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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시뇰, 지금까지 여성이 거의 전적으로 활동하던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생활에서 여성의 참여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보십니까? 또 여성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려면, 여성은 전반적으로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엇보다 방금 말씀하신 두 영역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남성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만 여성에게 고유한 여러 특성을 지니고, 집과 가정은 언제나 여성의 삶에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가정의 일에 헌신하는 것이 인간적으로나 그리스도인으로서나 중요한 역할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온갖 고귀한 직종과 직업 가운데 다른 전문적인 일에 종사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가정의 일도 하나의 직업입니다. 문제를 그런 식으로 제기할 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강조점만 달리하면서 두 영역을 끊임없이 대립시킨다면,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바로잡으려는 잘못보다 더 큰 잘못에 빠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이 자기 가족을 위한 일을 저버리는 것은 더 심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여성이 오직 가정 밖에서만 자신의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가족에게 바친 시간이 자신의 인격 발달과 성숙에서 빼앗긴 시간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형태이든 가정은 인격이 성장하기에 특히 좋은 자리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게도 가정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보살피는 일은 여성에게 언제나 가장 큰 존엄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남편과 자녀를 돌보는 일, 좀 더 넓게 말하면 자기 주변에 따뜻하고 사람을 길러 주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일을 통해 여성은 자신의 사명에서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수행하며, 따라서 그 안에서 자신의 인격적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사회생활의 다른 측면, 나아가 예를 들어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도 대립하지 않습니다. 여성은 그러한 분야에서도 한 인격체로서, 그리고 언제나 여성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값진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 그렇게 할 것입니다. 가정과 사회 모두 그러한 특별한 기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기여는 결코 부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성의 발전과 성숙, 해방이 남성과 똑같아지려는, 곧 획일화되려는 요구나 남성의 행동 방식을 모방하는 것을 뜻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여성에게 성취가 아니라 손실일 것입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낫거나 못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권리의 평등을 말할 수 있으며, 이는 민법과 교회법 모두에서 법적으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여성도 남성과 정확히 똑같이 인격체로서, 하느님의 딸로서 존엄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근본적인 평등을 바탕으로 각자는 자신에게 고유한 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차원에서 해방이란 자신이 지닌 잠재력을 온전히 발전시킬 실제적인 가능성, 곧 고유한 한 사람으로서 지닌 잠재력과 여성으로서 지닌 잠재력을 온전히 발전시킬 가능성을 뜻합니다. 법 앞에서의 평등과 법에 따른 기회의 평등은 이러한 다양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전제하고 증진합니다. 그 다양성은 모두에게 풍요로움이 됩니다.
여성은 가정과 시민 사회와 교회에 자신에게 고유하며 오직 자신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것을 전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섬세한 다정함, 지칠 줄 모르는 너그러움, 구체적인 것에 대한 애정, 예리한 지성, 직관력, 깊고 소박한 신심, 끈기 등입니다. 이처럼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기여의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성다움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명을 수행하려면 여성은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순진하게 남을 모방하려는 태도에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태도는 대체로 여성을 열등한 위치에 놓이게 하기 쉽고, 자신에게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주체성과 진실성을 지니고 제대로 양성된다면, 자신이 부름받았다고 느끼는 사명이 무엇이든 자신의 일과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것입니다. 하루를 남편과 자녀에게 바치든, 어떤 고귀한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고 다른 일에 온전히 헌신하든, 그 삶과 일은 참으로 건설적이고 풍요로우며 의미로 가득할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길에서 인간적이고 신적인 소명에 충실할 때, 여성으로서의 인격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으며 실제로 실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인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겉보기에 두드러지지 않는 삶이 지닐 수 있는 초월적 가치의 모범이실 뿐 아니라 그 증거이시기도 하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지난해 10월 팜플로나에서 나바라 대학교 후원회 총회를 맞아 집전하신 미사의 강론에서, 인간의 사랑에 관해 저희의 마음을 깊이 움직이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많은 여성 독자가 그 말씀을 듣고 받은 감동을 편지로 전해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혼인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잘 아는 일, 곧 여러 나라에서 이미 오랫동안 사제로 살아오며 경험한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푸스데이 회원 대부분은 혼인한 삶을 살며, 그들에게 인간의 사랑과 부부의 의무는 하느님께 받은 소명의 일부입니다. 오푸스데이는 혼인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며 소명이 되게 했습니다. 이는 개인의 성화와 사도직에 많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저는 거의 40년 동안 혼인의 소명적 의미를 설교해 왔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과 고귀하고 순결한 인간의 사랑을 자신의 삶에서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남녀들이, 혼인은 이 땅에서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라는 제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의 눈빛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저는 얼마나 여러 번 보았는지 모릅니다!
