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제2호
서문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밤 사경, 곧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습니다.”1 지극히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주님께서 일러 주신 곳으로 배를 몰고 가려고 바람을 거슬러 힘겹게 노를 젓는 제자들을 만나러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 제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그분께서는 이를 위하여 당신의 신성한 권능을 드러내시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명령을 수행하며, 인간의 격정과 오류로 거칠어진 바다를 항해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안에서 온갖 나약함을 느끼지만, 주님께서 맡기신 이 구원의 배를 끝까지 이끌어 가겠다는 결심은 굳건합니다.
때로는 거센 맞바람 앞에서, 인간적으로는 무력한 우리의 목소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올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사람들이 저를 뒤쫓고 공격하며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원수들이 줄곧 저를 뒤쫓습니다. 정녕 저를 공격하는 자들이 많기도 합니다.”2
주님께서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필요할 때마다 사랑 가득한 전능으로 당신을 드러내시어, 당신 사람들의 마음을 평화와 확신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습니다.”3
겸손의 필요성
저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에서 오는 기쁨과 더불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겸손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이 겸손은 희망과 넓고 큰 마음에 어긋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가장 잘 지켜 주고 보장해 줍니다. “모든 확신이 칭찬받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마땅히 내려놓아야 할 만큼만 걱정을 내려놓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일에서만 두려움을 떨쳐 버리는 확신이 칭찬받을 만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확신은 용덕과 대범함의 한 조건입니다.”4
우리 각자는 성경에 나오는 저 거대한 상과 같습니다. “그 상의 머리는 순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며, 배와 넓적다리는 청동이고, 아랫다리는 쇠이며, 발은 일부는 쇠로, 일부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5
우리의 인간적 토대가 이렇게 약하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맙시다. 그러면 신중해지고, 곧 겸손해져서, 저 거대한 상에 일어난 일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떨어져 나와 쇠와 진흙으로 된 그 상의 발을 쳐서 부수었습니다. 그러자 쇠와 진흙과 청동과 은과 금이 한꺼번에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처럼 되었고, 바람에 날려가 그 흔적조차 남지 않았습니다.”6
자녀 여러분, 성령께서 바오로 성인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닥친 유혹은 인간이 겪는 보통의 유혹일 따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실하시므로 여러분의 힘을 넘어서는 유혹을 겪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유혹에서도 유익을 얻어 견디어 낼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7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신화
영혼은 은총으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합니다. 곧 신화(神化)됩니다. 그 새로운 삶은 이전의 삶과, 또 주위에서 흔히 마주치는 삶과 얼마나 다릅니까! 성신앙은 은총의 상태에 있는 영혼이 참으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영혼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셨던 크고 귀중한 은혜들을 우리에게 주시어, 그 은혜들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8 신앙으로 바라보는 이러한 인간 이해는, 순전히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인간 이해와 크게 다릅니다. 그 차이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에 비길 만큼 큽니다.
우리는 살과 뼈를 지닌 인간이지 천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은총 안에 있는 영혼의 영향으로, 육신에도 이러한 신화의 효과가 미칩니다. 이는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맛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감히 ‘저는 거룩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스스로 다른 이를 거룩하게 하는 존재이며, 저를 거룩하게 해 줄 이가 필요 없다는 뜻으로 거룩하다고 말한다면, 저는 교만한 거짓말쟁이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에 따라, 거룩하다는 말을 거룩하게 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몸도 머리이신 그분과 함께, 그분 아래에서, 땅끝에서 부르짖는 마지막 사람에 이르기까지 담대하게 말하십시오. ‘저는 거룩합니다.’”9
자녀 여러분, 저는 한 가지 염려를 숨길 수 없습니다. 겸손이라는 깊은 토대가 없다면, 이러한 신화가 어떤 경우에는 자만으로, 참된 희망의 변질로, 교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염려입니다. 그러다가 조만간 예상하지 못했던 자신의 나약함을 체험하면, 영적으로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저는 바람에 높이 날려 올라가 햇빛을 받아 황금빛 구름을 이루는 먼지를 곧잘 예로 듭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를 높이 들어 올리고,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과 아름다움이신 하느님의 온갖 놀라움을 우리 안에 비추어 줍니다. 여러분과 제가 자신을 먼지이며 보잘것없고 나약한 존재라고 안다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 생각은 제 영혼을 가득 채웁니다.
그러나 겸손 없는 신격화라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좋지 않습니다! 더구나 집단적으로 스스로를 신격화한다면 더욱 나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겸손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교만한 이를 낮추십니다.”10
내적 생활과 영적 활동이라는 항해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도들에게 이처럼 바다가 잔잔한 시기를 허락하십니다. 거친 풍랑도, 자신의 나약함도, 주위 환경의 장애물도 잠잠해집니다. 영혼은 자신과 다른 이들 안에서 하느님께 속한 것들의 아름다움과 힘을 누리고, 아직 흔들리는 믿음 속에서도 기쁨과 평화와 확신으로 가득 찹니다.
특히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흔히, 때로는 여러 해 동안, 폭풍이 덜한 바다로 이끄십니다. 그들이 처음 내린 결심을 굳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아직 내어 드릴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sicut modo geniti infantes’,11 곧 갓 태어난 아기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신격화가 눈을 멀게 하여 우리에게 진흙으로 된 발이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올바른 신화와 그릇된 신격화를 가르는 시금석은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일이 하느님의 선물이며 은총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한,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선물로 받은 영적 위대함을 자신에게, 자신의 행위와 공로와 탁월함에 돌린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겸손하십시오, 겸손하십시오! 우리는 자신이 어느 모로 진흙으로 빚어졌음을 알고, 자신의 교만과 나약함도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인이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 겸손에 이릅니다. 첫째는 신심을 닦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영적 체험을 깊이 겪는 가운데, 육신의 나약함이나 덕을 실천하는 이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행동, 또는 자신을 덮치는 악한 생각 때문에, 자신을 더욱 낮추고 순종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경우입니다.
둘째는 지성이 거룩한 은총으로 깊고 충만하게 비추임을 받을 때입니다. 그러면 영혼은 겸손이 마치 본성이 된 듯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더욱 충만하고 풍요로워져, 언제나 하느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더라도 영광을 얻으려는 욕망으로 우쭐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보다 자신을 낮추며, 순종과 거룩한 겸손이 가득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합니다.”12
겸손의 토대 위에 세우기
건물의 기초를 놓으려면 때로는 땅을 아주 깊이 파야 합니다. 커다란 철제 지지대를 만들어, 바위에 닿을 때까지 박아 넣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단단한 지반이 나오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 반석은 신심, 하느님의 자녀됨, 하느님 손에 자신을 맡기는 태도, 솔직함, 그리고 언제나 일상생활의 현실에 발을 붙이고 생각하는 자세입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피신처, 저의 구원자이십니다.”13
우리 주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의 가르침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리고 강물이 넘쳐흐르고 바람이 거세게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가르침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리고 강물이 넘쳐흐르고 바람이 거세게 그 집에 들이치자, 그 집은 무너져 크게 파괴되고 말았다.”14
자녀 여러분, 이제 저는 여러분이 깊고 진실한 겸손 위에 삶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몇 가지 생각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지혜와 가르침을 업신여기는 이는 불행합니다. 그의 희망은 헛되고, 수고는 열매를 맺지 못하며, 그가 하는 일은 쓸모없습니다.”15 반면에 주님께서는 “거룩한 이들에게 그 노고에 맞는 상급을 주시고 놀라운 길로 이끄셨으며, 낮에는 그늘이 되어 주시고 밤에는 별빛이 되어 주셨습니다.”16
우리 삶의 항해에는 안으로든 밖으로든 바다가 잔잔한 시기가 있고, 그 시기가 오래 이어지기도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평화가 결정적으로 자리 잡고 평온이 완전해지는 곳은 오직 하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싸움을 가져오러 왔다.”17
사람은 조금씩 성장하지만, 자신의 본성이 지닌 인간적 완성의 모든 가능성을 남김없이 실현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 자연적 활동에서는 누구도 능가하지 못할 경지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완덕의 본질인 사랑 안에서는 언제나 더 자랄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 고유한 본성에 따라, 성장에 한계가 없습니다. 사랑은 무한한 사랑이신 성령께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을 자라게 하시는 원인이신 하느님의 능력도 무한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측면에서도 이러한 성장에 한계를 정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자랄수록, 더 큰 사랑을 받아들일 능력도 함께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사랑의 성장에 한계를 미리 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려야 합니다.”18
바오로 성인의 증언을 들으십시오. “저는 이미 모든 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완전해진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저를 붙잡으신 그 목적에 도달하려고 계속 달려갑니다.”19 바오로 성인은 완전한 길손이었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 길이 이끄는 완성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함께 이렇게 말씀드리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달려갑시다. 계속 나아갑시다. 우리는 이미 길 위에 있습니다. 지나온 길에 대한 복된 확신 때문에,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을 향한 노력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합시다.”20
장애물이 있음을 알기. 자신의 나약함에 놀라지 않기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목표는 높습니다. 삶의 여정이 끝날 때까지도 그 완성에는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더 높은 곳을 향할 수 있습니다. 전진하지 않는 사람은 후퇴하고, 성장하지 않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집회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를 먹는 이들은 여전히 배고프고, 나를 마시는 이들은 여전히 목마를 것입니다.”21
더구나 우리 안에는 은총을 거스르고 저항하는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원죄의 상처이며, 어쩌면 우리의 개인적인 죄들로 더욱 덧난 상처입니다.
