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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에 따르면 평신도의 사명은 교회와 세상 안에서 수행됩니다. 그런데 흔히 둘 가운데 한쪽만 생각하여 이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 과제와 세상 안에서 수행해야 하는 과제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를 결코 서로 다른 두 과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평신도가 교회의 사명에 고유하게 참여하는 것은 바로 세속적 현실과 현세 질서, 세상을 ab intra, 곧 안으로부터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성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고유하고 특별한 과제와 더불어, 평신도에게도 성직자와 수도자들처럼 신자라는 법적 신분에 따르는 일련의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 권능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자연스럽게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행사됩니다. 교회의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교계 고유의 사도직에 직접 협력하거나 초대받으면 교계의 사목 과제에 조언하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평신도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고유한 과제와 신자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과제는 서로 대립하는 두 과제가 아니라 겹쳐지는 과제입니다.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합니다. 평신도가 동시에 신자라는 사실을 잊고 그 고유한 사명만을 바라보는 것은, 푸르고 꽃피는 가지가 어떤 나무에도 붙어 있지 않다고 상상하는 것만큼 터무니없습니다. 평신도에게 특별하고 고유하며 독특한 것을 잊거나 이 세속 사도직 과제들의 특징과 교회적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무성한 교회의 나무를 줄기만 있는 기형적인 상태로 축소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오푸스데이는 현대 평신도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이 과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지난해 10월 팜플로나에서 나바라 대학교 후원회 총회를 맞아 집전하신 미사의 강론에서, 인간의 사랑에 관해 저희의 마음을 깊이 움직이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많은 여성 독자가 그 말씀을 듣고 받은 감동을 편지로 전해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혼인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잘 아는 일, 곧 여러 나라에서 이미 오랫동안 사제로 살아오며 경험한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푸스데이 회원 대부분은 혼인한 삶을 살며, 그들에게 인간의 사랑과 부부의 의무는 하느님께 받은 소명의 일부입니다. 오푸스데이는 혼인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며 소명이 되게 했습니다. 이는 개인의 성화와 사도직에 많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저는 거의 40년 동안 혼인의 소명적 의미를 설교해 왔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과 고귀하고 순결한 인간의 사랑을 자신의 삶에서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남녀들이, 혼인은 이 땅에서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라는 제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의 눈빛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저는 얼마나 여러 번 보았는지 모릅니다!
혼인은 혼인한 사람들이 그 안에서 거룩해지고, 그 혼인을 통해 다른 이들도 거룩하게 하도록 마련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부부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가 베푸는 특별한 은총이 있습니다. 혼인 생활로 부름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삶 안에서 거룩해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합니다. 날마다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언제나 희망과 애정을 품고 그리스도인 가정들을 생각합니다. 혼인성사에서 태어난 모든 가정을 생각합니다. 그 가정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와 사랑이라는 위대한 신적 신비, 곧 sacramentum magnum! (Eph 5, 32), 위대한 성사의 빛나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이 그리스도교적 세포들이 거룩함을 갈망하며 태어나고 자라도록 힘써야 합니다. 입문의 성사인 세례가 이미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신적인 사명을 부여하며, 각자는 자신의 길에서 그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다른 이들을 거룩하게 하면서 자신도 거룩해지도록 부름받았음을, 사도가 되도록 부름받았음을, 그리고 자신의 첫 사도직이 가정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교육하며 사회에 그리스도교의 빛을 비추는 일에 담긴 초자연적 활동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의 사명에 대한 이러한 자각에 그들의 삶의 결실과 성공, 곧 행복이 크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의 행복을 이루는 비결은 공상이 아니라 일상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집에 돌아올 때 느끼는 숨은 기쁨을 발견하는 데 있고, 자녀들과 다정하게 어울리는 데 있으며, 가족 전체가 협력하는 매일의 일에 있습니다. 씩씩하게 맞서야 하는 어려움 앞에서 밝은 마음을 지니는 데 있고, 문명이 제공하는 모든 발전을 활용하여 집을 쾌적하게 하고 삶을 더 수월하게 하며 교육을 더 효과적으로 하는 데에도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가정을 이루도록 부름받은 이들에게 늘 서로 사랑하라고, 연애하던 시절 서로에게 품었던 설레는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삶에 늘 따르는 슬픔과 역경이 시작되면 사랑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사이며 이상이고 소명인 혼인을 빈약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사랑은 더욱 굳건해집니다. 슬픔과 역경이 급류처럼 밀려와도 참된 사랑을 잠기게 할 수는 없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함께 나누는 희생은 두 사람을 더욱 하나로 묶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듯 aquae multae, 곧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수많은 어려움도 non potuerunt extinguere caritatem (Cant 8, 7), 사랑을 끌 수는 없습니다.
