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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몬시뇰과의 대화»에 오푸스데이 → 초자연적인 목적과 수단 항이 있음.

몬시뇰께서는 오랫동안 평신도의 성소가 ‘일을 성화하고, 일 안에서 자신을 성화하며, 일로써 다른 이들을 성화하는’ 세 가지에 있다고 말하고 써 오셨습니다. 첫 번째인 ‘일을 성화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 표현에는 창조 신학 자체의 근본 개념들이 담겨 있으므로 짧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40년 전부터 늘 가르쳐 온 것은, 정직한 모든 인간 노동은 지적 노동이든 육체노동이든 그리스도인이 가능한 한 완전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완전하게, 곧 직업적 역량을 갖추어 수행하고, 그리스도교적으로 완전하게, 곧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일이 아무리 소박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현세적 현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질서 짓고 그 신적 차원을 드러내는 데 기여하며, 세상의 창조와 구속이라는 놀라운 일 안에 받아들여져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노동은 은총의 질서로 들어 높여지고 성화되며 하느님의 일, operatio Dei, opus Dei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일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놀라운 말씀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일깨우면서, 우리는 지상 생애의 거의 전부를 한 마을에서 장인으로 일하며 보내신 그리스도의 모범에 주목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성화하신 그 인간 노동을 사랑합니다. 노동, 곧 인간의 고귀하고 창조적인 수고 안에서 우리는 인간의 가장 높은 가치 가운데 하나이자 사회의 진보와 인간관계를 갈수록 더 정의롭게 질서 짓는 데 필수적인 수단을 봅니다. 그뿐 아니라 당신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 사랑과, 인간 서로 간의 사랑 및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지도 봅니다. 곧 완덕의 수단이자 성덕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오푸스데이의 유일한 목적은 언제나 이것이었습니다. 세상 한가운데에서, 세속의 현실과 관심사 가운데에서, 모든 인종과 사회적 처지의 남녀가 일상 업무 안에서, 또 그 일을 통해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노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오푸스데이의 핵심 사명과 목적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 단체에 관한 구상은 어떤 선례에 바탕을 둔 것입니까? 아니면 오푸스데이는 교회와 그리스도교 세계 안에서 독특하고 완전히 새로운 것입니까? 수도회와 재속회, 또는 예를 들어 Holy Name Society, 콜럼버스 기사단, Christopher Movement 같은 가톨릭 단체와 비교할 수 있습니까?

오푸스데이는 모든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바라도록 북돋우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곧 평범한 사람과 거리의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정상적인 생활 방식이나 일상 업무, 희망과 관심사를 바꾸지 않고도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돕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래전에 제가 쓴 표현대로, 오푸스데이는 복음처럼 오래되었고 복음처럼 새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읽는 놀라운 말씀, 곧 하느님께서 일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일깨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상 생애의 거의 전부를 한 마을에서 장인으로 일하며 보내신 그리스도의 모범에 주목했습니다. 노동은 인간의 가장 높은 가치 가운데 하나이자 사회 발전에 기여해야 할 수단일 뿐 아니라, 성화에 이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다른 어떤 조직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쉽게 답하기 어렵습니다. 영적 목적을 지닌 조직들을 서로 비교하려 하면, 모든 활동에 생명과 존재 이유를 주는 정신이라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외적인 특징이나 법적 명칭에 머물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단체들과 관련해서는, 수도회나 재속회와는 매우 거리가 멀고 Holy Name Society 같은 기관에 더 가깝다는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오푸스데이는 국제적인 평신도 조직이며, 재속 사제들도 속해 있습니다. 다만 전체 회원에 비하면 극히 적은 수입니다. 회원들은 세상 안에서 살며 자신의 직업이나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오푸스데이에 오는 것은 그 일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일상 업무를 성화하고 이를 자신을 성화하며 다른 사람들의 성화를 돕는 수단으로 바꾸기 위한 영적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분을 바꾸지 않고 미혼자, 기혼자, 사별한 사람, 사제라는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신의 신분 안에서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려고 노력합니다. 오푸스데이가 원하는 것은 서원이나 맹세가 아닙니다. 회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삶에 따르는 부족함과 잘못 가운데에서도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고 인간적 덕과 그리스도교적 덕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떤 비교를 원하신다면, 오푸스데이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그리스도인 성소를 충실히 살아갔으며, 단순하면서도 숭고한 세례라는 사실로 부름받은 완덕을 진지하게 추구했습니다. 겉으로는 다른 시민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푸스데이 회원들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평범한 일을 하며, 자신이 본래 누구인가에 맞게 세상 한가운데에서 살아갑니다. 곧 자기 신앙의 요구에 온전히 응답하려는 그리스도인 시민들입니다.

