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안에서 성덕을 추구하도록 돕는 오푸스데이
오푸스데이는 현대 평신도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이 과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이러한 자각은 교회를 모든 신자로 이루어진 공동체로 더 깊이 바라보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같은 사명에 함께 책임을 지며, 각자 자신의 형편에 따라 이를 수행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성령의 이끄심에 힘입어 자신들이 교회이며, 하느님께서 바라신 고유하고 숭고하며 필요한 사명을 지녔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의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사명은 반드시 교계의 위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바로 그 신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교계와 일치하고 교도권의 가르침에 따라 그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가톨릭 신자에게 주교단과 그 으뜸이신 로마 교황과의 일치 없이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평신도들이 교회의 성덕과 사도직에 기여하는 고유한 방식은 현세의 구조 안에서 자유롭고 책임 있게 행동하며 그 안에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누룩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적 삶의 증언, 하느님의 이름으로 빛을 비추는 말, 공동 문제의 해결에 기여하며 다른 이들을 섬기는 책임 있는 행동은 모두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께 받은 사명을 수행하는 현존의 표현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바로 오푸스데이가 설립된 날부터, 저는 요한 성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해 왔으며 다른 이들도 묵상하도록 이끌어 왔습니다. Et ego, si exaltatus fuero a terra, omnia traham ad meipsum (Ioan 12, 32).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당신께 이끄십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한가운데에서 일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모든 인간 활동의 정점에 그리스도를 모셔야 합니다.
평신도들의 이런 자각과 더불어 목자들의 감수성에도 비슷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목자들은 평신도 성소의 고유성을 깨닫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게 베푸시는 성덕과 사도직의 은사를 발견하도록 이끄는 사목을 통해, 이 성소를 북돋우고 도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사목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제 생각에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영들을 식별하는 초자연적 은사와 하느님의 일에 대한 감수성, 자신의 취향을 강요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영혼들 안에서 일으키시는 것을 섬기는 겸손이 요구됩니다. 한마디로 하느님 자녀들의 정당한 자유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은 서로 매우 다르지만 모두 똑같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걸으며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담긴 이런 하느님의 요구를 인정하지 않고, 그릇된 효율성의 논리에 이끌려 그리스도인들에게 획일성을 강요하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의 뿌리에는 정당할 뿐 아니라 칭찬받을 만한 바람이 있습니다. 곧 교회가 현대 세계의 마음을 움직이는 증언을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길이 잘못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교계를 현세적 문제에 끌어들여 과거 수 세기의 성직주의와 형태만 다를 뿐 똑같이 해로운 성직주의에 빠지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신도들, 곧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떼어 내어 그 세상 밖에서 만들어진 결정이나 생각의 대변인으로 만들까 크게 염려합니다.
저는 우리 사제들에게 유행의 중심에 서지 않는 법을 배우고, 참으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 되는 겸손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세례자의 외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illum oportet crescere, me autem minui (Ioan 3, 30). 곧 그리스도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저는 작아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평범한 그리스도인들, 곧 평신도들이 사회의 모든 환경 안에 그리스도를 현존하게 해야 합니다. 교리를 가르치고, 복음이 개인과 사회에 요구하는 바를 깊이 이해하도록 도우며,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도록 이끄는 사명은 언제나 사제의 근본적인 과제 가운데 하나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제 활동은 양심의 정당한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마다 하느님께 자유롭게 응답해야 합니다. 더욱이 모든 가톨릭 신자는 사제의 이런 도움과 더불어 하느님께 직접 받는 빛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은 고유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신분의 은총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려면 성직자가 언제나 말하거나 앞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과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하느님 성소의 존엄성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푸스데이 회원들은 집단으로 행동하지 않고, 각자의 자유와 책임에 따라 개인으로서 활동합니다. 따라서 오푸스데이는 폐쇄적인 조직도 아니며, 어떤 식으로든 회원들을 모아 다른 사람들에게서 고립시키는 조직도 아닙니다. 오푸스데이가 지도하는 유일한 활동인 단체 차원의 활동1은 사회적·문화적·종교적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회원들 역시 바로 세상 안에서 성화되어야 하므로, 일과 시민 생활 참여를 통해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과 늘 협력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푸스데이가 지금까지 해 왔고 현재 수행하고 있는 과제는 무엇입니까? 회원들은 이 분야에서 활동하는 다른 단체들과 어떤 협력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오푸스데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해 온 일에 역사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제 몫이 아닙니다. 다만 오푸스데이가 추구하는 목적은 세상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신분이나 처지와 관계없이 성덕을 찾고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푸스데이는 가정과 우정, 직업 활동과 고귀한 포부를 지니고 시민 사회의 조직 안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이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다시 말해 그 삶 자체가 성덕과 사도직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정직한 모든 인간 활동 안에 현존하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평범하고 하찮게 보일 수도 있는 보통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룩한 삶이자 다른 이들을 거룩하게 하는 삶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따르고, 교회에 봉사하며, 다른 이들이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깨닫도록 돕기 위해 세상을 버리거나 세상에서 떨어져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의 활동에 종사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은 하느님의 섭리가 바라시는 자리와 환경에서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은 현세의 구조 안에 머물며 세상을 그 안에서부터 성화하는 사명을 하느님께 받습니다. 따라서 오푸스데이는 그들이 이 하느님의 사명을 발견하도록 돕는 데 헌신합니다. 인간적 소명, 곧 직업적·가정적·사회적 소명이 초자연적 성소에 어긋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성소를 이루는 본질적인 일부임을 보여 줍니다.
