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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푸스데이의 엄청난 성공을 어떻게 설명하시며, 어떤 기준으로 그 성공을 가늠하십니까?
어떤 일이 초자연적인 것일 때에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는 성공이나 실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이미 코린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이들의 판단이나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판단이라고 말했습니다.
분명 오푸스데이는 오늘날 세계 곳곳에 퍼져 있으며, 거의 70개 국적의 남녀가 속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저 자신도 놀랍습니다. 인간적인 설명은 어떤 것도 찾을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의 뜻으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원하시는 곳으로 부시며, 사람들의 성화를 이루시려고 원하시는 사람을 쓰시기 때문입니다. 제게 이 모든 것은 감사와 겸손의 계기이며, 언제나 당신을 섬길 줄 알도록 하느님께 청하는 계기입니다.
또 제가 어떤 기준으로 일을 가늠하고 판단하는지 물으셨습니다.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성덕, 성덕의 열매입니다.
오푸스데이의 가장 중요한 사도직은 각 회원이 친구와 직장 동료들을 날마다 대하면서 자기 삶의 증언과 말로 하는 사도직입니다. 이 조용하고 겸손한 사도직의 초자연적 효과를 누가 측정할 수 있겠습니까? 충실하고 진실한 친구의 모범이 주는 도움이나 좋은 어머니가 가정 안에서 미치는 영향을 수치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질문은 오푸스데이가 수행하는 단체 사도직에 관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경우에는 인간적·기술적 관점에서 결과를 측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노동자 직업훈련 학교가 그곳에 다니는 사람들의 사회적 발전을 이루는지, 대학이 학생들에게 적절한 전문·문화 교육을 제공하는지 등입니다. 그런 뜻으로 하신 질문이라면, 그 결과는 이 일을 고유한 전문 직무로 수행하며 진지하게 일하려는 누구나 그러하듯 준비를 갖춘 사람들이 수행하기 때문이라고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그 활동을 미리 정해진 틀에 맞추어 구상하지 않고, 실제 요구에 맞추기 위해 매번 그 활동이 이루어질 사회의 고유한 필요를 연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푸스데이는 인간적 효율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런 활동의 참된 성공과 실패는, 인간적으로 훌륭하게 수행되는 가운데 그 일을 하는 사람들과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의 형제임을 느끼며, 그 마음을 인류에 대한 사심 없는 봉사로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현재는 이미 수천 명에 이르지만, 지금까지 오푸스데이가 초기 회원들의 열의에 힘입어 발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기관에 본래 따르는 위험, 곧 처음의 열정과 추진력이 식을 가능성에 대비하여 오푸스데이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조치가 있습니까?
오푸스데이는 열의가 아니라 신앙에 기초합니다. 초창기의 오랜 세월은 몹시 어려웠으며, 눈에 보이는 것은 어려움뿐이었습니다. 오푸스데이는 인간적 수단 없이 하느님의 은총과 초기 회원들의 기도와 희생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있는 것은 젊음과 명랑함,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는 바람뿐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오푸스데이의 무기는 언제나 기도와 헌신하는 삶, 영혼을 섬기기 위해 모든 이기심을 조용히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푸스데이에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때문에 그분의 피조물들을 사랑하며 직업 활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바로 모든 것을 내어 주도록 이끄는 정신을 받으러 옵니다.
열정이 식지 않도록 하는 보장은 제 자녀들이 이 정신을 결코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일은 시간이 지나면 쇠퇴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은 인간이 이를 격하시키지 않는 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추진력을 잃을 때에만 부패와 쇠퇴가 찾아옵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주님의 섭리가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토록 다양한 나라에서 다른 이들과 똑같은 평범한 시민들이 이 고유한 하느님의 성소를 불과 40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받아들이고 실천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오푸스데이의 목적은 각 회원의 성화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자신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머무는 남녀입니다. 온갖 어려움에도, 곧 자신의 비참함과 개인적인 잘못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기 위해 오푸스데이에 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곧 떠날 것입니다. 저는 성덕이 성덕을 부른다고 생각하며, 오푸스데이 안에 이 깊은 확신과 신앙의 삶이 결코 부족하지 않도록 하느님께 청합니다. 보시다시피 우리는 인간적·법적 보장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영감을 주신 일은 은총의 리듬에 따라 움직입니다. 제 처방은 오직 이것입니다. 성인이 되는 것, 각자 자신의 성덕으로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방금 가족의 일치가 큰 가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오푸스데이에서는 왜 남편과 아내가 함께 참여하는 영적 양성 활동을 마련하지 않습니까?