오푸스데이 설립 이후 지금까지 교회 자체에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기간에 오푸스데이의 성격과 목적이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해 왔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처음부터 오푸스데이의 유일한 목적은 방금 설명한 그대로였습니다. 모든 인종과 사회적 처지의 남녀가 세상 한가운데에서 일상 업무 안에서, 또 그 일을 통해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노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오푸스데이가 시작된 1928년부터 저는 성덕이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며, 이 땅의 모든 길과 모든 신분, 모든 직업과 정직한 모든 일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다고 설교해 왔습니다. 이 메시지에는 많은 함의가 담겨 있으며, 오푸스데이의 삶에서 얻은 경험은 제가 그 의미를 갈수록 깊이, 더 섬세하고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오푸스데이는 작게 태어났으며, 이후 살아 있는 유기체가 자라듯, 역사 안에서 발전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점진적이고 꾸준하게 자연스럽게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아무리 달라진다 해도 그 목적과 존재 이유는 바뀌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오푸스데이의 메시지는 어떤 상황에서 수행하든 정직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성화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모든 직업의 사람들이 오푸스데이에 속해 있습니다. 의사와 법률가, 기술자와 예술가뿐 아니라 건설노동자와 광부, 농민도 있습니다. 영화감독과 제트기 조종사부터 고급 미용사에 이르기까지 어떤 직업도 가능합니다. 회원들에게 시대의 흐름에 맞게 살고 현대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자연스럽고 본능적입니다. 그들과 똑같은 다른 시민들과 함께 그 세계를 만들어 내고 현대적인 모습을 부여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오푸스데이의 정신이므로, 교회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과 그 진보와 발전을 거부하지 않고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공의회가 장엄하게 선언하는 것을 보며 우리가 얼마나 크게 기뻐했는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교회와 국가에 동시에 속해 있음을 알고, 따라서 각자가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이자 시민으로서 자신의 개인적 책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회원들이 거의 40년 전부터 실천하려고 노력해 온 영성의 핵심 특징입니다.

오푸스데이의 엄청난 성공을 어떻게 설명하시며, 어떤 기준으로 그 성공을 가늠하십니까?

어떤 일이 초자연적인 것일 때에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는 성공이나 실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이미 코린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이들의 판단이나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판단이라고 말했습니다.

분명 오푸스데이는 오늘날 세계 곳곳에 퍼져 있으며, 거의 70개 국적의 남녀가 속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저 자신도 놀랍습니다. 인간적인 설명은 어떤 것도 찾을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의 뜻으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원하시는 곳으로 부시며, 사람들의 성화를 이루시려고 원하시는 사람을 쓰시기 때문입니다. 제게 이 모든 것은 감사와 겸손의 계기이며, 언제나 당신을 섬길 줄 알도록 하느님께 청하는 계기입니다.

또 제가 어떤 기준으로 일을 가늠하고 판단하는지 물으셨습니다.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성덕, 성덕의 열매입니다.

오푸스데이의 가장 중요한 사도직은 각 회원이 친구와 직장 동료들을 날마다 대하면서 자기 삶의 증언과 말로 하는 사도직입니다. 이 조용하고 겸손한 사도직의 초자연적 효과를 누가 측정할 수 있겠습니까? 충실하고 진실한 친구의 모범이 주는 도움이나 좋은 어머니가 가정 안에서 미치는 영향을 수치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질문은 오푸스데이가 수행하는 단체 사도직에 관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경우에는 인간적·기술적 관점에서 결과를 측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노동자 직업훈련 학교가 그곳에 다니는 사람들의 사회적 발전을 이루는지, 대학이 학생들에게 적절한 전문·문화 교육을 제공하는지 등입니다. 그런 뜻으로 하신 질문이라면, 그 결과는 이 일을 고유한 전문 직무로 수행하며 진지하게 일하려는 누구나 그러하듯 준비를 갖춘 사람들이 수행하기 때문이라고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그 활동을 미리 정해진 틀에 맞추어 구상하지 않고, 실제 요구에 맞추기 위해 매번 그 활동이 이루어질 사회의 고유한 필요를 연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푸스데이는 인간적 효율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런 활동의 참된 성공과 실패는, 인간적으로 훌륭하게 수행되는 가운데 그 일을 하는 사람들과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의 형제임을 느끼며, 그 마음을 인류에 대한 사심 없는 봉사로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푸스데이에 점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오푸스데이 가르침의 매력 때문만입니까, 아니면 현대의 불안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까?

주님께서는 창세기가 전하듯 하느님께서 사람이 일하도록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일깨우도록 1928년 오푸스데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는 30년 동안 나자렛에 머무르시며 직업을 가지고 일하신 예수님의 모범에 다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러 왔습니다. 예수님의 손 안에서 노동, 곧 세상의 수백만 사람이 하는 것과 비슷한 직업 활동은 하느님의 일이 되고, 구원의 활동이 되며,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오푸스데이의 정신은 인간적으로 올바르고 고귀한 일이면 어떤 일이든 하느님의 일이 될 수 있다는 지극히 아름다운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수 세기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이 잊고 지냈던 사실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는 하찮은 직업이 없습니다. 모든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별난 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십니다(Mt 5, 48). 대다수의 사람에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일을 성화하고, 그 일 안에서 자신을 성화하며, 일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성화하고, 그렇게 자신의 삶의 길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뜻합니다.

