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교회 안에서 여성의 삶
몬시뇰, 지금까지 여성이 거의 전적으로 활동하던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생활에서 여성의 참여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보십니까? 또 여성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려면, 여성은 전반적으로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엇보다 방금 말씀하신 두 영역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남성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만 여성에게 고유한 여러 특성을 지니고, 집과 가정은 언제나 여성의 삶에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가정의 일에 헌신하는 것이 인간적으로나 그리스도인으로서나 중요한 역할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온갖 고귀한 직종과 직업 가운데 다른 전문적인 일에 종사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가정의 일도 하나의 직업입니다. 문제를 그런 식으로 제기할 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강조점만 달리하면서 두 영역을 끊임없이 대립시킨다면,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바로잡으려는 잘못보다 더 큰 잘못에 빠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이 자기 가족을 위한 일을 저버리는 것은 더 심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여성이 오직 가정 밖에서만 자신의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가족에게 바친 시간이 자신의 인격 발달과 성숙에서 빼앗긴 시간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형태이든 가정은 인격이 성장하기에 특히 좋은 자리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게도 가정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보살피는 일은 여성에게 언제나 가장 큰 존엄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남편과 자녀를 돌보는 일, 좀 더 넓게 말하면 자기 주변에 따뜻하고 사람을 길러 주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일을 통해 여성은 자신의 사명에서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수행하며, 따라서 그 안에서 자신의 인격적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사회생활의 다른 측면, 나아가 예를 들어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도 대립하지 않습니다. 여성은 그러한 분야에서도 한 인격체로서, 그리고 언제나 여성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값진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 그렇게 할 것입니다. 가정과 사회 모두 그러한 특별한 기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기여는 결코 부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성의 발전과 성숙, 해방이 남성과 똑같아지려는, 곧 획일화되려는 요구나 남성의 행동 방식을 모방하는 것을 뜻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여성에게 성취가 아니라 손실일 것입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낫거나 못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권리의 평등을 말할 수 있으며, 이는 민법과 교회법 모두에서 법적으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여성도 남성과 정확히 똑같이 인격체로서, 하느님의 딸로서 존엄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근본적인 평등을 바탕으로 각자는 자신에게 고유한 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차원에서 해방이란 자신이 지닌 잠재력을 온전히 발전시킬 실제적인 가능성, 곧 고유한 한 사람으로서 지닌 잠재력과 여성으로서 지닌 잠재력을 온전히 발전시킬 가능성을 뜻합니다. 법 앞에서의 평등과 법에 따른 기회의 평등은 이러한 다양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전제하고 증진합니다. 그 다양성은 모두에게 풍요로움이 됩니다.
여성은 가정과 시민 사회와 교회에 자신에게 고유하며 오직 자신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것을 전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섬세한 다정함, 지칠 줄 모르는 너그러움, 구체적인 것에 대한 애정, 예리한 지성, 직관력, 깊고 소박한 신심, 끈기 등입니다. 이처럼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기여의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성다움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명을 수행하려면 여성은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순진하게 남을 모방하려는 태도에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태도는 대체로 여성을 열등한 위치에 놓이게 하기 쉽고, 자신에게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주체성과 진실성을 지니고 제대로 양성된다면, 자신이 부름받았다고 느끼는 사명이 무엇이든 자신의 일과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것입니다. 하루를 남편과 자녀에게 바치든, 어떤 고귀한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고 다른 일에 온전히 헌신하든, 그 삶과 일은 참으로 건설적이고 풍요로우며 의미로 가득할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길에서 인간적이고 신적인 소명에 충실할 때, 여성으로서의 인격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으며 실제로 실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인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겉보기에 두드러지지 않는 삶이 지닐 수 있는 초월적 가치의 모범이실 뿐 아니라 그 증거이시기도 하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그런데 여성은 때때로 자신에게 맞고 자신이 부름받은 자리에 실제로 있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집 밖에서 일할 때는 가정에서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다가오고, 가족에게 온전히 전념할 때는 자신의 가능성이 제한된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갈등을 겪는 여성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그러한 감정은 아주 현실적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한계, 곧 인간이기에 우리 모두가 지닌 한계보다는, 삶 전체를 이끌어 줄 뚜렷한 이상이 없는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자각하지 못하는 교만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면에서나 어떤 수준에서나 최고가 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므로 방향을 잃고 불안에 빠지거나, 심지어 낙심하고 권태를 느끼게 됩니다. 모든 일에 관여할 수는 없고, 무엇에 마음을 쏟아야 할지 모르며, 결국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영혼이 시기심에 노출되고, 상상력이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가 환상 속에서 피난처를 찾기 쉽습니다. 환상은 현실에서 멀어지게 하여 마침내 의지를 잠재웁니다. 제가 여러 차례 ‘그랬더라면 하는 신비주의’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헛된 공상과 거짓 이상주의로 이루어진 태도입니다.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이 직업을 갖지 않았더라면! 건강이 더 좋았더라면, 나이가 더 젊었더라면, 시간이 더 많았더라면!’ 하는 것이지요.
해결책은 가치 있는 모든 것이 그렇듯 대가를 요구하지만, 인간 삶의 참된 중심을 찾는 데 있습니다. 모든 것에 우선순위와 질서와 의미를 줄 수 있는 것, 곧 참된 내적 생활을 통한 하느님과의 사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며 그분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의 의미를 발견하고, 인간적인 이상이 신적인 이상으로 바뀌며, 우리 삶 앞에 새로운 희망의 지평이 열립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활동의 이러저러한 부분뿐 아니라 삶 전체도 기꺼이 희생하기에 이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함으로써 삶은 가장 깊은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여성과 관련해 제기하신 문제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양상은 다르지만 많은 남성도 언젠가 비슷한 일을 겪습니다. 그 뿌리는 대개 같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빛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깊이 있는 이상이 부족한 것입니다.
어쨌든 사소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작은 해결책들도 실천해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이 많을 때는 순서를 정하고 체계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많은 어려움은 질서가 없고 그 습관이 부족한 데서 생깁니다. 천 가지 일을 하면서도 모두 잘해 내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계획을 세웠고, 굳은 의지로 많은 일에 질서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올 일이나 앞서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을 생각하느라 허둥대지 않고, 매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줄 알았습니다. 반면 일이 많다는 사실에 압도되어, 그렇게 압도된 채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여성들도 있습니다.
물론 가정을 꾸려 가는 일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는 여성들도 언제나 많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것이 크고도 보람 있는 일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이 직업은 참되고 고귀한 직업이기에, 이를 통해 가족뿐 아니라 수많은 친구와 지인,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줍니다. 때로는 다른 직업인들보다 훨씬 폭넓은 일을 해냅니다. 더구나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오푸스데이의 제 딸들이 운영하는 곳과 같이, 여성 양성을 위한 센터에서 그 경험과 지식을 수백 명의 사람들을 위해 활용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때 그들은 가정생활을 가르치는 교사가 됩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많은 대학 교수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교육하는 교사가 됩니다.
같은 주제를 거듭 여쭙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편집부로 오는 편지를 보면, 자녀가 많은 가정의 어머니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이 아이를 낳는 역할에만 묶여 있다고 불평합니다. 직업 활동, 문화생활, 사회적 활동 등 다른 분야에 자신의 삶을 쏟을 수 없어 크게 만족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분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회적 활동이란 헌신과 봉사의 마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고, 모든 이의 선익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성이 집에서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사회적 역할일 뿐 아니라, 가장 폭넓은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역할이 되기도 쉽습니다.
그 가정에 자녀가 많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어머니의 일은 전문 교육자와 양성자의 일에 견줄 만하며, 많은 경우 비교해 보면 오히려 더 낫습니다. 한 교사는 어쩌면 평생에 걸쳐 몇몇 소년이나 소녀를 어느 정도 잘 길러 냅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가장 근본적인 측면에서 깊이 있게 길러 줄 수 있고, 그들 또한 다른 이들을 길러 주는 사람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책임감과 덕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문제에서도 순전히 양적인 기준에 마음이 끌려, 수천 명이 자기 수업을 거쳐 가는 교사나 수천 명의 독자에게 글을 쓰는 작가의 일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 교사와 작가는 실제로 몇 명을 길러 냅니까? 어머니는 셋, 다섯, 열 명 또는 그보다 많은 자녀를 돌봅니다. 그리고 그들을 참된 예술 작품으로, 교육과 균형 감각과 이해심과 그리스도교적 인생관을 갖춘 놀라운 사람으로 길러 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행복하고, 참으로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아들과 딸이 집안일을 돕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녀를 잘 가르칠 줄 아는 어머니는 그렇게 할 수 있으며, 그 덕분에 기회와 시간을 얻습니다. 그 시간을 잘 활용하면 자신의 취미와 재능을 가꾸고 교양을 풍부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오늘날에는 여러분도 잘 아시듯 제대로 다루고 충분히 활용하면 수고를 크게 덜어 주는 기술적 수단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이 일에서도 다른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역량이 결정적입니다. 최신 세탁기가 있는데도 손빨래를 할 때보다 더 오래 걸리고, 빨래도 더 못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도구는 사용할 줄 알 때에만 유용합니다.
