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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몬시뇰과의 대화»에 성덕 → 모든 사람이 거룩해져야 한다 항이 있음.

오푸스데이 설립 이후 지금까지 교회 자체에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기간에 오푸스데이의 성격과 목적이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해 왔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처음부터 오푸스데이의 유일한 목적은 방금 설명한 그대로였습니다. 모든 인종과 사회적 처지의 남녀가 세상 한가운데에서 일상 업무 안에서, 또 그 일을 통해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노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오푸스데이가 시작된 1928년부터 저는 성덕이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며, 이 땅의 모든 길과 모든 신분, 모든 직업과 정직한 모든 일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다고 설교해 왔습니다. 이 메시지에는 많은 함의가 담겨 있으며, 오푸스데이의 삶에서 얻은 경험은 제가 그 의미를 갈수록 깊이, 더 섬세하고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오푸스데이는 작게 태어났으며, 이후 살아 있는 유기체가 자라듯, 역사 안에서 발전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점진적이고 꾸준하게 자연스럽게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아무리 달라진다 해도 그 목적과 존재 이유는 바뀌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오푸스데이의 메시지는 어떤 상황에서 수행하든 정직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성화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모든 직업의 사람들이 오푸스데이에 속해 있습니다. 의사와 법률가, 기술자와 예술가뿐 아니라 건설노동자와 광부, 농민도 있습니다. 영화감독과 제트기 조종사부터 고급 미용사에 이르기까지 어떤 직업도 가능합니다. 회원들에게 시대의 흐름에 맞게 살고 현대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자연스럽고 본능적입니다. 그들과 똑같은 다른 시민들과 함께 그 세계를 만들어 내고 현대적인 모습을 부여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오푸스데이의 정신이므로, 교회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과 그 진보와 발전을 거부하지 않고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공의회가 장엄하게 선언하는 것을 보며 우리가 얼마나 크게 기뻐했는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교회와 국가에 동시에 속해 있음을 알고, 따라서 각자가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이자 시민으로서 자신의 개인적 책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회원들이 거의 40년 전부터 실천하려고 노력해 온 영성의 핵심 특징입니다.

오푸스데이의 내부 조직이 비밀결사의 규칙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때때로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아울러 1928년 오푸스데이를 설립하시면서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메시지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1928년부터 성덕이 특권을 누리는 일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이 땅의 모든 길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다고 설교해 왔습니다. 오푸스데이 고유의 영성을 지탱하는 중심이 바로 일상 노동의 성화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신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교회의 사도직에서 성직자를 돕는 것뿐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이 초자연적 목적을 이루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얻어 주신 자유를 바탕으로, 각자가 인격적으로 자유로워야 하고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껴야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데에는 어떤 비밀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푸스데이 회원들은 비밀을 몹시 싫어합니다. 다른 이들과 똑같은 평범한 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푸스데이에 들어와도 신분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섬기는 데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라는 팻말을 등에 달고 다니는 것은 그들에게 역겨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 태도는 평신도답지도, 세속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오푸스데이 회원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이 오푸스데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를 떠들고 다니지는 않지만 숨기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몬시뇰, 저는 1년 반 전 팜플로나에 모인 2,000여 명이 넘는 청중의 질문에 답하시는 모습을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몬시뇰께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책임 있고 자유로운 시민으로 행동해야 하며,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로 먹고살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생각에 어떤 중요성을 부여하시며, 얼마나 널리 실현하고자 하십니까?

가톨릭 신자라는 이름을 하나의 직업으로 삼는 태도는 언제나 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윤리 전체의 토대인 개인적 책임의 원칙을 부정하려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푸스데이와 그 회원들의 정신은 교회를 이용하지 않고, 교회와 모든 피조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가 이름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교적 삶을 실제로 증언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성직주의를 몹시 싫어하며, 나쁜 반성직주의와 더불어 좋은 반성직주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좋은 반성직주의는 사제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며, 평신자나 사제가 거룩한 사명을 현세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데 반대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어느 누구를 반대한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우리 오푸스데이에는 배타적인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모든 이,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자신의 삶을 훌륭한 봉사의 현실로 만드는 모든 이와 협력하려는 바람만 있습니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특히 1928년부터 제가 이 생각들을 얼마나 널리 펼쳐 왔느냐만이 아니라 교회의 교도권이 이를 얼마나 펼치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얼마 전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De Ecclesia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지상 사회의 온전한 시민임을 자각하고, 모든 인간 활동 안에서 전문적 역량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며, 세례를 받았다는 바로 그 사실로 부름받은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추구해야 한다고 일깨웠습니다. 이 가난한 사제에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이었습니다.

