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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이 성덕의 길이라는 가르침은 몬시뇰의 설교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1934년 『영적 고찰』을 쓰셨을 때부터 혼인을 소명으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책과 나중에 나온 『길』에서도 혼인은 그리스도의 참모부가 아니라 일반 병사들을 위한 것이라고 쓰셨습니다. 이 두 측면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오푸스데이의 정신과 삶에서는 이 두 측면을 조화시키는 데 어떠한 장애도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또한 영적인 동기로 살아가는 독신의 더 높은 탁월성은 저 개인의 신학적 견해가 아니라 교회의 신앙 교리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930년대에 제가 그 문장들을 쓸 당시 가톨릭 환경에서는, 구체적인 사목 생활에서 젊은이들이 동정의 초자연적 가치만 높이 여기게 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완덕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성덕에 이르는 또 하나의 길인 그리스도교적 혼인의 가치는 그늘에 가려 두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육기관에서는 젊은이들이 혼인의 존엄을 마땅히 받아야 할 만큼 소중히 여기도록 교육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중등교육의 마지막 학년에 학생들에게 해 주는 피정에서, 혼인으로 나아갈 가능성보다 수도 소명의 가능성을 생각할 자료를 더 많이 제시하는 일이 흔합니다. 갈수록 줄어들고는 있지만, 부부 생활을 낮추어 보고 젊은이들에게 교회가 그저 용인할 뿐인 어떤 것으로 제시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가정을 이루면 진지하게 성덕을 지향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푸스데이에서는 언제나 다르게 해 왔습니다. 사도적 독신의 존재 이유와 탁월성을 아주 분명히 밝히면서, 혼인을 이 땅에서 하느님께 이르는 길로 제시해 왔습니다.
저는 인간의 사랑을, 주님께서 제게 생명을 주시고자 쓰신 제 부모님의 거룩한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사랑을 두 손으로 축복합니다. 빵과 포도주가 성체성사의 재료이듯 부부는 혼인성사의 집전자이자 그 재료 자체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인간의 순결한 사랑을 노래하는 모든 노래를 좋아합니다. 제게는 그것이 인간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가락입니다. 동시에 저는 사도적 독신이라는 소명의 길을 따르는 이들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소중히 여기지 않는 독신자들이 아니라고 늘 말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 소명의 본질 자체인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실재로 설명됩니다. 저는 그 ‘사랑’을 대문자로 쓰기를 좋아합니다.
혼인의 소명을 이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propter regnum coelorum (Mt 19, 12), 곧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 소명의 더 높은 탁월성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모순도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교회의 가르침을 알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며, 또한 자신의 개인적인 소명을 알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면,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양립하는지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확신합니다. 곧 신앙을 지니고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혼인은 일반 병사들을 위한 것이라고 썼을 때, 저는 교회 안에서 언제나 일어나 온 일을 묘사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교황을 으뜸으로 삼는 주교단을 이루며 교황과 함께 온 교회를 다스리는 주교들은 독신으로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서 선발됩니다. 혼인한 사제들을 허용하는 동방 교회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독신자들은 평신도 사도직에서도 사도직 사업을 지속적으로 이끌고 뒷받침하는 데 헌신할 수 있도록, 실제로 마음과 행동에서 더 큰 자유를 지닌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평신도들이 훌륭하고도 매우 중요한 사도직을 할 수 없다거나 실제로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책임을 지는 자리에서 다양한 역할과 다양한 헌신의 방식이 있다는 뜻일 뿐입니다.
군대에서는 일반 병사들이 참모부만큼이나 필요하며, 더 영웅적이고 더 큰 영광을 받을 만할 수도 있습니다. 그 비유로 표현하려던 것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결국 다양한 과제가 있으며, 모두 중요하고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기 소명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각자에게 가장 완전한 것은 언제나 오직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인 생활 안에서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며 자신의 소명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는 그리스도인은, 사도적 독신으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저절로 특별한 존경과 깊은 애정을 느낍니다. 자기 자녀 가운데 누군가가 주님의 은총으로 그 길을 걷기 시작하면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혼인 소명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그 소명 덕분에 독신자든 기혼자든 모든 이의 위대한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인간의 사랑이 맺은 열매를 바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부가 몇 명의 자녀를 두어야 하는지를 두고 받는 조언 때문에, 심지어 일부 사제의 조언 때문에도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부부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시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양심을 혼란에 빠뜨리는 이들은 생명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눈먼 이를 이끄는 눈먼 이들, 자신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엄한 질책을 받아 마땅합니다. 저는 그들의 의도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이가 연민과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려는 바람에서 그런 조언을 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가르침을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가르침을 왜곡하는 이들의 파괴적인 행위, 많은 경우 악마적인 그 행위가 제게 깊은 슬픔을 준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습니다.