저는 결혼하여 자녀도 꽤 많으면서 가정을 아주 잘 꾸리고, 다른 사도직 활동에 협력할 시간까지 내는 여성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부부인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도 그렇게 했습니다. 두 사람은 가정과 생업에서 일했으며, 성 바오로의 훌륭한 협력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말과 모범으로 아폴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이끌었습니다. 아폴로는 나중에 초기 교회의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참으로 원한다면 어떤 의무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많은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일을 할 시간이 있습니다. 직업적 소명 의식을 갖고 가정을 꾸릴 시간, 끊임없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 줄 시간, 자신의 교양을 높이고 다른 이들의 교양도 풍부하게 해 줄 시간, 그토록 많은 유익한 일을 할 시간이 있습니다.
공적 생활과 정치에서 여성의 참여를 언급하셨습니다. 현재 스페인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 여성이 수행해야 할 고유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회생활 전반에 여성이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전적으로 긍정적인 현상이며, 앞서 말씀드린 더 폭넓은 현상의 한 부분입니다. 현대의 민주 사회는 여성이 정치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권리를 인정하고, 원하는 모든 여성이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유리한 여건을 마련해야 합니다.
공적인 일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헌신하려는 여성은 공동체 안에서 책임감 있게 긍정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충분히 준비할 의무가 있습니다. 모든 전문 직업은 사전 교육을 요구하며, 그 뒤에도 준비한 역량을 향상하고 새롭게 생기는 상황에 맞추어 나가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합니다. 이는 사회의 지도적 자리를 맡으려는 사람들에게 특히 중대한 의무입니다. 그들은 모든 이의 복지가 달린 매우 중요한 봉사를 하도록 부름받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준비된 여성에게는 모든 수준에서 공적 생활의 모든 분야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특정한 과제를 따로 정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분야에서 여성의 고유함은 과제나 직책보다는 그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여성으로서 찾아내는 섬세한 차이에 있으며, 나아가 그러한 문제 자체를 발견하고 제기하는 방식에도 있습니다.
여성은 자신에게 고유한 타고난 재능을 통해 시민 생활을 크게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가정법이나 사회 관련 입법이라는 광대한 분야를 바라보면 이 점은 분명합니다. 여성의 자질은 가정생활과 교육 환경, 젊은이들의 앞날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는 조치를 취할 때, 참된 인간적 가치와 그리스도교적 가치가 존중되도록 가장 확실하게 보장해 줄 것입니다.
방금 사회와 가정의 문제를 해결할 때 그리스도교적 가치가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 여기서는 그 가치가 공적 생활 전체에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싶습니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이 정치 활동에 종사할 때에도 그리스도교 신앙은 참된 사도직을, 곧 사회 전체를 위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봉사를 수행할 책임을 부여합니다. 공적 생활에서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교회를 대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더구나 개인의 출세나 정당의 이익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라는 뜻은 더욱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이 모든 현세적인 문제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형성하고, 언제나 자신이 고백하는 신앙에 일치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을 지라는 뜻입니다.
지난해 10월 팜플로나에서 나바라 대학교 후원회 총회를 맞아 집전하신 미사의 강론에서, 인간의 사랑에 관해 저희의 마음을 깊이 움직이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많은 여성 독자가 그 말씀을 듣고 받은 감동을 편지로 전해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혼인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잘 아는 일, 곧 여러 나라에서 이미 오랫동안 사제로 살아오며 경험한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푸스데이 회원 대부분은 혼인한 삶을 살며, 그들에게 인간의 사랑과 부부의 의무는 하느님께 받은 소명의 일부입니다. 오푸스데이는 혼인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며 소명이 되게 했습니다. 이는 개인의 성화와 사도직에 많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저는 거의 40년 동안 혼인의 소명적 의미를 설교해 왔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과 고귀하고 순결한 인간의 사랑을 자신의 삶에서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남녀들이, 혼인은 이 땅에서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라는 제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의 눈빛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저는 얼마나 여러 번 보았는지 모릅니다!
혼인은 혼인한 사람들이 그 안에서 거룩해지고, 그 혼인을 통해 다른 이들도 거룩하게 하도록 마련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부부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가 베푸는 특별한 은총이 있습니다. 혼인 생활로 부름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삶 안에서 거룩해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합니다. 날마다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언제나 희망과 애정을 품고 그리스도인 가정들을 생각합니다. 혼인성사에서 태어난 모든 가정을 생각합니다. 그 가정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와 사랑이라는 위대한 신적 신비, 곧 sacramentum magnum! (Eph 5, 32), 위대한 성사의 빛나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이 그리스도교적 세포들이 거룩함을 갈망하며 태어나고 자라도록 힘써야 합니다. 입문의 성사인 세례가 이미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신적인 사명을 부여하며, 각자는 자신의 길에서 그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다른 이들을 거룩하게 하면서 자신도 거룩해지도록 부름받았음을, 사도가 되도록 부름받았음을, 그리고 자신의 첫 사도직이 가정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교육하며 사회에 그리스도교의 빛을 비추는 일에 담긴 초자연적 활동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의 사명에 대한 이러한 자각에 그들의 삶의 결실과 성공, 곧 행복이 크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의 행복을 이루는 비결은 공상이 아니라 일상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집에 돌아올 때 느끼는 숨은 기쁨을 발견하는 데 있고, 자녀들과 다정하게 어울리는 데 있으며, 가족 전체가 협력하는 매일의 일에 있습니다. 씩씩하게 맞서야 하는 어려움 앞에서 밝은 마음을 지니는 데 있고, 문명이 제공하는 모든 발전을 활용하여 집을 쾌적하게 하고 삶을 더 수월하게 하며 교육을 더 효과적으로 하는 데에도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가정을 이루도록 부름받은 이들에게 늘 서로 사랑하라고, 연애하던 시절 서로에게 품었던 설레는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삶에 늘 따르는 슬픔과 역경이 시작되면 사랑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사이며 이상이고 소명인 혼인을 빈약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사랑은 더욱 굳건해집니다. 슬픔과 역경이 급류처럼 밀려와도 참된 사랑을 잠기게 할 수는 없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함께 나누는 희생은 두 사람을 더욱 하나로 묶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듯 aquae multae, 곧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수많은 어려움도 non potuerunt extinguere caritatem (Cant 8, 7), 사랑을 끌 수는 없습니다.
혼인이 성덕의 길이라는 가르침은 몬시뇰의 설교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1934년 『영적 고찰』을 쓰셨을 때부터 혼인을 소명으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책과 나중에 나온 『길』에서도 혼인은 그리스도의 참모부가 아니라 일반 병사들을 위한 것이라고 쓰셨습니다. 이 두 측면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오푸스데이의 정신과 삶에서는 이 두 측면을 조화시키는 데 어떠한 장애도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또한 영적인 동기로 살아가는 독신의 더 높은 탁월성은 저 개인의 신학적 견해가 아니라 교회의 신앙 교리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930년대에 제가 그 문장들을 쓸 당시 가톨릭 환경에서는, 구체적인 사목 생활에서 젊은이들이 동정의 초자연적 가치만 높이 여기게 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완덕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성덕에 이르는 또 하나의 길인 그리스도교적 혼인의 가치는 그늘에 가려 두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육기관에서는 젊은이들이 혼인의 존엄을 마땅히 받아야 할 만큼 소중히 여기도록 교육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중등교육의 마지막 학년에 학생들에게 해 주는 피정에서, 혼인으로 나아갈 가능성보다 수도 소명의 가능성을 생각할 자료를 더 많이 제시하는 일이 흔합니다. 갈수록 줄어들고는 있지만, 부부 생활을 낮추어 보고 젊은이들에게 교회가 그저 용인할 뿐인 어떤 것으로 제시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가정을 이루면 진지하게 성덕을 지향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푸스데이에서는 언제나 다르게 해 왔습니다. 사도적 독신의 존재 이유와 탁월성을 아주 분명히 밝히면서, 혼인을 이 땅에서 하느님께 이르는 길로 제시해 왔습니다.
저는 인간의 사랑을, 주님께서 제게 생명을 주시고자 쓰신 제 부모님의 거룩한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사랑을 두 손으로 축복합니다. 빵과 포도주가 성체성사의 재료이듯 부부는 혼인성사의 집전자이자 그 재료 자체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인간의 순결한 사랑을 노래하는 모든 노래를 좋아합니다. 제게는 그것이 인간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가락입니다. 동시에 저는 사도적 독신이라는 소명의 길을 따르는 이들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소중히 여기지 않는 독신자들이 아니라고 늘 말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 소명의 본질 자체인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실재로 설명됩니다. 저는 그 ‘사랑’을 대문자로 쓰기를 좋아합니다.
