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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밝은 눈빛은 어땠을까! 주님을 태중에 모신 순간부터 주님을 찬송하며 —“Magnificat anima mea Dominum!”6— 기쁨을 걷잡을 수 없으셨던 그분 어머니의 눈빛과 같았을 것이다.
어머님! 우리의 기쁨도 당신의 것처럼, 그분과 함께이고 그분을 모시는 기쁨이기를 청합니다.
내가 말하는 ‘우정의 사도직’은 자기희생적이고 진실한 ‘인격적’ 우정, 얼굴을 맞대고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그런 우정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게 호의나 도움을 베푸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때 그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생각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또한, 표면에 머물지 말고 이 복음적 교훈을 매일 더 깊이 받아들여라. 거기에서 결론을 끌어내고 —어렵지 않은 일이다— 매 순간 그대의 행동을 그 요구사항에 맞춰라.
“사람들이 너무 급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적 사랑이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가 선포되고 있지만요.”
인정한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로서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는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분께서는 당신의 교리를 모든 민족에게, 모든 시대를 통해 가르쳐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동의 사명과 운명을 완수하기 위해 그들의 인생을 통합한다. 역사에서 항상 그래왔다.
오늘날의 남녀에게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유일한 운명’이 더 낮은 가치일까?
그대가 소홀했던 작은 무리를 이제 다시 모아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려는 목자처럼 자신을 느꼈을 때, 그대는 우정의 의미를 이해한 것이다.
그대는 수동적이어서만은 안 된다. 친구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곧 그들을 ‘도와야’ 한다. 먼저 그대의 모범적 행동을 통해, 그다음에는 그대의 조언과 친밀감이 주는 영향력으로 말이다.
그대는 예기치 않게 발견한 형제애와 동료애의 정신에 열광했다. 당연하다. 그대가 그토록 강하게 꿈꿔왔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위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위해 조건 없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우리의 사랑스러운 형제인 그리스도와 형제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가 알고자 하는 모든 것을 가감 없이 가르쳐 준 참된 스승, 참된 친구를 만나는 큰 행운을 누렸다. 그대는 그들의 지식을 ‘훔치기 위해’ 속임수를 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가장 쉬운 길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길을 발견할 때까지 그들은 큰 수고와 고통을 치렀더라도 말이다…. 이제 그대가 이 사람, 저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할 차례다!
이 내용을 잘 묵상해보고 그에 따라 행동하라. 그대를 싫어하는 저 사람들은 그대가 그들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바뀔 것이다. 그대에게 달려 있다.
선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대는 선한 것처럼 보여야 한다. 가시만 돋아내는 장미 덤불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미지근한 사람들을 뜨겁게 하려면 열정의 불이 그들을 에워싸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외칠 수 있다. “내 상태를 한탄하지 말고, 그대를 그토록 슬퍼하게 하는 이 상태에서 벗어날 길을 보여주시오!”
때때로 그대는 자신이 산만하고 주의력이 없고 성격상 쌀쌀맞고 내성적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변명하려 한다. 그 이유로 그대와 함께 사는 사람조차도 잘 모른다고 덧붙이며 말이다.
정말 이런 핑계로 안심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일상의 모든 세부 사항에 초자연적 관점을 가지라고 나는 그대에게 조언했다. 그리고 즉시 “다른 사람들과의 생활이 하루 종일 많은 기회를 준다.”라고 덧붙였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사고방식을 존중한다는 의미다. 즉 하느님께 가는 그들의 길을 보고 기뻐하면서… 그들을 그대처럼 생각하게 하거나, 그대와 합류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으면 한다. 하느님께 이르는 서로 다른 길들은 평행하다. 저마다 자기 길을 따름으로써 하느님께 도달할 것이다. 비교하겠다고 또는 누가 더 위에 있는지 알고 싶다고 곁길로 들어서지 말라.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저 사람은 결점투성이라고요!” 좋다…. 하지만 오직 천국에 완전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 외에도, 그대 또한 흠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대를 참아줄 뿐 아니라 아끼기까지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결점투성이던 제자들에게 주신 사랑으로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대도 배워라!
그대는 그가 이해심이 없다고 불평한다…. 그런데 나는 그가 그대를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대신 그대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 언제 조금이라도 노력할 생각인가?
좋다, 인정한다. 그 사람은 나쁘게 행동했다. 그의 행실은 비난받을 만하고 합당하지 않다. 그는 격이 떨어진다.
“인간적으로 그는 모든 경멸을 받아 마땅합니다!”라고 그대는 덧붙였다.
알겠다, 그대를 이해한다. 그러나 그대의 마지막 결론에 공감할 수 없다. 그 비열한 삶도 신성하다. 그리스도가 그 삶을 구속하기 위해 죽었다! 그분이 경멸하지 않은 그 삶을 감히 그대가 경멸하겠는가?
만일 그대의 우정이 친구의 악행에 공범이 될 수준으로 떨어진다면, 일말의 가치도 없는 한심한 패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이미 그 자체로 비좁고 불확실한 삶이 때때로 어려워질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를 더 초자연적으로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이웃들에게 더 인간적일 것이고 더 큰 이해심을 보일 것이다.
관용은 권위에 비례한다. 한낱 재판관은 설사 경감 사유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유죄를 인정하고 판결을 받은 범인에게 선고를 내려야 한다. 나라의 최고 권력은 가끔 용서나 사면을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영혼을 언제나 용서하신다.
“나는 여러분을 통해 내 어리석은 짓들과 잘못을 잊으시고 아버지의 애정으로 나를 받아 주시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20세기의 한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통회하며 쓴 글이다.
그대는 몇몇 하찮지만 뿌리 박혔던 사소한 개인 걱정거리와 환상을 힘들게 제쳤다. 그 대가로, 이제 그대의 환상과 노고의 대상이 형제자매들, 오직 그들뿐이라는 것을 그대는 확신한다. 이웃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100배!” 그대가 며칠 전에 주님의 이 약속을 얼마나 기억했는지!
장담하건대, 그대는 사도직의 동료들 사이에서 실천되는 형제애에서 그 100배를 발견할 것이다.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book-subject/surco/2599/ (2026-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