부부들은 이 문제에 관해 조언과 권고를 들을 때,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는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진실함, 곧 올곧은 마음이 있고 최소한의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다면, 양심은 다른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일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줄 압니다. 자기 이기심에 유리한 조언을 찾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조언의 이른바 권위로 자기 영혼의 외침을 잠재우려 하고, 심지어 가장 관대한 조언자를 만날 때까지 조언자를 바꾸어 찾아다닐 수도 있습니다. 다른 문제는 제쳐 두더라도, 이것은 하느님의 자녀에게 걸맞지 않은 바리사이적인 태도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의 조언, 특히 도덕이나 신앙의 문제에서 사제의 조언은 특정한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깨닫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조언이 개인적인 책임을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우리 자신, 곧 각자가 결정해야 하며, 자신의 결정에 대해 각자 하느님께 직접 답변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조언보다 위에 하느님의 법이 있습니다. 이 법은 성경에 담겨 있으며,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교회의 교도권이 보존하고 제시합니다. 개인적인 조언이 교도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하느님의 말씀과 어긋날 때는 그러한 그릇된 견해에서 단호히 벗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올곧게 행동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은총으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깨우쳐 주시고, 필요할 때에는 비록 여러 번 어려운 길일지라도 그 영혼을 바르고 깨끗한 길로 이끌 줄 아는 사제를 만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영적 지도를 할 때에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그저 기계적으로 실행하기만 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데 힘써서는 안 됩니다. 그와 반대로 영적 지도는 판단력을 갖춘 사람을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판단력은 성숙함과 확고한 신념, 충분한 교리 지식, 섬세한 마음, 의지의 단련을 전제로 합니다.
부부가 자신의 소명이 지닌 존엄을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들이 인간의 사랑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사랑에 이르도록 하느님께 부름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녀를 낳고 그 뒤에 교육하는 일에서 하느님의 창조 능력에 협력하도록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자신들의 집과 가정생활 전체를 그리스도인의 모든 덕을 증언하는 자리가 되게 하라고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아무리 되풀이해도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혼인은 하느님께 이르는 위대하고 놀라운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의 신적인 모든 것이 그렇듯, 은총에 대한 응답과 너그러움, 헌신과 봉사라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어떤 형태로든 이기심은 우리 삶을 다스려야 하는 하느님의 사랑에 어긋납니다. 이는 혼인과 자녀 수에 관해 반드시 깊이 명심해야 하는 근본적인 점입니다.
저는 인류를 괴롭히는 큰 문제들이나 어떤 가정이 부딪힐 수 있는 구체적인 어려움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를 자주 생각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사제로서 제가 지녀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집니다. 그러나 그런 길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여성과 관련된 큰 문제 하나는 미혼 여성의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혼인의 소명이 있으면서도 결혼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말합니다. 결혼하지 못하면 그들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세상에 있는가?’ 하고 묻습니다. 어떤 대답을 해 주시겠습니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세상에 있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모든 피조물에게 널리 전하기 위해 있습니다. 혹시 이것이 작은 일처럼 보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어떤 영혼도 맹목적인 운명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모든 영혼을 위한 계획이 있으시며, 각자에게만 고유하고 남에게 넘길 수 없는 소명으로 모든 이를 부르십니다.