자녀 여러분, 성덕을 갈망하는 여러분을 가장 먼저 가로막는 것은 게으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싸워야 할 첫 번째 전선입니다. 그다음에는 반항, 곧 그리스도의 가벼운 멍에를 어깨에 메려 하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 거룩한 자유가 아니라 방종을 향한 무분별한 열망도 있습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과, 언제나 우리를 따라다니며 나이가 들수록 더 교묘해지는 교만도 있습니다. 그 뒤로 온갖 나쁜 성향이 줄을 잇습니다. 우리의 나약함은 결코 혼자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속이지 맙시다. 우리에게는 나약함이 있을 것입니다. 늙어서도 스무 살 때와 같은 나쁜 성향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때도 영적 투쟁이 똑같이 필요하며, 주님께 겸손을 달라고 청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Militia est vita hominis super terram’,22 곧 인간의 지상 생활은 싸움입니다. 그러나 평화는 바로 이 싸움 안에 있습니다. 평화는 승리의 열매입니다!
자녀 여러분, 자신이 나약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마음속에 ‘fomes peccati’, 곧 죄의 불길을 일으키는 불씨인 죄로 기우는 성향이 있다고 해서 겁먹지 마십시오.
놀라지 마십시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그때마다 다시 일어납니다.”23 우리의 영적 투쟁에도 실패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수하고 잘못했을 때에는 곧바로 마음을 돌려 통회해야 합니다. 상처가 나면 곧 피가 몰려와 이물질과 감염의 원인에 맞서듯, 통회의 행위가 지체 없이 마음과 입술에서 나와야 합니다.
“주 하느님이 말한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에서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어찌하여 굳이 죽으려 하느냐? 너 사람의 아들아, 네 백성의 자손들에게 말하여라. 의인이라도 죄를 짓는 날에는 그의 의로움이 그를 구해 주지 못한다. 악인이라도 자기 악에서 돌아서는 날에는 그 악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의인도 죄를 짓는 날에는 자기 의로움으로 살지 못한다.”24
인간적 성향이라는 장애물
다른 한편으로, 죄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고귀한 인간적 것들에 우리가 여전히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것들을 내려놓았다고 해서, 그것들을 향한 성향까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성향이 있었기에 우리 각자의 봉헌은 자신을 아낌없이, 집착 없이 내어 드리는 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봉헌을 지켜 가기에, 충실함은 계속 자신을 내어 드리는 일이 됩니다. 곧 지속되는 사랑이며, 너그러움이며, 이탈이지, 단순한 관성의 결과가 아닙니다.
토마스 성인은 말합니다. ‘Eiusdem autem est aliquid constituere, et constitutum conservare.’25 어떤 것을 이루게 하는 원인은 그것이 이루어진 뒤에도 그것을 유지하게 합니다. 자녀 여러분, 여러분의 봉헌을 처음 이루게 한 바로 그것이, 앞으로도 그 봉헌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린 사람과 같습니다.”26 하느님의 밭은 온 세상이며, 특별한 의미에서 여러분의 영혼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아버지의 밭은 우리의 밭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저에게 온 세상을 유산으로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위대함과 책임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27 하느님의 원수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 원수인 사탄이 끼어들고 함정을 놓는다는 이야기를 꺼리거나 두려워하는 듯합니다. 저는 악마가 활동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저는 제대 아래에서 ‘Sancte Michaël Archangele, defende nos in proelio: contra nequitiam et insidias diaboli…’28라고 기도할 때 깊은 신심을 느낍니다.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수많은 일에서 악마의 영향으로부터 지켜 주십사고 청하는 것입니다.
‘Cum autem dormirent homines…’, 곧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단 한 마디도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교리와 거룩한 생활의 좋은 씨앗을 허비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잠, 좋지 않은 잠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Custos, quid de nocte?’29 파수꾼아, 밤이 얼마나 지났느냐? 파수꾼아, 경계하여라! 우리는 깨어 있으면서 경고의 외침을 듣고,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잠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좋은 것들 가운데 나쁜 것이 끼어들기 때문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30
“밀이 자라 이삭을 맺기 시작하자 가라지도 드러났습니다.”31 비유 안에 담긴 하느님의 가르침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단순한 영혼에게는 밝고 명료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하며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바리사이들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 밭, 원수, 가라지….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가, 내밀한 기도 안에서 비유를 설명해 주십사고 청하십시오. ‘Edissere nobis parabolam!’32
주님께 가능한 모든 수단을 쓰고 싶다고 말씀드리십시오. 그러지 못했음을, 자신이 잠들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참으로 슬픈 그 잠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소홀해진 것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약해서였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곧바로 주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주님과 함께 굳세어지겠습니다. 패배는 제 것이고, 승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는 세상에 악이 없기를 바랍니다. 밭은 갈아엎어지고 필요한 돌봄을 받으며, 씨앗은 아낌없이 뿌려질 것입니다. “주님, 원수들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당신께 피신합니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이시니, 당신 뜻을 실천하도록 저를 가르치소서.”33
“온갖 짐과 죄의 얽매임을 벗어 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힘껏 달려갑시다.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언제나 바라봅시다.”34 어려움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약한 인간 본성의 성향에 맞서 싸우고 이겨 낼 수단을 알고 있습니다. 그 수단을 사용하며,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을 신뢰합시다.
낙관적인 마음을 가지십시오. 바오로 성인이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합니다. ‘Gaudete in Domino semper: iterum dico: gaudete.’35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자녀 여러분, 사물의 밝은 면을 보아야 합니다. 삶에서 가장 끔찍해 보이는 것도 그렇게까지 캄캄하고 어둡지는 않습니다. 차근차근 살펴보면 비관적인 결론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의사는 환자를 보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썩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신뢰하십시오. 다른 면을 살펴보지도 않고 나쁘다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아픈 사람이 곧바로 묘지로 가야 할 시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알맞은 치료약을 주어 낫게 합시다. 우리의 정신 안에는 필요한 온갖 치료약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인 문제라는 장애물
언제나 평온을 지닙시다. 신심이 깊고 솔직하다면 슬픔이 오래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객관적으로는 슬퍼할 일이 아닌데도 때때로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슬픔은 온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천주의 성모님의 어린 자녀이므로, 그분의 품 안에서 기쁨과 평화로 살아갈 것입니다. 때로는 누구나 마음속에 작은 갈등을 겪습니다. 그런데 교만은 그것을 크게 부풀려 대단한 일로 만들고, 우리의 평화를 빼앗으려 합니다. 그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이렇게 말하십시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죄인입니다.”
개인적인 문제를 겪는 이들 대부분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에 그런 문제를 겪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슬픔을 사라지게 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야 할 봉사를 잊고 자신에게 지나치게 몰두하는 데서 생깁니다.
자신을 잊고 영혼들을 섬기는 데 헌신하는 것은 참으로 효과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쁨 가득한 겸손으로 그 헌신에 보답하십니다.
또한 자신만 희생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품지 마십시오. 참된 희생 제물은 오직 한 분, 십자가 위의 우리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분함과 봉사 정신입니다.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은총이 풍성히 퍼져 나가 많은 이들의 감사로 하느님의 영광을 더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이 허물어져 가더라도 내적 인간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현세의 짧고 가벼운 고난은 우리에게 비길 데 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마련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36
내적 어둠이라는 장애물
우리는 어쩌면 또 다른 장애물, 곧 내적 생활의 어둠을 이겨 내야 할 것입니다. 신심이 깊은 사람도 가련한 자기 마음이 어둠 속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 어둠은 잠시일 수도 있고, 며칠이나 한동안, 또는 여러 해 동안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는 이렇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님,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으니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온유하고 어지신 분이시며, 당신을 부르는 이들에게 자비가 크십니다.”37
또한 요한 성인이 전해 주는 저 놀라운 일을 묵상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38
우리에게 눈먼 상태가 찾아오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우리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욱 거룩하고 더욱 유익한 도구로 만드시려고 사용하시는 수단일 수 있습니다. 어느 경우에나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사는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느님 아닌 다른 이유에 덜 의존하고, 더욱 하느님 자신께 뿌리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아는 것이 적은 사람이 자기 판단으로 보이는 것보다 지식이 훨씬 많은 사람에게서 듣는 것을 더 확신하듯, 사람은 그르칠 수 있는 자기 이성으로 보는 것보다 결코 그르칠 수 없으신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훨씬 더 확신합니다.”3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개신 뒤, 눈먼 이의 눈에 바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습니다.”40 자신을 정화하십시오. 그러면 더욱 맑아진 시선, 하느님께서 주시는 밝은 시선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낮추시는 바로 그 일로 우리를 높이십니다. 영혼이 하느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고 순종하며, 굳센 마음으로 정화를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빛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자신이 그때까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처럼 살아왔음을 놀라워하며 깨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41
결국 우리가 겪는 갈등도 겸손의 문제입니다. “세리가 성전에서 어떻게 기도하는지 보십시오. 그는 멀리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더욱 쉽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는 감히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지 못했지만, 이미 하늘을 만드신 분을 자기 곁에 모시고 있었습니다. (…) 하느님께서 멀리 계시느냐 가까이 계시느냐는 그대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그대 안에 머무르실 것입니다.”42
내적 메마름이라는 장애물
자녀 여러분, 신심 생활의 규범을 실천하면서 지치고 냉담해져서, 마치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제게 말할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연극은 참으로 훌륭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가 자녀들과 놀아 주듯 우리와 놀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시고, 여러분과 저는 그분 앞에서 아주 작은 어린아이입니다. ‘Ludens in orbe terrarum.’43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놀고, 하느님께서는 부모가 자녀들과 놀아 주듯 우리와 놀아 주십니다.
