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자 주
이 책에는 성 호세마리아가 오푸스데이 회원들에게 쓴 38편의 편지들 가운데 네 편을 담았습니다. 그는 1928년 10월 2일 설립의 빛을 따라 탄생시킨 이 기관의 정신과 사도직, 역사의 근본적인 측면들을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편지들을 썼습니다.
이 문서들은 성 호세마리아에게 고유한 하나의 문학 장르에 속하며, 그의 일반 서신들과는 구별됩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킬 때 편지라는 말을 궁서체로 썼습니다. 이는 고전 시대나 교회 전통의 저자들이 어떤 주제를 차근차근 자세히 설명하려고, 특정한 수신자가 아니라 폭넓은 사람들, 나아가 보편적인 독자를 대상으로 쓸 때 사용한 방식과 비슷합니다.
이 문서들의 문체는 친근하고 직접적입니다. 성 호세마리아는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깊이 있게 표현하면서도, 형식주의나 박식함을 뽐내는 학구적 태도는 모두 피합니다. 한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나의 편지들은 […] 자녀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빛을 주고 […] 우리 내적 역사의 세부 사항을 알게 하려는 가족의 대화입니다.”1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편지들은 논문이 아닙니다. […] 지금도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순서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지성과 삶 안에 아주 정확하고 분명하게 남기를 바라는 몇몇 개념들은 말과 글로 천 번이라도 되풀이할 것입니다. […]. 내가 다루는 주제를 남김없이 설명하려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나의 목적은 아닙니다.”2
그 어조는 오푸스데이 사람들과 가족 모임을 할 때와 비슷합니다. 어떤 현실을 사변적이고 학구적으로 성찰하는 사상가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되어야 할 메시지를 자신이 시작한 일에 전하는 아버지이자 설립자로서 말합니다.
이야기는 엄격한 틀을 따르지 않고 여러 어조를 오갑니다. 복음의 한 장면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에서 재치 있는 일화로, 엄격하게 요구하는 어조에서 유쾌한 어조로, 과거의 기억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미래의 전망으로 옮겨 갑니다.
이 편지들들은 무엇을 다룰까요?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의 성화와 기도, 회원들의 속세에서 오푸스데이 정신의 다양한 측면을 다루며, 넓게는 교회를 섬기는 이 기관의 고유한 사명을 다룹니다. 그 중 한 부류는 청년과 교육, 커뮤니케이션 같은 분야에서 오푸스데이 고유의 사도직과 복음화 활동의 여러 측면을 깊이 살핍니다. 몇몇 편지들은 오푸스데이 안의 사제직을 이야기하거나, 영적 준비와 신학, 교리 양성에서 계시의 유산과 교회 교도권에 대한 충실함에 이르기까지 회원들의 양성과 관련된 주제들을 펼칩니다.
여러 편지에서는 역사적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덕을 닦는 주제와 오푸스데이 정신의 근본 특징에 대한 설명이 함께 엮여 있습니다. 때로는 오푸스데이의 발전 과정에 있었던 어려움도 언급합니다.
이 편지들은 언제 어떻게 썼을까요? 성 호세마리아는 내심 메모에 남겼듯이 이미 1930년대에 이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3. 그때부터 여러 목적 가운데 하나로 편지들 집필에 쓸 자료를 기록하고 모았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그는 평생 개인 기도와 경험에서 얻은 영감을 기록하고, 묵상과 설교, 경우에 따라 글을 쓰기 위해 보관했습니다. 자료는 매우 다양했습니다. 날카로운 짧은 문장, 비교적 잘 다듬어진 긴 문단, 다듬어진 정도가 서로 다른 개요, 역사적 사건의 기록, 묵상의 줄거리나 초안, 어쩌면 상당한 분량의 원고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 해에 걸쳐 오푸스데이의 남녀 회원들이 정성껏 모은 묵상과 강연의 녹취록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비서관이나 타자 담당자의 도움을 받아 지금 다루는 편지들을 작성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직접 주도했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더욱이 글을 검토하고 다듬으면서 이전 판본들을 없앴으므로 작업 방식을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추론과 현재 남아 있는 소수의 문서·증언 자료를 통해, 최종 원고를 작성한 이 작업의 대부분은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문서가 그보다 여러 해 전에 이미 상당히 완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가 1963년부터 인쇄에 들어갔다는 것은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글을 여러 차례 고치면서, 이미 인쇄되었거나 심지어 회원들에게 발송된 판본도 폐기하게 하고 새 판본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는 세부 사항의 완전함에 대한 사랑과, 오류나 모호함이 없는 최종적인 글을 남기려는 바람에서 나온 작업 방식이었습니다.
선종 전에 그는 거의 모든 편지들을 회수하여 다시 철저히 검토하고 최종판을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이 작업은 1974~1975년에 수행할 수 있었으나, 선종 전 다시 인쇄에 넘길 시간은 없었습니다. 여러 문헌 비평 문제를 해결한 뒤, 마침내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역사연구소가 추진하는 전집에서 편지 제1~4호 원본 원고의 주석본을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본문과 여러 주석 및 기타 요소는 그 주석본에서 가져왔습니다.