오푸스데이의 유일하고 전적인 사명은 어떤 환경과 직업에서든 세상 안에서 살아가며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메시지, 곧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 성덕의 이상을 이해하는 이들에게 오푸스데이는 자신의 삶에서 이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영적 수단과 교리·수덕·사도직 양성을 제공합니다.
교황과 주교단이라는 정규 교계와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뿐 아니라, 같은 신앙을 지닌 다른 형제들과의 일치를 느끼는 것도 그리스도교 정신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오늘날 교회가 겪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다른 나라나 다른 사회 계층의 가톨릭 신자들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른다는 데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깊이 살아 냈던 형제애를 오늘 새롭게 실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각자의 다양한 성소를 사랑하면서 서로 일치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일부 작은 집단이 가톨릭의 이름으로 같은 신앙의 형제들을 향해 퍼뜨리는 부당하고 모욕적인 판단도 적지 않게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형제들은 자기 나라의 특수한 사정에서 볼 때 실제로 올바르고 희생적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하느님께 받은 부르심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여, 하느님께 받은 은사가 지닌 것을 교회에 빠짐없이 기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평범한 그리스도인인 오푸스데이 회원들의 고유한 일은 매우 다양한 인간 활동에 참여하면서 세상을 그 안에서부터 성화하는 것입니다. 회원이 된다고 해서 세상 안에서의 위치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므로, 공동 종교 예식이나 본당 생활 등에도 각각의 상황에 맞게 협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들은 좋은 가톨릭 신자가 되고자 하는 평범한 시민입니다.
그러나 회원들은 일반적으로 교회 명의의 활동을 맡아 일하지는 않습니다. 교계가 명시적으로 요청하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일부 회원이 교회의 활동에 협력합니다. 이러한 태도에는 자신들을 돋보이게 하려는 바람도 없고, 교회 명의의 활동을 존중하지 않는 마음은 더더욱 없습니다. 오직 오푸스데이 성소에 고유한 일에 힘쓰겠다는 결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활동에 최선의 노력을 바치며 수행하는 수도자와 성직자, 열의 가득한 평신도들은 이미 많이 있습니다.
회원들 고유의 일, 곧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셨다고 여기는 과제는 따로 있습니다. 성덕에 이르는 보편적 부르심 안에서 오푸스데이 회원은 세상 한가운데에서 자유롭고 책임 있게 성덕을 찾고 사도직을 수행하라는 특별한 부르심도 받습니다. 이를 위해 고유한 정신에 따라 살아가고 평생 특별한 양성을 받기로 약속합니다. 만일 교회의 활동에 종사하려고 세상 안에서의 일을 소홀히 한다면, 받은 하느님의 선물을 헛되게 만들 것입니다. 당장의 사목적 효율성에 대한 환상 때문에 교회에 실제 손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시민 사회의 모든 직업과 생업, 세속 노동이라는 드넓은 분야에서 자신을 성화하는 데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계속해서 직업적 역량과 종교적 양성을 쌓아야 하는 절실한 필요, 개인적으로 신심 생활과 기도에 바치는 시간, 자신의 신분에 따르는 의무를 희생적으로 수행하는 일은 삶 전체를 채웁니다. 남는 시간이 없습니다.
미혼자와 기혼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회 계층의 남녀가 오푸스데이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푸스데이 성소를 특징짓는 공통 요소는 무엇입니까? 회원 각자는 오푸스데이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약속을 합니까?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 한가운데에서, 거리 한복판에서 성덕을 찾는 것입니다. 오푸스데이라는 고유한 성소를 하느님께 받은 사람은 자신의 신분 안에서, 육체노동이든 지적 노동이든 자기 일을 수행하며 성덕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알고 그렇게 살아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단순히 이론적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날마다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될 개인의 잘못과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성덕에 이르고자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율법의 완성이며 완덕의 끈인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데 실제로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의 고요함 속에서, 또 세상의 소음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우리의 삶과 교차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애덕, 곧 사랑을 실천하면, 하나의 일치를 이루며 남김없이 열거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인간적 덕과 초자연적 덕을 실천하게 됩니다. 사랑은 정의와 연대, 가정과 사회에 대한 책임, 가난과 기쁨, 정결과 우정 등을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런 덕을 실천하는 것이 사도직으로 이끈다는 것은 곧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이미 사도직입니다. 일상 업무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면,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좋은 모범과 증언이 되고 구체적이며 효과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범에 말씀을 결합하시며 coepit facere et docere (Act 1, 1), 곧 행하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40년 전부터 이 활동을 우정과 신뢰의 사도직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모든 오푸스데이 회원은 성덕과 사도직에 대한 똑같은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푸스데이에는 회원들의 등급이나 서열이 없습니다. 있는 것은 다양한 개인적 상황, 곧 각자가 세상에서 처한 상황입니다. 동일하고 유일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유한 성소가 그 상황에 맞게 실현됩니다. 이는 우리 각자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개인적으로, 자유롭고 책임 있게 자신을 바치고 힘쓰라는 부르심입니다.
보시다시피 오푸스데이라는 사목적 현상은 아래로부터, 곧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일하는 그리스도인의 평범한 삶에서 생겨납니다. 수도원 생활이나 수도 생활의 세속화, 곧 탈성화의 흐름에 속하지 않습니다. 수도자들이 세상에 다가가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도 아닙니다.