노력과 메마름 앞에서 우리가 연극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을 관객으로 모시고 인간의 연극을 펼치는 놀라운 시간이 왔다고 말입니다. 그 관객은 하느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 하느님과 함께 천주의 성모님과 천사들과 성인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신심 생활, 희생의 삶, 사랑의 삶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도 사랑 때문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그분 앞에서 연극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광대가 되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사랑 때문에, 희생하면서, 개인적인 만족을 전혀 얻지 못하면서도 우리와 놀아 주시는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연극을 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세상의 보상을 구걸하지 않고, 보잘것없는 작은 불충실을 찾아 헤매지도 않으면서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자랑스럽고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여기십시오. 평범한 일상의 산문을 열한 음절로 이루어진 영웅 서사시의 시구로 바꾸는 것입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그를 사랑하고 나 자신을 그에게 드러내 보일 것이다.”44 주님께서 때때로 은총을 베푸시어, 헤아릴 수 없는 당신의 판단을45 우리가 알아듣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판단은 꿀보다, 벌집에서 흐르는 꿀보다 더 달콤합니다.46 그러나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기 때문에 이행해야 합니다.
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꺼운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 영혼을 행복하게 하는 감미로운 사랑은 고통 위에, 주님과 그분의 거룩한 교회를 섬기려고 자기 성향을 거슬러 나아가는 기쁨 위에 세워집니다.
유혹이라는 장애물
“그대가 하느님 마음에 들었으므로, 시련으로 시험받아야 했습니다.”47 주님께서 우리의 모범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유혹받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얻고, 그분과 함께라면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갖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순간에 영혼이 떨리는 것을 느끼거든,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제 모든 뼈가 떨리고 제 영혼이 몹시 떨리니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48
그러면 그분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고, 너를 이름 불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49
자신이 진흙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있는 그대로 안다고 해서 당황하거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신화입니다. 우리는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선택받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선택하시어, 당신 앞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50 우리는 각자의 가련한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 그분의 도구입니다. 겸손을 잃지 않고 자신의 연약함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익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유혹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 줍니다.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드는 것과 거기에 동의하는 것은 다릅니다. 유혹은 쉽게 물리칠 수 있습니다. “가장 작은 은총으로도 온갖 사욕을 물리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충분합니다.”51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제방을 넘어 흘러넘치려는 정욕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유혹은 기도와 극기로 이깁니다. “그들이 저를 괴롭힐 때에 저는 자루옷을 입고, 단식으로 제 영혼을 낮추며, 가슴속에서 거듭 기도하였습니다.”52 우리가 충실하면 세상에서 많은 선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봉헌의 삶에 새기십시오. 불충실의 거짓된 매력 앞에서 굳세고 강인하며 온전하고 흔들림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시편 저자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세게 떠밀려 넘어질 뻔하였으나 주님께서 저를 붙들어 주셨습니다.”53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유혹이 닥칠 때에 당신의 힘, 곧 은총으로 도우시어 저희가 승리하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겸손해지도록 시련을 허락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한 가지 심리적 갈등에 관하여 미리 일러 두고자 합니다. 몇 해 전, 신중하고 신심 깊은 한 훌륭한 수도자가 제게 말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마흔 살이 되면, 결혼한 사람은 결혼을 끝내고 싶어 하고, 수도자는 교구 사제가 되고 싶어 하고, 의사는 변호사가, 변호사는 기술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모두 그런 식입니다. 일종의 영적 대혼란이지요.”
일이 그 수도자의 말처럼 꼭 그렇게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그처럼 일반적인 법칙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를 겪는 이가 극히 적더라도, 제 자녀들이 그러한 위험을 알고 대비하기를 바랍니다. 형제자매 가운데 누군가 이런 고뇌를 겪는다면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신심이 새로워지고 활력을 되찾게 하며, 특별히 따뜻하게 대하고,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맡겨 주십시오. 꼭 마흔 살에 일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흔다섯 살에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또한 긴장을 풀고 쉴 수 있는 기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소수에게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아주 어린아이여야 한다고 해서 유치한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푸스데이에 올 때에는 자신의 발이 진흙으로 되어 있고 자신이 살과 피를 지닌 사람임을 알 만큼 충분한 나이가 되어 있습니다. 한창 성숙한 나이에 이르러서야 그것을 깨닫는다면 우스운 일일 것입니다. 태어난 지 몇 달 된 아기가 자기 손과 발을 처음 발견하고 놀라는 것과 같을 테니까요. 우리는 자신의 보잘것없음과 연약함을 모두 알면서 하느님을 섬기러 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 드렸다면, 사랑이 우리를 불충실하지 않도록 지켜 줄 것입니다.
또한 그때에 불충실해져 지상의 사랑에 매달린다면, 그것은 슬픔과 부끄러움과 고통으로 가득한 매우 쓰라린 삶의 시작이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자녀 여러분, 결코 맏아들의 상속권을 팔아 버리지 않겠다고, 세월이 흐른 뒤 그것을 렌즈콩 죽 한 그릇과 바꾸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십시오.** 희생으로 사랑해 온 그 많은 세월을 그렇게 헐값에 넘겨 버린다면 참으로 슬픈 일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십시오. “저는 당신의 의로운 법규를 지키기로 맹세하였으니, 그 맹세를 지키려 합니다.”54
우리의 충실함에 언제나 보답하시고 ‘omnia in bonum’, 곧 모든 것이 선을 이루는 데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동시에 언제든 자만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더 큰 선에 이바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모든 것을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이끄십니다. 그래서 길을 벗어나고 도를 넘은 이들조차 덕행에서 진보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더욱 겸손해지고 경험을 쌓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올바른 삶의 길을 걷는 중에도 기쁨과 떨림으로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자신이 안전하게 걸어가는 공을 주제넘게 스스로에게 돌리거나, 일이 잘 풀릴 때 ‘이제 우리는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게 됩니다.”55
낙담이라는 장애물
우리 모두에게는 허물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기려고 여러 해 동안 애써 왔더라도 그렇습니다. 영적 투쟁에서 낙담만 얻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충실하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Servi inutiles sumus’,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56 그러나 우리가 조금이라도 자기 몫을 한다면, 주님께서는 이 쓸모없는 종들을 통하여 세상에서 매우 큰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하늘에서 내밀어 주시는 손을 붙잡으려고 우리 손을 들어 올리는 노력이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자신의 발이 진흙으로 되어 있음을 보고 놀라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뿐입니다. 통회와 보속의 행위를 하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의식하는 잘못 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잘못이 있으리라는 것을 인정합시다. 그러므로 사랑에서 우러나는 아픔을 지닙시다. 그 아픔과 겸손의 깊은 자리에서, 우리 삶 안에는 많은 사랑도 있음을 감히 주님께 말씀드립시다.
잘못이 실제였듯 사랑도 실제입니다. 그 사랑은 그분께서 친히 우리 안에 넣어 주신 것이며, 우리 마음의 모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섬기게 합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뒤 베드로가 바친 통회의 말을 화살기도로 자주 바치십시오. “Domine, tu omnia nosti; tu scis, quia amo te!”57
여러분의 수호천사에게 우리의 잘못을 보지 말아 달라고 말씀드리십시오. 저는 제 수호천사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파하며 뉘우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름 더미에서 피어난 백합처럼 우리 마음에서 싹튼 이 선한 뜻을 주님께 전해 달라고 청하십시오.
여러분의 나약함이나 저의 나약함, 우리의 패배 때문에 낙담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열고 단순한 사람이 되십시오. 더욱 큰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이 길을 계속 걸어갑시다. 그분께서 우리의 힘이시기 때문입니다.58
자기 자신을 무질서하게 사랑한다면 슬퍼할 이유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실패와 보잘것없음이 있습니까! 자기 안에 그런 비참함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슬픔과 낙담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안에서 그분을 위하여 이웃과 자신을 사랑한다면 기뻐할 이유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결점을 생각하여 우쭐해지지 않는 것은 겸손에 속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받은 선물을 업신여기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배은망덕에 속합니다. 그런 멸시에서 게으름과 나태가 생겨납니다.”59 영적인 것을 싫어하는 마음과 미지근함도 거기서 생깁니다. 미지근함은 내적 생활의 무덤입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어쩌면 유난히 생생하게 체험하여 기운이 빠진다면, 그때야말로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느님 손에 자신을 맡길 때입니다. 어느 날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에 한 거지가 나와서 자선을 청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다섯 도시의 주인으로 삼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가난한 이는 어리둥절하여 외쳤습니다. “저는 그렇게 많이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가 대답했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처지에 맞게 청했고, 나는 나의 처지에 맞게 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고쳐 주십니다
“깊은 곳에서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제 목소리를 들어 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소서. 주님, 당신께서 죄를 기억하신다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서는 용서하시는 분이시고, 당신의 법은 제가 당신을 경외하도록 도와줍니다. 저는 당신의 약속을 바라며, 제 영혼은 주님을 신뢰합니다. 야경꾼들이 새벽을 기다리는 것보다 이스라엘은 더욱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께는 자비가 있고 풍성한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60
우리는 ‘de limo terrae’, 땅의 진흙으로 빚어졌습니다.61 물항아리를 만드는 흙처럼 약하고, 깨지기 쉽고, 단단하지 못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산산이 깨진 질그릇을 어떻게 수선하는지 보셨을 것입니다. 계속 쓰도록 쇠붙이로 이어 붙입니다. 그렇게 고친 그릇은 오히려 더 아름답기도 합니다. 특별한 멋이 있습니다. 무언가에 쓰였던 그릇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 쓸 수 있다면 훌륭한 그릇입니다. 게다가 그 그릇들이 생각할 수 있다면 결코 교만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릇이 깨졌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고, 그것을 고쳤다는 것은 더욱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특히 대신할 수 없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자녀 여러분, 영혼은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각자의 가련한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하느님의 향유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좋은 도구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참된 겸손으로 자신이 작고 비참하다고 느낄수록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부족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발걸음을 굳건히 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십니다. 그가 넘어져도 그대로 쓰러져 있지는 않으리니,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62
때때로 여러분 자신의 삶에서, 루카 성인이 전하는 나인의 장면을 겪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큰 잘못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설령 그런 경우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를 묻으러 메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외아들이었고,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가시어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곧 일어나 앉아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63
내적 생활은 바로 이것입니다. 시작하고 또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적 생활은 통회와 사랑과 보속의 행위를 거듭하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 당신을 높이 기립니다. 저를 구해 주시고, 제 고통을 원수들이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 저의 하느님, 제가 당신께 부르짖자 저를 낫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 영혼을 무덤에서 끌어 올리셨고, 구렁으로 내려가는 이들 가운데에서 저를 생명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의 성도들아, 주님께 노래하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여라.”64
실패라는 장애물
어떤 때에는 두 손이 빈 채로 남아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다시 시작할 때입니다. 시몬 베드로처럼 다시 들려오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들을 때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 애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와서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습니다. 이를 본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65
우리가 어떤 비참함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기억하고, 우리의 교만이 초래한 실패들을 떠올리며, 고기를 잡으시는 그리스도, 하느님의 위엄 앞에서 베드로와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가련한 죄인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때 사도에게 하셨듯이 지금 여러분과 저에게도,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의 그물 안에 들이실 때 하셨던 말씀을 되풀이하십니다. “Ex hoc iam homines eris capiens.”66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하느님의 명령으로, 하느님의 사명을 받아,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열매를 맺으며 말입니다.
