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백성 안의 자발성과 다양성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로 인터뷰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아조르나멘토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말을 교회의 삶에 적용할 때 그 참된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충실함입니다. 제게 아조르나멘토는 무엇보다 그것을 뜻합니다. 남편이든 군인이든 관리자이든, 언젠가 맺었던 사랑과 정의의 확고한 약속을 삶의 매 순간, 새로운 모든 상황에서 더욱 충실하게 이행할수록 더 좋은 남편, 더 좋은 군인, 더 좋은 관리자가 됩니다. 이 세심하고 실천적이며 한결같은 충실함은 어렵습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구체적 현실에 원칙을 적용하는 모든 일이 어렵듯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충실함은 영혼의 노쇠와 마음의 메마름, 사고의 경직에서 자신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어입니다.

기관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며, 특히 불완전한 인간의 계획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는 교회의 삶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의 구속과 구원은 당신을 보내신 하늘 아버지의 뜻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가득한 아들다운 충실함, 그리고 그분과 함께하는 우리의 충실함이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나 어느 시대나 교회의 아조르나멘토란 근본적으로 하느님 백성이 받은 사명과 복음에 대한 충실함을 기쁘게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인간 삶의 모든 상황에서 살아 있고 현실적인 이 충실함에는, Depositum Fidei, 곧 신앙의 유산에 담긴 풍요로움을 드러내는 데 필요한 적절한 교리적 발전이 요구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2천 년에 이르는 교회 역사에서 여러 번, 그리고 최근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러했습니다. 또한 개선할 수 있는 인간적인 요소에서 조직 구조와 선교 및 사도직 방법을 더 낫게 하는 적절한 변화와 개혁도 요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조르나멘토가 무엇보다 변화하는 데 있다거나 모든 변화가 쇄신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피상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공의회 가르침을 벗어나거나 거슬러, 하느님 백성의 전진을 수 세기 전, 적어도 봉건시대로 되돌릴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점만 생각해 보아도 충분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가리키기 위해 문헌들에서 ‘하느님 백성’이라는 표현을 폭넓게 사용했습니다. 이로써 이 하느님 백성의 유일한 사명에 대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동 책임을 드러냈습니다. 비오 12세께서 이미 말씀하신 ‘교회에 필요한 여론’이 이 공동 책임을 실제로 반영하려면 어떤 특징을 지녀야 한다고 보십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권위와 순종의 고유한 관계는 ‘교회 안의 여론’이라는 현상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자발적이고 책임 있는 순종이 아니라면 참된 그리스도교적 순종이 있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돌이나 시체가 아닙니다. 지성과 자유를 지닌 존재이며, 명령하는 사람과 똑같은 초자연적 질서로 모두 들어 높여졌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그리스도교적 양성이 없는 사람은 순종할 때나 의견을 말할 때나 지성과 자유를 결코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에 필요한 여론’의 근본 문제는 신자들에게 필요한 교리 양성의 문제와 같습니다. 물론 성령께서는 교회의 사명에 모두 공동 책임을 지는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에게 당신의 풍성한 선물들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에게도 적절한 교리 양성을 받을 의무를 면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제가 말하는 교리란 각 신자가 교회의 전체 사명과, 그 유일한 사명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참여 및 그에 따르는 특별한 책임에 관해 충분히 알아야 할 내용을 뜻합니다. 교황님께서 여러 번 일깨우셨듯이, 이것이 공의회 이후의 이 시대에 교회가 마주해야 하는 거대한 교육 과제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움트는 다른 희망들과 더불어, 말씀하신 문제의 올바른 해결도 이 과제와 직접 관련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리를 갖추지 못한 일부 은사적 인물들의 다소 예언적인 직감이 하느님 백성 안에 필요한 여론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여론의 표현 방식에 관해서는, 기구나 제도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구 사목평의회도, 공식적인 가톨릭 신문이 아니더라도 신문의 지면도, 한 신자가 자기 주교에게 보내는 단순한 개인 편지 등도 똑같이 적절한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의 의견을 드러낼 정당한 가능성과 방식은 매우 다양하므로, 새 조직이나 제도를 만들어 이를 틀에 가둘 수도 없고 가두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특히 어떤 성향이나 방향을 지닌 소수이든, 이른바 공식 가톨릭 신자들의 한 집단이나 작은 무리가 실제로 독점하거나 도구로 삼을 위험이 쉽게 생기는 기관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은 교계 자체의 신망을 위태롭게 하고 하느님 백성의 다른 구성원들에게는 조롱처럼 들릴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하느님 백성’이라는 개념은 교회의 역사적 성격을 드러냅니다. 교회는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실재이면서도 여정 가운데 변하고 사라지는 요소들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제들의 삶에서 사제다운 존재 방식은 어떻게 실현되어야 합니까? 사제 생활 교령 Presbyterorum Ordinis에 묘사된 사제의 모습 가운데 현재 특별히 강조하고 싶으신 특징은 무엇입니까?

저는 바로 변하고 사라지는 요소에 속하지 않는 사제 삶의 한 특징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제의 축성과 사명 사이에 있어야 하는 완전한 일치를 말합니다. 사제 생활 교령 Presbyterorum Ordinis에서도 여러 번 이를 일깨웁니다. 달리 말하면 개인의 신심 생활과 직무 사제직의 수행 사이의 일치, 사제가 하느님과 맺는 자녀다운 관계와 사람들과 맺는 사목적·형제적 관계 사이의 일치입니다. 저는 기도하는 사람이 아닌 사제의 직무가 효과를 거두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일부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사회 안에서 사제가 현존하는 방식을 찾으려는 관심이 있습니다. 공의회 가르침(Const. Lumen gentium, n. 31; Decr. Presbyterorum Ordinis, n. 8)에 근거하여, ‘일터의 사제들’처럼 사제가 시민 생활에서 직업이나 노동에 종사함으로써 이를 드러내려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먼저 제가 말씀드릴 것과 반대되는 의견도 존중한다는 점을 밝혀 두어야겠습니다. 여러 이유로 잘못된 의견이라고 생각하지만, 큰 사도적 열의로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분들과는 애정과 기도로 함께합니다.