오푸스데이 성소를 받는 사람은 주변의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사회적 관계와 직업, 걱정과 슬픔과 기쁨 안에서 새로운 빛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일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습니다. 세상이나 현대 사회에 ‘적응한다’고는 도무지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것인 현실에는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받은 성소는 갈릴래아에서 예수 그리스도 곁에 앉아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Mt 5, 48) 하시는 말씀을 듣던 어부와 농민, 상인과 군인들의 영혼 안에 일어났던 성소와 똑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푸스데이 회원이 추구하는 이 완덕은 그저 그리스도인 고유의 완덕입니다. 곧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름받았으며 신앙의 요구를 온전히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그 완덕입니다. 수도자와 그에 준하는 일부 기관에 고유한 것으로 여겨지는 ‘복음적 완덕’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법적으로 수도 신분을 가리키는 이른바 ‘복음적 완덕의 생활’은 더더욱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수도 성소의 길이 복된 길이며 교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오푸스데이의 정신을 지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저의 길도, 오푸스데이 회원들의 길도 아닙니다. 회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는 신분을 바꾸지 않는다는 명시적인 조건 아래 오푸스데이에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유한 특징은 세상 안에서 자신의 신분을 성화하고, 각 회원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을 성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푸스데이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각 회원이 하는 약속입니다.
오푸스데이는 어떻게 조직되어 있습니까?
방금 말씀드렸듯이 오푸스데이 성소가 남자든 여자든 일하는 가운데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찾아온다면, 오푸스데이가 위원회나 총회, 집회 등을 기반으로 세워지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어떤 이가 놀라는 가운데, 이런 의미에서 오푸스데이는 ‘조직되지 않은 조직’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대다수 회원, 거의 모든 회원은 오푸스데이 회원이 아니었더라도 살았을 곳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갑니다. 자신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자기 일을 하는 곳에서 살아갑니다.
각 회원은 자신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오푸스데이의 목적을 수행합니다. 자기 삶을 날마다 평범하게, 원하신다면 작다고 할 수도 있지만 꾸준하고 하느님의 힘으로 결실을 맺는 사도직으로 바꾸면서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러한 성덕과 사도직의 삶을 북돋우기 위해 각자는 오푸스데이로부터 필요한 영적 도움과 조언, 지도를 받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영적인 일에만 해당합니다. 직업이나 사회적 관계 등 다른 모든 일에서는 각자가 원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그 영역이 중립적인 곳이 아니라 성화할 수 있고 자신을 성화하는 대상이며 사도직의 수단임을 알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모두 자기 삶을 살며 그에 따르는 관계와 의무를 수행하고, 영적 도움을 받기 위해 오푸스데이에 옵니다. 여기에는 어느 정도 구조가 필요하지만 언제나 매우 작은 규모입니다. 꼭 필요한 수준으로 유지되도록 적절한 수단을 마련합니다. 평생 계속되는 종교 교리 양성을 조직하여, 적극적이고 진실하며 참된 신심과 뜨거운 열정으로 이끕니다. 이 열정에는 반드시 관상가의 끊임없는 기도와 개인적이며 책임 있는 사도직 활동이 따르며, 어떤 종류의 광신도 없습니다.
또한 모든 회원은 양심의 문제를 의논할 수 있는 오푸스데이 사제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전체에 비하면 극히 적은 일부 회원들은 사도직 활동을 지도하거나 다른 이들의 영적 돌봄을 위해 함께 살면서 평범한 그리스도인 가정을 이루며, 동시에 각자의 직업 활동을 계속합니다.
각 나라에는 지도신부가 주재하고 언제나 합의제로 운영되는 지구 통치 기구가 있습니다. 또 로마에 본부를 두고 매우 다양한 국적의 전문직 종사자들로 구성된 중앙 통치 기구가 있습니다. 오푸스데이는 남자 부문과 여자 부문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두 부문은 완전히 독립적이어서 서로 다른 두 단체를 이룬다고 할 수 있으며, 오직 총장의 인격 안에서만 결합됩니다2.
‘조직되지 않은 조직’이라는 말의 뜻이 분명해졌기를 바랍니다. 조직보다 정신이 우선하며, 회원들의 삶을 지시나 계획, 모임으로 옭아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각자는 자유롭게 살아가면서 공통의 정신과 성덕 및 사도직에 대한 공통의 열망으로 다른 이들과 결합되고, 자신의 평범한 삶을 성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오푸스데이 회원들이 인간 활동의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보면서, 있지도 않은 영향력이나 통제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매우 빈약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오푸스데이는 어떤 현세적 활동도 지배하지 않으며 지배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이 바로 자신의 현세적 활동을 기회로 삼아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기를 바라신다는 메시지입니다. 따라서 평범한 그리스도인인 회원들은 각자 적절하다고 여기는 곳에서 적절하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일합니다. 오푸스데이는 그들이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행동하도록 영적으로 돕는 일만 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오푸스데이가 선한 목적에서라 하더라도 정치·경제·문화의 가장 중요한 영역에 침투하여 내부에서 이를 통제하려는 지식 귀족들의 조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입니까?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거나 그리스도교 신앙을 충실히 살아 내며 인류를 진지하게 섬기려고 노력한 거의 모든 기관은 특히 초기에 몰이해를 겪었습니다. 오푸스데이가 실천하고 선포하던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가르침을 처음에 일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조직적이고 끈질긴 중상모략도 있었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우리가 비밀리에 활동한다거나, 어쩌면 그들 자신이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약 30년 전 이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스페인의 한 수도자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자기 수도회와 교회를 떠나 민법상 혼인을 했고, 지금은 개신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중상모략은 일단 퍼지면 한동안 관성으로 살아남습니다. 사실을 알아보지 않고 글을 쓰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며, 누구나 스스로 오류가 없다고 여기지 않고 진실을 확인하면 바로잡을 줄 아는 훌륭한 언론인들처럼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중상모략은 얼핏 보기에도 믿기 어려울 뿐 아니라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현실에 의해 반박되었는데도 말입니다. 말씀하신 소문들이 스페인에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더욱이 오푸스데이 같은 국제적인 기관이 한 나라의 문제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야가 좁고 지방적인 사고방식임을 드러냅니다.