이 문제에서도 다른 많은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선호나 의견에 따라 여러 방안 가운데 선택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우리에게 하나의 방식만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 생활 안에 마치 일당 체제를 수정하고 확대한 새 판본을 들여오는 듯한 사목 방식, 더 넓게는 그런 사도직 접근 방식은 전염병처럼 피해야 합니다.
부부를 위한 피정과 다른 양성 활동을 마련하는 가톨릭 단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유를 행사하여 적절하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활동에서 자신의 그리스도인 소명을 더 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 역시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최선이라는 것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에는 부부가, 나아가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고 때로는 함께해야 하는 측면이 많습니다. 성찬의 희생 제사와 다른 예배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영적 양성을 위한 어떤 활동은 남편과 아내가 따로 참여할 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성화와 수덕적 투쟁, 하느님과의 일치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라는 특성이 그렇게 강조됩니다. 이는 나중에 다른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지만, 그 안에서 각자의 양심은 다른 누군가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할 때 각자의 개인적 요구와 필요, 나아가 각자의 심리에도 양성을 맞추기가 더 쉽습니다. 그렇다고 그 활동에서 참가자들이 혼인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푸스데이의 정신에서 그보다 더 거리가 먼 일은 없습니다.
저는 이미 40년 동안 말과 글로, 모든 남성과 모든 여성은 일상생활 안에서, 자기 일상의 구체적인 여건 안에서 거룩해져야 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따라서 부부는 가정의 의무를 완전하게 이행하며 거룩해져야 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오푸스데이가 마련하고 기혼자들도 참여하는 피정과 그 밖의 양성 수단에서는 언제나 부부가 혼인 소명의 존엄을 깨닫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 소명을 더 잘 살아가도록 준비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부부 사랑이 요구하는 것과 실제로 드러나는 모습은 여러 면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다릅니다. 각자에게 맞는 양성 수단을 통해 자신의 실제 삶에서 이를 발견하도록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 또는 며칠 동안 떨어져 있는 것이 나머지 시간 내내 더 깊이 일치하고 더 많이, 더 잘 서로 사랑하도록 해 줍니다. 존중으로도 가득 찬 사랑으로 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문제에서도 저희 방식만이 유일하게 좋은 방식이라거나 모든 사람이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주 좋은 결실을 맺고 있고, 오랜 경험 외에도 그렇게 할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반대 의견을 공격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말씀드릴 것은, 오푸스데이에서 영적 양성을 위한 특정 활동에는 이런 기준을 따르지만, 매우 다양한 다른 종류의 활동에는 부부가 부부로서 함께 참여하고 협력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오푸스데이 회원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부모들과 함께하는 활동을 들 수 있습니다. 오푸스데이가 운영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의 부모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하는 모임과 강연, 삼일 기도 등도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활동의 성격상 부부의 참여가 필요할 때에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그 활동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모임과 활동은 개인의 영적 양성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삼는 활동과는 다릅니다.
한편 부모는 마음을 젊게 유지하려고도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의 고귀한 열망은 물론, 심지어 엉뚱한 모습까지도 더 쉽게 호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삶은 변하며, 우리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예전의 것들보다 더 낫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다른 생활 방식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적지 않은 경우 조금만 거리를 두고 유머 감각을 발휘하면 넘길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그리스도교적 물질주의
육신의 부활을 믿는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유물론이라고 판단되는 위험을 가지고도 항상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것을 거부하는 관념에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영적인 것에 닫힌 유물론에 뚜렷하게 반대되는 "그리스도교적 유물론"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의 발자국이라고 일컫던 일곱 성사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삶에 이르게 하고 천국에 올라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이 길을 택하셨음을 보여 주는 가장 명백한 표징이 아니겠습니까? 하나하나의 성사가 물질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창조와 구원의 힘을 가진, 하느님의 사랑인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다가오는 성체성사가, 초라한 이 세상의 물질(빵과 포도주)을 통하여, 최근의 공의회가 상기했다시피 “인간의 손으로 가꾼 자연 요소들”(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 38항 참조)을 통하여 봉헌되어 우리 구원자의 경애하올 몸과 피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참여하는 수 없이 많은 세상의 일들을 이 진리의 빛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활동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당뿐 만이 아니라 이 모든 세상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지적으로 직업적으로 적절하게 되려 노력합니다. 그 사람은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이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개인의 식견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결정들은, 작든 크든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려고 매우 겸손되이 노력하는 개인의 성찰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book-subject/conversaciones/4736/ (2026-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