저는 사제직을 올바르게 수행한다면, 곧 흔히 인간적 미성숙의 증거인 소심함이나 열등감 없이, 또 초자연적 정신의 부족을 드러내는 성직자적 오만함 없이 수행한다면, 사제에게 고유한 직무 자체만으로도 그가 사목하는 인간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 가운데 인간이자 사제로서 정당하고 단순하며 진실하게 현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의 세계와 삶을 함께 나누고 그 문제들을 이해하며 그 운명에 동참하는 데에는 보통 그 이상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아마추어로 하는 평신도 활동이라는 순진한 통행증에 의지하는 것은 거의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그 자체의 진실성 결여로 미리 실패가 정해지는 셈이며, 여러 이유로 평신도들 자신의 건전한 상식을 거스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사제 직무는, 특히 성직자가 이토록 부족한 오늘날에는, 온 시간을 쏟아야 하는 일이어서 다른 일을 겸할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많은 영혼이 이를 모르고 있다 해도 우리를 대단히 필요로 하므로, 아무리 해도 그 필요를 다 채울 수 없습니다. 일손도 시간도 힘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제인 제 자녀들에게, 어느 날 시간이 남는다고 느낀다면 그날은 사제직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해도 된다고 흔히 말합니다.

또한 오푸스데이의 이 사제들은 보통 성품을 받기 전에 여러 해 동안 시민 생활에서 직업 활동이나 노동에 종사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기술자이자 사제, 의사이자 사제, 노동자이자 사제 등입니다. 그러나 시민 사회의 옛 동료와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고 존중받기 위해 계산자나 청진기, 착암기를 들고 영혼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제가 아는 한 없습니다. 물론 때로는 성직 신분의 의무와 양립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직업이나 생업에 종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민 사회 안에서의 현존’을 확보하는 데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다른 여러 이유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회적 사랑의 실천이나 어떤 사도직을 시작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제적 이유 등입니다. 바오로 성인도 때때로 천막을 만드는 옛 직업에 종사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에서 하나니아스가 이민족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선포하려면 천막 만드는 법을 배우라고 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정리하여 말씀드리면, 어떤 사도직 사업의 정당성과 올바른 의도를 미리 판단하려는 뜻이 전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저는 예를 들어 ‘지식인이자 사제’, ‘노동자이자 사제’가 ‘노동자 사제’보다 더 진실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가르침에도 더 잘 부합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필요한 전문 사목의 의미를 제외하면, 전형적인 노동자 사제의 모습은 이미 과거에 속합니다. 많은 이들이 평신도 사도직의 놀라운 가능성을 알지 못하던 과거입니다.

때로는 현세적 문제, 특히 정치적 문제에 구체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제들에게 비난이 쏟아집니다. 과거와 달리 이런 입장들 가운데 많은 것은 더 큰 자유와 사회 정의 등을 증진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극히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 이 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직무 사제직의 고유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의와 자유의 결여 등이 그리스도교적이지 않으므로 사제가 이를 고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 두 요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

사제는 모든 그리스도교적 덕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사목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상황에서 그 덕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요구하고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 설교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의 munus docendi, 곧 가르치는 임무의 본질적인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며 주신 존엄과 자유,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세례로 받는 고유한 초자연적 존엄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러한 직무의 의무를 수행하는 어떤 사제도 무지나 악의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결코 정치에 끼어든다는 비난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펼침으로써 현세의 구조와 활동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질서 짓는 평신도 고유의 사도직 과제에 간섭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른바 제3세계의 문제에 대한 온 교회의 관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성직자, 특히 현지인 사제의 부족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시며, 이 분야에서 몬시뇰의 경험은 어떻습니까?

실제로 현지 성직자의 증가는 많은 나라에서 교회의 발전, 나아가 존속까지 보장하기 위한 지극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격렬한 민족주의를 겪는 나라들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에 관해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현지 성직자의 양성이 교회에 절박한 문제인 여러 나라의 수백 명 평신도가 오푸스데이에서 사제직을 준비하고 사제가 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이제 60개 나라가 넘을 것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저보다 낫습니다. 그토록 확고한 교리와 보편적이며 가톨릭적인 시야, 불타는 봉사 정신을 갖추고 양성됩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자기 나라에서 주교품을 받았으며 이미 번성하는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기본권에 따라 사제들은 성직 신분의 존엄과 요구에 맞는 올바른 목적을 추구하는 단체라면 자유롭게 설립하거나 기존 단체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성직자의 직무와 개인적 삶의 사적 영역 사이에 반드시 존재하며 존중되어야 하는 구별을 고려하면, 재속 성직자들이 결사의 권리를 행사하는 정당성과 범위를 오해나 주저함, 무질서의 위험 없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교구에 입적되어 직권자에게 속합니다. 교구와 다른 단체, 더구나 전 세계적 범위의 단체에 속하는 것은 무엇으로 정당화할 수 있습니까?

정당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교회가 모든 신자에게와 마찬가지로 성직자에게도 인정하는 자연권인 결사의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하는 것입니다. 재속 사제들의 영적 생활에 크게 기여한 수많은 훌륭한 단체를 생각해 보면, 이 오랜 전통은 최근의 로마 교황들인 비오 12세, 요한 23세, 바오로 6세의 가르침과 규정에서 여러 차례 재확인되었고, 최근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자체의 장엄한 교도권으로도 재확인되었습니다(사제 생활 교령 Presbyterorum Ordinis, n. 8 참조).

이와 관련하여, 교구 주교들이 추진하거나 지도하는 사제 단체 외에는 다른 단체가 없어야 한다는 한 수정안(modus)에 대한 답변을 떠올리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담당 공의회 위원회는 그 요청을 거부했고 이후 총회가 이를 승인했습니다. 거부의 근거는 성직자에게도 속하는 자연권인 결사의 권리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Non potest negari Presbyteris id quod laicis, attenta dignitate naturae humanae, Concilium declaravit congruum, utpote iuri naturali consentaneum” (Schema Decreti Presbyterorum Ordinis, Typis Polyglottis Vaticanis 1965, pág. 68).