한편 스페인에서나 다른 모든 나라에서나 회원 대다수는 가정주부, 노동자, 소상인, 사무직 종사자, 농민 등입니다. 곧 정치적·사회적으로 특별한 영향력을 지니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노동자가 회원이라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으면서 정치인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는 주목합니다. 실제로 제게는 역의 짐꾼 한 사람의 오푸스데이 성소도 기업 경영자의 성소만큼 중요합니다. 성소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하느님의 일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대중영합적인 차별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단순한 일도 때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질문에 조금 길게 답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이야기한 소문들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고 싶습니다. 그 중상모략은 오래전에 완전히 신빙성을 잃었으며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언제나 공개적으로 행동해 왔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 사도직의 성격과 목적을 분명히 설명했고, 원한다면 누구나 실상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가톨릭 신자와 비가톨릭 신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할 것 없이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활동을 사랑과 존중으로 바라보며 협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스페인의 경우를 이야기해 봅시다. 이 나라에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거나 공적 생활에 참여하는 소수의 회원들은 다른 모든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양심에 따라, 개인의 자유와 책임 아래 행동합니다. 이 때문에 실제로 서로 다르며 흔히 상반되기까지 하는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면, 오푸스데이에 속한 사람들이 스페인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어떤 특별한 현상처럼 말하는 것은 현실을 왜곡하여 중상모략으로 이어집니다. 스페인의 공적 생활에서 활동하는 회원들은 이 분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전체 가톨릭 신자에 비하면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인구의 거의 전부가 가톨릭 신자이므로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이 가톨릭 신자인 것은 통계상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더욱이 장관에서 시장에 이르기까지 스페인 공공 행정의 모든 층위에는 매우 다양한 신자 단체 출신의 가톨릭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톨릭 액션의 여러 부문, 현재 에레라 추기경이 초대 회장을 지낸 전국 가톨릭 홍보인 협회, 성모 신심회 등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기회에 오푸스데이는 어느 나라나 체제, 정치적 성향이나 이념과도 결부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선언합니다. 회원들은 언제나 현세적 문제에서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이며 행동합니다. 또한 정치적 입장이나 당파적 이익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려는 모든 시도를 몹시 싫어합니다.
또한 교회 역사가 진전하면서, 평신도에 관한 모든 것을 왜곡하고 그들에게 숨은 의도를 부여하려는 특정한 성직주의를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오푸스데이가 실천하고 선포하던 것이 다름 아닌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성소이며, 구체적인 초자연적 헌신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더 쉬워졌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들이 사회 각계에 침투한다’는 말이 더 이상 쓰이지 않고, 모두가 그것이 성직주의적인 표현임을 깨닫는 때가 오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말은 오푸스데이의 사도직에는 전혀 해당하지 않습니다. 회원들은 현세의 구조에 침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똑같은 평범한 시민이므로 이미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공장이나 병원, 의회에서 일하는 사람을 오푸스데이로 부르신다면, 이는 그 사람이 이제부터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신의 직업을 성화하기 위한 수단을 마련하기로 결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받은 고유한 성소에 따라 복음의 메시지가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바를 자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자각이 평범한 삶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contemptus mundi, 곧 세상의 것들을 멀리하고 가볍게 여기는 수도 성소를 하느님께 받은 이들에게만 정당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을 떠나는 일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나 정점으로 삼으려는 것은 분명히 엄청난 잘못입니다.
따라서 회원들을 특정 환경에 들여보내는 것은 오푸스데이가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들은 이미 그곳에 있었고 떠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은총과 앞서 말씀드린 우정과 신뢰의 사도직에서 생겨나는 오푸스데이 성소는 모든 환경에서 나타납니다.