노동을 갈수록 높이 평가하는 현대 사회의 여건은, 오푸스데이의 정신이 강조하려는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이러한 측면을 오늘날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작용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전체에서 커다란 쇄신 운동이 일어나도록 바라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령들을 읽으면, 일상 노동의 가치와 세상 안에서 살아가며 일하는 그리스도인의 성소가 지닌 존엄을 새롭게 인정하는 것이 바로 그 쇄신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각은 교회를 모든 신자로 이루어진 공동체로 더 깊이 바라보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같은 사명에 함께 책임을 지며, 각자 자신의 형편에 따라 이를 수행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성령의 이끄심에 힘입어 자신들이 교회이며, 하느님께서 바라신 고유하고 숭고하며 필요한 사명을 지녔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의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사명은 반드시 교계의 위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바로 그 신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교계와 일치하고 교도권의 가르침에 따라 그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가톨릭 신자에게 주교단과 그 으뜸이신 로마 교황과의 일치 없이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평신도들이 교회의 성덕과 사도직에 기여하는 고유한 방식은 현세의 구조 안에서 자유롭고 책임 있게 행동하며 그 안에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누룩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적 삶의 증언, 하느님의 이름으로 빛을 비추는 말, 공동 문제의 해결에 기여하며 다른 이들을 섬기는 책임 있는 행동은 모두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께 받은 사명을 수행하는 현존의 표현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바로 오푸스데이가 설립된 날부터, 저는 요한 성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해 왔으며 다른 이들도 묵상하도록 이끌어 왔습니다. Et ego, si exaltatus fuero a terra, omnia traham ad meipsum (Ioan 12, 32).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당신께 이끄십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한가운데에서 일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모든 인간 활동의 정점에 그리스도를 모셔야 합니다.

평신도들의 이런 자각과 더불어 목자들의 감수성에도 비슷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목자들은 평신도 성소의 고유성을 깨닫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게 베푸시는 성덕과 사도직의 은사를 발견하도록 이끄는 사목을 통해, 이 성소를 북돋우고 도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사목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제 생각에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영들을 식별하는 초자연적 은사와 하느님의 일에 대한 감수성, 자신의 취향을 강요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영혼들 안에서 일으키시는 것을 섬기는 겸손이 요구됩니다. 한마디로 하느님 자녀들의 정당한 자유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은 서로 매우 다르지만 모두 똑같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걸으며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담긴 이런 하느님의 요구를 인정하지 않고, 그릇된 효율성의 논리에 이끌려 그리스도인들에게 획일성을 강요하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의 뿌리에는 정당할 뿐 아니라 칭찬받을 만한 바람이 있습니다. 곧 교회가 현대 세계의 마음을 움직이는 증언을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길이 잘못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교계를 현세적 문제에 끌어들여 과거 수 세기의 성직주의와 형태만 다를 뿐 똑같이 해로운 성직주의에 빠지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신도들, 곧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떼어 내어 그 세상 밖에서 만들어진 결정이나 생각의 대변인으로 만들까 크게 염려합니다.

저는 우리 사제들에게 유행의 중심에 서지 않는 법을 배우고, 참으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 되는 겸손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세례자의 외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illum oportet crescere, me autem minui (Ioan 3, 30). 곧 그리스도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저는 작아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평범한 그리스도인들, 곧 평신도들이 사회의 모든 환경 안에 그리스도를 현존하게 해야 합니다. 교리를 가르치고, 복음이 개인과 사회에 요구하는 바를 깊이 이해하도록 도우며,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도록 이끄는 사명은 언제나 사제의 근본적인 과제 가운데 하나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제 활동은 양심의 정당한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마다 하느님께 자유롭게 응답해야 합니다. 더욱이 모든 가톨릭 신자는 사제의 이런 도움과 더불어 하느님께 직접 받는 빛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은 고유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신분의 은총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려면 성직자가 언제나 말하거나 앞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과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하느님 성소의 존엄성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푸스데이 회원들은 집단으로 행동하지 않고, 각자의 자유와 책임에 따라 개인으로서 활동합니다. 따라서 오푸스데이는 폐쇄적인 조직도 아니며, 어떤 식으로든 회원들을 모아 다른 사람들에게서 고립시키는 조직도 아닙니다. 오푸스데이가 지도하는 유일한 활동인 단체 차원의 활동1은 사회적·문화적·종교적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회원들 역시 바로 세상 안에서 성화되어야 하므로, 일과 시민 생활 참여를 통해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과 늘 협력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푸스데이가 지금까지 해 왔고 현재 수행하고 있는 과제는 무엇입니까? 회원들은 이 분야에서 활동하는 다른 단체들과 어떤 협력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오푸스데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해 온 일에 역사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제 몫이 아닙니다. 다만 오푸스데이가 추구하는 목적은 세상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신분이나 처지와 관계없이 성덕을 찾고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푸스데이는 가정과 우정, 직업 활동과 고귀한 포부를 지니고 시민 사회의 조직 안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이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다시 말해 그 삶 자체가 성덕과 사도직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정직한 모든 인간 활동 안에 현존하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평범하고 하찮게 보일 수도 있는 보통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룩한 삶이자 다른 이들을 거룩하게 하는 삶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따르고, 교회에 봉사하며, 다른 이들이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깨닫도록 돕기 위해 세상을 버리거나 세상에서 떨어져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의 활동에 종사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은 하느님의 섭리가 바라시는 자리와 환경에서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은 현세의 구조 안에 머물며 세상을 그 안에서부터 성화하는 사명을 하느님께 받습니다. 따라서 오푸스데이는 그들이 이 하느님의 사명을 발견하도록 돕는 데 헌신합니다. 인간적 소명, 곧 직업적·가정적·사회적 소명이 초자연적 성소에 어긋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성소를 이루는 본질적인 일부임을 보여 줍니다.

오푸스데이의 유일하고 전적인 사명은 어떤 환경과 직업에서든 세상 안에서 살아가며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메시지, 곧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 성덕의 이상을 이해하는 이들에게 오푸스데이는 자신의 삶에서 이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영적 수단과 교리·수덕·사도직 양성을 제공합니다.