오푸스데이에 점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오푸스데이 가르침의 매력 때문만입니까, 아니면 현대의 불안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까?

주님께서는 창세기가 전하듯 하느님께서 사람이 일하도록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일깨우도록 1928년 오푸스데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는 30년 동안 나자렛에 머무르시며 직업을 가지고 일하신 예수님의 모범에 다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러 왔습니다. 예수님의 손 안에서 노동, 곧 세상의 수백만 사람이 하는 것과 비슷한 직업 활동은 하느님의 일이 되고, 구원의 활동이 되며,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오푸스데이의 정신은 인간적으로 올바르고 고귀한 일이면 어떤 일이든 하느님의 일이 될 수 있다는 지극히 아름다운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수 세기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이 잊고 지냈던 사실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는 하찮은 직업이 없습니다. 모든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별난 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십니다(Mt 5, 48). 대다수의 사람에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일을 성화하고, 그 일 안에서 자신을 성화하며, 일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성화하고, 그렇게 자신의 삶의 길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뜻합니다.

노동을 갈수록 높이 평가하는 현대 사회의 여건은, 오푸스데이의 정신이 강조하려는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이러한 측면을 오늘날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작용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전체에서 커다란 쇄신 운동이 일어나도록 바라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령들을 읽으면, 일상 노동의 가치와 세상 안에서 살아가며 일하는 그리스도인의 성소가 지닌 존엄을 새롭게 인정하는 것이 바로 그 쇄신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교황과 주교단이라는 정규 교계와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뿐 아니라, 같은 신앙을 지닌 다른 형제들과의 일치를 느끼는 것도 그리스도교 정신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오늘날 교회가 겪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다른 나라나 다른 사회 계층의 가톨릭 신자들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른다는 데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깊이 살아 냈던 형제애를 오늘 새롭게 실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각자의 다양한 성소를 사랑하면서 서로 일치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일부 작은 집단이 가톨릭의 이름으로 같은 신앙의 형제들을 향해 퍼뜨리는 부당하고 모욕적인 판단도 적지 않게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형제들은 자기 나라의 특수한 사정에서 볼 때 실제로 올바르고 희생적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하느님께 받은 부르심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여, 하느님께 받은 은사가 지닌 것을 교회에 빠짐없이 기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평범한 그리스도인인 오푸스데이 회원들의 고유한 일은 매우 다양한 인간 활동에 참여하면서 세상을 그 안에서부터 성화하는 것입니다. 회원이 된다고 해서 세상 안에서의 위치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므로, 공동 종교 예식이나 본당 생활 등에도 각각의 상황에 맞게 협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들은 좋은 가톨릭 신자가 되고자 하는 평범한 시민입니다.

그러나 회원들은 일반적으로 교회 명의의 활동을 맡아 일하지는 않습니다. 교계가 명시적으로 요청하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일부 회원이 교회의 활동에 협력합니다. 이러한 태도에는 자신들을 돋보이게 하려는 바람도 없고, 교회 명의의 활동을 존중하지 않는 마음은 더더욱 없습니다. 오직 오푸스데이 성소에 고유한 일에 힘쓰겠다는 결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활동에 최선의 노력을 바치며 수행하는 수도자와 성직자, 열의 가득한 평신도들은 이미 많이 있습니다.

회원들 고유의 일, 곧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셨다고 여기는 과제는 따로 있습니다. 성덕에 이르는 보편적 부르심 안에서 오푸스데이 회원은 세상 한가운데에서 자유롭고 책임 있게 성덕을 찾고 사도직을 수행하라는 특별한 부르심도 받습니다. 이를 위해 고유한 정신에 따라 살아가고 평생 특별한 양성을 받기로 약속합니다. 만일 교회의 활동에 종사하려고 세상 안에서의 일을 소홀히 한다면, 받은 하느님의 선물을 헛되게 만들 것입니다. 당장의 사목적 효율성에 대한 환상 때문에 교회에 실제 손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시민 사회의 모든 직업과 생업, 세속 노동이라는 드넓은 분야에서 자신을 성화하는 데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계속해서 직업적 역량과 종교적 양성을 쌓아야 하는 절실한 필요, 개인적으로 신심 생활과 기도에 바치는 시간, 자신의 신분에 따르는 의무를 희생적으로 수행하는 일은 삶 전체를 채웁니다. 남는 시간이 없습니다.