실제로 성직자, 구체적으로 사제는 성품성사를 통해 Ordo Presbyterorum, 곧 사제단에 결합되어, 하느님 법에 따라 주교단의 협력자가 됩니다. 교구 사제의 경우 이 직무는 교회법이 정한 방식에 따라 입적과 교회법적 사명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입적은 사제를 자기 직권자의 권위 아래 한 지역 교회를 섬기도록 소속시키고, 교회법적 사명은 주교를 으뜸으로 하는 사제단의 일치 안에서 특정한 직무를 부여합니다. 따라서 사제는 성사적·법적 유대를 통해 다음 모든 일에서 자기 직권자에게 속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구체적인 사목 활동의 배정, 그 직무 수행을 위해 받는 교리적·규율적 지침, 필요한 정당한 경제적 보수, 영혼의 돌봄과 하느님 예배를 규정하기 위해 주교가 내리는 모든 사목적 규정, 그리고 성직 신분에서 나오는 권리와 의무에 관한 보편법의 규정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필수적인 종속 관계와 더불어, 재속 사제의 삶에는 자율성과 개인의 자유 및 책임이라는 정당한 개인적 영역도 있습니다. 종속 관계는 사제가 자기 직권자와 세심하게 살아야 하는 순종과 일치, 사목적 친교를 교회법적으로 구체화합니다. 한편 개인적 영역에서 사제는 교회 안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닙니다. 따라서 미성년자의 법적 처지(cfr. can. 89 del C.I.C.)와도 구별되고, 수도 서원을 통해 그 개인적 권리의 전부 또는 일부를 행사하기를 포기한 수도자의 처지와도 구별됩니다.

이 때문에 재속 사제는 도덕의 일반적 한계와 자기 신분의 의무 안에서, 개인적·영적·문화적·경제적 삶 등에 관한 모든 일을 혼자서든 단체로서든 자유롭게 정하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각자는 자신의 취향이나 능력에 따라 문화적 소양을 쌓을 자유가 있습니다. 원하는 사회적 관계를 유지할 자유가 있으며, 직무상의 의무를 마땅히 수행하는 한 자신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삶을 꾸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양심에 따라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개인 재산을 처분할 자유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각자는 영적·수덕적 생활과 신심 행위에서 성령께서 일으켜 주시는 움직임을 따르고, 교회가 권고하거나 허용하는 여러 수단 가운데 자신의 구체적인 개인 사정에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마지막 점에 관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고 최근에는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회칙 Sacerdotalis coelibatus에서 다시, 관할 교회 권위가 승인한 정관에 따라 사제가 자기 직무를 수행하면서 성덕을 증진하도록 돕는 단체들을 높이 평가하고 적극 권장했습니다. 교구 단체이든 교구 간 단체이든, 전국적이든 세계적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단체들의 존재는, 이미 말씀드렸듯이, 모든 사제를 자기 주교와 결합하는 친교와 종속의 유대, 사제단의 다른 모든 구성원과의 형제적 일치, 그리고 자기 지역 교회를 섬기는 활동의 효과를 결코 훼손하지 않으며 훼손할 수도 없습니다.

공의회에 따르면 평신도의 사명은 교회와 세상 안에서 수행됩니다. 그런데 흔히 둘 가운데 한쪽만 생각하여 이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 과제와 세상 안에서 수행해야 하는 과제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를 결코 서로 다른 두 과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평신도가 교회의 사명에 고유하게 참여하는 것은 바로 세속적 현실과 현세 질서, 세상을 ab intra, 곧 안으로부터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성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고유하고 특별한 과제와 더불어, 평신도에게도 성직자와 수도자들처럼 신자라는 법적 신분에 따르는 일련의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 권능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자연스럽게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행사됩니다. 교회의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교계 고유의 사도직에 직접 협력하거나 초대받으면 교계의 사목 과제에 조언하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평신도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고유한 과제와 신자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과제는 서로 대립하는 두 과제가 아니라 겹쳐지는 과제입니다.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합니다. 평신도가 동시에 신자라는 사실을 잊고 그 고유한 사명만을 바라보는 것은, 푸르고 꽃피는 가지가 어떤 나무에도 붙어 있지 않다고 상상하는 것만큼 터무니없습니다. 평신도에게 특별하고 고유하며 독특한 것을 잊거나 이 세속 사도직 과제들의 특징과 교회적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무성한 교회의 나무를 줄기만 있는 기형적인 상태로 축소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몬시뇰께서는 오랫동안 평신도의 성소가 ‘일을 성화하고, 일 안에서 자신을 성화하며, 일로써 다른 이들을 성화하는’ 세 가지에 있다고 말하고 써 오셨습니다. 첫 번째인 ‘일을 성화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 표현에는 창조 신학 자체의 근본 개념들이 담겨 있으므로 짧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40년 전부터 늘 가르쳐 온 것은, 정직한 모든 인간 노동은 지적 노동이든 육체노동이든 그리스도인이 가능한 한 완전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완전하게, 곧 직업적 역량을 갖추어 수행하고, 그리스도교적으로 완전하게, 곧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일이 아무리 소박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현세적 현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질서 짓고 그 신적 차원을 드러내는 데 기여하며, 세상의 창조와 구속이라는 놀라운 일 안에 받아들여져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노동은 은총의 질서로 들어 높여지고 성화되며 하느님의 일, operatio Dei, opus Dei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일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놀라운 말씀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일깨우면서, 우리는 지상 생애의 거의 전부를 한 마을에서 장인으로 일하며 보내신 그리스도의 모범에 주목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성화하신 그 인간 노동을 사랑합니다. 노동, 곧 인간의 고귀하고 창조적인 수고 안에서 우리는 인간의 가장 높은 가치 가운데 하나이자 사회의 진보와 인간관계를 갈수록 더 정의롭게 질서 짓는 데 필수적인 수단을 봅니다. 그뿐 아니라 당신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 사랑과, 인간 서로 간의 사랑 및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지도 봅니다. 곧 완덕의 수단이자 성덕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오푸스데이의 유일한 목적은 언제나 이것이었습니다. 세상 한가운데에서, 세속의 현실과 관심사 가운데에서, 모든 인종과 사회적 처지의 남녀가 일상 업무 안에서, 또 그 일을 통해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노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평신도 사도직 교령 Apostolicam actuositatem 제5항은 현세 질서에 그리스도교적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온 교회의 사명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따라서 이는 교계와 성직자, 수도자와 평신도 모두의 일입니다. 이 유일하고 공동인 사명에서 교회의 각 부문이 맡는 역할과 방식을 어떻게 보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사실 답은 공의회 문헌 자체에 있습니다. 교계에는 이 사도직 과제의 수행을 이끌고 밝혀 주어야 할 교리 원칙들을 교도권의 일부로 제시하는 일이 맡겨져 있습니다(cfr. Const. Lumen gentium, n. 28; Const. Gaudium et spes, n. 43; Decr. Apostolicam actuositatem, n. 24).