교황과 주교단이라는 정규 교계와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뿐 아니라, 같은 신앙을 지닌 다른 형제들과의 일치를 느끼는 것도 그리스도교 정신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오늘날 교회가 겪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다른 나라나 다른 사회 계층의 가톨릭 신자들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른다는 데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깊이 살아 냈던 형제애를 오늘 새롭게 실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각자의 다양한 성소를 사랑하면서 서로 일치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일부 작은 집단이 가톨릭의 이름으로 같은 신앙의 형제들을 향해 퍼뜨리는 부당하고 모욕적인 판단도 적지 않게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형제들은 자기 나라의 특수한 사정에서 볼 때 실제로 올바르고 희생적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하느님께 받은 부르심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여, 하느님께 받은 은사가 지닌 것을 교회에 빠짐없이 기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평범한 그리스도인인 오푸스데이 회원들의 고유한 일은 매우 다양한 인간 활동에 참여하면서 세상을 그 안에서부터 성화하는 것입니다. 회원이 된다고 해서 세상 안에서의 위치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므로, 공동 종교 예식이나 본당 생활 등에도 각각의 상황에 맞게 협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들은 좋은 가톨릭 신자가 되고자 하는 평범한 시민입니다.

그러나 회원들은 일반적으로 교회 명의의 활동을 맡아 일하지는 않습니다. 교계가 명시적으로 요청하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일부 회원이 교회의 활동에 협력합니다. 이러한 태도에는 자신들을 돋보이게 하려는 바람도 없고, 교회 명의의 활동을 존중하지 않는 마음은 더더욱 없습니다. 오직 오푸스데이 성소에 고유한 일에 힘쓰겠다는 결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활동에 최선의 노력을 바치며 수행하는 수도자와 성직자, 열의 가득한 평신도들은 이미 많이 있습니다.

회원들 고유의 일, 곧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셨다고 여기는 과제는 따로 있습니다. 성덕에 이르는 보편적 부르심 안에서 오푸스데이 회원은 세상 한가운데에서 자유롭고 책임 있게 성덕을 찾고 사도직을 수행하라는 특별한 부르심도 받습니다. 이를 위해 고유한 정신에 따라 살아가고 평생 특별한 양성을 받기로 약속합니다. 만일 교회의 활동에 종사하려고 세상 안에서의 일을 소홀히 한다면, 받은 하느님의 선물을 헛되게 만들 것입니다. 당장의 사목적 효율성에 대한 환상 때문에 교회에 실제 손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시민 사회의 모든 직업과 생업, 세속 노동이라는 드넓은 분야에서 자신을 성화하는 데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계속해서 직업적 역량과 종교적 양성을 쌓아야 하는 절실한 필요, 개인적으로 신심 생활과 기도에 바치는 시간, 자신의 신분에 따르는 의무를 희생적으로 수행하는 일은 삶 전체를 채웁니다. 남는 시간이 없습니다.

미혼자와 기혼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회 계층의 남녀가 오푸스데이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푸스데이 성소를 특징짓는 공통 요소는 무엇입니까? 회원 각자는 오푸스데이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약속을 합니까?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 한가운데에서, 거리 한복판에서 성덕을 찾는 것입니다. 오푸스데이라는 고유한 성소를 하느님께 받은 사람은 자신의 신분 안에서, 육체노동이든 지적 노동이든 자기 일을 수행하며 성덕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알고 그렇게 살아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단순히 이론적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날마다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될 개인의 잘못과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성덕에 이르고자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율법의 완성이며 완덕의 끈인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데 실제로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의 고요함 속에서, 또 세상의 소음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우리의 삶과 교차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애덕, 곧 사랑을 실천하면, 하나의 일치를 이루며 남김없이 열거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인간적 덕과 초자연적 덕을 실천하게 됩니다. 사랑은 정의와 연대, 가정과 사회에 대한 책임, 가난과 기쁨, 정결과 우정 등을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런 덕을 실천하는 것이 사도직으로 이끈다는 것은 곧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이미 사도직입니다. 일상 업무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면,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좋은 모범과 증언이 되고 구체적이며 효과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범에 말씀을 결합하시며 coepit facere et docere (Act 1, 1), 곧 행하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40년 전부터 이 활동을 우정과 신뢰의 사도직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모든 오푸스데이 회원은 성덕과 사도직에 대한 똑같은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푸스데이에는 회원들의 등급이나 서열이 없습니다. 있는 것은 다양한 개인적 상황, 곧 각자가 세상에서 처한 상황입니다. 동일하고 유일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유한 성소가 그 상황에 맞게 실현됩니다. 이는 우리 각자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개인적으로, 자유롭고 책임 있게 자신을 바치고 힘쓰라는 부르심입니다.

보시다시피 오푸스데이라는 사목적 현상은 아래로부터, 곧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일하는 그리스도인의 평범한 삶에서 생겨납니다. 수도원 생활이나 수도 생활의 세속화, 곧 탈성화의 흐름에 속하지 않습니다. 수도자들이 세상에 다가가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도 아닙니다.