여러분의 진흙으로 된 발은 부서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발이 얼마나 약한지 알고 있으므로 신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나를 죄로 고발할 수 있느냐?”67 하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밤이 되어 양심을 성찰하고, 하루의 일을 셈하여 모두 더해 보면, 제가 얻는 결론은 이렇습니다. ‘Pauper servus et humilis!’**** 가난하고 비천한 종입니다! 저는 자주 이렇게 기도합니다. “Cor contritum et humiliatum, Deus, non despicies!”68 “하느님, 부서지고 낮추어진 마음을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겸손한 체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자신을 가난하고 쓸모없는 종으로 여기며, 부서지고 낮추어진 마음을 지닌 것을 보신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업신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당신께, 지극히 사랑하올 당신 성심의 부요함과 큰 능력에 결합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올바른 신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좋은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음을 아는 이의 신화입니다.
“보라, 내가 바로 그대의 죄를 지워 버리고 더는 기억하지 않는 하느님이다. 보았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내가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자비에 속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자기 죄를 기억하여 그것을 바로잡는 계기로 삼으십시오.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하느님께서 잊으신 죄들을 언제나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또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죄인들 가운데 첫째가 바로 나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였습니다.’가 아니라 ‘나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그 죄들이 용서받았지만, 바오로에게는 그 기억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워 버리신 것을 그는 스스로 드러냈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그를 선택된 도구라고 부르시고, 그는 자신을 첫째가는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죄도 잊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은혜는 얼마나 잘 기억했겠습니까!”69
바오로 성인은 자신이 사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임을 알지만, 동시에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도 느낍니다. 여러분과 저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입니다. 저 자신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죄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더는 그분을 거스르지 않지만, 저는 다른 사람이 저지른 온갖 비열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비로이 우리의 연약함을 다른 이들의 눈에 감추어 주셔서, 사람들이 우리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칭찬하며 우리가 죄인임을 모르는 듯 행동할 때, 우리는 참된 겸손으로 마음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Tamquam prodigium factus sum multis: et tu adiutor fortis.”70 “저는 많은 이에게 놀라운 표징처럼 되었지만,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 저의 힘이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은 인간의 나약함 안에서 드러납니다
“계시가 너무나 엄청나서 내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내 몸에 가시가 주어졌습니다. 나를 때리는 사탄의 천사입니다. 그것을 없애 달라고 주님께 세 번 청하였지만, 그분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내 능력은 약함을 통하여 빛나고 그 목적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안에 머무르도록 더욱 기꺼이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겪는 질병과 모욕, 궁핍과 박해와 곤경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71
하느님께서는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실 때에 그 일에 걸맞지 않아 보이는 수단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당신의 일임을 분명히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초라함이 얼마나 무겁게 짓누르는지 잘 아는 여러분과 저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제가 비참하게 보이더라도, 당신 손안의 거룩한 도구임을 여전히 알고 있습니다.”
저는 거룩한 교회를 섬기며 평생 해 온 일이 제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임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비록 그분께서 저를 도구로 사용하셨더라도 말입니다. “하늘에서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72
요한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기
요한 복음의 한 대목을 묵상합시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올 것이다.’ 베드로가 말하였습니다. ‘왜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73
그러므로 마음이 뜨거워져 주님께 “예.” 하고 대답하며, 그분께 충실하고 어떠한 희생이든 감수하겠다고 말씀드릴 때에는 이렇게 덧붙입시다. “예수님, 당신의 은총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의 어머니, 어머니의 도움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는 참으로 연약하여 그토록 많은 잘못과 작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당신께서 저를 내버려 두신다면 큰 잘못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녀 여러분, 겸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첫 열두 제자의 발에 입 맞추실 때에 우리의 발에도 입 맞추셨음을 생각하십시오. 그분은 바로 그분이시고, 우리는 있는 그대로 가련한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충실하고 겸손하면 순결하고, 극기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겸손할수록 더욱 큰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시하러 온 것이 아니라 순종하러 왔습니다. ‘Non venit ministrari, sed ministrare’,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처럼74 우리도 섬기러 왔습니다. 세례자의 말을 자주 묵상하십시오. “Illum oportet crescere, me autem minui.”75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커지고 싶다면 작아지는 데서 시작하십시오. 하늘에 닿는 건물을 세우고 싶다면 먼저 겸손의 기초를 놓을 생각을 하십시오. 세우려는 건물이 크고 높을수록 기초는 더 깊이 파야 합니다. 건물이 위로 올라가는 동안, 기초를 파는 이는 더 깊이 내려갑니다. 그러므로 건물은 올라가기 전에 먼저 낮아집니다. 그 꼭대기는 낮아진 뒤에야 솟아오릅니다.”76
결점은 겸손의 계기입니다. 겸손하려면 하느님과 자신 앞에서 솔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결점을 없애려고 싸우기만 한다면, 제가 여러분의 결점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이 겸손의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카스티야 최고의 문인이 말했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토대이자 기초이며, 겸손이 없으면 어떤 것도 덕이 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끝까지 충실하고 싶다면 겸손합시다. 겸손하려면 솔직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 앞에서, 그리고 우리 영혼을 이끌어 주는 이들 앞에서 솔직해야 합니다. ‘Ut probetis potiora, ut sitis sinceri et sine offensa in diem Christi.’77 무엇이 더 나은지 분별하고, 마지막 날까지 순수하고 흠 없이 머무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끝까지 충실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솔직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렵습니다. 사람은 익명 뒤에 숨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공적 생활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은 흔히 익명의 편지를 수없이 받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익명으로 남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개인 기도와 양심 성찰 안에서 하느님과 마주하기를 피합니다.
큰 행렬이 지나갈 때 군중 속에 섞여 저속한 욕설이나 모욕을 퍼붓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혼자서 숨을 곳 없이 상대방과 마주하고, 자기 행동의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겁에 질려 입을 다물겠습니까! 익명과 비겁함 뒤로 숨고 자기 행동의 책임을 피하게 만드는 불성실함은, 거리의 소란 속에서 정체를 감춘 손을 들어 돌을 던져 대성당의 고딕식 유리창을 산산이 부수게 합니다.
모든 사람의 자유와 개인적 책임을 사랑하게 하는 그리스도교적 이성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알고자 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 행동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날마다 하는 양심 성찰은 자신에 대한 앎과 참된 겸손을 주고, 그 결과 하늘로부터 항구함의 은총을 얻게 해 줄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저에 관하여 당신께 감추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 제 혀에 말이 오르기도 전에,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아십니다. (…) 제가 어디로 가야 당신의 영을 벗어나겠습니까? 어디로 달아나야 당신 앞에서 숨겠습니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이 계시고, 심연으로 내려가도 거기에 계십니다. (…) 제가 ‘어둠이 나를 덮어 주고, 내 주위의 빛이 밤이 되어 주리라.’ 하여도, 어둠은 당신께 어둡지 않고 밤도 낮처럼 밝으리니, 당신께는 어둠과 빛이 같기 때문입니다.”78
자신에게 솔직해야 합니다. 이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사람들을 실제 가치대로 사서 그들이 스스로 매기는 값에 판다면 세상에서 가장 남는 장사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솔직하기는 어렵습니다. 교만은 기억을 억지로 왜곡하고 흐리게 합니다. 바로잡을 생각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악을 선으로 포장할 구실을 찾습니다. 온갖 주장과 이유를 쌓아 올려, 점점 약해지고 흐려지는 양심의 소리를 짓눌러 버립니다.
“의지는 선이나 선으로 보이는 것을 향하므로, 선하지 않은 것이 어떤 식으로든 선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결코 악을 향하여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79 정욕이나 그릇된 의지는 지성을 억누릅니다. 지성이 성급히 동의하게 하거나, 마음에 거슬리는 측면은 살펴보지 않게 합니다. 그 대신 자신의 성향을 유리하게 뒷받침하고 선으로 꾸며 주는 측면들만 받아들이게 합니다.
겸손이 없으면 양심이 왜곡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깊이 겸손하지 않으면, 양심은 쉽게 왜곡됩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과 양심은 분명해야 합니다. 악한 일을 하면서 그것을 거룩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이 적을수록 그러한 왜곡의 결과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양심을 주관적으로 달래는 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새로운 도덕의 전령, 악을 옹호하는 주장의 선교사이자 예언자로 여깁니다. 새로운 십자군의 열성으로 자신의 오류를 퍼뜨리고, 약한 이들을 뒤따르게 합니다. 그들은 이런 새로운 가르침에서 자기의 그릇된 행동을 정당화할 구실을 찾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에게는 기꺼이 받아들이는 의무인, 자신을 바로잡는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된다고 느낍니다.