혼인의 소명을 이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propter regnum coelorum (Mt 19, 12), 곧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 소명의 더 높은 탁월성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모순도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교회의 가르침을 알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며, 또한 자신의 개인적인 소명을 알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면,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양립하는지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확신합니다. 곧 신앙을 지니고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혼인은 일반 병사들을 위한 것이라고 썼을 때, 저는 교회 안에서 언제나 일어나 온 일을 묘사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교황을 으뜸으로 삼는 주교단을 이루며 교황과 함께 온 교회를 다스리는 주교들은 독신으로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서 선발됩니다. 혼인한 사제들을 허용하는 동방 교회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독신자들은 평신도 사도직에서도 사도직 사업을 지속적으로 이끌고 뒷받침하는 데 헌신할 수 있도록, 실제로 마음과 행동에서 더 큰 자유를 지닌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평신도들이 훌륭하고도 매우 중요한 사도직을 할 수 없다거나 실제로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책임을 지는 자리에서 다양한 역할과 다양한 헌신의 방식이 있다는 뜻일 뿐입니다.
군대에서는 일반 병사들이 참모부만큼이나 필요하며, 더 영웅적이고 더 큰 영광을 받을 만할 수도 있습니다. 그 비유로 표현하려던 것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결국 다양한 과제가 있으며, 모두 중요하고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기 소명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각자에게 가장 완전한 것은 언제나 오직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인 생활 안에서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며 자신의 소명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는 그리스도인은, 사도적 독신으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저절로 특별한 존경과 깊은 애정을 느낍니다. 자기 자녀 가운데 누군가가 주님의 은총으로 그 길을 걷기 시작하면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혼인 소명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그 소명 덕분에 독신자든 기혼자든 모든 이의 위대한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인간의 사랑이 맺은 열매를 바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부가 몇 명의 자녀를 두어야 하는지를 두고 받는 조언 때문에, 심지어 일부 사제의 조언 때문에도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부부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시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양심을 혼란에 빠뜨리는 이들은 생명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눈먼 이를 이끄는 눈먼 이들, 자신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엄한 질책을 받아 마땅합니다. 저는 그들의 의도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이가 연민과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려는 바람에서 그런 조언을 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가르침을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가르침을 왜곡하는 이들의 파괴적인 행위, 많은 경우 악마적인 그 행위가 제게 깊은 슬픔을 준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습니다.
부부들은 이 문제에 관해 조언과 권고를 들을 때,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는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진실함, 곧 올곧은 마음이 있고 최소한의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다면, 양심은 다른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일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줄 압니다. 자기 이기심에 유리한 조언을 찾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조언의 이른바 권위로 자기 영혼의 외침을 잠재우려 하고, 심지어 가장 관대한 조언자를 만날 때까지 조언자를 바꾸어 찾아다닐 수도 있습니다. 다른 문제는 제쳐 두더라도, 이것은 하느님의 자녀에게 걸맞지 않은 바리사이적인 태도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의 조언, 특히 도덕이나 신앙의 문제에서 사제의 조언은 특정한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깨닫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조언이 개인적인 책임을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우리 자신, 곧 각자가 결정해야 하며, 자신의 결정에 대해 각자 하느님께 직접 답변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조언보다 위에 하느님의 법이 있습니다. 이 법은 성경에 담겨 있으며,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교회의 교도권이 보존하고 제시합니다. 개인적인 조언이 교도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하느님의 말씀과 어긋날 때는 그러한 그릇된 견해에서 단호히 벗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올곧게 행동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은총으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깨우쳐 주시고, 필요할 때에는 비록 여러 번 어려운 길일지라도 그 영혼을 바르고 깨끗한 길로 이끌 줄 아는 사제를 만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영적 지도를 할 때에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그저 기계적으로 실행하기만 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데 힘써서는 안 됩니다. 그와 반대로 영적 지도는 판단력을 갖춘 사람을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판단력은 성숙함과 확고한 신념, 충분한 교리 지식, 섬세한 마음, 의지의 단련을 전제로 합니다.
부부가 자신의 소명이 지닌 존엄을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들이 인간의 사랑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사랑에 이르도록 하느님께 부름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녀를 낳고 그 뒤에 교육하는 일에서 하느님의 창조 능력에 협력하도록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자신들의 집과 가정생활 전체를 그리스도인의 모든 덕을 증언하는 자리가 되게 하라고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아무리 되풀이해도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혼인은 하느님께 이르는 위대하고 놀라운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의 신적인 모든 것이 그렇듯, 은총에 대한 응답과 너그러움, 헌신과 봉사라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어떤 형태로든 이기심은 우리 삶을 다스려야 하는 하느님의 사랑에 어긋납니다. 이는 혼인과 자녀 수에 관해 반드시 깊이 명심해야 하는 근본적인 점입니다.
저는 인류를 괴롭히는 큰 문제들이나 어떤 가정이 부딪힐 수 있는 구체적인 어려움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를 자주 생각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사제로서 제가 지녀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집니다. 그러나 그런 길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녀가 꽤 많은 여성들 가운데 또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친척과 친구들에게 차마 알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피임약이 있는데도 자녀를 많이 두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여건에서는 자녀가 많은 가정을 꾸려 가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맡기시는 사명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자녀를 많이 두는 부모들을 저는 축복합니다. 또한 부부들에게 생명의 샘을 막지 말고,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를 보내 주신다면 초자연적 안목과 용기를 지니고 그 가정을 꾸려 가라고 권합니다.
제가 자녀가 많은 가정을 칭찬할 때, 순전히 생리적인 관계의 결과로 자녀가 많아진 가정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덕을 실천한 열매로 자녀가 많은 가정, 인격의 존엄을 깊이 인식하는 가정, 하느님께 자녀를 드린다는 것은 자연적 생명으로 낳는 데 그치지 않고 오랜 교육의 과정 전체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아는 가정을 뜻합니다. 생명을 주는 것이 첫째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일상적인 수단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이 바로 자녀가 적은 가정을 이루는 데 있는 구체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생 제한을 이상이나 보편적인 의무로, 또는 그저 일반적인 의무로 삼는 이론들은 범죄적이고 반그리스도교적이며 인간 이하의 것입니다.
이른바 공의회 이후의 정신을 내세워 자녀가 많은 가정을 반대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 교리를 변질시키고 왜곡하는 일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부부들 가운데, 충분히 숙고한 공동의 합의에 따라 더 많은 자녀를 기꺼이 받아들여 훌륭히 교육하는 이들은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Const. past. Gaudium et spes, n. 50). 또한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1966년 2월 12일에 하신 또 다른 연설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최근에 막을 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리스도인 부부들에게 너그러운 정신을 널리 퍼뜨려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늘려 가게 하기를 바랍니다. …… 하느님 나라가 이처럼 확장되고, 영원한 구원과 현세의 구원을 전하기 위해 교회가 인류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여러분의 너그러움에도 맡겨져 있음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수 자체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가 많거나 적다는 것만으로 어떤 가정이 더 그리스도교적이거나 덜 그리스도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올곧게 혼인 생활을 하느냐입니다. 참된 상호 사랑은 남편과 아내의 공동생활을 넘어 그 자연스러운 열매인 자녀들에게 뻗어 갑니다. 반대로 이기심은 결국 그 사랑을 단순한 본능의 충족으로 떨어뜨리고, 부모와 자녀를 이어 주는 관계를 파괴합니다. 자신이 부모의 뜻에 반하여 세상에 왔다고, 순결한 사랑에서가 아니라 부주의나 계산 착오로 태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스스로 부모의 좋은 자녀, 참된 자녀라고 느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자녀 수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녀가 많은 가정에 대한 공격이 신앙의 부족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봅니다. 그것은 너그러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산물입니다. 그 분위기는 겉보기에는 이타적인 이유로 이기심과 차마 털어놓을 수 없는 어떤 행위들을 감추려 합니다. 출산 억제를 가장 많이 선전하고 다른 나라들에까지 그 실행을 강요하는 나라들이 바로 생활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들이라는 역설이 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경제적·사회적 논거가 그들 자신으로 하여금 누리는 풍요로운 재화의 일부를 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포기하게 한다면, 그 논거를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까지는 그 주장을 실제로 좌우하는 것이 쾌락주의와 정치적 지배의 야심, 곧 인구를 통한 신식민주의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양심에 거리낌 없이 피임을 위해 피임약 사용을 권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있다는 것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제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교황의 가르침을 태연하게 무시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기 어려울 만큼 경솔하게도, 교황이 ex cathedra로 말씀하지 않으실 때에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한 개인 학자일 뿐이라고 주장해서도 안 됩니다. 교황은 틀리고 자신들은 틀리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부터가 이미 지나친 오만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교황이 스승이실 뿐 아니라, 명시적으로 그렇게 선언하실 때에는 무류의 스승이실 뿐 아니라, 최고 입법자이시기도 하다는 점을 잊고 있습니다. 이 경우 현 교황 바오로 6세께서 명백하게 지시하신 것은, 이처럼 민감한 문제에서 존경하는 기억 속에 계신 비오 12세 교황의 모든 규정이 여전히 유효하므로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오 12세께서는 개별적이고 어려운 경우에 임신을 피하기 위해 몇 가지 자연적인 방법만 허용하셨으며, 피임약은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반대의 것을 조언하는 것은 중대한 사안에서 교황 성하께 중대하게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든 다른 것이든 피임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모든 차원에서 생겨나는 불행한 결과에 관해서라면 두꺼운 책 한 권을 쓸 수도 있겠습니다. 부부 사랑의 파괴, 곧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배우자가 아니라 공범으로 바라보게 되는 일, 불행, 부정, 영적·정신적 불균형, 자녀들에게 미치는 헤아릴 수 없는 해로움, 혼인 생활의 평화를 잃는 일 등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저 교황께 순종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만일 언젠가 교황께서 임신을 피하기 위해 특정한 약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결정하신다면, 저는 교황 성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에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교황의 규정과 윤리 신학의 규범을 지키면서, 방금 언급한 명백한 위험을 각 경우에 검토하여, 양심에 따라 각자에게 조언을 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세상을 구할 이들은 영의 삶을 마비시키고 모든 것을 경제나 물질적 안락의 문제로 축소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제나 명심할 것입니다. 도덕 규범이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맞추어져 있음을 아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그 신앙이 요구하는 것을 기꺼이 감당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 우리 삶이 지닌 초월적 의미를 전하는 이들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현실 도피를 조장하게 할 것이 아니라, 모든 이가 알맞은 물질적 수단을 갖추고 모든 이에게 일이 있으며 누구도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서 부당한 제약을 받지 않도록 효과적으로 노력하게 해야 합니다.