오푸스데이 성소를 받는 사람은 주변의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사회적 관계와 직업, 걱정과 슬픔과 기쁨 안에서 새로운 빛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일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습니다. 세상이나 현대 사회에 ‘적응한다’고는 도무지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것인 현실에는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받은 성소는 갈릴래아에서 예수 그리스도 곁에 앉아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Mt 5, 48) 하시는 말씀을 듣던 어부와 농민, 상인과 군인들의 영혼 안에 일어났던 성소와 똑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푸스데이 회원이 추구하는 이 완덕은 그저 그리스도인 고유의 완덕입니다. 곧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름받았으며 신앙의 요구를 온전히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그 완덕입니다. 수도자와 그에 준하는 일부 기관에 고유한 것으로 여겨지는 ‘복음적 완덕’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법적으로 수도 신분을 가리키는 이른바 ‘복음적 완덕의 생활’은 더더욱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수도 성소의 길이 복된 길이며 교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오푸스데이의 정신을 지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저의 길도, 오푸스데이 회원들의 길도 아닙니다. 회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는 신분을 바꾸지 않는다는 명시적인 조건 아래 오푸스데이에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유한 특징은 세상 안에서 자신의 신분을 성화하고, 각 회원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을 성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푸스데이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각 회원이 하는 약속입니다.

이 점이 분명해졌으니 여쭙고 싶습니다. 회원들이 받는 영적 양성에는 어떤 특징이 있어서, 오푸스데이에 속한다는 사실에서 어떠한 현세적 이해관계도 배제될 수 있습니까?

순전히 영적인 것이 아닌 모든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배제됩니다. 오푸스데이는 이탈과 희생, 자기 포기, 영혼을 섬기기 위한 쉼 없는 노동 등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세적 이익의 차원에서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영적 삶의 차원에서는 많은 것을 줍니다. 수덕적 투쟁에서 싸우고 승리할 수단을 주고, 기도의 길로 이끌며, 예수님을 형제처럼 대하고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을 뵙는 법을 가르칩니다. 또한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이며, 따라서 그분의 가르침을 전할 책임이 있음을 자각하도록 가르칩니다.

내적 생활의 길에서 나아가 온전히 자신을 내어 주고 자신의 삶을 주님을 섬기는 데 바치는 것이 가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푸스데이에서 항구할 수 없습니다. 성덕은 이름표가 아니라 깊은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푸스데이에는 정치적·경제적·이념적 목적을 위한 활동이 없으며, 어떤 현세적 활동도 없습니다. 오직 회원들의 초자연적 양성과 사도직 활동만이 있습니다. 곧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끊임없이 영적으로 돌보는 일과, 돌봄·자선·교육 등의 단체 사도직 활동입니다.

오푸스데이 회원들은 오직 분명하게 정해진 성덕의 길을 따르고 특정한 사도직 활동에 협력하기 위해 결합되어 있습니다. 서로 간의 약속은 모든 현세적 이해관계를 배제합니다. 이 영역에서 모든 회원은 자유롭고, 따라서 각자 서로 다르며 때로는 상반되기도 하는 목적과 관심사를 가지고 자기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오푸스데이의 목적은 오직 하느님을 향하므로, 그 정신은 자유의 정신, 모든 사람의 개인적 자유를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그 사랑은 단순한 이론적 선언이 아니라 진실한 것이므로, 우리는 자유의 필연적 결과인 다원성을 사랑합니다. 오푸스데이에서는 다원성을 단순히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고 사랑하며, 결코 가로막지 않습니다. 정치·경제·사회·예술 등의 문제에서 회원들 가운데 수많은 다양한 생각과 서로 다른 태도가 있는 것을 보면 저는 기쁩니다. 모든 일이 하느님 앞에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광신과 불관용이 지배하지 않고, 무엇보다 신앙으로 살아가며, 우리 인간이 단순한 호감이나 이해관계가 아니라 동일한 성령의 활동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안다면 영적 일치와 현세적 다양성은 양립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제로 삼으시어 하느님 아버지께로 이끄십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일치, 교도권과 교회 전통에 대한 충실함, 그리스도의 구원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는 관심이, 흔히 말하듯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로운 논의에 맡겨 두신 문제들에 대한 다양한 태도와 상충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그 다양성이 하느님 계획의 일부이며, 당신 뜻대로 선물과 빛을 나누어 주시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임을 충분히 의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며, 따라서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의견을 존중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과 온전한 형제애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회원들은 바로 이 정신에 따라 양성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회원이라는 사실을 이용하여 개인적 이익을 얻거나 다른 이들에게 정치적·문화적 선택을 강요하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회원들이 이를 용인하지 않고 태도를 바꾸거나 오푸스데이를 떠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푸스데이에서 누구도 조금의 일탈조차 결코 허용할 수 없는 점입니다. 자신의 개인적 자유뿐 아니라 자신이 헌신한 활동의 초자연적 본질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 하느님의 일인 오푸스데이의 초자연적 목적을 가장 잘 보장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이미 수천 명에 이르지만, 지금까지 오푸스데이가 초기 회원들의 열의에 힘입어 발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기관에 본래 따르는 위험, 곧 처음의 열정과 추진력이 식을 가능성에 대비하여 오푸스데이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조치가 있습니까?

오푸스데이는 열의가 아니라 신앙에 기초합니다. 초창기의 오랜 세월은 몹시 어려웠으며, 눈에 보이는 것은 어려움뿐이었습니다. 오푸스데이는 인간적 수단 없이 하느님의 은총과 초기 회원들의 기도와 희생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있는 것은 젊음과 명랑함,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는 바람뿐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오푸스데이의 무기는 언제나 기도와 헌신하는 삶, 영혼을 섬기기 위해 모든 이기심을 조용히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푸스데이에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때문에 그분의 피조물들을 사랑하며 직업 활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바로 모든 것을 내어 주도록 이끄는 정신을 받으러 옵니다.