“너희에게 예언하는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마라. 그들은 너희를 속이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제 마음에서 나온 환시이지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비웃는 자들에게 ‘평화, 너희에게 평화가 있으리라.’ 하고 말한다. 또 제 마음의 악한 욕망을 따라가는 모든 이에게 ‘너희에게 아무런 재앙도 닥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한다. (…) 그들은 거짓말과 허풍으로 내 백성을 잘못 이끈다. 내가 그들을 보내지도 않았고 아무런 사명도 주지 않았으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이다.”80
이 성경 말씀을 읽고 나서 평범한 영혼으로서는 분별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확실한 기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께 대한 사랑입니다. 그다음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참된 겸손을 가려내는 시금석입니다.
영적 지도에서의 솔직함
우리는 성인이 되려고 오푸스데이에 왔습니다. 아직 성인이 되기에는 멀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놀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나약함을 올바른 것인 양 꾸미려 하지 말고, 단순하게 인정합시다. 눈을 철저히 멀게 하여 모든 것을 거꾸로 보이게 만드는 교만을 피합시다. 자녀 여러분, 자신에게 솔직하고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의 헌신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겸손해야 하고, 영적 지도에서 마음을 활짝 열어 영혼의 구석구석에 신선한 공기가 통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수덕 생활은 복음처럼 단순합니다. 마음을 어둠 속에 둔 채 영혼을 복잡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에 단절을 일으켜, 잠시라도 마음의 단순함과 하느님 앞에서의 진실함을 잃게 함으로써 성령의 활동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81
마음을 짓누르는 일이 있으면 말하십시오. 입을 다물게 하는 악마를 경계하십시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모두 이야기하십시오. 그러면 언제나 이길 것입니다. 말하지 않으면 이기지 못합니다. 말하지 않는 사람은 사탄과 비밀을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을 친구로 삼는 것은 좋지 않은 일입니다.
더없이 솔직하십시오. 말하지 않은 채 자기에게 무엇인가를 허용하지 마십시오. 모두 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길이 복잡하게 얽힌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이 결국 큰일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고해성사를 보러 간 집시의 이야기를 기억하십시오. “신부님, 제가 고삐를 훔쳤습니다. (…) 그런데 그 뒤에 노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또 그 뒤에 다른 고삐가 있었고, 또 노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렇게 스무 마리까지 이어졌습니다.
자녀 여러분, 다른 많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삐 하나쯤이라고 허용하는 순간, 나머지 전체가 줄줄이 뒤따라옵니다. 부끄러워할 일들까지 따라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는 두 가지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어머니를 찾아온 여자 손님들에게 입 맞추는 것과 새 옷을 입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침대 밑으로 숨곤 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호세마리아, 부끄러워할 것은 죄뿐이란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저는 그 말씀에 아주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악마는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도록 부끄러움을 빼앗아 갔다가, 그 잘못을 말하지 못하도록 다시 부끄러움을 돌려줍니다.
그 잘못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카페에 둘러앉아 과장하며 자랑하는 바로 그 잘못일 수도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아주 솔직하십시오.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 생기면 즉시, 달려가서, 여러분을 도울 수 있는 이에게, 착한 목자에게 말씀드리십시오. 이것이 이치에 맞는 결정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돌 하나를 등에 지고, 주머니에는 모두 합쳐 백 그램쯤 되는 작은 돌들을 가득 넣고 걸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마드리드라면 푸에르타 델 솔에서 쿠아트로 카미노스까지 걸어가야 한다고 해 봅시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큰 돌을 계속 등에 진 채 주머니의 작은 돌부터 하나씩 꺼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거운 짐입니다.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몹시 어리석은 일이며, 솔직하지 못하게 되는 시작입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쓰라린 결과가 생기면 이야기하십시오. 모든 치유는 하느님께 있습니다. 크고 엄청난 죄를 지었더라도 그렇습니다. 모두 말하십시오. 이야기하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이는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도 진흙으로 빚어졌으며, 그것이 잘못이라면 자기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괴로움은 대부분 소심증이나 올바르게 형성되지 못한 양심에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더욱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지도하는 이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가장 악마적인 유혹입니다. 솔직하지 못하게 만드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항구함의 가장 큰 적입니다. 우리는 진흙으로 빚어졌지만, 말하면 그 진흙은 청동처럼 강해집니다. 이 생각을 깊이 새기고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평온을 얻을 것입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기가 훨씬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 여러분,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성인이 되려고 오푸스데이에 왔습니다. 그러려면 모든 수단을 사용해야 합니다. 병든 사람이 건강을 되찾으려고 병원에 갔다고 합시다. 진찰해야 하니 옷을 벗으라고 해도 싫다고 하고, 어떤 증상이 있느냐고 물어도 말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데려가야 할 곳은 일반 병원이 아니라 정신 병원입니다.
우리를 양성할 사명을 맡은 이들이 우리의 모든 개인 사정을 알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의 모습을 아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영혼이 투명해지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 앞에서, 자신 앞에서, 우리를 양성하는 이들 앞에서 솔직할 때에만,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가능한 만큼 그리스도인의 완덕과 인간적 완성을 이루고 선 안에서 끝까지 충실할 것입니다.
단번에, 남김없이, 용감하게 자신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Ecce ego: quia vocasti me!”82 뒤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도록 배들을 불태우십시오. 영혼 안에 숨겨 두는 구석이 있는 한, 돌아갈 가능성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뜻으로 이 길을 잃는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어쩌면 이제는 손쓸 길이 없어 보이는 때에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야기하면 모든 것을 더 쉽게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영혼이 평온한 때, 올바른 신화를 누리는 때에는 기술자들이 하는 것처럼 하십시오. 그들은 산에서 풍부하게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가두어 둡니다. 그러면 가뭄이 왔을 때에도 마시고, 밭에 물을 대고, 전기를 만들어 빛과 동력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저수지가 있습니다.
지금 빛이 풍부하고 마음속에 충실하고자 하는 열망이 느껴질 때에 굳게 결심하십시오. 언젠가 주님께서 허락하시어 우리가 어둠에 둘러싸였다고 생각하게 되면, 우리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부르며 그 빛으로 돌아가겠다고 말입니다.
죽을 때까지 충실하기
자녀 여러분, 우리가 결심한 이 모든 것은 매 순간의 작은 의무에 충실하는 것으로 모아집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매우 큰일을 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영원한 삶을 기다리며, 지나가는 이 삶에서 주님을 섬기도록 자신을 바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남습니다.”83
또한 ‘statutum est hominibus semel mori’, 사람은 한 번 죽는다는 것을84 생각하십시오. 어떤 이는 어린 시절에, 어떤 이는 여러분처럼 젊을 때에, 어떤 이는 한창 성숙한 때에, 또 어떤 이는 늙은 뒤에 죽습니다.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은 짧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우리 자신의 성화와 사도직에 참으로 힘써야 합니다. 충실하고 성실하게 시간을 쓰며, 받은 달란트를 책임감 있게 잘 관리하여 하느님의 사업을 진전시켜야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믿음과 순결과 이 길에 대한 충실함을 요구합니다. 손상되지 않고, 굳건하고, 순결하며, 기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충실함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85 마지막 순간까지 충실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성인이 될 것입니다.
믿음에 충실하기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 뒤에 당신을 따라온 군중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준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86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의 주된 목적은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어 우리가 믿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물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도록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87
믿으려는 뜻, 영혼의 겸손한 자세가 없다면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보지 못합니다. 지성은 깊이 없는 평면 위에서 움직이며, 초자연적 실재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 곧 성체에 관하여 말씀하셔도,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빵을 생각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주님, 그 빵을 저희에게 늘 주십시오.’”88
그러나 그분께서 그들이 믿어야 할 신비를 분명한 말로 제시하시어, 그 신비가 실제로 지닌 초자연적 내용을 피할 여지가 없게 하시고, 믿기에 충분한 은총을 주시면서 신덕의 행위를 요구하시자, 그들은 흩어져 떠납니다. “그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물러가 더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는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고 믿었습니다.’”89
저는 지금 여러분과 저를 위하여 베드로의 믿음을 청합니다. ‘Quae per caritatem operatur’,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90 살아 있고, 흔들림 없으며, 망설임도 없고, 그 내용을 축소하지도 않으며, 한 점 그늘 없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믿음입니다.
사랑으로 순결에 충실하기
자녀 여러분, 거룩한 순결을 사랑하십시오. 우리의 정결은 기쁨에 찬 긍정이며, 하느님을 섬기려고 자신을 내어 드린 봉헌과 우리의 사랑에서 마땅히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사랑을 한 피조물에게 쏟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마음을 온전하고 젊고 생기 넘치며 깨끗한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바쳤습니다. 주님의 은총에 응답하기를 우리가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초자연적인 이유입니다.
잠시 덧붙이고 싶습니다. 우리는 혼인 생활을 크게 존중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혼인은 고귀하고 거룩합니다. ‘Sacramentum hoc magnum est’, 혼인은 위대한 성사입니다.91 우리는 혼인을 또 하나의 성소의 길, 하느님의 창조 능력에 놀랍게 참여하는 길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고귀하고 순결한 사도적 독신의 성소가 그 자체로 더 높은 것이라는 사실은 확고한 신앙 교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천사처럼이 아니라, 순결하고 굳세며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나아갈 것입니다. 천사는 우리와 본성이 다르므로 천사처럼 살려는 것은 질서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많은 사람이 가정을 위하여 하는 일, 우리 부모님께서 그리스도인답게 충실히 살며 하신 일을, 우리는 모든 사랑 가운데 가장 크신 사랑을 위하여 합시다.