혼인 생활에서 자녀를 갖지 못하는 일은, 그로 인해 좌절감을 느낄 수 있기에 때로는 불화와 몰이해의 원인이 됩니다. 자녀가 없는 그리스도인 부부는 자신의 혼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먼저 너무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하느님께 자녀를 허락해 주시기를, 그것이 그분의 뜻이라면 구약의 성조들을 축복하셨듯 자신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 모두 좋은 의사를 찾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자녀를 주시지 않는다면, 이를 어떤 좌절로도 여겨서는 안 됩니다. 바로 그 사실 안에서 자신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기에 자녀를 주시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를 얻었다는 순수한 인간적 기쁨 없이도, 똑같은 노력과 똑같이 섬세한 헌신으로 이웃을 도우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패했다고 느끼거나 슬픔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부부가 내적 생활을 한다면,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재촉하시고 이끌어 자신의 삶을 너그러운 그리스도교적 봉사가 되게 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자기 자녀를 통해 수행했을 사도직과는 다르지만, 그에 못지않게 놀라운 사도직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도움과 사랑과 따뜻한 애정이 필요한 사람들을 곧 발견할 것입니다. 또한 참여할 수 있는 사도직 활동도 많습니다. 그 일에 마음을 쏟을 줄 알고, 자신을 잊고 너그럽게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 줄 줄 안다면, 놀라운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그 영혼을 참된 평화로 가득 채워 줄 영적 부성의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길은 경우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 봉사하려는 열망과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돌보는 데 이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너그러운 겸손을 지닌 이들에게 언제나 상을 주십니다. 그들의 영혼에 깊은 기쁨을 주십니다.
어떤 혼인 생활에서는 이유가 무엇이든 아내가 남편과 헤어져, 품위를 훼손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 혼인 유대의 불가해소성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남편과 헤어진 이 여성들은 새 가정을 꾸릴 가능성이 자신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답해 주시겠습니까?
그 여성들의 고통을 이해하면서, 저는 그런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결코 잔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상황이 특히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주님과 복되신 그분의 어머니께 의지한다면 은총의 도움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혼인의 불가해소성은 교회의 변덕스러운 생각도 아니며, 단순히 교회가 제정한 법에 불과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법과 하느님의 법에 속하며, 우리의 본성과 은총의 초자연적 질서에 온전히 부합합니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경우 부부의 행복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되고, 자녀들에게는 영적인 차원까지 포함하는 안정의 필수 조건이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지금 이야기하는 이런 고통스러운 경우에도,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면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깊은 충족감이 따릅니다. 이것은 궁여지책이나 위로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의 본질입니다.
그 여성들에게 이미 돌보아야 할 자녀가 있다면, 갈라진 가정의 부족함을 그 영혼들 안에서 채워 주기 위해 끊임없이 사랑에 찬 어머니의 헌신을 요구받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 헌신이 특히 더 필요합니다. 또한 자신들에게는 희생을 요구하는 그 불가해소성이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온전함을 지켜 주는 보호막이며, 부부의 사랑을 고귀하게 하고 자녀들이 버림받는 것을 막아 주는 것임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혼인의 불가해소성이라는 그리스도교 계명이 겉보기에 엄격하다고 놀라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확증하셨을 때 사도들도 놀랐습니다. 짐이나 멍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당신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많은 상황이 피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적지 않은 경우 피할 수 있었고 피했어야 했던 그 상황들을 너무 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처지에 있는 여성의 삶이 실제로 학대받는 다른 여성의 삶보다, 또는 삶에 따르는 다른 큰 육체적·정신적 고통 가운데 하나를 겪는 사람의 삶보다 더 고통스럽습니까?
한 사람을, 나아가 사회 전체를 참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안락을 애타게 추구하며 자기 뜻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무조건 없애려는 시도입니다. 삶에는 천 가지 얼굴이 있고 아주 다양한 상황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거칠고, 어떤 것은 겉보기에 수월할지도 모릅니다. 그 하나하나가 고유한 은총을 지니며, 하느님께서 고유하게 부르시는 소리입니다. 일하고 사랑의 신적 증거를 보여 줄 새롭고도 유일한 기회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짓눌리는 사람에게 저는 자신의 문제도 조금은 잊고 다른 이들의 문제에 마음을 쓰도록 노력하라고 조언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더 큰 평화를 얻을 것이며, 무엇보다 거룩해질 것입니다.
가정의 근본적인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안정된 가정의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치적·사회적 이유로 가족이 갈라지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이런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제 대답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저와 다르게 생각한다는 사실은, 특히 자유롭게 의견을 가질 수 있는 문제에서 그렇다는 사실은, 개인적인 적대감을 품는 태도를 결코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태도조차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저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물며 같은 혈육이며 같은 신앙으로 결합된 사람들이 자유롭게 견해를 가질 수 있는 문제에서 의견이 다를 때는 얼마나 더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까! 더욱이 그러한 분야에서는 누구도 절대적인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으므로, 애정이 가득한 상호 관계는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을 배우는 구체적인 수단입니다. 또한 다른 이들도 원한다면 함께 사는 각자가 자신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을 배우게 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가르쳐 줄 것은 늘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가정이 갈라지는 것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으며, 인간답지도 않습니다. 자유의 가치를 깊이 이해하고, 영혼에 주어진 하느님의 이 선물을 열정적으로 사랑한다면, 자유에 따르는 다원성도 사랑하게 됩니다.
같은 영적 목표로 결합된 사람들의 큰 가족인 오푸스데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예로 들겠습니다. 신앙에 속하지 않는 문제에서는 각자가 완전한 자유와 개인적인 책임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이 사실에서 논리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생겨나는 다원성은 오푸스데이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다원성은 올바른 정신이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개인의 자유에 따르는 정당한 결과인 다원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기 때문에, 회원들의 다양한 의견은 오푸스데이에서 서로를 대할 때 지극한 사랑과 상호 이해를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유와 사랑, 우리는 언제나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얻어 주신 자유로 살아가고, 그분께서 새 계명으로 주신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은 본질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방금 가족의 일치가 큰 가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오푸스데이에서는 왜 남편과 아내가 함께 참여하는 영적 양성 활동을 마련하지 않습니까?
이 문제에서도 다른 많은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선호나 의견에 따라 여러 방안 가운데 선택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우리에게 하나의 방식만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 생활 안에 마치 일당 체제를 수정하고 확대한 새 판본을 들여오는 듯한 사목 방식, 더 넓게는 그런 사도직 접근 방식은 전염병처럼 피해야 합니다.
부부를 위한 피정과 다른 양성 활동을 마련하는 가톨릭 단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유를 행사하여 적절하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활동에서 자신의 그리스도인 소명을 더 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 역시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최선이라는 것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에는 부부가, 나아가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고 때로는 함께해야 하는 측면이 많습니다. 성찬의 희생 제사와 다른 예배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영적 양성을 위한 어떤 활동은 남편과 아내가 따로 참여할 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성화와 수덕적 투쟁, 하느님과의 일치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라는 특성이 그렇게 강조됩니다. 이는 나중에 다른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지만, 그 안에서 각자의 양심은 다른 누군가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할 때 각자의 개인적 요구와 필요, 나아가 각자의 심리에도 양성을 맞추기가 더 쉽습니다. 그렇다고 그 활동에서 참가자들이 혼인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푸스데이의 정신에서 그보다 더 거리가 먼 일은 없습니다.