세속 생활 고유의 모든 상황과 구조 안에서 일하는 평신도들에게는, 교도권이 밝힌 교리 원칙에 비추어 그 현세적 현실을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질서 짓는 일이 고유하게 맡겨져 있습니다. 동시에 사회적·가정적·정치적·문화적 생활 등에서 내려야 할 구체적인 결정에 관해서는 필요한 개인적 자율성을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cfr. Const. Lumen gentium, n. 31; Const. Gaudium et spes, n. 43; Decr. Apostolicam actuositatem, n. 7).

고유한 생활 신분을 받아들여 그 세속의 현실과 활동에서 물러나는 수도자들의 사명은 공개적인 종말론적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 백성의 다른 신자들이 이 땅에는 영원한 거처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돕습니다(cfr. Const. Lumen gentium, n. 44; Decr. Perfectae caritatis, n. 5). 또한 수많은 남녀 수도자들이 자신을 잊는 희생정신으로 수행하는 자선·사랑·사회적 돌봄의 많은 활동이 현세 질서에 그리스도교적 생명을 불어넣는 데 기여하는 봉사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길을 통해 실현되든 모든 그리스도인 삶의 한 특징은 ‘하느님 자녀의 존엄과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가르침 전반에서 그토록 끊임없이 평신도의 자유를 옹호하실 때 무엇을 뜻하십니까?

바로 평신도들이 교도권이 제시한 원칙에 비추어 모든 구체적인 이론적·실천적 결정을 내릴 개인의 자유를 뜻합니다. 예를 들면 철학과 경제학, 정치에 관한 여러 의견, 예술과 문화의 흐름, 자신의 직업적·사회적 삶의 문제 등에 관하여, 각자가 양심상 가장 적절하고 자신의 확신과 인간적 능력에 가장 잘 맞는다고 판단하는 결정을 내리는 자유입니다.

가톨릭 평신도가 다른 평신도 시민들에 비해 권리가 축소되지 않고 현세의 현실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고유한 사도직 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이 자율성의 영역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직무 사제직을 수행하는 우리 모두는 언제나 이를 세심하게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교계 직무의 고유한 목적을 넘어서는 목적에 평신도를 도구로 삼으려 한다면, 시대착오적이고 유감스러운 성직주의에 빠질 것입니다. 평신도를 영원한 미성숙 상태에 가두어 그들의 사도직 가능성을 크게 제한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특히 오늘날에는 교회 안의 권위와 일치라는 개념 자체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로운 논의에 맡기신 일들에 관하여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도 참된 판단과 의견의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느님 백성의 교계적 질서와 필요한 일치에 어긋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굳건히 하고 변질될 가능성에서 지켜 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성소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평신도 성소와 수도 성소는 실제 실현 방식에서 매우 다릅니다. 그렇다면 수도자들은 교육 활동 등을 통해 어떻게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참된 평신도의 길로 양성할 수 있습니까?

교회를 섬기는 수도자들의 훌륭한 활동을 저는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수도자들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성덕과 사도직에 부름받은 평신도 성소의 특징과 요구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것을 사랑하며 학생들에게 가르칠 줄 아는 만큼 가능할 것입니다.

평신도에 관해 이야기할 때 여성의 존재라는 현실을 잊어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이 흐려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이야기할 때도 흔히 단순히 여성의 공적 생활 참여로 이해합니다. 교회와 세상 안에서 여성의 사명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평신도의 사도직 과제나 권리와 의무 등에 관해 이야기할 때, 여성에게 어떤 구별이나 차별을 두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세례받은 모든 남녀는 하느님 자녀로서 공통된 존엄과 자유, 책임에 동등하게 참여합니다. 교회 안에는 바오로 성인이 이미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친 바로 그 뿌리 깊고 근본적인 일치가 있습니다. Quicumque enim in Christo baptizati estis, Christum induistis. Non est Iudaeus, neque Graecus: non est servus, neque liber: non est masculus, neque femina (Gal 3, 27-28). 곧 더 이상 유다인과 그리스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성품을 받을 법적 자격을 제외하고는, 교회의 법과 내적 생활, 사도직 활동에서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온전히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품에 관한 구별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실정법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밖에는 사도직을 수행할 권리, 단체를 설립하고 지도할 권리, 교회의 공동선에 관한 모든 일에 책임 있게 의견을 표명할 권리 등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분명한 신학적 이유들을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지만, 실제로는 일부 사고방식의 저항에 부딪히리라는 것을 압니다. 오푸스데이가 여자 부문에 속한 여성들도 교회 학문에서 학위를 취득하도록 도왔을 때, 일부 사람들이 보였던 놀라움과 심지어 비판을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많은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서도 따라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항과 주저함은 조금씩 사라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교회론을 이해하는 문제일 뿐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것은 성직자와 수도자들만이 아니라, 평신도인 남녀도 하느님 백성이며 하느님 법에 따라 고유한 사명과 책임을 지닌다는 사실을 깨닫는 문제입니다.