그러므로 거룩한 순결을 많이 사랑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를 부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기쁨과 초자연적 풍요로움 안에서 우리 오푸스데이의 이 거룩한 길에 끝까지 충실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은총이 위태로워졌다고 느낄 때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이미 말씀드렸듯 우리는 진흙으로 빚어졌습니다. ‘Habemus autem thesaurum istum in vasis fictilibus.’92 우리는 하느님의 보물을 질그릇에 담고 있습니다. 지금을 두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언젠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때를 위하여 지금부터 여러분께 충실함을 청합니다. 시간을 잘 쓰고 교만을 다스리는 데에서, 자신을 버리고 순종하려는 결심에서, 상상력을 통제하려는 노력에서 드러나는 충실함입니다. 여러분의 봉헌이 얼마나 참된지를 지켜 주면서 동시에 드러내는, 작지만 효과적인 수많은 일들에서의 충실함입니다.
어느 순간 내적 투쟁이 더욱 어려워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사랑이 참됨을 보여 줄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 봉헌을 조금이라도 맛보기 시작한 이가 싸움에서 패배하여 쓰러지는 것은, 사기를 당하는 것과 같고 비참한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바오로 성인의 외침을 잊지 마십시오. “Quis me liberabit de corpore mortis huius?”93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 주겠습니까?” 그리고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대답을 들으십시오. “Sufficit tibi gratia mea!”94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젊은 날에 아낌없이 드린 사랑을, 세월이 흐른 뒤 도로 거두어들이지는 맙시다. 충실함은 사랑의 완성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바친 영혼의 삶에서 생길 수 있는 온갖 쓰라림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얼마간의 부패와 불순함이 있습니다. 충실함이 온전하고 금이 가지 않았다면, 그것은 기쁘고 확고할 것입니다.
성소에 충실하기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충실하십시오. 이 당부는 제 마음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여러분이 충실하면, 영혼들과 거룩한 교회를 향한 우리의 봉사는 풍성한 영적 열매로 가득 찰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삶에서 어떤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이 길이나 사랑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으로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의무 하나를 감당할 수 없으니 어떤 의무도 이행하지 않겠다.”
그것은 교만한 반응이며, 하느님을 닮아 가는 데서 악마를 닮아 가는 쪽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옛 스콜라 격언은 ‘Corruptio optimi pessima’라고 가르칩니다. 가장 좋은 것이 타락하면 가장 나쁜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은총과 함께하는 겸손만이 그 타락을, 최선에서 최악으로 순식간에 넘어가는 일을 막을 수 있습니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곳을 찾아 메마른 곳을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찾지 못하면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하고 말한다. 돌아가 보니 집은 말끔히 치워지고 잘 꾸며져 있다.
그러면 나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거기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95
한 가지를 놓쳤다고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으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논리입니다. 우리는 보물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길에서 그 일부를, 심지어 상당한 부분을 잃었다고 해서, 남은 것마저 홧김에 내던질 까닭은 없습니다. 가장 합리적인 태도는 이미 겪은 경험도 활용하여, 더는 잃지 않도록 온갖 예방책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일에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잃어버린 것이 없습니다. 겸손하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남아 있는 것을 지키려 애쓴다면,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때로 참회자의 뉘우침은 너무나 강렬하여, 죄로 잃었던 은총보다 더 큰 은총의 상태에 상응하기도 합니다. (…) 그러므로 참회자는 때때로 이전보다 더 큰 은총을 받고 다시 일어납니다.”96
길가의 가시덤불에 붙잡힌 채 머무르는 이는 자기 뜻으로 그렇게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등졌기 때문에 불행해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나약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나약함은 결코 하느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부르심에 의지하고, 옛 전사들이 갑옷을 입듯 하느님의 선하심 안으로 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Ecce ego: quia vocasti me!”97 “저를 부르셨기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방어입니다. 나약함이 있다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으므로 나약함을 공격해야 합니다.
어려움과 유혹이 닥칠 때에 악마는 자주 우리를 이렇게 생각하게 하려 합니다. “너에게 이런 결함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너를 부르지 않으셨다는 표시다. 너는 더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그 궤변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으므로, 이런 잘못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총으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의 봉헌은, 하느님께서 부르셔서 어느 날 시작한 길에 충실하는 데에 필요한 은총을 받을 자격, 말하자면 권리를 줍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겪더라도,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그 은총이 부족하지 않으리라고 믿음은 말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협력해야 합니다. 그 협력에는 용덕의 실천이 포함됩니다. 용덕의 한 부분은 시련과 어려움과 유혹과 자기 나약함을 견디는 인내입니다. “시험을 받고도 흠 없이 드러난 이는 영원한 영광을 얻으리라. 법을 어길 수 있으면서도 어기지 않고, 악을 저지를 수 있으면서도 저지르지 않은 이는 주님 안에서 제 행복을 보장받으리라.”98
창조주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이 온전한 봉헌의 삶을 위하여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Elegit nos in ipso ante mundi constitutionem.’99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의 거룩한 부르심을 의심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빛이 있고, 주님께서 거저 주신 내적 힘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전능 옆에 우리의 나약함이, 당신의 빛 옆에 가련한 우리 본성의 어둠이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구원 사업에 협력하도록 찾으십니다. 그 이끄심은 분명하며 우리는 의심할 수 없습니다. 다른 때에 살펴본 수많은 이유 외에도 외적인 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동기 때문이 아니라 온전한 헌신으로 오푸스데이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지 않으셨다면, 오푸스데이에서 그토록 많은 희생을 하며 일하는 우리는 정신 병원에 가야 할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정신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르심이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확신하게 해 주는 구체적이고 외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Veni, sequere me.”100 “와서 나를 따라라.”
평생 충실하려고 노력합시다. 어느 순간 충실하지 못하다고 느끼면 싸우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그러면 승리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싸움에서 지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승리하시도록 우리의 모든 나약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내려놓읍시다. 그러면 그분께서 얼마나 높이 드러나시는지, 우리의 지상 생활을 신화하도록 어떻게 도와주시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나약함은 가장 좋은 순간에도, 우리 존재의 가장 숭고한 순간에도 함께합니다. 이제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도록 거룩한 복음이 증언해 줍니다.
최후의 만찬, 사랑과 하느님의 내밀한 말씀이 넘치던 그 자리, 가장 가까우며 가장 잘 양성되고 가장 사랑받던 이들의 모임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Facta est autem contentio inter eos, quis eorum videretur esse maior.’101 그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누가 가장 뛰어난지 서로 논쟁하고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어떤 나약함을 느끼더라도 놀라지 맙시다. 분명한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충실하여 모든 민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성인이 된 그들을 기억합시다. 싸우고 걸어갈 준비를 합시다. 중요한 것은 항구함입니다.
날마다 조금씩 바로잡기
항구하고 기쁜 마음으로, 넓은 바다에서 항구에 닿으려고 항로를 조금씩 수정하는 배처럼 날마다 자신을 조금씩 바로잡으십시오. 성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선한 뜻이 있었고, 내적 생활과 투쟁 안에서 자신을 바로잡는 솔직함이 있었습니다. 승리도 패배도 있었으며, 그 패배가 때로는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희망이시고 믿음이시며 사랑이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찾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투쟁을 기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내적 생활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완덕을 바란다는 확실한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다가가 말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스승님, 저희가 청하는 것을 모두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분께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저희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되물으셨습니다. ‘내가 마실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내가 받을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습니다. ‘Possumus, 할 수 있습니다.’”102
영광으로 가는 길은 죽음의 좁은 문을 지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례를 받은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모릅니까? 우리는 세례로 그분과 함께 묻혀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103
자녀 여러분,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말합시다. “Possumus!”****** “할 수 있습니다!” ‘Omnia possum in eo qui me confortat.’104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확신으로 가득 차십시오.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 일을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05 우리가 협력한다면 해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힘이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Quia tu es, Deus, fortitudo mea.”106
우리의 교육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으로 이루어지며, 두 가지로 모아집니다. 상식에 따라 행동하고, 초자연적 감각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교육이 드러나는 여러 방식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크게 신뢰하고,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며, 자기 자신은 경계하는 것입니다.
자기 판단을 쉽게 믿지 마십시오. 귀금속을 시험하려면 시금석이 필요하듯, 우리도 인간적인 면과 초자연적인 면에서 자기 판단이 순금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의 의견을, 특히 우리를 돕는 직무에 따르는 은총을 받은 이들의 의견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주장했던 것을 기꺼이 바로잡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바로잡는 것은 굴욕이 아닙니다. 그것은 올바름으로 가득 찬 행위이며, 바로 그 초자연적 교육에 속합니다.
“한 사람의 초자연적 선은 온 우주의 자연적 선보다 더 낫습니다.”107 하느님께 우리의 지성 안에 언제나 이러한 믿음과 초자연적 시야를 넣어 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애정과 행동이 객관적으로 올바른 질서를 이루도록 청해야 합니다. 이런 판단 기준은 하느님의 선물이므로 그분께 청해야 합니다.
