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몬시뇰과의 대화»에는 초대 그리스도인를 주제로 하는 4 항이 있음.

오푸스데이의 핵심 사명과 목적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 단체에 관한 구상은 어떤 선례에 바탕을 둔 것입니까? 아니면 오푸스데이는 교회와 그리스도교 세계 안에서 독특하고 완전히 새로운 것입니까? 수도회와 재속회, 또는 예를 들어 Holy Name Society, 콜럼버스 기사단, Christopher Movement 같은 가톨릭 단체와 비교할 수 있습니까?

오푸스데이는 모든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바라도록 북돋우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곧 평범한 사람과 거리의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정상적인 생활 방식이나 일상 업무, 희망과 관심사를 바꾸지 않고도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돕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래전에 제가 쓴 표현대로, 오푸스데이는 복음처럼 오래되었고 복음처럼 새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읽는 놀라운 말씀, 곧 하느님께서 일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일깨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상 생애의 거의 전부를 한 마을에서 장인으로 일하며 보내신 그리스도의 모범에 주목했습니다. 노동은 인간의 가장 높은 가치 가운데 하나이자 사회 발전에 기여해야 할 수단일 뿐 아니라, 성화에 이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다른 어떤 조직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쉽게 답하기 어렵습니다. 영적 목적을 지닌 조직들을 서로 비교하려 하면, 모든 활동에 생명과 존재 이유를 주는 정신이라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외적인 특징이나 법적 명칭에 머물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단체들과 관련해서는, 수도회나 재속회와는 매우 거리가 멀고 Holy Name Society 같은 기관에 더 가깝다는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오푸스데이는 국제적인 평신도 조직이며, 재속 사제들도 속해 있습니다. 다만 전체 회원에 비하면 극히 적은 수입니다. 회원들은 세상 안에서 살며 자신의 직업이나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오푸스데이에 오는 것은 그 일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일상 업무를 성화하고 이를 자신을 성화하며 다른 사람들의 성화를 돕는 수단으로 바꾸기 위한 영적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분을 바꾸지 않고 미혼자, 기혼자, 사별한 사람, 사제라는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신의 신분 안에서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려고 노력합니다. 오푸스데이가 원하는 것은 서원이나 맹세가 아닙니다. 회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삶에 따르는 부족함과 잘못 가운데에서도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고 인간적 덕과 그리스도교적 덕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떤 비교를 원하신다면, 오푸스데이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그리스도인 성소를 충실히 살아갔으며, 단순하면서도 숭고한 세례라는 사실로 부름받은 완덕을 진지하게 추구했습니다. 겉으로는 다른 시민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푸스데이 회원들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평범한 일을 하며, 자신이 본래 누구인가에 맞게 세상 한가운데에서 살아갑니다. 곧 자기 신앙의 요구에 온전히 응답하려는 그리스도인 시민들입니다.

미혼자와 기혼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회 계층의 남녀가 오푸스데이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푸스데이 성소를 특징짓는 공통 요소는 무엇입니까? 회원 각자는 오푸스데이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약속을 합니까?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 한가운데에서, 거리 한복판에서 성덕을 찾는 것입니다. 오푸스데이라는 고유한 성소를 하느님께 받은 사람은 자신의 신분 안에서, 육체노동이든 지적 노동이든 자기 일을 수행하며 성덕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알고 그렇게 살아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단순히 이론적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날마다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될 개인의 잘못과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성덕에 이르고자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율법의 완성이며 완덕의 끈인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데 실제로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의 고요함 속에서, 또 세상의 소음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우리의 삶과 교차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애덕, 곧 사랑을 실천하면, 하나의 일치를 이루며 남김없이 열거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인간적 덕과 초자연적 덕을 실천하게 됩니다. 사랑은 정의와 연대, 가정과 사회에 대한 책임, 가난과 기쁨, 정결과 우정 등을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런 덕을 실천하는 것이 사도직으로 이끈다는 것은 곧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이미 사도직입니다. 일상 업무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면,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좋은 모범과 증언이 되고 구체적이며 효과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범에 말씀을 결합하시며 coepit facere et docere (Act 1, 1), 곧 행하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40년 전부터 이 활동을 우정과 신뢰의 사도직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모든 오푸스데이 회원은 성덕과 사도직에 대한 똑같은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푸스데이에는 회원들의 등급이나 서열이 없습니다. 있는 것은 다양한 개인적 상황, 곧 각자가 세상에서 처한 상황입니다. 동일하고 유일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유한 성소가 그 상황에 맞게 실현됩니다. 이는 우리 각자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개인적으로, 자유롭고 책임 있게 자신을 바치고 힘쓰라는 부르심입니다.

보시다시피 오푸스데이라는 사목적 현상은 아래로부터, 곧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일하는 그리스도인의 평범한 삶에서 생겨납니다. 수도원 생활이나 수도 생활의 세속화, 곧 탈성화의 흐름에 속하지 않습니다. 수도자들이 세상에 다가가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도 아닙니다.

오푸스데이 성소를 받는 사람은 주변의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사회적 관계와 직업, 걱정과 슬픔과 기쁨 안에서 새로운 빛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일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습니다. 세상이나 현대 사회에 ‘적응한다’고는 도무지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것인 현실에는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받은 성소는 갈릴래아에서 예수 그리스도 곁에 앉아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Mt 5, 48) 하시는 말씀을 듣던 어부와 농민, 상인과 군인들의 영혼 안에 일어났던 성소와 똑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푸스데이 회원이 추구하는 이 완덕은 그저 그리스도인 고유의 완덕입니다. 곧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름받았으며 신앙의 요구를 온전히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그 완덕입니다. 수도자와 그에 준하는 일부 기관에 고유한 것으로 여겨지는 ‘복음적 완덕’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법적으로 수도 신분을 가리키는 이른바 ‘복음적 완덕의 생활’은 더더욱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수도 성소의 길이 복된 길이며 교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오푸스데이의 정신을 지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저의 길도, 오푸스데이 회원들의 길도 아닙니다. 회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는 신분을 바꾸지 않는다는 명시적인 조건 아래 오푸스데이에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유한 특징은 세상 안에서 자신의 신분을 성화하고, 각 회원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을 성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푸스데이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각 회원이 하는 약속입니다.

