사람의 개인적 자유를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그 사랑은 단순한 이론적 선언이 아니라 진실한 것이므로, 우리는 자유의 필연적 결과인 다원성을 사랑합니다. 오푸스데이에서는 다원성을 단순히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고 사랑하며, 결코 가로막지 않습니다. 정치·경제·사회·예술 등의 문제에서 회원들 가운데 수많은 다양한 생각과 서로 다른 태도가 있는 것을 보면 저는 기쁩니다. 모든 일이 하느님 앞에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광신과 불관용이 지배하지 않고, 무엇보다 신앙으로 살아가며, 우리 인간이 단순한 호감이나 이해관계가 아니라 동일한 성령의 활동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안다면 영적 일치와 현세적 다양성은 양립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제로 삼으시어 하느님 아버지께로 이끄십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일치, 교도권과 교회 전통에 대한 충실함, 그리스도의 구원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는 관심이, 흔히 말하듯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로운 논의에 맡겨 두신 문제들에 대한 다양한 태도와 상충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그 다양성이 하느님 계획의 일부이며, 당신 뜻대로 선물과 빛을 나누어 주시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임을 충분히 의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며, 따라서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의견을 존중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과 온전한 형제애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회원들은 바로 이 정신에 따라 양성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회원이라는 사실을 이용하여 개인적 이익을 얻거나 다른 이들에게 정치적·문화적 선택을 강요하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회원들이 이를 용인하지 않고 태도를 바꾸거나 오푸스데이를 떠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푸스데이에서 누구도 조금의 일탈조차 결코 허용할 수 없는 점입니다. 자신의 개인적 자유뿐 아니라 자신이 헌신한 활동의 초자연적 본질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 하느님의 일인 오푸스데이의 초자연적 목적을 가장 잘 보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몬시뇰께서는 일에 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오푸스데이의 영성에서 일이 차지하는 자리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오푸스데이 성소는 이를 받는 사람의 처지나 생활 신분을 어떤 방식으로도 바꾸거나 변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조건이 노동이므로, 오푸스데이 정신에 따른 성덕과 사도직이라는 초자연적 성소는 일하라는 인간적 소명을 확고히 해 줍니다. 회원 대다수는 평신도, 곧 평범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직업이나 생업, 흔히 온 힘을 쏟아야 하는 일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으로 생계를 꾸리고 가족을 부양하며 공동선에 기여하고 자신의 인격을 계발합니다.
오푸스데이 성소는 이 모든 것을 확고히 해 줍니다. 그래서 이 성소의 본질적인 표지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세상 안에서 살면서 인간적으로나 초자연적으로나 가능한 한 완전하게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각자의 불완전함을 안고서 말입니다. 곧 지상 사회의 건설에 효과적으로 기여하여 역량과 봉사 정신을 가지고 수행되는 일이며,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데 기여하여 자신을 성화하고 그 자체가 성화되는 일입니다.
오푸스데이 정신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온전히 살아 내고 사도직을 실천하려는 이들은 직업 활동으로 자신을 성화하고, 그 직업 활동을 성화하며, 직업 활동을 통해 다른 이들을 성화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함께 일하는 다른 시민들과 다르지 않은 동등한 사람으로서, 나자렛 작업장에서 30년 동안 일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분과 일치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일상의 일은 자신을 성화해야 하는 환경일 뿐 아니라 성덕의 바로 그 재료이기도 합니다. 하루의 여러 사건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기도 생활을 위한 자극을 얻습니다. 직업 활동 자체가 친척과 친구, 동료 같은 다른 사람들, 또 자신의 사회나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제들과 접하게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에게 본질적인 타인을 섬기는 헌신을 실천할 기회를 줍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참되고 진실하게 증언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모두가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세상 안에서의 평범한 삶과 날마다 하는 일이 하느님과의 만남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성덕과 사도직은 회원들의 삶과 하나를 이룹니다. 그래서 일이 그들의 영적 삶을 지탱하는 중심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헌신은 그들이 오푸스데이에 오기 전부터 하던 일,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하는 일에 접붙여집니다.