요한 성인이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
요한 성인이 기록한 것을 저와 함께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 가까이에 있는 시카르라는 사마리아 고을에 이르셨습니다. 거기에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길을 걸으시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108 지치신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면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그분께서는 배도 고프셨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가까운 고을에 갔습니다. 목도 마르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물을 좀 다오.’”109
그 뒤에 마음을 사로잡는 대화가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사제적 영혼은 잃어버린 양을 되찾으려고 온갖 정성을 쏟으십니다. 피로도 배고픔도 목마름도 잊으십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말하였습니다.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110
‘Perfectus Deus, perfectus homo’, 완전한 하느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111 우리가 묵상하도록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우리 가련한 본성의 올바른 요구들 앞에서 평온함을 잃지 않고, 영혼들의 선익, 곧 모든 영혼의 선익을 위하여 그런 요구를 잊거나 적어도 뒤로 미룰 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업을 완수하도록 용기를 주시고,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뜻을 사랑하며 언제나 그 열망을 양식으로 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버렸습니다. 제자들이 놀라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받는다고 믿어라.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112
믿음은 우리 사도직이 열매를 맺게 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 될 것입니다. “나를 믿는 이는 성경 말씀대로 그의 속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113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교황님의 교도권에 대한 성실한 충실함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나아온 말 못하는 이들과 눈먼 이들, 다리 저는 이들과 병자들, 그 밖의 많은 이를 막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114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며, 사흘 동안 당신을 따른 그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십니다!
게다가 그들 가운데에는 민간 치료사를 따라다니듯, 또는 세상의 권력자에게서 혜택을 얻으려고 따라다니듯 주님을 따른 이들도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또 다른 의도를 보여 주는 대목도 적지 않습니다. ‘Ut caperent eum in sermone’, 그분의 말씀을 책잡으려고,115 말씀 하나를 꼬투리 잡아 왜곡하려고 따른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사흘 동안 머물렀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시는 큰 기적을 베푸셨다면, 우리를 위해서는 무엇인들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곤경에 처하여 자신의 궁핍함을 느낄 때에는 신뢰하며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 손에 자신을 맡기고, 우리는 사랑과 희생으로 사흘보다 훨씬 더 오래 그분을 따라왔다고 말씀드리십시오.
자신에게서나 다른 이들에게서 비롯된 장애물을 마주할 때에 믿음을 키우십시오. 루카 성인이 전하는 백인대장의 행동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은 벗들을 보내어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주님을 찾아갈 자격조차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을 낫게 해 주십시오.’”116
기도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순간 어려움과 역경은 사라집니다. “단순하게 행동하는 이는 안심하고 살아갑니다.”117 이 말씀을 기억하며 겸손하고 솔직하게 예수님께 말씀드리러 갑시다. 그러면 곧 빛이 비치고 평화와 평온과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날개에 아직 진흙이 묻어 있더라도 우리는 행복할 것입니다. 그 뒤에 극기와 참회를 하면 그 진흙은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독수리처럼 믿음과 행동의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것입니다.
집회서가 말하는 그 사람처럼,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우리를 창조하신 주님께 마음을 향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려고 입을 열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를 깨달음의 영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혜의 말씀을 비처럼 내려 주실 것이고, 우리는 기도로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묵상하는 데에 우리의 의지와 지성을 기울입시다.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교훈을 널리 알립시다.118
기도는 올바르고 겸손하며 거룩한 신화를 우리에게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위험 없이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Da, quaesumus, omnipotens Deus: ut, quae divina sunt, iugiter exsequentes, donis mereamur caelestibus propinquare.”119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께 속한 것을 끊임없이, 항구하게 따르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풍성한 선물, 올바른 신화를 아낌없이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Da nobis, quaesumus, Domine: perseverantem in tua voluntate famulatum; ut in diebus nostris, et merito et numero populus tibi serviens augeatur.”120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끝까지 충실합시다. 그러면 이 평화의 군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이 백성이 수적으로도 성덕에서도 성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자녀 여러분, 기쁘게 힘써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한,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가로막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Diligentibus Deum, omnia cooperantur in bonum.’121 인생에서 죽음 말고는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죽음도 생명입니다. 솔직함과 초자연적 감각과 유쾌한 마음이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결코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바라빠는 살인자이자 반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는 죽음으로 그의 목숨을 구하십니다.
디스마는 강도이며 범죄자였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뉘우침의 한마디, 단순하고 신뢰에 찬 기도 하나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어 그를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 주십니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바로잡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 여러분, 즉시 바로잡으십시오!
오푸스데이에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 온갖 사람이 오며 앞으로도 올 것입니다. 포도밭 일꾼들처럼 제십일시 무렵에 부름받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122 생애가 끝나 갈 때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오푸스데이에 오는 사람을 본다면 저는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 해 동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져 지내 온 영혼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시간에 온 일꾼을 위한 자리도 언제나 있습니다. 그가 충실하다면 영광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어쩌면 자발적으로 손발이 십자가에 묶인 채 단 몇 분 동안 사랑한 것만으로도 말입니다. 성덕은 많은 일을 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는 위대한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배신도 속임수도 없이 모든 사랑, 모든 아름다움, 모든 위대함, 모든 지식이 있습니다. (…) 그리고 결코 싫증 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충만하게 채우시되 물리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희망을 빼앗으려 한 이단자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살아 있을 때에도 이미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선포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우리의 믿음도 헛됩니다. (…) 우리가 이승에서 사는 동안만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123
하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세상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이 항해의 모든 어려움을 함께 견뎌 냅시다. 우리와 사랑하기를 바라는 모든 영혼이 열망하는 것은 하느님께 이르는 것, 하늘의 영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무엇도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하늘에 가려면 충실해야 합니다. 충실하려면 싸워야 하고, 때로는 얼굴을 땅에 대고 넘어지더라도 우리의 길을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성덕에 대한 책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Vae soli’, 혼자 있는 이는 불행합니다.124 같은 사슬의 고리임을 알고 책임감을 잃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오푸스데이의 하느님 자녀인 우리 각자는 진심으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라는 고리가 끊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끊어지면 하느님과 거룩한 교회와 형제자매들을 배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고리들이 튼튼한 것을 기뻐합시다. 금으로 된 고리, 백금으로 된 고리, 보석이 박힌 고리가 있는 것을 기뻐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아무도 혼자가 아니며, 따로 떨어진 시구도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거룩한 서사시를 이루는 시구들입니다. 그 일치와 조화와 결실을 깨뜨려서는 안 됩니다.
다른 이들이 승리하도록 도우며, 여러분 자신의 나약함도 이겨 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제가 끝까지 충실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주님께 용서를 청하면, 그 잘못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여 교회와 함께 ‘Felix culpa!’, 복된 탓이라고*******말할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평온을 얻고, 자신의 성덕과 다른 이들의 성덕을 사랑하고 실천하도록 서로 도울 것입니다. 그리하여 놀이용 카드들이 지닌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카드 한 장은 혼자 설 수 없지만 서로 기대면 서 있는 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연약함, 다른 이들의 연약함까지 헤아리십니다. 그러나 사랑이 우리를 하나로 묶는다면, 모두가 함께 지닌 힘도 헤아리십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올바르고 좋은 정신이 한결같도록 지켜 주는, 복된 형제적 권고를 사랑하십시오.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125
세상의 모든 사람을 그들의 결점과 기질까지도 품어 사랑할 수 있도록 마음을 넓힙시다. 때로는 영혼들이 조금씩 걷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인내로 격려하여 천천히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스스로 움직임을 거의 느끼지 못하더라도 실제로는 걸어가도록 말입니다.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는 우리의 일에서, 사람들의 정당한 개인적 자유를 널리 알리고 북돋우며 지켜야 합니다. 각자가 현세의 일에서 자기 몫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무, 자기 자유처럼 다른 이들의 자유도 지키고 모든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무를 일깨워야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잘못과 허물이 있으므로,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적인 매력으로 그들이 결점을 이겨 내도록 도우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서로를 지탱하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여러분 주위에는 많은 영혼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영적 선익을 가로막을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완덕을 추구하고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하느님뿐 아니라 우리의 사도직에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하는 모든 이도 실망시켜서는 안 됩니다. 인간적인 이유에서도 그렇습니다. 성실함만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좋은 모범을 보이려고 싸웁니다.
어느 날 불행히도 우리의 행동이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하지 못했다면, 그것을 바로잡을 은총을 주님께 청합시다.
우리는 인류라는 반죽 속에서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덕이 필요합니다. 지난 잘못을 바로잡고, 겸손한 마음으로 일상생활에서 덕을 실천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산다면 우리는 충실할 것입니다. 밤에 양심을 성찰하며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주님, 저는 온종일 제 자신에게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섬기고, 당신을 사랑하여 다른 이들을 섬기는 데에 늘 마음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하나 되어
우리 힘만으로는 아무런 유익한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길을 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Sine me nihil potestis facere’, 나 없이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126 그러나 주님과 하나 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Omnia possum in eo qui me confortat.’127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실수와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을 없애려고 싸운다면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 한 번은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사실 저는 아직도 그 사람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는 아주 높은 곳을 나는 비행기에 있었는데, 안에 있지 않고 날개 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적 생활이 없는 영혼들이 사도직의 높은 곳을 바로 그렇게 다닌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늘 추락할 위험 속에서 괴로워하며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이 삶은 싸움이며 전쟁입니다. 평화의 전쟁이며, 언제나 ‘in gaudio et pace’, 기쁨과 평화 속에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오푸스데이의 사람이 된다면 그 평화와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한 신심을 지니고, 각자의 일에서 교양과 실력을 갖추며, 부지런히 일하고, 영적 생활에서는 운동선수처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경기장에서 달리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이는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모릅니까?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모든 일에서 철저히 절제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관을 기다립니다.”128
그래서 우리는 관상하는 영혼입니다. 하루의 첫 생각부터 밤의 마지막 생각까지, 끊임없는 대화로 언제나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며 사랑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고, 그분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그분께 나아가며, 그분을 통하여 성부와 성령께 나아갑니다.