혼인은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며 소명입니다. 그러나 유일한 길도, 유일한 소명도 아닙니다. 각 여성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 반드시 혼인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혼인 소명이 있는데도 결혼하지 못했다고요? 어떤 경우에는 사실일 수 있으며, 어쩌면 이기심이나 자존심이 그 하느님의 부르심을 이루지 못하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에는, 주님께서 참된 혼인 소명을 주시지 않았다는 표징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을 좋아하고,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남편과 자녀에게 충실하게 마음을 바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여성에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결혼할 수 있으면서도 하느님과 영혼들을 섬기는 데 마음을 쓰기 위해 결혼하지 않는 여성들에게도 그렇습니다.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좋습니다. 지금까지 해 왔듯이 계속 주님의 뜻을 사랑하고, 누구도 버리지 않으시며 언제나 충실하신, 지극히 사랑스러운 예수님의 성심과 가까이 사귀십시오. 그분은 이 삶 내내 우리를 돌보시며, 이미 지금부터 영원히 당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고자 하십니다.
더구나 여성은 자기 가족 외의 다양한 영역에서도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어머니의 정서적인 특성까지 포함한 모든 여성적 특성을 지니고, 다른 가정에서, 학교에서, 복지 사업에서, 수많은 곳에서 수행할 수 있습니다. 사회는 때로 자신이 ‘노처녀’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매우 가혹하고 몹시 부당합니다. 주변에 기쁨과 평화와 능률을 퍼뜨리는 미혼 여성들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에 고귀하게 자신을 바칠 줄 알고, 영적으로 깊은 어머니가 될 줄 아는 여성들입니다. 단지 생리적으로만 어머니인 많은 여성보다 더 참되게 어머니가 됩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인간 삶의 중요한 측면들, 특히 여성의 삶에 관한 여러 측면을 이야기하고, 오푸스데이의 정신이 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생활에서 여성의 역할을 어떻게 증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답할 때면, 평소의 제 방식과 달리 논쟁적으로 답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런 표현을 성직자 중심의 의미로 사용하여, ‘교회’라는 말을 성직자나 교계 제도에 속한 어떤 것과 같은 뜻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생활에 참여한다는 것을 오직, 또는 주로 본당 생활을 돕는 일, 거룩한 교계의 위임을 받은 단체에서 협력하는 일, 전례 거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 등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이론적으로는 선언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교회가 하느님 백성 전체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교회가 현존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이 말로 교회 조직의 생활에 여성이 할 수 있는 협력의 중요성을 작게 보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신도의 그리스도인 소명의 충만함을,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평범한 남성과 여성의 그리스도인 소명의 충만함을 옹호하는 데 제 삶을 바쳤습니다. 따라서 교회와 세상 안에서 그들의 사명이 신학적으로나 법적으로 온전히 인정받도록 힘쓰는 데 제 삶을 바쳤습니다.
다만 저는 그 협력의 범위를 부당하게 축소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또한 평범한 그리스도인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직자처럼 되지 않고, 세속적인 사람, 평범한 사람, 세상에서 살아가며 세상의 관심사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 때에만 자신의 고유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 조직 안에서 자신에게 해당하는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사랑하시며 모든 이를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으로 선포하면서, 인간의 모든 활동에 그리스도를 모셔 가는 것은 이 땅에 가득한 수백만 그리스도인 남녀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에 참여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장 중요하고 어떤 경우든 다른 모든 참여 방식의 전제가 되어야 하는 방법은, 자신의 인간적 소명이 이끌어 준 삶의 자리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를 특별히 의식하여 목표로 삼지도 않으면서, 일상생활을 소박하게 살아가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 남녀를 생각하면 제 마음은 얼마나 깊이 움직이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자기 삶의 숭고함을 깨닫게 하고, 하찮아 보이는 그 삶이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밝혀 주며, 사건과 상황을 통해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더 주의 깊게 귀 기울이도록 가르치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 일을 하도록 교회를 재촉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구속하셨음을 보여 주며, 안에서부터 온 세상을 그리스도교화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여성은 가정에서든 자신이 수행하는 다른 일에서든, 자신에게 속한 고유한 잠재력을 실현하며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그 사명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이시고 동정녀이시며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을 향하여 살아가며 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 (Lc 1, 38),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경우에 유일하고 다른 이에게 넘길 수 없는 개인적인 소명에 충실한지는 이 응답에 달려 있습니다. 그 충실함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온 세상에서 이루시는 구원 사업의 협력자가 되게 할 것입니다.