같은 주제를 거듭 여쭙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편집부로 오는 편지를 보면, 자녀가 많은 가정의 어머니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이 아이를 낳는 역할에만 묶여 있다고 불평합니다. 직업 활동, 문화생활, 사회적 활동 등 다른 분야에 자신의 삶을 쏟을 수 없어 크게 만족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분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회적 활동이란 헌신과 봉사의 마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고, 모든 이의 선익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성이 집에서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사회적 역할일 뿐 아니라, 가장 폭넓은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역할이 되기도 쉽습니다.

그 가정에 자녀가 많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어머니의 일은 전문 교육자와 양성자의 일에 견줄 만하며, 많은 경우 비교해 보면 오히려 더 낫습니다. 한 교사는 어쩌면 평생에 걸쳐 몇몇 소년이나 소녀를 어느 정도 잘 길러 냅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가장 근본적인 측면에서 깊이 있게 길러 줄 수 있고, 그들 또한 다른 이들을 길러 주는 사람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책임감과 덕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문제에서도 순전히 양적인 기준에 마음이 끌려, 수천 명이 자기 수업을 거쳐 가는 교사나 수천 명의 독자에게 글을 쓰는 작가의 일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 교사와 작가는 실제로 몇 명을 길러 냅니까? 어머니는 셋, 다섯, 열 명 또는 그보다 많은 자녀를 돌봅니다. 그리고 그들을 참된 예술 작품으로, 교육과 균형 감각과 이해심과 그리스도교적 인생관을 갖춘 놀라운 사람으로 길러 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행복하고, 참으로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아들과 딸이 집안일을 돕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녀를 잘 가르칠 줄 아는 어머니는 그렇게 할 수 있으며, 그 덕분에 기회와 시간을 얻습니다. 그 시간을 잘 활용하면 자신의 취미와 재능을 가꾸고 교양을 풍부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오늘날에는 여러분도 잘 아시듯 제대로 다루고 충분히 활용하면 수고를 크게 덜어 주는 기술적 수단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이 일에서도 다른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역량이 결정적입니다. 최신 세탁기가 있는데도 손빨래를 할 때보다 더 오래 걸리고, 빨래도 더 못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도구는 사용할 줄 알 때에만 유용합니다.

저는 결혼하여 자녀도 꽤 많으면서 가정을 아주 잘 꾸리고, 다른 사도직 활동에 협력할 시간까지 내는 여성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부부인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도 그렇게 했습니다. 두 사람은 가정과 생업에서 일했으며, 성 바오로의 훌륭한 협력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말과 모범으로 아폴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이끌었습니다. 아폴로는 나중에 초기 교회의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참으로 원한다면 어떤 의무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많은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일을 할 시간이 있습니다. 직업적 소명 의식을 갖고 가정을 꾸릴 시간, 끊임없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 줄 시간, 자신의 교양을 높이고 다른 이들의 교양도 풍부하게 해 줄 시간, 그토록 많은 유익한 일을 할 시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신심 생활로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가정에서도 어떤 신심 행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것이 바로 자녀들에게 참된 그리스도교 교육을 베푸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에 대해 말해 줍니다. 성 바오로가 ‘가정 교회’라고 부른 그 가정들에(1 Cor 16, 19), 복음의 빛은 새로운 힘과 새로운 생명을 주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환경에서는 가정의 따뜻함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초자연적인 신심 생활의 첫걸음이 얼마나 좋은 결실을 맺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이는 가장 먼저 생겨나는 가장 근본적인 애정의 대상들 가운데 주님을 모시는 법을 배웁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대하는 법을 배웁니다. 부모의 모범을 따라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를 이해하면 부모가 수행할 수 있는 위대한 사도직이 보입니다. 또한 그 신심을 자녀에게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전해 주려면, 부모 자신이 진실한 신심을 지녀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수단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언제나 실천해 온 몇 가지 짧고 규칙적인 신심 행위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식사 전의 축복 기도, 온 가족이 함께 바치는 묵주 기도, 아침에 일어날 때와 밤에 잠자리에 들 때 바치는 개인 기도입니다. 요즘에는 이 지극히 견고한 성모 신심을 공격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말입니다. 지역에 따라 관습은 다르겠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어떤 신심 행위를 장려하여, 가족들이 겉치레 경건 없이 소박하고 자연스럽게 함께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면 하느님을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 성당에 가서 찾아뵙는 낯선 분으로 여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하느님을 실제로 계시는 그대로 바라보고 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Mt 18, 20).

저는 자녀로서 감사와 자부심을 품고 이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어릴 적 어머니의 입에서 배운 기도를 지금도 아침저녁으로 소리 내어 바칩니다. 그 기도는 저를 하느님께 이끌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첫걸음을 내딛도록 가르쳐 주셨던 그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시작하는 하루를 주님께 봉헌하거나 끝나는 하루에 감사드리면서, 제가 각별히 사랑하는 이들이 천상 영광 안에서 더 큰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시기를, 그리고 나중에는 하늘에서 저희를 영원히 하나로 지켜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