혼인은 혼인한 사람들이 그 안에서 거룩해지고, 그 혼인을 통해 다른 이들도 거룩하게 하도록 마련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부부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가 베푸는 특별한 은총이 있습니다. 혼인 생활로 부름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삶 안에서 거룩해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합니다. 날마다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언제나 희망과 애정을 품고 그리스도인 가정들을 생각합니다. 혼인성사에서 태어난 모든 가정을 생각합니다. 그 가정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와 사랑이라는 위대한 신적 신비, 곧 sacramentum magnum! (Eph 5, 32), 위대한 성사의 빛나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이 그리스도교적 세포들이 거룩함을 갈망하며 태어나고 자라도록 힘써야 합니다. 입문의 성사인 세례가 이미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신적인 사명을 부여하며, 각자는 자신의 길에서 그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다른 이들을 거룩하게 하면서 자신도 거룩해지도록 부름받았음을, 사도가 되도록 부름받았음을, 그리고 자신의 첫 사도직이 가정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교육하며 사회에 그리스도교의 빛을 비추는 일에 담긴 초자연적 활동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의 사명에 대한 이러한 자각에 그들의 삶의 결실과 성공, 곧 행복이 크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의 행복을 이루는 비결은 공상이 아니라 일상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집에 돌아올 때 느끼는 숨은 기쁨을 발견하는 데 있고, 자녀들과 다정하게 어울리는 데 있으며, 가족 전체가 협력하는 매일의 일에 있습니다. 씩씩하게 맞서야 하는 어려움 앞에서 밝은 마음을 지니는 데 있고, 문명이 제공하는 모든 발전을 활용하여 집을 쾌적하게 하고 삶을 더 수월하게 하며 교육을 더 효과적으로 하는 데에도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가정을 이루도록 부름받은 이들에게 늘 서로 사랑하라고, 연애하던 시절 서로에게 품었던 설레는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삶에 늘 따르는 슬픔과 역경이 시작되면 사랑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사이며 이상이고 소명인 혼인을 빈약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사랑은 더욱 굳건해집니다. 슬픔과 역경이 급류처럼 밀려와도 참된 사랑을 잠기게 할 수는 없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함께 나누는 희생은 두 사람을 더욱 하나로 묶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듯 aquae multae, 곧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수많은 어려움도 non potuerunt extinguere caritatem (Cant 8, 7), 사랑을 끌 수는 없습니다.
방금 가족의 일치가 큰 가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오푸스데이에서는 왜 남편과 아내가 함께 참여하는 영적 양성 활동을 마련하지 않습니까?
이 문제에서도 다른 많은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선호나 의견에 따라 여러 방안 가운데 선택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우리에게 하나의 방식만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 생활 안에 마치 일당 체제를 수정하고 확대한 새 판본을 들여오는 듯한 사목 방식, 더 넓게는 그런 사도직 접근 방식은 전염병처럼 피해야 합니다.