어쩌면 오푸스데이의 본질과 활동 방식이 이처럼 단순하다는 것 자체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하여 참되고 올바른 것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사람들에게는 어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오푸스데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당신 제자들에게 이런 어려움을 예고하시며 non est discipulus super Magistrum (Mt 10, 24), 곧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게 보아 주기를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또 하느님의 자녀로서 모든 사람에게 존중받을 권리는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생각을 전체주의적으로 강요하려는 광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푸스데이 회원들이 언제나 개인적 책임을 지면서, 먼저 다른 사람의 개인적 자유를, 그다음 자신의 개인적 자유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일화가 생각납니다. 이름을 밝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므로 어느 도시라고만 하겠습니다. 그 시의회는 오푸스데이 회원들이 지도하는 한 교육 활동에 재정 지원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그 활동은 오푸스데이가 수행하는 모든 단체 사도직 활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공익에 분명히 기여하고 있었습니다. 시의원 대다수는 지원에 찬성했습니다. 사회주의자인 한 의원은 찬성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그 시설의 활동을 직접 알아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활동의 특징은 운영자들이 개인의 자유를 매우 사랑한다는 점입니다. 그 기숙사에는 온갖 종교와 이념을 지닌 학생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시의원들은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자신의 반대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 사회주의 의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반대한 것은 사정이 그렇다면 그 기숙사가 가톨릭 신앙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거나 교회에 반대하려는 사람은 사도직 활동을 좋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저는 인간으로서 그를 존중하고 진리로 이끌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점이 분명해졌으니 여쭙고 싶습니다. 회원들이 받는 영적 양성에는 어떤 특징이 있어서, 오푸스데이에 속한다는 사실에서 어떠한 현세적 이해관계도 배제될 수 있습니까?
순전히 영적인 것이 아닌 모든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배제됩니다. 오푸스데이는 이탈과 희생, 자기 포기, 영혼을 섬기기 위한 쉼 없는 노동 등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세적 이익의 차원에서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영적 삶의 차원에서는 많은 것을 줍니다. 수덕적 투쟁에서 싸우고 승리할 수단을 주고, 기도의 길로 이끌며, 예수님을 형제처럼 대하고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을 뵙는 법을 가르칩니다. 또한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이며, 따라서 그분의 가르침을 전할 책임이 있음을 자각하도록 가르칩니다.
내적 생활의 길에서 나아가 온전히 자신을 내어 주고 자신의 삶을 주님을 섬기는 데 바치는 것이 가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푸스데이에서 항구할 수 없습니다. 성덕은 이름표가 아니라 깊은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푸스데이에는 정치적·경제적·이념적 목적을 위한 활동이 없으며, 어떤 현세적 활동도 없습니다. 오직 회원들의 초자연적 양성과 사도직 활동만이 있습니다. 곧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끊임없이 영적으로 돌보는 일과, 돌봄·자선·교육 등의 단체 사도직 활동입니다.
오푸스데이 회원들은 오직 분명하게 정해진 성덕의 길을 따르고 특정한 사도직 활동에 협력하기 위해 결합되어 있습니다. 서로 간의 약속은 모든 현세적 이해관계를 배제합니다. 이 영역에서 모든 회원은 자유롭고, 따라서 각자 서로 다르며 때로는 상반되기도 하는 목적과 관심사를 가지고 자기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오푸스데이의 목적은 오직 하느님을 향하므로, 그 정신은 자유의 정신, 모든 사람의 개인적 자유를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그 사랑은 단순한 이론적 선언이 아니라 진실한 것이므로, 우리는 자유의 필연적 결과인 다원성을 사랑합니다. 오푸스데이에서는 다원성을 단순히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고 사랑하며, 결코 가로막지 않습니다. 정치·경제·사회·예술 등의 문제에서 회원들 가운데 수많은 다양한 생각과 서로 다른 태도가 있는 것을 보면 저는 기쁩니다. 모든 일이 하느님 앞에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광신과 불관용이 지배하지 않고, 무엇보다 신앙으로 살아가며, 우리 인간이 단순한 호감이나 이해관계가 아니라 동일한 성령의 활동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안다면 영적 일치와 현세적 다양성은 양립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제로 삼으시어 하느님 아버지께로 이끄십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일치, 교도권과 교회 전통에 대한 충실함, 그리스도의 구원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는 관심이, 흔히 말하듯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로운 논의에 맡겨 두신 문제들에 대한 다양한 태도와 상충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그 다양성이 하느님 계획의 일부이며, 당신 뜻대로 선물과 빛을 나누어 주시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임을 충분히 의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며, 따라서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의견을 존중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과 온전한 형제애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회원들은 바로 이 정신에 따라 양성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회원이라는 사실을 이용하여 개인적 이익을 얻거나 다른 이들에게 정치적·문화적 선택을 강요하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회원들이 이를 용인하지 않고 태도를 바꾸거나 오푸스데이를 떠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푸스데이에서 누구도 조금의 일탈조차 결코 허용할 수 없는 점입니다. 자신의 개인적 자유뿐 아니라 자신이 헌신한 활동의 초자연적 본질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 하느님의 일인 오푸스데이의 초자연적 목적을 가장 잘 보장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이미 수천 명에 이르지만, 지금까지 오푸스데이가 초기 회원들의 열의에 힘입어 발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기관에 본래 따르는 위험, 곧 처음의 열정과 추진력이 식을 가능성에 대비하여 오푸스데이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조치가 있습니까?
오푸스데이는 열의가 아니라 신앙에 기초합니다. 초창기의 오랜 세월은 몹시 어려웠으며, 눈에 보이는 것은 어려움뿐이었습니다. 오푸스데이는 인간적 수단 없이 하느님의 은총과 초기 회원들의 기도와 희생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있는 것은 젊음과 명랑함,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는 바람뿐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오푸스데이의 무기는 언제나 기도와 헌신하는 삶, 영혼을 섬기기 위해 모든 이기심을 조용히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푸스데이에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때문에 그분의 피조물들을 사랑하며 직업 활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바로 모든 것을 내어 주도록 이끄는 정신을 받으러 옵니다.