열정이 식지 않도록 하는 보장은 제 자녀들이 이 정신을 결코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일은 시간이 지나면 쇠퇴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은 인간이 이를 격하시키지 않는 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추진력을 잃을 때에만 부패와 쇠퇴가 찾아옵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주님의 섭리가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토록 다양한 나라에서 다른 이들과 똑같은 평범한 시민들이 이 고유한 하느님의 성소를 불과 40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받아들이고 실천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오푸스데이의 목적은 각 회원의 성화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자신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머무는 남녀입니다. 온갖 어려움에도, 곧 자신의 비참함과 개인적인 잘못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기 위해 오푸스데이에 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곧 떠날 것입니다. 저는 성덕이 성덕을 부른다고 생각하며, 오푸스데이 안에 이 깊은 확신과 신앙의 삶이 결코 부족하지 않도록 하느님께 청합니다. 보시다시피 우리는 인간적·법적 보장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영감을 주신 일은 은총의 리듬에 따라 움직입니다. 제 처방은 오직 이것입니다. 성인이 되는 것, 각자 자신의 성덕으로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몬시뇰께서는 일에 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오푸스데이의 영성에서 일이 차지하는 자리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오푸스데이 성소는 이를 받는 사람의 처지나 생활 신분을 어떤 방식으로도 바꾸거나 변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조건이 노동이므로, 오푸스데이 정신에 따른 성덕과 사도직이라는 초자연적 성소는 일하라는 인간적 소명을 확고히 해 줍니다. 회원 대다수는 평신도, 곧 평범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직업이나 생업, 흔히 온 힘을 쏟아야 하는 일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으로 생계를 꾸리고 가족을 부양하며 공동선에 기여하고 자신의 인격을 계발합니다.

오푸스데이 성소는 이 모든 것을 확고히 해 줍니다. 그래서 이 성소의 본질적인 표지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세상 안에서 살면서 인간적으로나 초자연적으로나 가능한 한 완전하게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각자의 불완전함을 안고서 말입니다. 곧 지상 사회의 건설에 효과적으로 기여하여 역량과 봉사 정신을 가지고 수행되는 일이며,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데 기여하여 자신을 성화하고 그 자체가 성화되는 일입니다.

오푸스데이 정신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온전히 살아 내고 사도직을 실천하려는 이들은 직업 활동으로 자신을 성화하고, 그 직업 활동을 성화하며, 직업 활동을 통해 다른 이들을 성화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함께 일하는 다른 시민들과 다르지 않은 동등한 사람으로서, 나자렛 작업장에서 30년 동안 일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분과 일치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일상의 일은 자신을 성화해야 하는 환경일 뿐 아니라 성덕의 바로 그 재료이기도 합니다. 하루의 여러 사건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기도 생활을 위한 자극을 얻습니다. 직업 활동 자체가 친척과 친구, 동료 같은 다른 사람들, 또 자신의 사회나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제들과 접하게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에게 본질적인 타인을 섬기는 헌신을 실천할 기회를 줍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참되고 진실하게 증언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모두가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세상 안에서의 평범한 삶과 날마다 하는 일이 하느님과의 만남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성덕과 사도직은 회원들의 삶과 하나를 이룹니다. 그래서 일이 그들의 영적 삶을 지탱하는 중심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헌신은 그들이 오푸스데이에 오기 전부터 하던 일,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하는 일에 접붙여집니다.

사목 활동 초기에 제가 이런 내용을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 어떤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또 어떤 이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관해서는 언제나 부정적으로 말하는 데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이 언제나 완전하므로 세상은 선하며, 죄로 세상을 나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인간이라는 사실을 제가 이해하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다른 이들도 이를 이해하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때 저는 우리가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고 지금도 그렇게 말합니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이며, 세상의 사건과 일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고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에는 악과 선이 뒤섞여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식별할 줄 아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식별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의 선함을 부정하게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것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것, 심지어 우리 자신의 나약함 뒤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것을 알아보게 해야 합니다. 사도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좋은 표어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 Cor 3, 22-23) 그렇게 하여 세상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어야 합니다.

혼인이 성덕의 길이라는 가르침은 몬시뇰의 설교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1934년 『영적 고찰』을 쓰셨을 때부터 혼인을 소명으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책과 나중에 나온 『길』에서도 혼인은 그리스도의 참모부가 아니라 일반 병사들을 위한 것이라고 쓰셨습니다. 이 두 측면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오푸스데이의 정신과 삶에서는 이 두 측면을 조화시키는 데 어떠한 장애도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또한 영적인 동기로 살아가는 독신의 더 높은 탁월성은 저 개인의 신학적 견해가 아니라 교회의 신앙 교리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930년대에 제가 그 문장들을 쓸 당시 가톨릭 환경에서는, 구체적인 사목 생활에서 젊은이들이 동정의 초자연적 가치만 높이 여기게 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완덕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성덕에 이르는 또 하나의 길인 그리스도교적 혼인의 가치는 그늘에 가려 두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육기관에서는 젊은이들이 혼인의 존엄을 마땅히 받아야 할 만큼 소중히 여기도록 교육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중등교육의 마지막 학년에 학생들에게 해 주는 피정에서, 혼인으로 나아갈 가능성보다 수도 소명의 가능성을 생각할 자료를 더 많이 제시하는 일이 흔합니다. 갈수록 줄어들고는 있지만, 부부 생활을 낮추어 보고 젊은이들에게 교회가 그저 용인할 뿐인 어떤 것으로 제시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가정을 이루면 진지하게 성덕을 지향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푸스데이에서는 언제나 다르게 해 왔습니다. 사도적 독신의 존재 이유와 탁월성을 아주 분명히 밝히면서, 혼인을 이 땅에서 하느님께 이르는 길로 제시해 왔습니다.