미혼자와 기혼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회 계층의 남녀가 오푸스데이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푸스데이 성소를 특징짓는 공통 요소는 무엇입니까? 회원 각자는 오푸스데이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약속을 합니까?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 한가운데에서, 거리 한복판에서 성덕을 찾는 것입니다. 오푸스데이라는 고유한 성소를 하느님께 받은 사람은 자신의 신분 안에서, 육체노동이든 지적 노동이든 자기 일을 수행하며 성덕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알고 그렇게 살아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단순히 이론적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날마다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될 개인의 잘못과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성덕에 이르고자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율법의 완성이며 완덕의 끈인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데 실제로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의 고요함 속에서, 또 세상의 소음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우리의 삶과 교차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애덕, 곧 사랑을 실천하면, 하나의 일치를 이루며 남김없이 열거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인간적 덕과 초자연적 덕을 실천하게 됩니다. 사랑은 정의와 연대, 가정과 사회에 대한 책임, 가난과 기쁨, 정결과 우정 등을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런 덕을 실천하는 것이 사도직으로 이끈다는 것은 곧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이미 사도직입니다. 일상 업무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면,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좋은 모범과 증언이 되고 구체적이며 효과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범에 말씀을 결합하시며 coepit facere et docere (Act 1, 1), 곧 행하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40년 전부터 이 활동을 우정과 신뢰의 사도직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모든 오푸스데이 회원은 성덕과 사도직에 대한 똑같은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푸스데이에는 회원들의 등급이나 서열이 없습니다. 있는 것은 다양한 개인적 상황, 곧 각자가 세상에서 처한 상황입니다. 동일하고 유일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유한 성소가 그 상황에 맞게 실현됩니다. 이는 우리 각자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개인적으로, 자유롭고 책임 있게 자신을 바치고 힘쓰라는 부르심입니다.

보시다시피 오푸스데이라는 사목적 현상은 아래로부터, 곧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일하는 그리스도인의 평범한 삶에서 생겨납니다. 수도원 생활이나 수도 생활의 세속화, 곧 탈성화의 흐름에 속하지 않습니다. 수도자들이 세상에 다가가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도 아닙니다.

오푸스데이 성소를 받는 사람은 주변의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사회적 관계와 직업, 걱정과 슬픔과 기쁨 안에서 새로운 빛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일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습니다. 세상이나 현대 사회에 ‘적응한다’고는 도무지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것인 현실에는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받은 성소는 갈릴래아에서 예수 그리스도 곁에 앉아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Mt 5, 48) 하시는 말씀을 듣던 어부와 농민, 상인과 군인들의 영혼 안에 일어났던 성소와 똑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푸스데이 회원이 추구하는 이 완덕은 그저 그리스도인 고유의 완덕입니다. 곧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름받았으며 신앙의 요구를 온전히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그 완덕입니다. 수도자와 그에 준하는 일부 기관에 고유한 것으로 여겨지는 ‘복음적 완덕’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법적으로 수도 신분을 가리키는 이른바 ‘복음적 완덕의 생활’은 더더욱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수도 성소의 길이 복된 길이며 교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오푸스데이의 정신을 지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저의 길도, 오푸스데이 회원들의 길도 아닙니다. 회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는 신분을 바꾸지 않는다는 명시적인 조건 아래 오푸스데이에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유한 특징은 세상 안에서 자신의 신분을 성화하고, 각 회원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을 성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푸스데이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각 회원이 하는 약속입니다.

오푸스데이처럼 뚜렷한 평신도적 성격을 지닌 기관에 왜 사제들이 있습니까? 모든 회원이 사제가 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책임자들이 선발한 사람들만 사제가 될 수 있습니까?

미혼자이든 기혼자이든 사별한 사람이든, 평신도이든 성직자이든, 자신의 신분 안에서 자신을 성화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오푸스데이 성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구 사제들도 오푸스데이에 결합되며, 이전과 똑같이 교구 사제로 남습니다. 오푸스데이는 그들이 자신의 일상 업무를 성화함으로써 자신의 신분에 고유한 그리스도교적 완덕에 이르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그 일상 업무란 바로 자신의 주교와 교구, 온 교회를 섬기는 사제 직무입니다. 그들의 경우에도 오푸스데이와 맺는 유대는 신분을 조금도 바꾸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직권자가 맡기는 사명과 수행해야 할 다른 사도직 및 활동에 계속 온전히 헌신하며, 오푸스데이는 그 일에 결코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제에게 고유한 덕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실천하면서 자신을 성화합니다.