저는 이미 40년 동안 말과 글로, 모든 남성과 모든 여성은 일상생활 안에서, 자기 일상의 구체적인 여건 안에서 거룩해져야 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따라서 부부는 가정의 의무를 완전하게 이행하며 거룩해져야 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오푸스데이가 마련하고 기혼자들도 참여하는 피정과 그 밖의 양성 수단에서는 언제나 부부가 혼인 소명의 존엄을 깨닫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 소명을 더 잘 살아가도록 준비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부부 사랑이 요구하는 것과 실제로 드러나는 모습은 여러 면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다릅니다. 각자에게 맞는 양성 수단을 통해 자신의 실제 삶에서 이를 발견하도록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 또는 며칠 동안 떨어져 있는 것이 나머지 시간 내내 더 깊이 일치하고 더 많이, 더 잘 서로 사랑하도록 해 줍니다. 존중으로도 가득 찬 사랑으로 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문제에서도 저희 방식만이 유일하게 좋은 방식이라거나 모든 사람이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주 좋은 결실을 맺고 있고, 오랜 경험 외에도 그렇게 할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반대 의견을 공격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말씀드릴 것은, 오푸스데이에서 영적 양성을 위한 특정 활동에는 이런 기준을 따르지만, 매우 다양한 다른 종류의 활동에는 부부가 부부로서 함께 참여하고 협력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오푸스데이 회원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부모들과 함께하는 활동을 들 수 있습니다. 오푸스데이가 운영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의 부모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하는 모임과 강연, 삼일 기도 등도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활동의 성격상 부부의 참여가 필요할 때에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그 활동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모임과 활동은 개인의 영적 양성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삼는 활동과는 다릅니다.
한편 부모는 마음을 젊게 유지하려고도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의 고귀한 열망은 물론, 심지어 엉뚱한 모습까지도 더 쉽게 호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삶은 변하며, 우리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예전의 것들보다 더 낫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다른 생활 방식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적지 않은 경우 조금만 거리를 두고 유머 감각을 발휘하면 넘길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가정생활에 관해 계속 여쭙되, 이제는 자녀 교육과 부모 자녀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오늘날 가정의 상황이 변하면서 때로는 서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고, 심지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여 이른바 세대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오래된 문제입니다. 다만 오늘날 사회의 특징인 빠른 변화로 인해, 지금은 더 자주 또는 더 날카롭게 제기될 수 있겠습니다.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사물을 다르게 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청소년이 성숙한 사람과 똑같이 생각한다면 오히려 놀라운 일이겠지요. 우리 모두는 스스로 자신의 판단을 형성하기 시작할 때 어른들에게 반항하려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세월이 흐른 뒤에는, 부모님이 경험과 사랑에서 하신 많은 말씀에서 옳으셨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그 시기를 거친 부모가 먼저 유연함과 밝은 마음으로 서로 이해하기 쉽게 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랑으로 일어날 수 있는 그런 갈등을 피해야 합니다.
저는 언제나 부모들에게 자녀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라고 조언합니다. 교육 자체에 필요한 부모의 권위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녀와 같은 눈높이에 설 것을 요구하는 우정과 충분히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가장 반항적이고 무심해 보이는 아이들까지도 언제나 부모와 가까워지고 그런 우애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열쇠는 대개 신뢰에 있습니다. 부모가 허물없이 친밀한 분위기에서 교육할 줄 알고, 결코 의심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며, 자유를 주고 그 자유를 개인적인 책임으로 사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때로는 속아 주는 편이 더 낫습니다. 자녀에게 보내는 신뢰는 자녀 스스로 그 신뢰를 저버린 것을 부끄러워하고 자신을 고치게 합니다. 반대로 자유가 없고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다고 느끼면, 늘 속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이러한 우정, 곧 자녀의 눈높이에 서서 자녀가 자기의 작은 문제들을 믿고 이야기할 수 있게 하는 태도는, 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부모가 직접 자녀에게 생명의 기원을 알려 주는 일입니다. 자녀의 생각과 이해 능력에 맞추고 자연스러운 호기심보다 조금 앞서서, 점진적으로 알려 주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불순한 생각을 덧씌우거나, 그 자체로 고귀하고 거룩한 일을 친구에게서 은밀히 듣는 좋지 않은 이야기로 배우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 자체가 부모와 자녀의 우정을 굳건하게 하는 중요한 단계가 되는 경우가 많으며, 도덕적 삶이 막 깨어나는 바로 그때 서로 멀어지는 것을 막아 줍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모에게만 달린 것은 아닙니다. 자녀들도 자기 몫을 해야 합니다. 젊음은 언제나 위대한 모든 것, 높은 이상, 참된 모든 것에 크게 열광할 수 있는 힘을 지녔습니다. 부모의 삶에 있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어쩌면 매우 조용하지만 언제나 자연스러움을 입고 있습니다. 부담을 주지는 않으면서, 부모가 자신들을 위해 치른 희생과 가정을 꾸려 가기 위해 보여 준, 때로는 영웅적이기까지 한 극기를 깨닫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한 자녀들은 일을 과장하지 않고,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의 역할을 하지 않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부모에게 언제나 빚을 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빚은 결코 다 갚을 수 없지만, 자녀로서 보답하는 태도는 존경과 감사에 찬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솔직해집시다. 화목한 가정이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마찰도 있고 의견 차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흔한 일이며, 어느 정도는 우리 나날에 맛을 더해 주기까지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나 넘어가게 되는 사소한 일들입니다. 나중에 남는 것은 오직 변하지 않는 것, 곧 사랑입니다. 희생으로 이루어지며 결코 꾸며 낸 것이 아닌 참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서로를 걱정하게 하고, 작은 문제와 그것을 가장 섬세하게 해결할 방법을 알아차리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정상적인 모습이기에, 제가 십계명의 제4계명을 ‘지극히 감미로운 계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 뜻을 아주 잘 이해했습니다. 저는 이미 1920년대부터 그렇게 거듭 말해 왔습니다.
오늘날 일부 젊은이들은 그리스도교 신심을 겉치레 경건으로 받아들여 거의 완전히 외면합니다. 어쩌면 몇 가지 틀에 박힌 감상적인 관행으로 축소되기도 하는 강압적 종교 교육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겠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해결책은 이미 질문 속에 들어 있습니다. 먼저 모범으로, 그다음에 말로 참된 신심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것입니다. 겉치레 경건은 대개 교리의 부족과 인간적인 면에서의 어떤 왜곡에서 생겨나는, 가짜 영성의 슬픈 희화화에 불과합니다. 참되고 진실한 것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도 40년 전의 젊은이들에게도 그리스도교 신심이 뿌리내리는 모습을 기쁘게 보아 왔습니다. 그들이 신심이 진실한 삶이 된 모습을 볼 때,
—기도란 아버지나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주님과 이야기하는 것임을 이해할 때입니다. 익명의 누군가로서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서로 마주하여 대화하는 것입니다.
—믿음 가득한 만남으로 초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저 말씀, vos autem dixi amicos (Ioan 15, 15),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라는 말씀이 그들의 영혼에 울리도록 노력할 때입니다.
—그들의 신앙에 힘차게 호소하여, 주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심을 보게 할 때입니다(Heb 13, 8).
한편 그 소박하고 진심 어린 신심이 인간적 덕의 실천도 요구하며, 매주나 매일 하는 몇 가지 신심 행위로 축소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신심은 삶 전체에 스며들어 일과 휴식, 우정과 여가, 모든 것에 의미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만 하느님의 자녀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묵상하고 그 의미에 깊이 젖어 들기 위해 특별히 바치는 순간들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의식은 신심의 핵심입니다.
앞서 젊은이들은 이 모든 것을 잘 이해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덧붙여,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언제나 젊음을 느낀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80세 노인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살아갈 때, 제대 아래에서 바치는 다음 기도의 말씀을 참으로 깊이 음미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리이다. 제 젊음에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께 나아가리이다’(Ps 42, 4).