저는 인간의 사랑을, 주님께서 제게 생명을 주시고자 쓰신 제 부모님의 거룩한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사랑을 두 손으로 축복합니다. 빵과 포도주가 성체성사의 재료이듯 부부는 혼인성사의 집전자이자 그 재료 자체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인간의 순결한 사랑을 노래하는 모든 노래를 좋아합니다. 제게는 그것이 인간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가락입니다. 동시에 저는 사도적 독신이라는 소명의 길을 따르는 이들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소중히 여기지 않는 독신자들이 아니라고 늘 말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 소명의 본질 자체인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실재로 설명됩니다. 저는 그 ‘사랑’을 대문자로 쓰기를 좋아합니다.

혼인의 소명을 이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propter regnum coelorum (Mt 19, 12), 곧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 소명의 더 높은 탁월성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모순도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교회의 가르침을 알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며, 또한 자신의 개인적인 소명을 알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면,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양립하는지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확신합니다. 곧 신앙을 지니고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혼인은 일반 병사들을 위한 것이라고 썼을 때, 저는 교회 안에서 언제나 일어나 온 일을 묘사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교황을 으뜸으로 삼는 주교단을 이루며 교황과 함께 온 교회를 다스리는 주교들은 독신으로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서 선발됩니다. 혼인한 사제들을 허용하는 동방 교회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독신자들은 평신도 사도직에서도 사도직 사업을 지속적으로 이끌고 뒷받침하는 데 헌신할 수 있도록, 실제로 마음과 행동에서 더 큰 자유를 지닌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평신도들이 훌륭하고도 매우 중요한 사도직을 할 수 없다거나 실제로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책임을 지는 자리에서 다양한 역할과 다양한 헌신의 방식이 있다는 뜻일 뿐입니다.

군대에서는 일반 병사들이 참모부만큼이나 필요하며, 더 영웅적이고 더 큰 영광을 받을 만할 수도 있습니다. 그 비유로 표현하려던 것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결국 다양한 과제가 있으며, 모두 중요하고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기 소명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각자에게 가장 완전한 것은 언제나 오직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인 생활 안에서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며 자신의 소명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는 그리스도인은, 사도적 독신으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저절로 특별한 존경과 깊은 애정을 느낍니다. 자기 자녀 가운데 누군가가 주님의 은총으로 그 길을 걷기 시작하면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혼인 소명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그 소명 덕분에 독신자든 기혼자든 모든 이의 위대한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인간의 사랑이 맺은 열매를 바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인간 삶의 중요한 측면들, 특히 여성의 삶에 관한 여러 측면을 이야기하고, 오푸스데이의 정신이 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생활에서 여성의 역할을 어떻게 증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답할 때면, 평소의 제 방식과 달리 논쟁적으로 답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런 표현을 성직자 중심의 의미로 사용하여, ‘교회’라는 말을 성직자나 교계 제도에 속한 어떤 것과 같은 뜻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생활에 참여한다는 것을 오직, 또는 주로 본당 생활을 돕는 일, 거룩한 교계의 위임을 받은 단체에서 협력하는 일, 전례 거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 등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이론적으로는 선언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교회가 하느님 백성 전체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교회가 현존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이 말로 교회 조직의 생활에 여성이 할 수 있는 협력의 중요성을 작게 보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신도의 그리스도인 소명의 충만함을,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평범한 남성과 여성의 그리스도인 소명의 충만함을 옹호하는 데 제 삶을 바쳤습니다. 따라서 교회와 세상 안에서 그들의 사명이 신학적으로나 법적으로 온전히 인정받도록 힘쓰는 데 제 삶을 바쳤습니다.

다만 저는 그 협력의 범위를 부당하게 축소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또한 평범한 그리스도인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직자처럼 되지 않고, 세속적인 사람, 평범한 사람, 세상에서 살아가며 세상의 관심사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 때에만 자신의 고유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 조직 안에서 자신에게 해당하는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사랑하시며 모든 이를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으로 선포하면서, 인간의 모든 활동에 그리스도를 모셔 가는 것은 이 땅에 가득한 수백만 그리스도인 남녀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에 참여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장 중요하고 어떤 경우든 다른 모든 참여 방식의 전제가 되어야 하는 방법은, 자신의 인간적 소명이 이끌어 준 삶의 자리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를 특별히 의식하여 목표로 삼지도 않으면서, 일상생활을 소박하게 살아가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 남녀를 생각하면 제 마음은 얼마나 깊이 움직이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자기 삶의 숭고함을 깨닫게 하고, 하찮아 보이는 그 삶이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밝혀 주며, 사건과 상황을 통해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더 주의 깊게 귀 기울이도록 가르치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 일을 하도록 교회를 재촉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구속하셨음을 보여 주며, 안에서부터 온 세상을 그리스도교화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여성은 가정에서든 자신이 수행하는 다른 일에서든, 자신에게 속한 고유한 잠재력을 실현하며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그 사명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이시고 동정녀이시며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을 향하여 살아가며 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 (Lc 1, 38),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경우에 유일하고 다른 이에게 넘길 수 없는 개인적인 소명에 충실한지는 이 응답에 달려 있습니다. 그 충실함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온 세상에서 이루시는 구원 사업의 협력자가 되게 할 것입니다.