열정이 식지 않도록 하는 보장은 제 자녀들이 이 정신을 결코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일은 시간이 지나면 쇠퇴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은 인간이 이를 격하시키지 않는 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추진력을 잃을 때에만 부패와 쇠퇴가 찾아옵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주님의 섭리가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토록 다양한 나라에서 다른 이들과 똑같은 평범한 시민들이 이 고유한 하느님의 성소를 불과 40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받아들이고 실천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오푸스데이의 목적은 각 회원의 성화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자신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머무는 남녀입니다. 온갖 어려움에도, 곧 자신의 비참함과 개인적인 잘못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기 위해 오푸스데이에 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곧 떠날 것입니다. 저는 성덕이 성덕을 부른다고 생각하며, 오푸스데이 안에 이 깊은 확신과 신앙의 삶이 결코 부족하지 않도록 하느님께 청합니다. 보시다시피 우리는 인간적·법적 보장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영감을 주신 일은 은총의 리듬에 따라 움직입니다. 제 처방은 오직 이것입니다. 성인이 되는 것, 각자 자신의 성덕으로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푸스데이처럼 뚜렷한 평신도적 성격을 지닌 기관에 왜 사제들이 있습니까? 모든 회원이 사제가 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책임자들이 선발한 사람들만 사제가 될 수 있습니까?
미혼자이든 기혼자이든 사별한 사람이든, 평신도이든 성직자이든, 자신의 신분 안에서 자신을 성화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오푸스데이 성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구 사제들도 오푸스데이에 결합되며, 이전과 똑같이 교구 사제로 남습니다. 오푸스데이는 그들이 자신의 일상 업무를 성화함으로써 자신의 신분에 고유한 그리스도교적 완덕에 이르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그 일상 업무란 바로 자신의 주교와 교구, 온 교회를 섬기는 사제 직무입니다. 그들의 경우에도 오푸스데이와 맺는 유대는 신분을 조금도 바꾸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직권자가 맡기는 사명과 수행해야 할 다른 사도직 및 활동에 계속 온전히 헌신하며, 오푸스데이는 그 일에 결코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제에게 고유한 덕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실천하면서 자신을 성화합니다.
성품을 받은 뒤 오푸스데이에 들어오는 이 사제들 외에도, 오푸스데이에는 회원이 된 뒤 성품성사를 받는 다른 재속 사제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평신도, 곧 평범한 그리스도인일 때 오푸스데이에 결합되었습니다. 전체 회원에 비해 매우 적은 수로 2퍼센트에도 못 미칩니다. 이들은 경우에 따라 이전의 세속 직업 활동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사제 직무를 통해 오푸스데이의 사도직 목적에 봉사합니다. 실제로 이들은 의사, 기술자, 기계공, 농민, 교사, 기자 등으로 전문적 역량을 쌓고 오랫동안 자기 일을 한 뒤 사제직에 부름받은 전문직 종사자나 노동자들입니다. 또한 서두르지 않고 최대한 깊이 있게 관련 교회 학문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세속 직업 환경의 고유한 사고방식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성품을 받으면 의사이자 사제, 법률가이자 사제, 노동자이자 사제 등이 됩니다.
그들의 존재는 오푸스데이의 사도직에 필요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 사도직은 기본적으로 평신도들이 수행합니다. 각 회원은 자기 일터에서 사도가 되어 모범과 말, 곧 대화를 통해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가까이 이끌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도직을 하며 영혼들을 그리스도교 생활의 길로 이끌다 보면 성사라는 경계에 이릅니다. 평신도의 성화 직무에는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성찬례를 거행하며 교회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제의 성화 직무가 필요합니다. 또한 오푸스데이의 사도직은 고유한 영성을 전제로 하므로 사제 역시 그 고유한 정신을 살아 있는 모습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이 사제들은 다른 회원들을 섬기는 일 외에도 많은 영혼에게 봉사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그들의 삶 전체에 깃든 사제적 열의는 누구든 자기 곁을 지나가면서 그리스도의 빛을 조금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작은 파벌이나 차별을 모르는 오푸스데이의 정신은 다른 재속 사제 형제들과 깊고 실질적으로 일치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그들을 이끕니다. 그들은 자신이 일하는 모든 교구에서 스스로 교구 사제라고 느끼며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교구들을 열심히, 효과적으로 섬기려고 노력합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이므로 한 가지 짚고 싶습니다. 사제품을 받는 이 평신도 회원들은 자신의 성소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책임자들의 초대에 자유롭게 응답하여 사제직을 받아들일 때, 그렇게 하면 하느님과 더 깊이 결합되거나 성덕을 더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평신도 성소 자체가 충만하고 완전하며, 오푸스데이 안에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처음부터 그리스도교적 완덕에 이르는 분명한 길이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제품은 결코 오푸스데이 성소의 어떤 완성이나 영광의 정점이 아닙니다. 일부 회원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도록 주어지는 부르심입니다. 또한 오푸스데이에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두 등급의 회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동등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여기고, 자기 신분 안에서 성화한다는 같은 정신을 실천합니다3.
몬시뇰께서는 일에 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오푸스데이의 영성에서 일이 차지하는 자리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오푸스데이 성소는 이를 받는 사람의 처지나 생활 신분을 어떤 방식으로도 바꾸거나 변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조건이 노동이므로, 오푸스데이 정신에 따른 성덕과 사도직이라는 초자연적 성소는 일하라는 인간적 소명을 확고히 해 줍니다. 회원 대다수는 평신도, 곧 평범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직업이나 생업, 흔히 온 힘을 쏟아야 하는 일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으로 생계를 꾸리고 가족을 부양하며 공동선에 기여하고 자신의 인격을 계발합니다.