다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남녀의 본질적 평등은 바로 교회 건설과 시민 사회의 발전에서 남녀가 서로 보완하는 역할도 함께 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무 뜻 없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다양성은 가부장적인 의미로가 아니라, 풍부한 뉘앙스와 결과를 지닌 그 깊이 전체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남성은 교회와 사회를 남성화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고, 여성은 하느님 백성과 세상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이제까지 남성만 해 왔지만 자신도 똑같이 잘할 수 있는 일을 단순히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 모두 정당하게 구원 역사의 주역이라고 느껴야 하되, 서로 보완하는 방식으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길》의 첫 판본은 1934년에 나왔지만, 당시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단적’이었던 많은 생각이 담겨 있고 오늘날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어떤 내용들이 그러합니까?

괜찮으시다면 이 문제는 나중에 다른 기회에 천천히 다루겠습니다. 지금은 주님께 깊이 감사드린다는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수많은 언어로, 이미 250만 부가 넘게 나온 《길》의 여러 판본도 사용하시어, 매우 다양한 인종과 언어의 사람들의 지성과 삶 안에 훗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확인하게 될 그리스도교 진리들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수백만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에게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주셨습니다.

몬시뇰께서 오래전부터 사제들, 특히 교구 성직자들을 영적·인간적으로 돌보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오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능한 동안 그들을 위해 열심히 설교하고 영적 지도를 하신 데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어느 시점부터는 부르심을 느끼는 이들이 온전히 교구 사제로 남고 자기 직권자에 대한 종속 관계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오푸스데이에 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유들 외에 교회 생활의 어떤 사정이 이런 관심을 갖게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울러 이 활동이 교구 성직자나 교회 생활의 일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떻게 도움을 주었고 지금도 줄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의 이런 관심과, 이제 제도화된 오푸스데이의 이 활동을 일으켰으며 지금도 일으키는 교회 생활의 사정은 다소 우연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교구 사제의 삶과 일에 긴밀하게 결합된 영적·인간적 차원의 지속적인 요구입니다. 근본적으로 교구 사제는 자기 교구 사제로서의 처지를 조금도 바꾸지 않는 정신과 수단으로, 자신의 직무 수행 안에서 개인적 성덕을 찾도록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여 받은 하느님 성소의 은총에 언제나 젊은 정신과 더욱 큰 너그러움으로 응답하고, 여러 요인에서 쉽게 생겨날 수 있는 영적·인간적 위기를 신중하고 신속하게 예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요인에는 고독과 환경의 어려움, 무관심, 활동에 결실이 없는 듯한 느낌, 타성, 피로, 지적 양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대한 무관심, 심지어 자기 직권자나 다른 사제 형제들과의 관계를 초자연적으로 바라보는 시야의 부족도 있습니다. 마지막 것은 순종과 일치의 위기를 일으키는 깊은 뿌리입니다.

결사의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하여 성십자가 사제회1에 가입하는 교구 사제들은, 오직 자기 신분과 직무의 의무에 모든 면에서 부합하는 방식으로 그런 개인적인 영적 도움을 받기를 바라서 가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도움은 도움이 아니라 복잡함과 장애, 무질서가 될 것입니다.

실제로 오푸스데이 정신의 본질적 특징은 누구도 자신의 자리에서 끌어내지 않는 것입니다. unusquisque, in qua vocatione vocatus est, in ea permaneat (1 Cor 7, 20). 오히려 각자가 자기 신분과 교회 및 시민 사회에서의 사명에 따르는 과제와 의무를 가능한 한 완전하게 수행하도록 이끕니다. 따라서 사제가 오푸스데이에 가입해도 교구 사제의 성소를 조금도 바꾸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입적한 지역 교회를 섬기는 헌신, 자기 직권자에 대한 온전한 종속, 재속 영성, 다른 사제들과의 일치 등이 그대로입니다. 반대로 그 성소를 온전히 살아가기로 약속합니다. 바로 교구 사제로서 자신의 사제적 의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완덕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은 우리 단체에서 교회법적·수덕적 차원의 여러 실제 적용으로 이어지며, 이를 자세히 설명하려면 길어질 것입니다. 한 가지 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내부 장상에게 순종 서원이나 약속을 요구하는 다른 단체들과 달리, 오푸스데이에 가입하는 교구 사제들의 종속은 통치상의 종속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내부 교계가 없으며, 따라서 이중의 순종 의무가 생길 위험도 없습니다. 오히려 영적 도움과 돌봄을 위한 자발적 관계입니다.

이 사제들이 오푸스데이에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지속적인 수덕적 도움입니다. 재속적이며 교구적인 영성에 따르고, 각 지역 교회의 통치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인물과 상황의 변화에 좌우되지 않는 도움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주교가 설교와 사목 서한, 대화와 규율 지침 등을 통해 주는 공동의 영적 지도에 더하여, 어디에 있든 세심하고 지속적인 개인 영적 지도를 받습니다. 이것은 주교 자신이 주는 공통의 지도를 보완하며, 이를 존중하는 것을 언제나 중대한 의무로 여깁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통상 교도권이 그토록 권장하는 이 개인 영적 지도를 통해 사제의 신심 생활과 사목적 사랑, 지속적인 교리 양성, 교구 사도직에 대한 열의, 자기 직권자에게 마땅히 지녀야 할 사랑과 순종, 사제 성소와 신학교에 대한 관심 등이 북돋워집니다.

이 모든 활동의 열매는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이 사제들이 섬기는 지역 교회들에 돌아갑니다. 교구 사제인 제 영혼은 이를 기뻐합니다. 더구나 교황님과 주교님들이 얼마나 큰 사랑으로 이 활동을 축복하고 원하며 도와주시는지 여러 번 보면서 위로도 받았습니다.