그렇다면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신심 생활로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가정에서도 어떤 신심 행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것이 바로 자녀들에게 참된 그리스도교 교육을 베푸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에 대해 말해 줍니다. 성 바오로가 ‘가정 교회’라고 부른 그 가정들에(1 Cor 16, 19), 복음의 빛은 새로운 힘과 새로운 생명을 주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환경에서는 가정의 따뜻함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초자연적인 신심 생활의 첫걸음이 얼마나 좋은 결실을 맺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이는 가장 먼저 생겨나는 가장 근본적인 애정의 대상들 가운데 주님을 모시는 법을 배웁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대하는 법을 배웁니다. 부모의 모범을 따라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를 이해하면 부모가 수행할 수 있는 위대한 사도직이 보입니다. 또한 그 신심을 자녀에게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전해 주려면, 부모 자신이 진실한 신심을 지녀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수단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언제나 실천해 온 몇 가지 짧고 규칙적인 신심 행위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식사 전의 축복 기도, 온 가족이 함께 바치는 묵주 기도, 아침에 일어날 때와 밤에 잠자리에 들 때 바치는 개인 기도입니다. 요즘에는 이 지극히 견고한 성모 신심을 공격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말입니다. 지역에 따라 관습은 다르겠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어떤 신심 행위를 장려하여, 가족들이 겉치레 경건 없이 소박하고 자연스럽게 함께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면 하느님을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 성당에 가서 찾아뵙는 낯선 분으로 여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하느님을 실제로 계시는 그대로 바라보고 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Mt 18, 20).
저는 자녀로서 감사와 자부심을 품고 이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어릴 적 어머니의 입에서 배운 기도를 지금도 아침저녁으로 소리 내어 바칩니다. 그 기도는 저를 하느님께 이끌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첫걸음을 내딛도록 가르쳐 주셨던 그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시작하는 하루를 주님께 봉헌하거나 끝나는 하루에 감사드리면서, 제가 각별히 사랑하는 이들이 천상 영광 안에서 더 큰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시기를, 그리고 나중에는 하늘에서 저희를 영원히 하나로 지켜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저희 잡지의 ‘젊은이들’ 코너를 통해 그들의 여러 문제가 전해집니다. 아주 흔한 문제 하나는 자녀의 진로를 정할 때 부모가 때때로 자신의 뜻을 강요하는 일입니다. 이는 전공이나 직업을 선택할 때에도, 사귈 상대를 선택할 때에도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영혼들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려고 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부모의 이러한 태도를 정당화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인격적 성숙에 반드시 필요한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아닙니까?
궁극적으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선택은 각자가 어떠한 강요나 압력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스스로 내려야 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보통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발걸음이고, 그 발걸음을 어떻게 내딛느냐에 행복이 크게 달려 있기 때문에, 평정심이 필요하고 성급함을 피해야 하며 책임감과 신중함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신중함의 한 부분이 바로 조언을 구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 없이, 또 다른 사람들, 특히 부모가 주는 따뜻함과 빛 없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만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만에는 대개 큰 대가가 따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새로운 지평을 보여 주고, 자신의 경험을 전해 주며, 일시적인 감정 상태에 휩쓸리지 않도록 성찰하게 하고, 사물을 현실적으로 평가해 줌으로써 귀중한 도움을 줄 수 있고 또 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직접 조언하여 도와줄 것이고, 때로는 자녀가 다른 적임자를 찾아가도록 격려함으로써 도와줄 것입니다. 충실하고 진실한 친구, 학식과 신심을 갖춘 사제, 진로 지도 전문가 같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조언은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자료를 줍니다. 이는 선택의 가능성을 넓혀 주고, 비합리적인 요인에 따라 결정하지 않게 해 줍니다.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듣고 모든 것을 충분히 숙고한 뒤에는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는 누구도 자유를 침해할 권리가 없습니다. 부모는 부당하게 자녀에게 자신을 투영하려는, 곧 자신의 취향대로 자녀를 만들어 가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성향과 재능을 존중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이 있다면 이는 대체로 어렵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경우, 자녀가 내린 결정이 잘못되었고 심지어 불행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부모가 판단할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조차, 해결책은 강압에 있지 않습니다. 이해하는 데 있으며, 많은 경우 자녀 곁에 머물 줄 알아 어려움을 이겨 내도록 돕고, 필요하다면 그 나쁜 일에서 가능한 모든 좋은 것을 끌어내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참으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자녀의 행복을 바라는 부모는, 적절한 조언과 숙고 뒤에는 조심스럽게 물러서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게 하는 자유라는 큰 선익을 아무것도 해치지 않도록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을 자유롭게 사랑하고 섬기도록 바라셨으며, 우리의 개인적인 결정을 언제나 존중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제 자유 의지에 맡기셨다’고 말합니다(Eccli 15, 14).
제기하신 구체적인 경우 가운데 마지막 것, 곧 교회와 영혼들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려는 결정에 대해 특별히 몇 마디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부모가 그 소명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저는 그리스도인 가정을 이루는 자신의 사명에 실패한 것이며, 그리스도교가 자기 자신의 혼인 소명에 부여하는 존엄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푸스데이에서 제가 겪은 경험은 매우 긍정적입니다. 저는 오푸스데이 회원들에게 자기 소명의 90퍼센트는 부모님 덕분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부모님이 그들을 잘 교육하고 너그러워지는 법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경우, 사실상 거의 모든 경우에 부모들은 자녀의 그 결정을 존중할 뿐 아니라 사랑하며, 오푸스데이를 곧 자기 가족의 확장으로 여긴다고 저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는 제게 큰 기쁨 가운데 하나이며, 아주 신적인 사람이 되려면 또한 아주 인간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요즘에는 사랑이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는 이론을 주장하고, 그로부터 연애는 시험 삼아 해 보는 결혼과 같다는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의 명령이라고 여기는 것을 따르지 않으면 진실하지 못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직한 사람이라면,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생각해야 할 대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걸맞지 않은 태도이며, 인간의 사랑을 이기심과 쾌락과 혼동하여 그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시대에 뒤떨어진다고요? 오히려 본능 외에는 다른 충동을 인정하지 않고 밀림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이 뒤처진 사람입니다. 연애는 서로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깊게 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배우는 모든 학교가 그렇듯, 소유욕이 아니라 헌신과 이해, 존중과 섬세함의 정신으로 이끌려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1년 남짓 전에 나바라 대학교에 아름다운 사랑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성상을 선물하고자 했습니다. 그 여러 학부에서 수업을 듣는 젊은 남녀들이 성모님께 사랑의 고귀함을, 인간의 사랑이 지닌 고귀함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시험 삼아 해 보는 결혼이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사랑을 얼마나 모르는지요! 사랑은 그보다 더 확실하고 더 실제적이며 더 인간적인 실재입니다. 시험해 본 다음 변덕이나 편의, 이익에 따라 받아들이거나 버리는 상품처럼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판단력의 결여는 너무나 안타까워서, 그렇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이들을 굳이 단죄할 필요조차 없어 보입니다. 그들 스스로 자신에게 결실 없는 삶과 슬픔, 황량한 고립을 선고하기 때문입니다. 불과 몇 년만 지나면 이를 겪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들을 위해 많이 기도하고, 온 마음으로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길이 여전히 열려 있음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힘써 노력한다면 그들도 성인이 될 수 있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용서와 은총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야 사랑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이며 또한 고귀한 인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와 기쁨, 풍요로운 결실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여성과 관련된 큰 문제 하나는 미혼 여성의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혼인의 소명이 있으면서도 결혼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말합니다. 결혼하지 못하면 그들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세상에 있는가?’ 하고 묻습니다. 어떤 대답을 해 주시겠습니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세상에 있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모든 피조물에게 널리 전하기 위해 있습니다. 혹시 이것이 작은 일처럼 보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어떤 영혼도 맹목적인 운명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모든 영혼을 위한 계획이 있으시며, 각자에게만 고유하고 남에게 넘길 수 없는 소명으로 모든 이를 부르십니다.
혼인은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며 소명입니다. 그러나 유일한 길도, 유일한 소명도 아닙니다. 각 여성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 반드시 혼인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혼인 소명이 있는데도 결혼하지 못했다고요? 어떤 경우에는 사실일 수 있으며, 어쩌면 이기심이나 자존심이 그 하느님의 부르심을 이루지 못하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에는, 주님께서 참된 혼인 소명을 주시지 않았다는 표징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을 좋아하고,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남편과 자녀에게 충실하게 마음을 바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여성에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결혼할 수 있으면서도 하느님과 영혼들을 섬기는 데 마음을 쓰기 위해 결혼하지 않는 여성들에게도 그렇습니다.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좋습니다. 지금까지 해 왔듯이 계속 주님의 뜻을 사랑하고, 누구도 버리지 않으시며 언제나 충실하신, 지극히 사랑스러운 예수님의 성심과 가까이 사귀십시오. 그분은 이 삶 내내 우리를 돌보시며, 이미 지금부터 영원히 당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고자 하십니다.
더구나 여성은 자기 가족 외의 다양한 영역에서도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어머니의 정서적인 특성까지 포함한 모든 여성적 특성을 지니고, 다른 가정에서, 학교에서, 복지 사업에서, 수많은 곳에서 수행할 수 있습니다. 사회는 때로 자신이 ‘노처녀’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매우 가혹하고 몹시 부당합니다. 주변에 기쁨과 평화와 능률을 퍼뜨리는 미혼 여성들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에 고귀하게 자신을 바칠 줄 알고, 영적으로 깊은 어머니가 될 줄 아는 여성들입니다. 단지 생리적으로만 어머니인 많은 여성보다 더 참되게 어머니가 됩니다.
