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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리스도인의 성소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평신도 성소와 수도 성소는 실제 실현 방식에서 매우 다릅니다. 그렇다면 수도자들은 교육 활동 등을 통해 어떻게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참된 평신도의 길로 양성할 수 있습니까?
교회를 섬기는 수도자들의 훌륭한 활동을 저는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수도자들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성덕과 사도직에 부름받은 평신도 성소의 특징과 요구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것을 사랑하며 학생들에게 가르칠 줄 아는 만큼 가능할 것입니다.
예수회 같은 여러 수도회가 오푸스데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우리가 수도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그들에게 품는 애정에 똑같이 응답하고 오푸스데이의 사도직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많은 수도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회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저는 총장 아루페 신부를 알고 교류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애정의 관계라고 확언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 오푸스데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수도자를 만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해 때문이거나, 본질적으로 평신도적이고 세속적이며 수도자들 고유의 영역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는 우리 활동의 실상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수도자에게 존경과 사랑만을 품고 있으며, 그들이 교회와 온 인류를 위해 하는 봉사가 날마다 더 큰 결실을 맺도록 주님께 청합니다. 오푸스데이와 수도자 사이에 다툼이 생기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다투려면 둘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누구와도 싸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 역사가 진전하면서, 평신도에 관한 모든 것을 왜곡하고 그들에게 숨은 의도를 부여하려는 특정한 성직주의를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오푸스데이가 실천하고 선포하던 것이 다름 아닌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성소이며, 구체적인 초자연적 헌신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더 쉬워졌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들이 사회 각계에 침투한다’는 말이 더 이상 쓰이지 않고, 모두가 그것이 성직주의적인 표현임을 깨닫는 때가 오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말은 오푸스데이의 사도직에는 전혀 해당하지 않습니다. 회원들은 현세의 구조에 침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똑같은 평범한 시민이므로 이미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공장이나 병원, 의회에서 일하는 사람을 오푸스데이로 부르신다면, 이는 그 사람이 이제부터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신의 직업을 성화하기 위한 수단을 마련하기로 결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받은 고유한 성소에 따라 복음의 메시지가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바를 자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자각이 평범한 삶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contemptus mundi, 곧 세상의 것들을 멀리하고 가볍게 여기는 수도 성소를 하느님께 받은 이들에게만 정당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을 떠나는 일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나 정점으로 삼으려는 것은 분명히 엄청난 잘못입니다.
따라서 회원들을 특정 환경에 들여보내는 것은 오푸스데이가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들은 이미 그곳에 있었고 떠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은총과 앞서 말씀드린 우정과 신뢰의 사도직에서 생겨나는 오푸스데이 성소는 모든 환경에서 나타납니다.
어쩌면 오푸스데이의 본질과 활동 방식이 이처럼 단순하다는 것 자체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하여 참되고 올바른 것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사람들에게는 어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오푸스데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당신 제자들에게 이런 어려움을 예고하시며 non est discipulus super Magistrum (Mt 10, 24), 곧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게 보아 주기를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또 하느님의 자녀로서 모든 사람에게 존중받을 권리는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생각을 전체주의적으로 강요하려는 광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푸스데이 회원들이 언제나 개인적 책임을 지면서, 먼저 다른 사람의 개인적 자유를, 그다음 자신의 개인적 자유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일화가 생각납니다. 이름을 밝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므로 어느 도시라고만 하겠습니다. 그 시의회는 오푸스데이 회원들이 지도하는 한 교육 활동에 재정 지원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그 활동은 오푸스데이가 수행하는 모든 단체 사도직 활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공익에 분명히 기여하고 있었습니다. 시의원 대다수는 지원에 찬성했습니다. 사회주의자인 한 의원은 찬성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그 시설의 활동을 직접 알아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활동의 특징은 운영자들이 개인의 자유를 매우 사랑한다는 점입니다. 그 기숙사에는 온갖 종교와 이념을 지닌 학생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시의원들은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자신의 반대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 사회주의 의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반대한 것은 사정이 그렇다면 그 기숙사가 가톨릭 신앙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거나 교회에 반대하려는 사람은 사도직 활동을 좋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저는 인간으로서 그를 존중하고 진리로 이끌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수년 전부터 같은 말을 해 왔기에 다시 한번 상기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이해, 조화로운 삶에 대한 가르침은 오푸스데이가 전하는 메시지의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단언컨대, 하느님의 사업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봉사하려 하는 남녀들도 그저 다른 이들과 똑같은 시민들이며, 진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각자의 소명을 살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시 확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오푸스데이가 단체로서 장려하고 있는 일들도 이처럼 매우 현세적인 특징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푸스데이의 활동들은 교회의 공적인 사업이 아닙니다. 교회의 어떤 계층을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푸스데이의 사업들은 복음의 빛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자 하고,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불타오르게 하려는 시민들이 행하는 인간적, 문화적, 사회적 활동들입니다. 일례로 오푸스데이에서는 “성령께서 양 떼의 감독으로 세우”신(사도 20,28) 주교님들께서 미래의 사제들을 준비시키는 교구 신학교를 운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book-subject/conversaciones/4197/ (2026-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