몬시뇰께서는 오푸스데이의 초기 삶을 이야기하시면서 자신에게는 오직 ‘젊음과 하느님의 은총, 명랑함’만 있었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더구나 1920년대에는 평신도에 관한 교리가 아직 오늘날 같은 발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오푸스데이는 교회 생활에서 뚜렷한 실재가 되었습니다. 젊은 사제로서 어떻게 이러한 일을 이룰 수 있는 이해를 갖게 되셨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제게는 그때도 지금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 외에 다른 목표가 없습니다. 오푸스데이의 시작에 관해서는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은 1917년부터 제가 이를 어렴풋이 느끼게 하셨지만, 그것은 제 영혼의 역사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으며 저의 내적 삶에 속합니다. 다만 제가 언제나 지극히 사랑하는 마드리드 주교님의 허락과 다정한 축복 아래 행동했다는 말씀은 드릴 수 있습니다. 오푸스데이는 그곳에서 1928년 10월 2일 태어났습니다. 그 후에도 언제나 성좌와, 우리가 활동하는 각 지역의 존경하는 직권자들의 승인과 격려를 받아 왔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오푸스데이 평신도들이 스페인 사회의 영향력 있는 지위에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스페인에서의 오푸스데이 영향력을 말합니다. 그 영향력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자기 자랑처럼 들릴 수 있는 모든 것은 제게 매우 불편합니다. 그러나 오푸스데이가 실제로 스페인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우리의 활동을 그토록 너그럽게 축복해 주시는 주님께 대한 눈멂과 감사하지 않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푸스데이가 여러 해 동안 활동해 온 나라들의 환경에서는, 활동이 점차 발전하는 데 따라 그 영향도 이미 사회적으로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구체적으로 스페인에서는 39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단체가 이곳에서 교회의 삶 안에 태어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영향은 어떤 성격일까요? 오푸스데이는 영적·사도적 목적을 지닌 단체이므로, 스페인에서나 우리가 활동하는 다섯 대륙의 다른 나라들에서나 그 영향도 오직 그런 성격, 곧 영적·사도적 영향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영혼인 교회 전체와 마찬가지로, 시민 사회에 미치는 오푸스데이의 영향은 모든 인간 활동의 윤리적 측면에 파급되기는 해도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등의 현세적 성격이 아닙니다. 다른 차원의 더 높은 영향이며, ‘성화한다’는 정확한 동사로 표현됩니다.

이 점은 기자님께서 영향력 있다고 부르신 회원들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정치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라면 의회나 내각에 자리를 차지한 회원들이 영향력 있을 것입니다. 문화 단체라면 저명한 철학자나 국가 문학상 수상자 등의 회원들을 영향력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반면 오푸스데이처럼 육체노동이든 지적 노동이든 사람들의 일상 업무를 성화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모든 회원을 영향력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모두가 일하고, 어떤 일이든 거룩하게, 그리스도교적으로, 완전함을 바라며 수행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노동의 의무는 오푸스데이 안에서 규율과 수덕의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제게는 광부인 제 자녀가 동료들 가운데에서 하는 증언이 대학 총장이 다른 교수들 사이에서 하는 증언만큼 영향력 있고,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오푸스데이의 영향력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이 사회학적 현실을 간단히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단체에는 모든 사회적 처지와 직업, 연령과 생활 신분의 사람들이 속해 있습니다. 여자와 남자, 성직자와 평신도, 노인과 젊은이, 독신자와 기혼자, 대학인과 노동자, 농민과 사무직 종사자, 전문직 종사자와 공공기관 근무자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폭넓고 다양한 사람들이 지닌 그리스도교적 확산의 힘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특히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고, 어떤 사회적 환경에서 살아가든 자신의 직업이나 생업을 성화하고, 그 일 안에서 자신을 성화하며, 그 일로써 다른 이들을 성화한다는 동일한 사도직 정신으로 움직인다면 말입니다.

이런 개인적 사도직 활동에 우리의 단체 사도직 활동의 성장도 더해야 합니다. 학생 기숙사, 피정의 집, 나바라대학교,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교육시설, 기술교육기관, 학교, 여성교육학교 등이 있습니다. 이런 활동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스도교 정신을 퍼뜨리는 중심지입니다. 평신도들이 시작하고, 같은 일을 하는 동료들과 똑같은 평신도 시민들이 전문적인 일로 운영하며, 모든 계층과 처지의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사회의 폭넓은 계층에게 자신의 직업이나 업무를 수행하면서 제기되는 문제에 그리스도교적 답을 줄 필요성을 일깨워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오푸스데이에 사회적 중요성과 의미를 부여합니다. 일부 회원들이 인간적으로 영향력 있는 직책을 차지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우리의 관심사가 조금도 아니므로 각자의 자유로운 결정과 책임에 맡깁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회원이 가장 소박한 일에서부터 하느님의 영향력을 전하는 활동을 수행한다는 사실이며, 하느님의 선하심 덕분에 그 수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가톨릭 신자인 존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된 날에야 미국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시작되었다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몬시뇰께서는 오푸스데이의 실상을 말씀하시면서 ‘조직된 무조직’이라고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이 표현의 의미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성령의 활동으로 이끌리는 개인의 사도적 자발성, 자유롭고 책임 있는 주도권에 우리가 최우선적이고 근본적인 중요성을 둔다는 뜻입니다. 통치 기구의 꼭대기에서 강요하는 조직 구조나 명령, 전술과 계획에 중요성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최소한의 조직은 있습니다. 로마에 본부를 두고 언제나 합의제로 운영되는 중앙 통치 기구와, 역시 합의제로 운영되며 각기 지도신부가 주재하는 지구 통치 기구들이 있습니다2. 그러나 이 기구들의 모든 활동은 근본적으로 한 가지 과제를 향합니다. 회원들의 신심 생활에 필요한 영적 도움과 적절한 영적·종교 교리적·인간적 양성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오리들이여, 물로 들어가라!’ 하는 셈입니다. 곧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의 모든 길을 성화하러 나가는 것입니다. 그 모든 길에는 하느님께서 지나가신 향기가 서려 있습니다.