앞선 질문들은 연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드릴 질문은 혼인에 관한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혼인 생활이 단조로움에 빠지지 않고 계속 행복하려면, 기혼 여성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시겠습니까? 사소한 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잡지에는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진 여성 독자들의 편지가 많이 옵니다.
저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해결책들도 겉보기에 소박하더라도 중요합니다.
혼인 생활에서 처음의 설렘을 간직하려면 아내는 날마다 남편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남편도 아내에 대해 똑같이 해야 한다고 말해야겠지요. 사랑은 새로운 하루마다 되찾아야 하며, 희생과 미소로, 또 재치 있는 애교로 얻어 내는 것입니다. 남편이 일하고 지쳐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가 끝도 없이 말하며 자신이 보기에 잘못된 모든 일을 늘어놓기 시작한다면, 남편이 결국 인내심을 잃는다고 해서 놀랄 일이겠습니까? 그런 덜 유쾌한 일들은 남편이 덜 피곤하고 마음의 준비가 더 되었을 때, 좀 더 적절한 순간을 위해 미루어 둘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작은 일은 몸단장입니다. 다른 사제가 여러분에게 반대되는 말을 한다면, 저는 그가 잘못된 조언자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내적 생활을 향상하는 데뿐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 단정한 모습을 갖추도록 자신을 돌보는 데도 더욱 마음을 써야 합니다. 물론 언제나 나이와 형편에 맞아야 합니다. 저는 농담으로, 건물의 외벽은 오래될수록 더 보수가 필요하다고 흔히 말합니다. 이것은 사제로서 드리는 조언입니다. 카스티야의 옛 속담에는 단장한 아내는 남편을 남의 집 문에서 돌아오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편의 외도 가운데 80퍼센트는 아내에게 책임이 있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날마다 남편의 마음을 얻을 줄 모르고, 다정하고 섬세한 작은 배려를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혼 여성은 남편과 자녀에게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남편도 아내와 자녀에게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제대로 잘 해내려면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합니다. 이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든 것은 나쁘며, 옳지 않습니다.
이 사랑스러운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데에는 변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집 밖에서 하는 일은 물론 변명이 되지 않으며, 신심 생활 자체도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매일의 의무와 양립하지 못한다면 그런 신심 생활은 좋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습니다. 기혼 여성은 먼저 가정을 돌보아야 합니다. 제 고향의 노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성당에 가느라 / 냄비를 태우는 여인은 / 절반은 천사이고 / 나머지 절반은 악마라네.’ 제가 보기에는 전부 악마인 것 같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어려움은 제쳐 두더라도, 남편과 아내 사이의 다툼 역시 흔하며 때로는 가정의 평화를 심각하게 위태롭게 합니다. 부부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시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동안 다툼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를 자연스럽게 해결하면 사랑을 더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성격과 개인적인 취향, 기질, 때로는 못된 성질, 그리고 결점이 있습니다. 각자에게는 인격의 좋은 면도 있습니다. 그런 면 때문에, 또 그 밖의 여러 이유로 그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의 부족함을 고치려고 애쓰고 다른 이들의 잘못을 넘겨 주려고 노력할 때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곧 실제로는 갈라지거나 대립할 이유가 될 수 없는 모든 것을 없애고 넘어서는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반대로 작은 차이를 과장하고 서로의 결점과 실수를 들추어 비난하기 시작하면, 평화가 끝나고 사랑을 죽일 위험에 빠집니다.
부부에게는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인간적 덕과 그리스도인의 덕을 실천하도록 자기 신분에 맞는 은총, 곧 성사의 은총이 있습니다. 이해심, 밝은 마음, 인내, 용서, 서로를 대할 때의 섬세함입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며, 초조함이나 교만, 개인적인 고집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남편과 아내는 내적 생활에서 성장하고, 성가정에게서 그리스도인 가정의 덕을 세심하게 실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인간적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동기로 말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이런저런 일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거나,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면,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과장하는 것입니다. 자기 변덕을 다스릴 줄 아는 힘을, 자신을 지배할 줄 아는 은총을 하느님께 청해야 합니다. 화의 위험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자제력을 잃고 말에 원망이 가득해져 모욕하게 되고, 어쩌면 원하지 않았더라도 상처를 입히고 해를 끼치게 되는 데 있습니다.
침묵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며,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남편이 화를 낼 때는 다시 평정심을 되찾을 때까지 아내가 특별히 인내해야 할 때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한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을 키우려는 마음이 있다면, 두 사람이 동시에 나쁜 기분에 지배당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
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것은, 자신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결코 없다고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보통은 이처럼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는 문제에서, 자신이 전적으로 옳다고 더 확신할수록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자신을 바로잡고, 필요하다면 용서를 청하기가 더 쉬워집니다. 용서를 청하는 것은 화를 끝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며, 이렇게 평화와 사랑에 이르게 됩니다. 다투라고 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와 함께 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끔 다투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인도의 사제왕 요한과 다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부부 사이의 그런 작은 다툼은 잦지만 않다면, 그리고 잦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사랑이 없다는 뜻이 아니며 오히려 사랑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조언을 드리겠습니다. 자녀들 앞에서는 절대로 다투지 마십시오. 이를 위해서는 정해 둔 말 한마디나 눈길, 몸짓으로 서로 뜻을 맞추면 됩니다. 다툼을 피할 수 없다면 나중에 좀 더 차분하게 다투면 될 것입니다. 부부의 평화가 가정의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깊이 있고 효과적인 교육에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헌신과 진실한 사랑, 서로 돕는 태도와 이해심의 모범을 보게 하십시오.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어떤 것도 이겨 낼 수 있는 사랑의 실재를 아이들의 눈에서 가리지 않게 하십시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누구나 가끔은 화를 냅니다. 필요해서 그럴 때도 있고, 극기의 정신이 부족해서 그럴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소로 가족의 친밀함을 되찾아, 그런 화가 애정을 깨뜨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구체적인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오푸스데이 여성부가 운영하는 기숙학교가 마드리드에 문을 연다는 발표가 최근에 있었습니다. 이 학교는 가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가사 근로자들에게 전인적인 교육을 제공하여 직업 역량을 갖추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합니다. 오푸스데이의 이러한 활동들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사도직 사업의 주된 목적은 가사 근로자들이 과학적인 안목으로 자기 일을 할 수 있도록 그 직업의 존엄을 높이는 것입니다. 오푸스데이 여성 회원들이 우리 단체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운영하는 비슷한 사업이 많이 있습니다. 과학적인 안목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가사 노동이 그 본래 모습대로, 곧 참된 전문 직업으로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비천한 것으로 나타내려 해 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비천했던 것은 그 일이 흔히 이루어지던 조건이었습니다. 지금도 때로는 그 조건이 비천합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적은 보수만 주며, 애정도 없이 제멋대로 하는 고용주의 변덕에 따라 일하기 때문입니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보장이 담긴 적절한 근로 계약을 존중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양측의 권리와 의무를 분명히 정해야 합니다.
이런 법적인 보장에 더하여, 그 봉사를 제공하는 사람이 역량을 갖추고 전문적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그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저는 ‘봉사’라고 말했습니다. 잘 수행된 모든 사회적 일이란 바로 훌륭한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가사 근로자의 일도, 교사의 일도, 판사의 일도 그렇습니다. 오직 모든 것을 자신의 안락에 종속시키는 사람의 일만이 봉사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하는 일은 지극히 중요한 일입니다! 또한 모든 일은 똑같은 초자연적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큰 일이나 작은 일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한다면 모든 일이 큽니다. 큰 일로 여겨지는 일들도 그리스도교적 인생관을 잃으면 작아집니다. 반대로 겉보기에 작은 일 가운데서도 실제로 미치는 영향 때문에 매우 커질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제게는 오푸스데이 회원인 제 딸 가운데 가사 근로자로 일하는 딸의 일이나, 귀족 작위를 지닌 딸의 일이나 똑같이 중요합니다. 두 경우 모두 제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들이 하는 일이 자신과 다른 이들의 성화를 위한 수단이며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직업과 신분 안에서 더 거룩해져 가며, 하느님께 받은 사명을 더 큰 사랑으로 수행하는 사람의 일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대학 교수인 여성이나, 상점의 판매원으로 일하는 여성, 비서나 노동자나 농민으로 일하는 여성이나 똑같은 지위를 지닙니다. 모든 영혼은 평등합니다. 다만 때로는 더 소박한 사람들의 영혼이 더 아름답고, 언제나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과 성령 하느님을 더 친밀하게 대하는 영혼들이 주님을 더 기쁘게 해 드립니다.