분명히 이 사실이, 눈에 보이는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일상생활이야말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진정한 장소라는 확신을 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일상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곳은 바로 여러분의 동료가 있고, 여러분의 갈망이 있고, 여러분의 일과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매일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온 인류에 봉사하면서 우리 자신을 성화해야 할 장소는 바로 이 세상의 가장 물질적인 것들 한가운데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이를 계속해서 가르쳐 왔습니다. 이 세상은 주님의 손에서 나왔기에, 그분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기 때문입니다 (창세 1,7에서 참조). 이 세상이 나쁘고 추하게 된 것은 우리 인간들의 저희의 죄와 부정(不貞)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의심치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사는 여러분이 어떤 방법으로든 일상생활에서 도망간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일상에서에 계시는 하느님
이와는 반대로, 하느님은 여러분을 인간사(人間事)의 일상적이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활동들 안에서, 그리고 그 활동들로부터 그분께 봉사하라고 부르고 계심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더욱 분명히 과학 연구실에서, 병원 수술실에서, 군대에서, 대학 강의에서, 공장에서, 작업장에서, 농장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모든 일들의 큰 파노라마에서 하느님께서 매일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잘 알아드십시오: 가장 일상적인 상황들 안에 거룩한 것들과 신성한 것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을 발견하느냐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저는 지난 30년대에, 대학생과 노동자 청년들에게 영성 생활을 "물질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치곤 했습니다.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있을 수 있는 이중생활의 유혹에서 보호하려 한 것이지요. 하느님과 관계 맺는 내적 생활을 하고, 또 다른 쪽으로는 세속적인 일이 가득한 직업 생활, 사회생활, 가정생활을 하면서 둘을 분리하고 구분하려는 이중생활 말입니다.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이와 같은 이중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이러한 정신 분열증 환자와 같은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단 하나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의 삶이, 영육 안에 모두, 하느님으로 가득 채워져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가장 분명히 보이고 가장 물질적인 것들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코린 3,23) 라고 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계신 성령께서, 땅에서부터 주님의 영광까지 솟아오르는 움직임을 일으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이 움직임에 모든 것이, 심지어 가장 흔해 보이는 것들까지도 포함된다는 것을 명백히 하기 위해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라고도 썼습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의 바로 이 가르침이 오푸스데이의 정신의 핵심입니다. 이 가르침을 따르신다면 여러분들이 완전한 정신으로 일터에서 생활하고, 일상에서 작은 일들에 사랑을 불어넣음으로써 하느님과 온 인류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사소한 일들에 숨어 있는 거룩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카스티야의 한 시인이 썼던 시구 한마디가 이에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천천히, 필기를 하면서, 일을 잘 하는 것이,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안토니오 마차도, 시집 161).
평이한 글로 쓰여지는 영웅적 서사시
여러분, 한 신자가 매일의 가장 작은 일을 사랑으로 행할 때, 바로 그곳에서 초월적인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수없이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성소가 매일의 평범한 산문을 굉장한 시구로 만드는 것이라고, 여러 번 망치를 두드리듯이 반복하여 말을 했던 것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은 평소의 일들을 거룩한 지향으로 행할 때에 여러분의 마음속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생활을 성화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모든 임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꿈과 거짓의 이상주의나, 환상을 버리십시오. 제가 "만약 신비주의"라고 이름 지었던 행동생각들, 즉 “만약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만약 내가 다른 직업을 가졌었다면…, 만약 내가 더 건강했다면…, 젊었다면…, 나이 들었다면…”이라는 모든 생각들을 버리십시오. 그 대신 눈앞에 있는 물질적이고 직접적인 현실에 집중하십시오. 거기에 우리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루카 24,39)
평신도의 청원
이 말씀을 위급한 때만이 아니라 매일 여러분들의 권리를 행사하셔야 된다는 초대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이는 또한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훌륭하게 이행하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정치 경제적인 일들, 학업과 직업 등 모든 분야에서 여러분의 자유로운 결정들로 인한 결과와 여러분 각자가 지니는 개인적 자립성의 결과를 용기 있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인 "평신도 정신"은 편협함이나 광신(狂信)을 멀리 할 수 있게 합니다. 더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이러한 평신도 정신은 여러분이 동료 시민들과 평화롭게 지내도록 돕고, 이러한 이해와 조화를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장려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입니다.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book-subject/conversaciones/5148/ (2026-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