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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충실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군중에게 빵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이신 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요한 6,26).
주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은 그분의 신성을 드러내어 우리가 믿음을 갖도록 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요한 6,28-30).
믿으려는 의지와 영혼의 겸손한 기질이 부족하면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보지 못하고, 지성은 초자연적 인 감각없이 안도감 없이 평면에서 움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의 빵과 성체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들은 계속해서 땅의 빵을 생각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요한 6,34).
그리고 그가 객관적인 초자연적 내용을 회피할 가능성 없이 믿어야 할 신비를 정확한 용어로 그들에게 제안할 때, 그가 그들에게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은혜를 주는 신학 적 신앙 행위를 요구할 때, 그들은 떠납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66-69).
이제 저는 여러분과 저에게 베드로의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을 구합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한 따름입니다. (갈라 5,6)
매일 조금씩 수정하다.
항구에 도착하기 위해 공해에서 배들이 하는 것처럼, 매일 조금씩 바로잡아 가며 끊임없이, 기쁘게 나아갑니다. 성도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선의와 성실함을 가지고 내면의 삶에서, 투쟁에서, 때로는 승리하고 때로는 패배하면서, 희망이시며 믿음이시며 사랑이신 하느님을 대하려고 노력하면서 바로잡으려 노력했습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투쟁을 기뻐하시며, 이는 우리가 내면의 삶, 즉 그리스도인의 완성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확실한 신호입니다.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세요.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르 10,35-39).
영광에 이르는 길은 죽음의 해협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로마 6,3-4).
자녀 여러분, 존과 제임스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으로 가득 차십시오.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필리 1,6).
우리가 협력한다면, 하느님의 힘을 확신하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제 피신처 하느님이시건만...” (시편 43,2).
우리의 교육학은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구성되며, 상식과 초자연적 감각으로 행동하는 것, 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이 교육학의 다른 표현들 중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큰 신뢰, 타인에 대한 신뢰, 우리 자신에 대한 불신. 자신의 판단을 쉽게 믿지 마십시오.
귀금속을 시험하는 것처럼, 우리의 판단이 정금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특히 우리를 도울 직위의 은혜를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고려하여, 인간과 초자연적인 문제에서 우리의 판단이 정금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전에 한 실언을 기꺼이 바로잡아야 합니다. 바로잡는 것은 굴욕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초자연적인 교육학 안에 있는 의로움으로 가득 찬 행위입니다.
“한 사람의 초자연적 선이, 온 우주의 자연적 선보다 낫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애정과 행위에 객관적인 위계를 부여하는 믿음과 초자연적 비전을 항상 우리의 지성 안에 두도록 하느님께 구해야 합니다. 이 기준은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준을 구해야 합니다.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book-subject/cartas-1/2730/ (2025-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