마드리드에 문을 연 그 학교를 통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분야에서 사회에 참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가정들에 기쁨과 평화와 이해를 가져다주어 가정 안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라면 몇 시간이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제가 가정에서 하는 일을 특별히 큰 의미를 지닌 직업으로 이해한다는 점을 알기에는 이미 말씀드린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일을 통해 가정의 가장 깊은 곳에서 많은 좋은 일도, 많은 나쁜 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좋은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인간적인 품격과 전문 역량, 사도적 열의를 지니고, 이 직업을 세상 수많은 가정에서 엄청난 결실을 맺는 기쁜 일로 만들어 갈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 두 측면을 하나로 조화시키는 것은 상당 부분 개인의 문제이며, 내적 생활의 문제입니다. 매 순간 판단하고, 각각의 경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고정된 규칙을 제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특히 가정의 어머니들을 염두에 두고 몇 가지 일반적인 방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주 다양한 상황과 교회 교도권의 권고와 가르침으로 사회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이 생겨나고 촉진되었습니다. 증거로서의 가난의 덕에 관해서도 많이 이야기합니다. 가족에게 정당한 안락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 주부는 이 덕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성경에는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표징 가운데 하나로 바로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Mt 11, 5). 가난의 덕을 사랑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없습니다. 이는 모든 이에게 해당합니다. 사막으로 물러나 사는 은수자에게도, 이 세상의 자원을 사용하거나 그 가운데 많은 것이 부족한 채 인간 사회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합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조금 더 머물러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가난을 설교하면서도 그 메시지가 삶에 가닿게 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의도는 분명 좋지만 시대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 채, 지적인 사변에서 나온 가난을 설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요란한 외적 표지가 일부 있지만, 동시에 내적으로 엄청난 결함이 있고 때로는 외적으로도 결함이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표현인 discite benefacere (1, 17)를 되새기며, 저는 모든 덕을 실천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어쩌면 특히 가난을 실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가난이 글은 많이 쓸 수 있지만 아무도 진지하게 실현하지 않는 이상으로 축소되지 않도록, 가난을 실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난은 주님께서 각 그리스도인에게 보내시는 초대이며, 따라서 인류의 삶 전체를 이끌어야 하는 구체적인 부르심임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가난은 비참함이 아니며, 더구나 불결함은 더욱 아닙니다. 우선 그리스도인을 규정하는 것은 삶의 외적 조건보다는 마음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평신도 소명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달린 매우 중요한 점에 다가가게 되는데, 가난은 단순히 포기하는 것으로 규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경우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가난의 증거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안락 외에는 다른 지평이 없는 환경에 맞서서, 하느님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면 어떤 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한 행동으로 힘차게 선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가 보통 요구하는 증거가 그것입니까? 세상에 대한 사랑과 사람들과의 연대도 명백하게 증언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때로는 그리스도교적 가난을 생각하면서 수도자들을 주된 기준으로 삼습니다. 수도자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공적이고 공식적인 증거를 보이는 것이 고유한 일이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안에서부터 일상의 소박함으로 보여 주는 평신도 증거의 고유한 성격을 알아보지 못할 위험이 있습니다.
모든 평범한 그리스도인은 얼핏 모순되어 보일 수 있는 두 측면을 자기 삶 안에서 조화시켜야 합니다. 하나는 알아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것들로 이루어진 참된 가난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며, 마음이 피조물로 만족하지 않고 창조주를 갈망한다는 표현이 되는 가난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그 같은 사랑을 모든 이에게 나누어 주고자 한다는 표현입니다. 동시에 자기 형제인 다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함께하고, 그들과 함께 기뻐하며 협력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을 사랑하고, 인간 삶의 문제를 해결하며 개인과 공동체의 발전을 돕는 영적·물질적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모든 피조물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희생, 바로 거기에 가난의 실상이 상당 부분 담겨 있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입니다. 불필요한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이론적인 규칙보다는, 이기심이나 부당한 안락 추구가 스며들고 있음을 알려 주는 내면의 목소리에 있습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안락함은 사치나 관능적 쾌락이 아닙니다. 가족과 다른 이들의 삶을 쾌적하게 하여, 모두가 하느님을 더 잘 섬길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가난은 세상 것들에 참으로 집착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불편함이나 수단의 부족이 있다면 이를 기쁘게 견디는 데 있습니다. 또한 하루 전체를 유연한 시간표에 담을 줄 아는 데에도 있습니다. 그 시간표에서는 매일의 신심 실천 외에도 적절한 휴식과 가족 간의 대화, 독서, 예술이나 문학 등의 취미, 또는 다른 고귀한 여가에 바치는 시간이 중요한 시간으로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시간을 유익한 일로 채우고, 가능한 한 일을 잘하며, 질서와 시간 엄수, 밝은 마음의 작은 세부들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한 자리와 자기 자신을 위한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남성과 모든 여성에게 일할 의무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유함과 경제적인 여유는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할 의무가 더 크다는 표지입니다.
희생에 의미를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모든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자녀들에게 몇 시간을 내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을 위해 삶 전체를 쓰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다른 이들에게 내어 줄 것이 있도록 물건을 사용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실제로 집착을 버리도록 보장해 주는 가난의 여러 측면입니다.
어머니에게는 자신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뿐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이렇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녀들 안에 믿음과 낙관적인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도록 교육하는 것입니다. 이기심을 이겨 내고,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섬기는 데 자기 시간의 일부를 너그럽게 쓰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기 나이에 맞는 활동에 참여하여, 인간적이고 신적인 연대를 이루려는 열망을 드러내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각자가 자신의 소명을 수행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제게는 자녀가 많고 가난한 가정에서 자녀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언제나 가장 좋은 가난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경우 자신들이 궁핍하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채, 노력과 끈기로 가족을 부양합니다. 모두가 사랑하고 섬기며 일하는 법을 배우는 기쁨에 찬 가정을 이루어 갑니다.
1967년 10월 08일에 드리는 강론
이번 인터뷰를 통해 인간 삶의 중요한 측면들, 특히 여성의 삶에 관한 여러 측면을 이야기하고, 오푸스데이의 정신이 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생활에서 여성의 역할을 어떻게 증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답할 때면, 평소의 제 방식과 달리 논쟁적으로 답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런 표현을 성직자 중심의 의미로 사용하여, ‘교회’라는 말을 성직자나 교계 제도에 속한 어떤 것과 같은 뜻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생활에 참여한다는 것을 오직, 또는 주로 본당 생활을 돕는 일, 거룩한 교계의 위임을 받은 단체에서 협력하는 일, 전례 거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 등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이론적으로는 선언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교회가 하느님 백성 전체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교회가 현존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이 말로 교회 조직의 생활에 여성이 할 수 있는 협력의 중요성을 작게 보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신도의 그리스도인 소명의 충만함을,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평범한 남성과 여성의 그리스도인 소명의 충만함을 옹호하는 데 제 삶을 바쳤습니다. 따라서 교회와 세상 안에서 그들의 사명이 신학적으로나 법적으로 온전히 인정받도록 힘쓰는 데 제 삶을 바쳤습니다.
다만 저는 그 협력의 범위를 부당하게 축소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또한 평범한 그리스도인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직자처럼 되지 않고, 세속적인 사람, 평범한 사람, 세상에서 살아가며 세상의 관심사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 때에만 자신의 고유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 조직 안에서 자신에게 해당하는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사랑하시며 모든 이를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으로 선포하면서, 인간의 모든 활동에 그리스도를 모셔 가는 것은 이 땅에 가득한 수백만 그리스도인 남녀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에 참여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장 중요하고 어떤 경우든 다른 모든 참여 방식의 전제가 되어야 하는 방법은, 자신의 인간적 소명이 이끌어 준 삶의 자리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를 특별히 의식하여 목표로 삼지도 않으면서, 일상생활을 소박하게 살아가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 남녀를 생각하면 제 마음은 얼마나 깊이 움직이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자기 삶의 숭고함을 깨닫게 하고, 하찮아 보이는 그 삶이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밝혀 주며, 사건과 상황을 통해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더 주의 깊게 귀 기울이도록 가르치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 일을 하도록 교회를 재촉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구속하셨음을 보여 주며, 안에서부터 온 세상을 그리스도교화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여성은 가정에서든 자신이 수행하는 다른 일에서든, 자신에게 속한 고유한 잠재력을 실현하며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그 사명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이시고 동정녀이시며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을 향하여 살아가며 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 (Lc 1, 38),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경우에 유일하고 다른 이에게 넘길 수 없는 개인적인 소명에 충실한지는 이 응답에 달려 있습니다. 그 충실함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온 세상에서 이루시는 구원 사업의 협력자가 되게 할 것입니다.
분명히 이 사실이, 눈에 보이는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일상생활이야말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진정한 장소라는 확신을 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일상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곳은 바로 여러분의 동료가 있고, 여러분의 갈망이 있고, 여러분의 일과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매일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온 인류에 봉사하면서 우리 자신을 성화해야 할 장소는 바로 이 세상의 가장 물질적인 것들 한가운데라는 이야기입니다…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conversaciones/sesagwa-gyohoe-aneseo-yeoseoyi-salm/ (2026-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