집필의 핵심은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폭넓고 명확히 한정하기 어려운 시기에 걸쳐 형성되었을 수 있지만, 언어와 표현은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저자가 많이 손질했습니다. 이 사실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4.
성 호세마리아는 이 문서들 가운데 일부에 과거의 날짜를 적고자 했습니다. 그 날짜는 최종 집필의 바탕이 된 자료의 날짜나, 설립 과정 전체에 대한 그의 생생한 기억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부분과 생각, 표현이 그때의 것이고 어떤 것이 1950~1970년대의 것인지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매우 어렵습니다. 성 호세마리아는 연대기적 문제에 신경 쓰지 않고, 특정한 때에 자신이 편지들에 담긴 내용의 본질을 설교하고 있었다는 것을 남기고자 합니다. 설립자로서 그의 관심은 하느님의 뜻과 역사가 요구하는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며 성숙시킨, 영속적 가치를 지닌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메시지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 놀라운 나무가 될 씨앗을 받듯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임을 강조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에스크리바에게 결정적인 것은 하느님께서 심으신 그 씨앗, 곧 하느님께서 먼저 행동하신 순간이었습니다.
1963년 처음 인쇄된 편지들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있었습니다5. 그때까지 훈령 같은 다른 비슷한 문서들은 스페인어로 출판되었습니다. 성 호세마리아는 오푸스데이 안에서 편지들을 라틴어로 부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얼마 뒤 편지들의 언어에 관한 생각을 바꾸어 스페인어로만 출판하게 되었을 때에도 라틴어로 붙였습니다. 교회가 오늘 날까지 공식 문서를 다른 언어로 작성했더라도 흔히 라틴어로 부르는 교회에 대한 신심과 일치의 바람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 명칭은 짧은 기간 동안, 언제나 오푸스데이 내부에서만 쓰였습니다.
오늘날 이 편지들을 찾아보는 데 문서 끝에 적힌 날짜나 라틴어가 실용적이지 않으므로, 전집에서는 일련번호를 붙이고 내용에 관한 짧은 설명을 덧붙이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 간략판에서도 같은 번호를 따르며, 사용하기 쉽도록 다루는 주제를 한층 더 짧게 덧붙였습니다.
성 호세마리아가 이 편지들에서 지닌 분명한 의도는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삶의 관점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자들을 돕고, 명확한 생각을 주며, 예수 그리스도께 더 충실하도록 북돋우고, 경계 없는 복음화 활동으로 이끌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울러 오푸스데이가 왜 지금과 같은 모습인지 설명하려는 뜻도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제1권에는 영적 생활에서 겸손이 지니는 중요성부터 그리스도인과 모든 선의의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지녀야 할 봉사 정신과 정직함에 이르기까지, 여러 주제에 관한 매우 풍요로운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비신자들을 대할 때의 대화 정신과 자유에 대한 사랑,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에 뿌리를 내리면서 동시에 세상과 속세 활동에 대한 낙관적인 사랑 안에서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헌신하는 삶의 희망찬 전망 등, 어떤 관점들은 그 현대성이 놀랍습니다.
편지 제13호, § 13. 이 편지와 이 서론에서 인용할 다른 편지들은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전집에 붙여진 번호로 표시합니다. 간단한 설명을 곁들인 전체 목록은 편지들 주석본 제1권의 서론에 있습니다.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Cartas (I), Madrid, Rialp, 2020, 24-32페이지 참조.
편지 제15호, § 3.
1933년 4월 24일 그는 내심 메모에 이렇게 씁니다.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저는 오직 당신의 일만을 위해 살기를 갈망하며, 영적으로는 피정과 강화, 묵상과 편지 등을 통해 제 내적 생활 전체를 제 자녀들의 양성에 바치기를 갈망합니다.” 내심 메모(Apuntes íntimos), 1933년 4월 24일(989항). 두 달 뒤 그해의 피정을 마치면서는 이렇게 적습니다. “결심: 학위를 취득하는 일을 마치면 가능한 모든 준비를 갖추어, O. [오푸스데이]에 적합해 보이는 이들에게 피정과 강화 등을 하는 데 뛰어들고, 그 피정과 강화, 개인적 대화에서 심은 생각들이 오래 남도록 묵상과 편지 등을 쓰겠다.” 내심 메모(Apuntes íntimos), 1933년 6월(1723항).
이 창작 과정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앞서 인용한 편지들 제1권에 호세 루이스 이야네스가 쓴 서론, 3-32페이지를 참조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요한 23세께서 1962년 2월 22일 교황령 Veterum sapientiae(AAS 54 [1962] 129-135)에서 라틴어의 보존과 학습에 관해 하신 권고를 따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 문서는 라틴어가 진리를 설명하는 데 정확성과 명료함을 주며, “안정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변함없는 해석을 보장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편지들 안에 오푸스데이 정신을 영원히 유효하게 설명해 두고 싶었던 에스크리바의 바람과도 일치합니다. 나중에는 이 생각이 실용적이지 않아 포기했고, 편지들은 스페인어로 인쇄되었습니다.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cartas-1/intro/jibja-ju/ (2026-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