부부를 위한 피정과 다른 양성 활동을 마련하는 가톨릭 단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유를 행사하여 적절하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활동에서 자신의 그리스도인 소명을 더 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 역시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최선이라는 것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에는 부부가, 나아가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고 때로는 함께해야 하는 측면이 많습니다. 성찬의 희생 제사와 다른 예배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영적 양성을 위한 어떤 활동은 남편과 아내가 따로 참여할 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성화와 수덕적 투쟁, 하느님과의 일치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라는 특성이 그렇게 강조됩니다. 이는 나중에 다른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지만, 그 안에서 각자의 양심은 다른 누군가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할 때 각자의 개인적 요구와 필요, 나아가 각자의 심리에도 양성을 맞추기가 더 쉽습니다. 그렇다고 그 활동에서 참가자들이 혼인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푸스데이의 정신에서 그보다 더 거리가 먼 일은 없습니다.
저는 이미 40년 동안 말과 글로, 모든 남성과 모든 여성은 일상생활 안에서, 자기 일상의 구체적인 여건 안에서 거룩해져야 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따라서 부부는 가정의 의무를 완전하게 이행하며 거룩해져야 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오푸스데이가 마련하고 기혼자들도 참여하는 피정과 그 밖의 양성 수단에서는 언제나 부부가 혼인 소명의 존엄을 깨닫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 소명을 더 잘 살아가도록 준비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부부 사랑이 요구하는 것과 실제로 드러나는 모습은 여러 면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다릅니다. 각자에게 맞는 양성 수단을 통해 자신의 실제 삶에서 이를 발견하도록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 또는 며칠 동안 떨어져 있는 것이 나머지 시간 내내 더 깊이 일치하고 더 많이, 더 잘 서로 사랑하도록 해 줍니다. 존중으로도 가득 찬 사랑으로 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문제에서도 저희 방식만이 유일하게 좋은 방식이라거나 모든 사람이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주 좋은 결실을 맺고 있고, 오랜 경험 외에도 그렇게 할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반대 의견을 공격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말씀드릴 것은, 오푸스데이에서 영적 양성을 위한 특정 활동에는 이런 기준을 따르지만, 매우 다양한 다른 종류의 활동에는 부부가 부부로서 함께 참여하고 협력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오푸스데이 회원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부모들과 함께하는 활동을 들 수 있습니다. 오푸스데이가 운영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의 부모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하는 모임과 강연, 삼일 기도 등도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활동의 성격상 부부의 참여가 필요할 때에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그 활동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모임과 활동은 개인의 영적 양성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삼는 활동과는 다릅니다.
한편 부모는 마음을 젊게 유지하려고도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의 고귀한 열망은 물론, 심지어 엉뚱한 모습까지도 더 쉽게 호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삶은 변하며, 우리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예전의 것들보다 더 낫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다른 생활 방식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적지 않은 경우 조금만 거리를 두고 유머 감각을 발휘하면 넘길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인간 삶의 중요한 측면들, 특히 여성의 삶에 관한 여러 측면을 이야기하고, 오푸스데이의 정신이 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생활에서 여성의 역할을 어떻게 증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답할 때면, 평소의 제 방식과 달리 논쟁적으로 답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런 표현을 성직자 중심의 의미로 사용하여, ‘교회’라는 말을 성직자나 교계 제도에 속한 어떤 것과 같은 뜻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생활에 참여한다는 것을 오직, 또는 주로 본당 생활을 돕는 일, 거룩한 교계의 위임을 받은 단체에서 협력하는 일, 전례 거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 등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이론적으로는 선언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교회가 하느님 백성 전체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교회가 현존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이 말로 교회 조직의 생활에 여성이 할 수 있는 협력의 중요성을 작게 보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신도의 그리스도인 소명의 충만함을,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평범한 남성과 여성의 그리스도인 소명의 충만함을 옹호하는 데 제 삶을 바쳤습니다. 따라서 교회와 세상 안에서 그들의 사명이 신학적으로나 법적으로 온전히 인정받도록 힘쓰는 데 제 삶을 바쳤습니다.