사목 활동 초기에 제가 이런 내용을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 어떤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또 어떤 이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관해서는 언제나 부정적으로 말하는 데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이 언제나 완전하므로 세상은 선하며, 죄로 세상을 나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인간이라는 사실을 제가 이해하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다른 이들도 이를 이해하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때 저는 우리가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고 지금도 그렇게 말합니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이며, 세상의 사건과 일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고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에는 악과 선이 뒤섞여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식별할 줄 아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식별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의 선함을 부정하게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것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것, 심지어 우리 자신의 나약함 뒤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것을 알아보게 해야 합니다. 사도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좋은 표어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 Cor 3, 22-23) 그렇게 하여 세상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일부 젊은이들은 그리스도교 신심을 겉치레 경건으로 받아들여 거의 완전히 외면합니다. 어쩌면 몇 가지 틀에 박힌 감상적인 관행으로 축소되기도 하는 강압적 종교 교육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겠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해결책은 이미 질문 속에 들어 있습니다. 먼저 모범으로, 그다음에 말로 참된 신심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것입니다. 겉치레 경건은 대개 교리의 부족과 인간적인 면에서의 어떤 왜곡에서 생겨나는, 가짜 영성의 슬픈 희화화에 불과합니다. 참되고 진실한 것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도 40년 전의 젊은이들에게도 그리스도교 신심이 뿌리내리는 모습을 기쁘게 보아 왔습니다. 그들이 신심이 진실한 삶이 된 모습을 볼 때,
—기도란 아버지나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주님과 이야기하는 것임을 이해할 때입니다. 익명의 누군가로서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서로 마주하여 대화하는 것입니다.
—믿음 가득한 만남으로 초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저 말씀, vos autem dixi amicos (Ioan 15, 15),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라는 말씀이 그들의 영혼에 울리도록 노력할 때입니다.
—그들의 신앙에 힘차게 호소하여, 주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심을 보게 할 때입니다(Heb 13, 8).
한편 그 소박하고 진심 어린 신심이 인간적 덕의 실천도 요구하며, 매주나 매일 하는 몇 가지 신심 행위로 축소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신심은 삶 전체에 스며들어 일과 휴식, 우정과 여가, 모든 것에 의미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만 하느님의 자녀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묵상하고 그 의미에 깊이 젖어 들기 위해 특별히 바치는 순간들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의식은 신심의 핵심입니다.
앞서 젊은이들은 이 모든 것을 잘 이해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덧붙여,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언제나 젊음을 느낀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80세 노인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살아갈 때, 제대 아래에서 바치는 다음 기도의 말씀을 참으로 깊이 음미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리이다. 제 젊음에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께 나아가리이다’(Ps 42, 4).
그리스도교적 물질주의
육신의 부활을 믿는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유물론이라고 판단되는 위험을 가지고도 항상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것을 거부하는 관념에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영적인 것에 닫힌 유물론에 뚜렷하게 반대되는 "그리스도교적 유물론"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의 발자국이라고 일컫던 일곱 성사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삶에 이르게 하고 천국에 올라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이 길을 택하셨음을 보여 주는 가장 명백한 표징이 아니겠습니까? 하나하나의 성사가 물질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창조와 구원의 힘을 가진, 하느님의 사랑인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다가오는 성체성사가, 초라한 이 세상의 물질(빵과 포도주)을 통하여, 최근의 공의회가 상기했다시피 “인간의 손으로 가꾼 자연 요소들”(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 38항 참조)을 통하여 봉헌되어 우리 구원자의 경애하올 몸과 피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참여하는 수 없이 많은 세상의 일들을 이 진리의 빛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활동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당뿐 만이 아니라 이 모든 세상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지적으로 직업적으로 적절하게 되려 노력합니다. 그 사람은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이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개인의 식견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결정들은, 작든 크든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려고 매우 겸손되이 노력하는 개인의 성찰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book-subject/conversaciones/4920/ (2026-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