그 경계, 그 순간에 이르면 단체로서의 오푸스데이는 자신의 과제, 곧 바로 그 목적을 위해 회원들이 결합한 그 과제를 마칩니다. 더 이상 어떤 지시도 할 필요가 없고, 할 수도 없으며, 해서도 안 됩니다. 그때부터 각 회원의 자유롭고 책임 있는 개인적 행동이 시작됩니다. 각자는 사도적 자발성과 완전한 개인적 자유를 가지고 행동하며, 내려야 할 구체적인 결정 앞에서 스스로 양심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육체노동이든 지적 노동이든 자신의 직업 활동을 성화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찾고 자기 환경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증언하려고 노력합니다. 각자가 자신의 세속 생활과 자신이 살아가는 현세의 현실 안에서 이런 결정을 자율적으로 내리므로, 당연히 서로 다른 선택과 판단, 행동이 자주 나타납니다. 한마디로 복된 무조직, 정당하고 필요한 다원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푸스데이의 올바른 정신에 본질적인 특징이며, 제게는 언제나 평신도 사도직을 이해하는 유일하게 올바르고 질서 있는 방식으로 보였습니다.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조직된 무조직’은 오푸스데이가 여러 나라의 인간 공동체가 겪는 문제를 그리스도교적으로 해결하는 데 단체로서도 기여하려는 바람에서 수행하는 단체 사도직 활동 자체에도 나타납니다. 이 단체의 활동과 사업은 언제나 직접적인 사도직 성격, 곧 교육·돌봄·자선 사업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바로 밑에서부터 사업 구상이 나오도록 북돋우는 것이며, 각 나라와 사회 집단의 상황과 필요, 가능성은 고유하고 보통 서로 다릅니다. 따라서 오푸스데이 중앙 통치 기구는 사실상 완전한 자율성을 누리는 지구 통치 기구들에, 자신들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구체적인 사도직 활동을 결정하고 추진하고 조직할 책임을 맡깁니다. 대학기관이나 학생 기숙사에서 진료소나 농민을 위한 실습 농장 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 자연스러운 결과로 다채롭고 다양한 활동의 모자이크가 생깁니다. 조직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모자이크입니다.

오푸스데이는 이 과정에 무엇을 기여했을까요? 이런 종합적 평가를 하기에는 지금이 역사적으로 가장 적절한 때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 문제들을 많이 다루었고, 그것이 제 영혼에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모릅니다. 평신도의 삶과 사명에 관한 적지 않은 개념과 상황도 교도권에서 충분한 확인과 빛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상당한 핵심 문제들은 일반적인 학계에서 참된 신학의 경계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오푸스데이에 주신 정신 안에서, 우리의 개인적인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충실히 살아 내려고 노력하는 그 정신 안에서, 우리에게는 논의 중인 그 문제들의 대부분이 이미 하느님에 의해 해결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해법들을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내세우려는 뜻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의 실재인 오푸스데이는 온 교회의 사목 활동에 어떻게 참여한다고 보십니까? 또 교회 일치 운동에는 어떻게 참여합니까?

먼저 한 가지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푸스데이는 교회 안의 완덕 신분의 발전 과정에 연결된 실재가 아니며, 그렇게 여겨질 수도 없습니다. 그 신분의 현대적이거나 쇄신된 형태가 아닙니다. 실제로 토마스 성인과 수아레스 등 여러 저자가 교리 안에 결정적으로 정립한 status perfectionis라는 신학적 개념도, 그 신학적 개념에 주어졌거나 주어질 수 있는 여러 법적 구체화도, 하느님께서 우리 단체에 바라신 영성과 사도직 목적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교리적으로 온전히 설명하려면 길어지므로, 이것만 생각하셔도 충분합니다. 오푸스데이는 회원들에게 모두가 세례로 이미 받은 봉헌과 다른 서원이나 맹세, 어떤 형태의 봉헌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 단체는 회원들이 신분을 바꾸어 다른 이들과 똑같은 평범한 신자이기를 그만두고 고유한 status perfectionis를 얻도록 하려는 뜻이 조금도 없습니다. 반대로 원하는 것, 또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신분 안에서, 교회와 시민 사회에서 차지하는 바로 그 자리와 처지에서 사도직을 하고 자신을 성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자기 자리에서 끌어내지 않으며, 자신의 일이나 현세의 고귀한 과제와 약속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푸스데이의 사회적 실재와 영성, 활동은 교회 생활의 전혀 다른 흐름 안에 자리합니다. 구체적으로 평신도들이 교회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그분 교회의 사명에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참여하게 하는 신학적·실생활적 과정에 속합니다. 오푸스데이가 존재해 온 거의 40년 동안,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려는 열망이 제 영혼과 제 자녀들의 영혼 안에서 이 차분하면서도 강한 관심을 통해 흐르도록 바라셨습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러합니다.

다른 문제들에 관해서도 비슷한 고찰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요한 교리적 설명에서나 양심의 교육에서나 교회법의 개혁 자체에서나, 앞으로 이루어야 할 것이 참으로 많고도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과제를 수행하는 데 성령께서 당신 백성, 특히 교계를 도와주시도록 주님께 많이 기도합니다. 기도는 언제나 제 위대한 무기였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오푸스데이를 계속 쓰시어, 어렵지만 놀라운 이 교회의 발전과 성장 과정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기여하고 돕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동시에 같은 교회론적 발전 과정에는 훌륭한 교리적 성과를 이룬 다른 측면들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오푸스데이의 정신과 삶의 증언이, 어쩌면 적지 않은 몫으로, 그에 기여하도록 바라셨습니다. 못지않게 훌륭한 다른 사도직 사업과 단체들의 귀중한 기여와 더불어 말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적 성과들이 하느님 백성 전체의 삶에 실제로 구현되기까지는 아직 상당한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기자님께서도 앞선 질문들에서 그중 몇 가지를 언급하셨습니다. 참된 평신도 영성의 발전, 교회 행정상의 일이거나 공식적인 일이 아닌 평신도 고유의 교회적 과제에 대한 이해, 평신도가 평신도로서 지니는 권리와 의무의 구별, 교계와 평신도 사이의 관계, 교회 안에서 남녀의 동등한 존엄과 과제의 상호 보완성, 하느님 백성 안에 질서 있는 여론을 형성할 필요 등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분명 매우 유동적인 현실이며, 때로는 역설도 있습니다. 40년 전에 말했더라면 거의 모든 사람, 또는 모든 사람이 충격을 받았을 똑같은 내용을 오늘날에는 거의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깊이 이해하고 질서 있게 실천하는 사람은 여전히 매우 적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더 잘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1932년, 세례가 사람에게 부여하는 고유한 존엄과 책임의 몇몇 측면과 결과를 오푸스데이의 제 자녀들에게 설명하면서 한 문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평범한 신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교회의 사도직에서 성직자를 돕는 것뿐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평신도 사도직이 언제나 교계 사도직에 대한 단순한 참여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직을 수행할 의무는 그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교회법적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사명을… 자신의 직업과 생업, 가족과 동료, 친구들을 통해 수행합니다.”

