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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밭고랑»에 성소 → 성소에 대한 반응 항이 있음.

주님의 부르심, 곧 성소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제시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1

그렇다. 부르심은 자기 부정, 즉 희생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희생이 온전하다면, “gaudium cum pace”, 곧 평화와 기쁨을 동반하고 즐겁기 짝이 없다.

그는 완전히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자 친구와 헤어지려고 펜을 들었을 때 결심이 무너지고 용기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게 지극히 인간적이며 또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들 생각에는 인간적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청하실 때, 그분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 버려야 할 것 중 하나가 아닌가 보다.

그대는 타오르는 열정보다는 심사숙고로 마음을 정했다. 감흥을 바랐지만, 그럴 여지가 없었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렸다.

그 순간부터 그대는 다시는 심각한 의문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때때로 넘쳐나는 차분하고 고요한 기쁨을 느낀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사랑의 대담함에 보답하는 방법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께서 첫 열두 사도를 부르신 방식은 이보다 더 단순할 수 없었다.

그 일을 계속하지 않으려고 많은 핑계를 찾는 그대에게 손에 장갑처럼 딱 맞는 생각이 있다. 저 첫 사도들의 인간적 지식은 빈약했지만, 그들은 관중을 얼마나 감동하게 했는가!

절대로 잊지 말라. 우리 각자를 통해 여전히 그분이 일하고 계신다.

그가 자신을 그리스도와 맞대면하게 했다고 그대를 책망하고, “이제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는 평화로이 살기는 글렀어.”라며 분개하며 덧붙인다고 놀라거나 위축되지 말라.

그를 위해 기도하라. 그를 안심시키려는 것은 소용이 없다. 아마도 그의 오래된 불안, 즉 양심의 목소리가 전면에 드러난 것일 것이다.

그대는 결심한 후부터 날마다 새로운 발견을 하고 있다. “이 일이 가능할까?” 하고 끊임없이 자문한 후 의심과 실망만 거듭하던 어제를 기억하는지.

이제 그대는 항상 정확하고 합리적이며 명쾌한 답을 얻는다. 그리고 때때로 유치한 그대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첫 열두 제자를 이렇게 돌보셨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하라. “우리를 낚으려고 한다.”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렇다고 인정하라.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알려라! 그들에게 성소가 없다면, 즉 주님께서 부르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성소가 있다면, 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외롭고 슬프게 끝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