어느 순간 불안과 걱정과 동요가 생기면, 주님께 다가가 아버지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그분 손에 자신을 맡긴다고 말씀드립시다. 이것은 믿음과 희망과 신뢰와 사랑을 담은 봉헌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 규범을 실천하는 이, 실천하려고 싸우는 이는,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젊을 때나 늙었을 때나, 햇살 아래에서나 폭풍 속에서나, 실천이 쉽거나 어렵거나 변함없이 그렇게 하는 제 자녀는, 끝까지 충실하다면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입니다. 저는 그 사람이 거룩해지리라고 확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을 그토록 사랑하십니다. ‘Deliciae meae esse cum filiis hominum’, 사람의 자녀들과 함께 있는 것이 나의 기쁨입니다.129 그래서 어느 순간 우리가 주님께 충실하지 못했더라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돌보고 계셨습니다.
자식이 사랑으로 다가오면 어머니가 그동안 자식이 보인 냉담한 태도를 더는 마음에 두지 않듯,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마침내 뉘우치고 고해성사로 깨끗해져 사랑으로 다가가면 잘못한 일들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 놀라운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평온을 잃지 않습니다. 확신을 갖고, 날마다 이어지는 이 싸움의 어떤 접전에서 길을 벗어났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큰 패배를 겪었다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약하여 길을 벗어날 수 있고, 실제로 벗어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느낍시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받아 주시리라는 확신으로, 감사하며 그분께 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듣고자 한다면 주님께서는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처럼 말씀하십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사람과 사건들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드러내지 않으신 채 알맞은 은총을 주십니다. 시작할 때와 같은 열정으로 일을 마칠 수 있도록 필요한 힘, 인간적인 활력까지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구하고 신뢰에 차서 살아가며 어려움을 이겨 내게 하는 신화는 더 이상 교만의 외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겸손의 외침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결합을 드러내는 방식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바로 우리의 비참함이 우리를 하느님께 피신하게 하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만나기. 싸움 안에서의 기쁨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손을 대십시오. 루카 성인이 하혈하던 여인의 치유를 어떻게 전하는지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모두 아니라고 하자 베드로와 동료들이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군중이 스승님을 에워싸고 밀어 대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130 그리스도에게서는 생명이 넘쳐흐릅니다.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자녀 여러분, 여러분은 날마다 그분께 말씀드리고, 그분께 손을 대며, 성체로 그분을 모십니다. 성체성사와 기도에서, 빵과 말씀 안에서 그분을 만납니다.
여러 해 전에 저는 이런 장면을 보았습니다. 한 무리의 남자들 가운데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멈추어 서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한 아이가 군중 속에서 나와, 모두가 우러러보는 그 사람의 옷을 손으로 쓸고 돌아갔습니다. 아이는 얼굴이 환해져서 소리쳤습니다. “내가 만졌어!”
우리는 그보다 더한 일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우정을 나눕니다. 바로 이 관계가 우리의 올바른 신화의 토대입니다. 성체성사와 기도는 우리가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교실입니다. 기쁨으로 모든 영혼을 섬기는 법, 다스릴 때에도 섬기는 법, 순종하기를 원하면서 자유롭게 순종하는 법, 서로 다름과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가장 깊은 결합 안에서 일치를 찾는 법을 배웁니다.
사도행전은 첫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분위기를 몇 마디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모두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나누고 기도하는 데에 항구하였습니다.”131 믿음과 빵과 말씀으로 우리는 끝까지 충실할 것이고 승리자라 불릴 것입니다. 지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세상 한가운데에서 모든 민족의 수많은 영혼을 위하여 평화의 길을 연 뒤, 하늘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모든 사랑을 누릴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저도 기쁩니다. 제 가련한 삶을 바라본다면 기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기쁩니다. 주님께서 다시 한번 우리를 찾으시고, 여전히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뽑아 버려야 하는지 알아보고 단호하게 뽑아 버리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태워야 하는지 알아보고 태우며, 무엇을 내어 드려야 하는지 알아보고 내어 드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어머니, 이 자녀들과 저에게 싸움 안에서 겸손이라는 복된 선물을 주소서. 그 겸손은 저희를 솔직하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깊이 잠겨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음을 느끼는 기쁨을 주소서. 저희의 온갖 보잘것없음, 모든 비참함과 나약함, 허물과 결점으로 가득한 가련한 인간 본성이 주님의 은총에 충실할 준비가 되어, 큰일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을 보는, 희생을 담은 초자연적 기쁨을 주소서.
저와 함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그렇습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어머니의 도움으로 저희는 충실하고 겸손하게 살겠습니다. 저희의 발이 진흙으로 되어 있음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 안에서 빛나는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고 은총이며, 당신께서 원하시고 선하시기에 베풀어 주시는 신화임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Confitemini Domino quoniam bonus.’132 주님은 좋으신 분이시니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천주의 모친이신 동정 마리아의 마음을 파선시킬 수 있는 폭풍은 없습니다. 폭풍이 몰아칠 때에 우리 각자는 싸우면서, 안전을 얻기 위하여 마리아의 지극히 감미로우신 성심이라는 굳건한 피난처로 달려갑시다.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서는 우리의 안전이십니다. 아름다운 사랑의 어머니, 지혜의 옥좌, 모든 은총의 중개자이시며, 우리의 손을 잡아 당신 아드님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실 분이십니다.
자녀 여러분, 슬플 때에도 기쁠 때에도, 여러분의 나약함이 뚜렷이 드러날 때에도 그렇지 않을 때에도, 그 나약함이 더욱 무겁게 느껴질 때에도 언제나 마리아께 나아가십시오. 세상 한가운데에서 당신 아드님 예수님을 섬기는 이 길에서, 성모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저희 어머니, 당신의 자녀인 저희 인간의 비참함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시여. 전구의 능력이 크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 삶을 용서해 주소서. 저희 안에서 빛이 되어야 했지만 어둠이 되었던 것, 힘이 되어야 했지만 나약함이 되었던 것, 불꽃이 되어야 했지만 미지근함이 되었던 것을 용서해 주소서. 저희 삶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이제 알았으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소서. 당신의 자녀답게 어머니를 닮은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도록 도와주소서.
여러분의 아버지가 축복을 보냅니다.
마드리드, 1931년 3월 24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 “신학대전”(S.Th.), II-II, q. 129, a. 7 ad 2.
다니 2,32-33.
다니 2,34-35.
1코린 10,12-13.
마태 10,34.
“신학대전”, II-II, q. 24, a. 7 c.
필리 3,12.
*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 De Peccatorum meritis et remissione et de Baptismo parvulorum ad Marcellinum libri tres, II, c. 13, 20 (CSEL 60, 93쪽) 참조. (원문 편집자 주)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 Enarrationes in Psalmos, 38, 6 (CChr.SL 39, 1179쪽).
마태 13,24.
마태 13,25.
“성 미카엘 대천사님, 싸움 중에 저희를 보호하시고, 악마의 악행과 간계에서 저희를 지켜 주소서. (…)” “로마 미사 경본”, “성 미카엘 대천사에게 바치는 기도”. (원문 편집자의 풀이)
이사 21,11.
마태 26,41.
마태 13,26.
마태 13,36.
시편 143[142],9-10.
** 창세 25,29-34 참조. (원문 편집자 주)
시편 119[118],106.
*** 로마 8,28 참조. (원문 편집자 주)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 De correptione et gratia liber unus, c. 9, 24 (CSEL 92, 247쪽).
루카 17,10.
요한 21,17. “Domine, tu omnia nosti; tu scis, quia amo te”: “주님,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아십니다.” (원문 편집자의 풀이)
마태 20,28. “Non venit ministrari, sed ministrare”: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원문 편집자의 풀이)
요한 3,30.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 Sermo 69, 2 (PL 38, 441열).
***** 미겔 데 세르반테스, El coloquio de los perros (Novelas ejemplares), 플로렌시오 세비야 아로요 편, 알리칸테, Biblioteca Virtual Miguel de Cervantes, 2001, fol. 246v 참조. (원문 편집자 주)
필리 1,10.
1사무 3,6.8 참조. 원문 표기: 1 R 3,6.9. 라틴어 성경의 3,9에 놓인 같은 응답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에서 3,8에 해당합니다. (권명·절 번호에 관한 한국어 편집자 주)
1사무 3,6.8 참조. 원문 표기: 1 R 3,6.9. 라틴어 성경의 3,9에 놓인 같은 응답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에서 3,8에 해당합니다. (권명·절 번호에 관한 한국어 편집자 주)
집회 31,10-11.
에페 1,4.
루카 18,22.
마르 10,35-39.
로마 6,3-4.
* 마르 10,35-39 참조. “Possumus”: “할 수 있습니다.” (원문 편집자의 풀이)
필리 4,13.
필리 1,6.
시편 43[42],2. “Quia tu es, Deus, fortitudo mea”: “하느님, 당신께서는 저의 힘이십니다.” (원문 편집자의 풀이)
요한 4,5-6.
요한 4,7.
요한 4,31-34.
아타나시오 성인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Quicumque 신경, 32 (DH 75항). “Perfectus Deus, perfectus homo”: “완전한 하느님이시며 완전한 인간.” (원문 편집자의 풀이)
루카 7,6-7.
잠언 10,9.
집회 39,6-11.
“로마 미사 경본”(비오 5세 성인 경본), 수난 제1주일 다음 화요일, 영성체 후 기도. “Da, quaesumus … caelestibus propinquare”: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명령을 실천하여 하늘의 선물에 이르게 하소서.” (원문 편집자의 풀이)
“로마 미사 경본”(비오 5세 성인 경본), 수난 제1주일 다음 화요일, 백성을 위한 기도. “Da nobis, quaesumus, Domine … serviens augeatur”: “주님, 저희가 당신 뜻에 따라 항구히 당신을 섬기게 하시어, 저희 시대에 당신을 섬기는 백성이 공로와 수에서 자라나게 하소서.” (원문 편집자의 풀이)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cartas-1/pyeonji-je2ho/ (2026-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