오늘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장엄한 가르침 이후에는, 아마 교회 안의 누구도 이 가르침의 정통성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신도 사도직을 위에서 아래로 조직된 사목 활동으로만 보는 생각을 실제로 버린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예전의 획일적인 평신도 사도직 개념을 넘어, 엄격한 중앙집권적 구조나 교회법적 사명, 교계의 위임 없이도 사도직이 있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평신도를 longa manus Ecclesiae라고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 동시에 머릿속에서 ‘하느님 백성인 교회’라는 개념을 더 제한적인 ‘교계’ 개념과 혼동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또 교계와 세심한 친교를 이루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정당한 사도직 자율성의 영역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평신도는 얼마나 될까요?

오푸스데이가 교회 일치 운동에 어떻게 참여하는지도 물으셨습니다. 작년에 한 프랑스 기자에게, 다정하고 아버지다운 매력에 이끌려 제가 한번은 요한 23세 교황님께 드린 말씀을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그 일화가 갈라진 우리 형제들의 출판물에까지 알려졌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교황 성하, 우리 오푸스데이에서는 가톨릭 신자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이 언제나 따뜻한 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교회 일치 정신을 성하께 배운 것은 아닙니다.” 교황님께서는 감동하시어 웃으셨습니다. 이미 1950년부터 성좌가 오푸스데이에 비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비그리스도인까지 협력 회원으로 받아들이도록 허락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푸스데이의 정신에 이끌려 우리 사도직에 협력하는 갈라진 형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자기 교파의 목사와 심지어 주교들도 적지 않습니다. 접촉이 활발해질수록 호의와 따뜻한 이해의 표현도 점점 잦아집니다. 회원들의 영성이 그리스도인에게 세례가 부여하는 약속과 요구를 책임 있게 살아간다는 단순한 결심에 중심을 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직업 활동을 성화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찾고 사도직을 수행하려는 바람, 세속의 현실에 깊이 참여하고 그 고유한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관상하는 영혼의 정신과 사랑으로 이를 대하는 것, 활동을 조직할 때 개인과 영혼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 하느님 자녀 됨에서 오는 존엄과 자유에 대한 존중을 우선하는 것, 평신도 사도직을 획일적이고 제도 중심적으로 보는 생각에 맞서 공동선을 마땅히 존중하는 가운데 정당한 주도권을 옹호하는 것, 이 밖에도 우리의 존재 방식과 일하는 방식의 여러 측면이 쉽게 만나는 지점입니다. 그곳에서 갈라진 형제들은 자신들과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그토록 많은 근거 있는 교회 일치의 희망을 걸어 온 교리적 전제의 상당 부분이 실제 삶이 되고 오랜 세월 검증된 모습을 발견합니다.

주제를 바꾸어 현재 교회의 상황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이를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진보적’, ‘통합주의적’이라고 불려 온 흐름들은 이 시기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기에 현재 교회의 교리적 상황은 모든 성장의 위기가 그렇듯 긍정적이면서 동시에 조심스러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풍요로운 교리는 온 교회, 곧 사제다운 하느님 백성 전체를 맡겨진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새롭게 충실하는 매우 희망찬 새 단계 앞에 서게 했으므로 분명 긍정적입니다. 동시에 조심스러운 때이기도 합니다. 도달한 신학적 결론들이,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성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극히 살아 있는 신학이며, 사목적·수덕적·규율적 차원에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적용을 지닙니다. 이는 전례와 교계의 조직 구조, 사도직 형태, 교도권, 세상과의 대화, 교회 일치 운동 등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내적·외적 삶에 매우 깊이 닿아 있고, 따라서 신자들의 그리스도교적 삶과 양심 자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 두 현실은 각각 우리 영혼에 그리스도교적 낙관과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낙관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풍요롭게 하신 그 교리가 충만한 열매를 맺게 하시리라는 기쁜 확신입니다. 동시에 연구하거나 통치하는 이들에게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특히 지금은 문제를 연구할 때 평정과 숙고가 부족하면 엄청난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자님께서 통합주의적, 진보적이라고 부르신 흐름들에 관해서는, 지금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말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분류하거나 단순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 나아가 가능하다는 생각 자체를 언제나 거부해 왔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참으로 격렬한 극단에 이르거나, 신학자들과 신자들 전체가 언제나 두 극단 중 하나를 향해야 하는 운명인 듯 영속화하려는 이 구분은, 근본적으로 하느님 백성의 교리적·실생활적 진보가 끊임없는 변증법적 긴장의 결과라는 확신에 따른 것이라고 봅니다. 반면 저는 온 마음으로, 원하시는 곳과 원하시는 사람에게 부시는 성령의 활동을 믿기를 더 좋아합니다.

목차
1

성십자가 사제회는 성직 자치단에 고유하며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떼어 놓을 수 없는 단체입니다. 오푸스데이에 입적한 성직자들과 여러 교구에 입적한 다른 사제 또는 부제들로 이루어집니다. 다른 교구의 이 사제들과 부제들은 자치단 성직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교구의 사제단에 속하며, 오직 자기 직권자만을 장상으로 따릅니다. 그들은 오푸스데이의 정신과 수덕적 실천에 따라 자신의 성화를 추구하기 위해 성십자가 사제회에 가입합니다. 오푸스데이 단장은 동시에 성십자가 사제회의 총장입니다.

성경 인용
목차
2

이 책의 「소개」에서 일부 법적·조직적 측면에 관한 답변들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다시 상기합니다. 그 답변들은 오푸스데이가 설립자가 바라던 최종적인 법적 형태를 아직 받지 못했던 당시에는 정확하고 명확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같은 「소개」에 실린 간략한 설명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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