성품을 받은 뒤 오푸스데이에 들어오는 이 사제들 외에도, 오푸스데이에는 회원이 된 뒤 성품성사를 받는 다른 재속 사제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평신도, 곧 평범한 그리스도인일 때 오푸스데이에 결합되었습니다. 전체 회원에 비해 매우 적은 수로 2퍼센트에도 못 미칩니다. 이들은 경우에 따라 이전의 세속 직업 활동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사제 직무를 통해 오푸스데이의 사도직 목적에 봉사합니다. 실제로 이들은 의사, 기술자, 기계공, 농민, 교사, 기자 등으로 전문적 역량을 쌓고 오랫동안 자기 일을 한 뒤 사제직에 부름받은 전문직 종사자나 노동자들입니다. 또한 서두르지 않고 최대한 깊이 있게 관련 교회 학문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세속 직업 환경의 고유한 사고방식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성품을 받으면 의사이자 사제, 법률가이자 사제, 노동자이자 사제 등이 됩니다.

그들의 존재는 오푸스데이의 사도직에 필요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 사도직은 기본적으로 평신도들이 수행합니다. 각 회원은 자기 일터에서 사도가 되어 모범과 말, 곧 대화를 통해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가까이 이끌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도직을 하며 영혼들을 그리스도교 생활의 길로 이끌다 보면 성사라는 경계에 이릅니다. 평신도의 성화 직무에는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성찬례를 거행하며 교회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제의 성화 직무가 필요합니다. 또한 오푸스데이의 사도직은 고유한 영성을 전제로 하므로 사제 역시 그 고유한 정신을 살아 있는 모습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이 사제들은 다른 회원들을 섬기는 일 외에도 많은 영혼에게 봉사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그들의 삶 전체에 깃든 사제적 열의는 누구든 자기 곁을 지나가면서 그리스도의 빛을 조금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작은 파벌이나 차별을 모르는 오푸스데이의 정신은 다른 재속 사제 형제들과 깊고 실질적으로 일치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그들을 이끕니다. 그들은 자신이 일하는 모든 교구에서 스스로 교구 사제라고 느끼며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교구들을 열심히, 효과적으로 섬기려고 노력합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이므로 한 가지 짚고 싶습니다. 사제품을 받는 이 평신도 회원들은 자신의 성소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책임자들의 초대에 자유롭게 응답하여 사제직을 받아들일 때, 그렇게 하면 하느님과 더 깊이 결합되거나 성덕을 더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평신도 성소 자체가 충만하고 완전하며, 오푸스데이 안에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처음부터 그리스도교적 완덕에 이르는 분명한 길이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제품은 결코 오푸스데이 성소의 어떤 완성이나 영광의 정점이 아닙니다. 일부 회원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도록 주어지는 부르심입니다. 또한 오푸스데이에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두 등급의 회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동등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여기고, 자기 신분 안에서 성화한다는 같은 정신을 실천합니다3.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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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몬시뇰은 이 답변에서 재속 사제가 오푸스데이에 속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에 관해 말합니다. a) 오푸스데이 평신도 회원 출신으로, 단장에게 성품을 받도록 부름받아 자치단에 입적하고 그 사제단을 이루는 사제들입니다. 이들은 전적으로 그것만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오푸스데이에 편입된 신자들을 사목적으로 돌보는 데 헌신합니다. 또한 그들과 함께 사회의 모든 환경에서 성덕과 사도직에 대한 보편적 부르심을 깊이 자각하도록 하는 고유한 사도직을 수행합니다(「소개」 참조). b) 이미 어떤 교구에 입적한 재속 사제들도,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몬시뇰이 이 답변의 첫머리에서 말하듯, 자치단과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성십자가 사제회에 가입하여 오푸스데이의 영적 삶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 사제회의 총장은 오푸스데이 단장입니다. 이 사제회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소개」 본문을 참조하십시오. 그곳에는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몬시뇰이 이 인터뷰 당시에는 아직 사용할 수 없었던 정확한 법률 용어로 설명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