오푸스데이 성소는 이 모든 것을 확고히 해 줍니다. 그래서 이 성소의 본질적인 표지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세상 안에서 살면서 인간적으로나 초자연적으로나 가능한 한 완전하게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각자의 불완전함을 안고서 말입니다. 곧 지상 사회의 건설에 효과적으로 기여하여 역량과 봉사 정신을 가지고 수행되는 일이며,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데 기여하여 자신을 성화하고 그 자체가 성화되는 일입니다.
오푸스데이 정신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온전히 살아 내고 사도직을 실천하려는 이들은 직업 활동으로 자신을 성화하고, 그 직업 활동을 성화하며, 직업 활동을 통해 다른 이들을 성화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함께 일하는 다른 시민들과 다르지 않은 동등한 사람으로서, 나자렛 작업장에서 30년 동안 일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분과 일치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일상의 일은 자신을 성화해야 하는 환경일 뿐 아니라 성덕의 바로 그 재료이기도 합니다. 하루의 여러 사건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기도 생활을 위한 자극을 얻습니다. 직업 활동 자체가 친척과 친구, 동료 같은 다른 사람들, 또 자신의 사회나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제들과 접하게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에게 본질적인 타인을 섬기는 헌신을 실천할 기회를 줍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참되고 진실하게 증언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모두가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세상 안에서의 평범한 삶과 날마다 하는 일이 하느님과의 만남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성덕과 사도직은 회원들의 삶과 하나를 이룹니다. 그래서 일이 그들의 영적 삶을 지탱하는 중심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헌신은 그들이 오푸스데이에 오기 전부터 하던 일,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하는 일에 접붙여집니다.
사목 활동 초기에 제가 이런 내용을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 어떤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또 어떤 이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관해서는 언제나 부정적으로 말하는 데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이 언제나 완전하므로 세상은 선하며, 죄로 세상을 나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인간이라는 사실을 제가 이해하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다른 이들도 이를 이해하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때 저는 우리가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고 지금도 그렇게 말합니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이며, 세상의 사건과 일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고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에는 악과 선이 뒤섞여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식별할 줄 아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식별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의 선함을 부정하게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것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것, 심지어 우리 자신의 나약함 뒤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것을 알아보게 해야 합니다. 사도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좋은 표어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 Cor 3, 22-23) 그렇게 하여 세상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푸스데이가 지난 40년 동안 어떻게 확장되어 왔는지 자료를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사도직 활동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먼저, 설립한 지 불과 40년 만에 오푸스데이가 전 세계로 퍼지는 것을 보게 해 주신 주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1928년 스페인에서 태어났을 때 이미 로마적이었습니다. 제게 그것은 가톨릭적이고 보편적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그 첫 움직임은 모든 나라로 뻗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면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는 많은 사건이 떠오릅니다. 삶의 소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려움과 고통에 뒤섞여, 그것들은 하느님 은총의 힘과 충실하게 살아온 수많은 남녀의 희생적이며 기쁜 헌신을 일깨워 줍니다. 오푸스데이의 본질적인 사도직은 회원 각자가 자신의 일터와 가정, 친구들 사이에서 개별적으로 수행하는 것임을 아주 분명히 해 두고 싶습니다. 눈에 띄지 않으며 통계로 옮기기 어려운 활동이지만, 날마다 직업 활동 한가운데에서 조용하고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많은 영혼에게 성덕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더 많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모범적인 삶을 이야기해 드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그 내밀함을 앗아 가 그 활동의 인간적이고 신적인 아름다움을 훼손하게 됩니다. 이를 숫자나 통계로 환원하는 것은 더 나쁠 것입니다. 영혼 안에서 맺는 은총의 열매를 헛되이 목록으로 만들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여러 나라에서 회원들이 지도하는 사도직 활동에 관해서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영적·사도적 목적을 지닌 활동으로, 인간적인 면에서도 정성과 완전함을 갖추어 일하려고 노력합니다. 오푸스데이 회원은 아니지만 그 일의 초자연적 가치를 이해하거나 인간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협력합니다. 효과적으로 우리를 도와주는 많은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평신도적이고 세속적인 활동입니다. 평범한 시민들이 각 나라의 법에 따라 통상적인 시민의 권리를 행사하며 시작하고, 언제나 전문적 판단으로 수행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특권이나 우대도 바라지 않는 활동입니다.