성령 강림 후 제21주일에 해당하는 거룩한 성경 말씀 중 두 구절을 들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여러분들은 제가 드리는 말씀을 통해서 제가 원하는 분위기에 들어간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거룩한 교회 안에서, 또한 하느님의 자녀들의 가족 앞에서 선포되는 이 말씀은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자비를 드러내는, 초자연적인 말씀입니다.
또한 오늘 이곳, 나바라 대학교 캠퍼스에서 봉헌되는 경이로운 성체성사를 합당하게 거행할 수 있도록 여러분을 준비시키는 말씀입니다.
지금 방금 드린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의 성사적인 희생인 성체성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성사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신비와 연결되는 믿음의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간이 일생 동안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거룩하고 탁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하늘나라, 곧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곳,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그곳(묵시 21,4 참조)에서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이 땅과 이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 의미 있고 위안이 되는 사실, 곧 신학자들이 ‘성체성사의 종말론적 의미’라고 부르는 것이 어쩌면 잘못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단지 “영적인 것”, 지상에 사는 동안 세상의 경멸스러운 것들에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 혹은 기껏해야 영혼에 꼭 필요한 것 정도만 용인하는 순수하고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어울리는 것으로 소개하려고 할 때마다 그런 오해가 생기곤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렇게 바라본다면, 성당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훌륭한 장소가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곧 성당에 가는 것만, 전례 예식에 참여하는 것만, 본당의 활동에 몰두하는 것을 거의 전적으로 의미하게 됩니다. 평범한 세상이 제 갈 길을 가는 동안, 천국의 대기실로 여겨지는 일종의 분리된 세상에서 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의 가르침과 은총의 삶은 격동적인 인간의 역사와 결코 만나지 않고 그저 스쳐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매일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만남
이 10월 아침, 주님의 파스카 잔치를 거행하는 이때에, 우리는 이 그릇된 그리스도교 개념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께 감사드리는 이 미사성제의 장소를 잘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특별한 성당에 있습니다. 성당의 신자석은 이 캠퍼스이고 교회 바로 제단 뒤 장식은 이 대학교의 도서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저 멀리에는 새 건물들을 짓는 기계가 보이고, 위로는 이곳 나바라의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평범한 일상생활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분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세대가 물질과 하찮게 보이는 상황에서 고귀한 본래의 의미를 되찾아야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물질과 사소한 상황들을 하느님의 나라를 섬기는 것에 도움이 되게 하고, 그것들을 영적으로 만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꾸준히 만날 수 있는 기회와 방법이 되게끔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적 물질주의
육신의 부활을 믿는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유물론이라고 판단되는 위험을 가지고도 항상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것을 거부하는 관념에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영적인 것에 닫힌 유물론에 뚜렷하게 반대되는 "그리스도교적 유물론"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의 발자국이라고 일컫던 일곱 성사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삶에 이르게 하고 천국에 올라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이 길을 택하셨음을 보여 주는 가장 명백한 표징이 아니겠습니까? 하나하나의 성사가 물질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창조와 구원의 힘을 가진, 하느님의 사랑인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다가오는 성체성사가, 초라한 이 세상의 물질(빵과 포도주)을 통하여, 최근의 공의회가 상기했다시피 “인간의 손으로 가꾼 자연 요소들”(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 38항 참조)을 통하여 봉헌되어 우리 구원자의 경애하올 몸과 피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참여하는 수 없이 많은 세상의 일들을 이 진리의 빛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활동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당뿐 만이 아니라 이 모든 세상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지적으로 직업적으로 적절하게 되려 노력합니다. 그 사람은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이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개인의 식견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결정들은, 작든 크든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려고 매우 겸손되이 노력하는 개인의 성찰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book-subject/conversaciones/2898/ (2026-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