다만 저는 그 협력의 범위를 부당하게 축소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또한 평범한 그리스도인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직자처럼 되지 않고, 세속적인 사람, 평범한 사람, 세상에서 살아가며 세상의 관심사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 때에만 자신의 고유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 조직 안에서 자신에게 해당하는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사랑하시며 모든 이를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으로 선포하면서, 인간의 모든 활동에 그리스도를 모셔 가는 것은 이 땅에 가득한 수백만 그리스도인 남녀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에 참여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장 중요하고 어떤 경우든 다른 모든 참여 방식의 전제가 되어야 하는 방법은, 자신의 인간적 소명이 이끌어 준 삶의 자리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를 특별히 의식하여 목표로 삼지도 않으면서, 일상생활을 소박하게 살아가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 남녀를 생각하면 제 마음은 얼마나 깊이 움직이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자기 삶의 숭고함을 깨닫게 하고, 하찮아 보이는 그 삶이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밝혀 주며, 사건과 상황을 통해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더 주의 깊게 귀 기울이도록 가르치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 일을 하도록 교회를 재촉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구속하셨음을 보여 주며, 안에서부터 온 세상을 그리스도교화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여성은 가정에서든 자신이 수행하는 다른 일에서든, 자신에게 속한 고유한 잠재력을 실현하며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그 사명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이시고 동정녀이시며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을 향하여 살아가며 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 (Lc 1, 38),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경우에 유일하고 다른 이에게 넘길 수 없는 개인적인 소명에 충실한지는 이 응답에 달려 있습니다. 그 충실함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온 세상에서 이루시는 구원 사업의 협력자가 되게 할 것입니다.
분명히 이 사실이, 눈에 보이는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일상생활이야말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진정한 장소라는 확신을 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일상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곳은 바로 여러분의 동료가 있고, 여러분의 갈망이 있고, 여러분의 일과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매일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온 인류에 봉사하면서 우리 자신을 성화해야 할 장소는 바로 이 세상의 가장 물질적인 것들 한가운데라는 이야기입니다…
일상생활에서 거룩함
이제 마쳐야겠습니다. 처음에 제가 하느님의 위대함과 자비에 대해 말씀드릴 거라고 했습니다. 일상생활을 거룩하게 살라는 말씀을 해드렸으니 이에 응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한가운데에서의 거룩한 삶, 소리를 내지 않고 소박하고 진실하게 사는 삶. 이러한 삶이야말로 오늘날 하느님의 “위대하신 권능”(집회 18,5)과 그분께서 늘 보여 주셨던 놀라운 자비의 가장 생생한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그쳐서는 안 되는 삶의 형태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시편으로 드리는 저의 기도와 찬미에 여러분도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다 함께 그분 이름을 높이 기리자.”(시편 34,4) 하느님께 사랑받는 여러분, 다시 말하자면, 믿음으로 삽시다.
조금 전 말씀 전례에서 들은 독서인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성 바오로가 말씀하셨듯이(6,11-17) 믿음의 방패를 잡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쥡시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필요한 덕입니다. 특별히 올해는 사랑하올 바오로 6세 교황 성하께서 선포하신 “신앙의 해”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일상생활에서 거룩함을 찾을 기반이 없어집니다.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믿음의 신비”(1티모 3,9)인 거룩한 성체성사에 가까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지금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것이며, 그 자비를 실행하는 우리 주님의 파스카에 참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녀 여러분, 잠시 후 이 제대 위에서 우리의 구원 사업이 갱신될 것임을 깨닫기 위해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 신경을 음미하기 위하여, 이 제대 위에서와 이 미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기 위하여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한마음 한뜻”(사도 4,32)이 되게 하여 주시고, 한 가족이 되게 하여 주십니다. 또한 우리를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곧 우리에게는 보편적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인 로마 가톨릭교회에 속하게 하여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한 일상생활이라는 증언을 온 인류에게 보여줌으로써, 이 모든 것이 그저 의식과 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현실이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 주기 위하여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모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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