로마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활동 가운데 하나를 아마 아실 것입니다. 바로 ELIS 센터입니다. 학교와 체육·문화 활동, 도서관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직업 자격과 전인적 양성을 돕습니다. 로마의 필요와 이 활동이 시작된 티부르티노 지역의 특수한 인간적 환경에 부응하는 활동입니다. 시카고와 마드리드, 멕시코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도 비슷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례는 나이로비의 Strathmore College of Arts and Science입니다. 케냐와 우간다, 탄자니아의 수백 명 학생이 거쳐 간 대학 진학 준비 교육기관입니다. 오푸스데이의 일부 케냐인 회원들은 다른 동포들과 함께 이곳을 통해 깊이 있는 교육·사회 활동을 해 왔습니다. 이곳은 동아프리카에서 완전한 인종 통합을 실현한 최초의 교육기관이며, 그 활동으로 문화의 아프리카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역시 나이로비에 있는 Kianda College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새로운 아프리카 여성의 양성에서 매우 중요한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더 들자면 나바라대학교의 활동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952년 설립된 이래 성장하여, 현재 18개 학부와 전문학교, 연구소에서 6,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최근 일부 신문에 실린 내용과 달리, 나바라대학교는 국가 보조금으로 운영되어 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스페인 국가는 운영비를 전혀 부담하지 않으며, 새로운 학생 정원 마련을 위한 일부 보조금만 지원했습니다. 나바라대학교는 개인과 민간단체의 도움으로 운영됩니다. 개인적 책임과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 사이의 연대라는 원칙에 바탕을 둔 교육 및 대학 생활 체계는 효과가 있음을 보여 주었으며, 오늘날 세계 대학의 상황에서 매우 긍정적인 경험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영국, 프랑스 등에서 이루어지는 다른 종류의 활동도 말씀드릴 수 있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습니다. 현재 오푸스데이는 다섯 대륙에 퍼져 있으며, 70개가 넘는 국적과 매우 다양한 인종 및 처지의 사람들이 속해 있다는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지난 40년의 활동에 만족하십니까? 최근 몇 년의 경험과 사회 변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등을 통해 어떤 구조적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시지는 않았습니까?
만족하느냐고요? 제 개인의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이 하느님의 일을 중심으로 그토록 놀라운 일들을 이루신 것을 보면 만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으로 사는 사람에게 자신의 삶은 언제나 하느님 자비의 역사입니다. 때로는 모든 것이 헛되고 심지어 실패처럼 보일 수도 있어서 그 역사를 읽기가 어려울지 모릅니다. 또 어떤 때에는 주님께서 풍성한 열매를 보게 해 주시므로 마음 가득 감사를 드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제가 누린 가장 큰 기쁨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평신도의 하느님 성소를 매우 분명하게 선포하는 것을 본 일입니다. 조금도 자랑하려는 뜻 없이 말씀드리면, 우리의 정신에 관한 한 공의회는 변화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랫동안 실천하고 가르쳐 온 것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오푸스데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어떤 사도직 기술이나 방법, 특정한 구조가 아니라 바로 일상의 일을 성화하도록 이끄는 정신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개인적인 잘못과 비참함이 있습니다. 모두 하느님 앞에서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과 자신의 삶을 대조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si scires donum Dei!... (Ioan 4, 10),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안다면!” 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바오로 성인은 덧붙입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2 Cor 4, 7)
겸손과 그리스도인의 성찰은 하느님의 선물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것은 사건의 흐름 앞에서 움츠러들거나, 역사 앞에서 열등감과 낙담을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개인의 삶에서, 때로는 단체나 기관의 삶에서도 바꾸어야 할 것이 있을 수 있으며, 아주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그런 문제에 임하는 태도는 무엇보다 인간의 작음에 비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지 경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조르나멘토는 무엇보다 먼저 개인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복음의 이 오래된 새로움에 자신의 삶을 맞추어야 합니다. 시대에 맞게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이미 지나간 인물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살아 계시며 언제나 살아 계실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그러하십니다(Heb 13, 8).
오푸스데이 전체에 관해서는, 어떤 거만함도 없이 하느님의 선하심에 감사드리며, 세상에 적응하는 문제가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대에 맞추어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할 필요도 결코 없을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평신도적인 이 고유한 특징들을 주시어 오푸스데이를 단 한 번으로 영원히 시대에 맞게 해 주셨습니다. 모든 회원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므로 결코 세상에 적응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진보를 뒤따라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회원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일상 노동으로 그 진보를 이루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35항의 주석 참조. 오푸스데이가 성직 자치단으로 설립된 이후에는 ‘총장’ 대신 오푸스데이의 고유 직권자인 ‘단장’이라고 해야 합니다. 단장은 대리들과 평의회들의 도움을 받아 통치 직무를 수행합니다. 오푸스데이 총회가 단장을 선출하며, 이 선출에는 교황의 인준이 필요합니다. 이는 선거인단이 선출하는 관할권을 지닌 고위 성직자에게 적용되어 온 전통적인 교회법 규범입니다.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몬시뇰은 이 답변에서 재속 사제가 오푸스데이에 속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에 관해 말합니다. a) 오푸스데이 평신도 회원 출신으로, 단장에게 성품을 받도록 부름받아 자치단에 입적하고 그 사제단을 이루는 사제들입니다. 이들은 전적으로 그것만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오푸스데이에 편입된 신자들을 사목적으로 돌보는 데 헌신합니다. 또한 그들과 함께 사회의 모든 환경에서 성덕과 사도직에 대한 보편적 부르심을 깊이 자각하도록 하는 고유한 사도직을 수행합니다(「소개」 참조). b) 이미 어떤 교구에 입적한 재속 사제들도,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몬시뇰이 이 답변의 첫머리에서 말하듯, 자치단과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성십자가 사제회에 가입하여 오푸스데이의 영적 삶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 사제회의 총장은 오푸스데이 단장입니다. 이 사제회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소개」 본문을 참조하십시오. 그곳에는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몬시뇰이 이 인터뷰 당시에는 아직 사용할 수 없었던 정확한 법률 용어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conversaciones/sesa-aneseo-seodeogeur-cuguhadorog-dobneun-opuseud/ (2026-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