분명히 이 사실이, 눈에 보이는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일상생활이야말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진정한 장소라는 확신을 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일상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곳은 바로 여러분의 동료가 있고, 여러분의 갈망이 있고, 여러분의 일과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매일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온 인류에 봉사하면서 우리 자신을 성화해야 할 장소는 바로 이 세상의 가장 물질적인 것들 한가운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교적 물질주의

육신의 부활을 믿는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유물론이라고 판단되는 위험을 가지고도 항상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것을 거부하는 관념에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영적인 것에 닫힌 유물론에 뚜렷하게 반대되는 "그리스도교적 유물론"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의 발자국이라고 일컫던 일곱 성사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삶에 이르게 하고 천국에 올라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이 길을 택하셨음을 보여 주는 가장 명백한 표징이 아니겠습니까? 하나하나의 성사가 물질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창조와 구원의 힘을 가진, 하느님의 사랑인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다가오는 성체성사가, 초라한 이 세상의 물질(빵과 포도주)을 통하여, 최근의 공의회가 상기했다시피 “인간의 손으로 가꾼 자연 요소들”(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 38항 참조)을 통하여 봉헌되어 우리 구원자의 경애하올 몸과 피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참여하는 수 없이 많은 세상의 일들을 이 진리의 빛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활동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당뿐 만이 아니라 이 모든 세상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지적으로 직업적으로 적절하게 되려 노력합니다. 그 사람은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이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개인의 식견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결정들은, 작든 크든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려고 매우 겸손되이 노력하는 개인의 성찰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의 바로 이 가르침이 오푸스데이의 정신의 핵심입니다. 이 가르침을 따르신다면 여러분들이 완전한 정신으로 일터에서 생활하고, 일상에서 작은 일들에 사랑을 불어넣음으로써 하느님과 온 인류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사소한 일들에 숨어 있는 거룩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카스티야의 한 시인이 썼던 시구 한마디가 이에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천천히, 필기를 하면서, 일을 잘 하는 것이,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안토니오 마차도, 시집 161).

평이한 글로 쓰여지는 영웅적 서사시

여러분, 한 신자가 매일의 가장 작은 일을 사랑으로 행할 때, 바로 그곳에서 초월적인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수없이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성소가 매일의 평범한 산문을 굉장한 시구로 만드는 것이라고, 여러 번 망치를 두드리듯이 반복하여 말을 했던 것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은 평소의 일들을 거룩한 지향으로 행할 때에 여러분의 마음속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생활을 성화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모든 임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꿈과 거짓의 이상주의나, 환상을 버리십시오. 제가 "만약 신비주의"라고 이름 지었던 행동생각들, 즉 “만약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만약 내가 다른 직업을 가졌었다면…, 만약 내가 더 건강했다면…, 젊었다면…, 나이 들었다면…”이라는 모든 생각들을 버리십시오. 그 대신 눈앞에 있는 물질적이고 직접적인 현실에 집중하십시오. 거기에 우리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루카 24,39)

평신도의 청원

이 말씀을 위급한 때만이 아니라 매일 여러분들의 권리를 행사하셔야 된다는 초대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이는 또한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훌륭하게 이행하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정치 경제적인 일들, 학업과 직업 등 모든 분야에서 여러분의 자유로운 결정들로 인한 결과와 여러분 각자가 지니는 개인적 자립성의 결과를 용기 있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인 "평신도 정신"은 편협함이나 광신(狂信)을 멀리 할 수 있게 합니다. 더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이러한 평신도 정신은 여러분이 동료 시민들과 평화롭게 지내도록 돕고, 이러한 이해와 조화를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장려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입니다.

나바라 대학교를 운영하는 일은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온전히 사회적 봉사에 전념하는 사업입니다. 또 이 나라의 현재와 미래의 번영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일하고자 하는 사업입니다. 저는 언젠가 스페인 정부가 이 사업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무언가 기여하는 때가 오리라는 희망을 계속해서 품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의에도 부합하고,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족적인 인간애

그리고, 여러분, 지금 이제 제가 소중히 여기는, 일상생활에의 따른 또 다른 차원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 간의 숭고한 순결한 사랑, 즉 연인애인들과 부부들의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거룩한 인간적 사랑은 단지 진실된 영적 활동과 함께여야만 허가되거나 용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전에 언급했던 잘못된 영성에 의해 그렇게 생각될 수 있지만 말입니다. 저는 40년 동안 말과 글을 통해 이와 정 반대되는 것을 가르쳐 왔고, 이제는 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도 이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혼인과 가정으로 이끄는 사랑 또한 아름답고 거룩한 길이요 성소이며,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길입니다. 인간적 사랑으로 둘러싸인 활기찬 영역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들, 곧 완전한 정신으로 일하기, 매일 작은 일에 사랑을 불어넣기, 사소한 일에 숨어 있는 “거룩한 것”을 발견하기가 특별히 잘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나바라 대학교의 교수, 학생, 교직원 여러분 모두가 아시듯이 저는 여러분의 사랑을 아름다운 사랑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 캠퍼스에는 우리가 기도하며 지은 경당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성모님께 기도하실 수도 있고, 성모님이 축복하실 여러분의 놀랍고도 순수한 사랑을 바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1코린 6,19). 여러분은 아름다운 사랑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녀의 성상 앞에서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물음에 얼마나 자주 기쁨에 찬 확언으로써 답하시겠습니까! 예! 그것을 알고 있고, 당신의 강한 도우심으로 그것을 살고자 합니다. 천주의 성모 동정 마리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