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제3호
새롭거나 새로워 보이는 것은 모두, 그것이 교리에 관한 것이든, 교리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방식이나 실천에 옮기는 방식에 관한 것이든, 적어도 겉으로는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내용과 행하는 일이 올바른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전통에 온전히 부합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오푸스데이는 교회의 어떤 것도 새롭게 바꾸려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개혁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푸스데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교회가 확실한 것으로 제시하는 모든 것을 충실히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지키는 규율의 거룩한 구속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은총으로 교회와 교황님의 가장 훌륭한 자녀가 되고자 합니다. 겸손하지 못한 듯 들리는 이 말을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뜻을 이루려면 자유를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날 더욱 심해진 듯한 한 가지 폐단을 피하십시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뚜렷이 드러나며 실제로 계속 나타나는 폐단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정당한 자율성을 거슬러,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문제에서 모든 사람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으려는 욕망입니다. 현세의 문제에 마치 교리상의 신조와 같은 것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굴복하지 않는 고결한 사람들을 향하여 그 본질과 내용이 추문을 일으킬 만한 공작과 선전으로 그릇된 기준을 옹호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의 정점에 계신 그리스도
2. Instaurare omnia in Christo.1 바오로 성인은 에페소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고, 모든 것의 정점과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모든 정직한 수고를 성화하러 왔습니다. 바로 세상 한가운데에서 평신도답게, 세속적인 방식으로 일상의 일을 성화하며, 거룩한 교회와 교황님과 모든 영혼을 섬기려는 것입니다.
이를 이루려면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지체들의 자유를 지키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상에서 그분을 대리하시는 분과 함께 하나의 신비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늘의 것과 세상의 것이 서로 찢겨 나가, 더 이상 머리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만물의 머리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실 때, 일치와 조화로운 결합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레네오 성인과 함께 이렇게 말합시다.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가 계시고, (…)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구원 경륜 전체를 관통하시며 모든 것을 당신 안에 총괄하십니다. 이 모든 것에는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도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인간을 당신 안에 총괄하십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 보이게 되셨고, 이해할 수 없으신 분이 이해할 수 있게 되셨으며, 고통을 겪을 수 없으신 분이 고통을 겪을 수 있게 되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모든 것을 당신 안에 모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하늘의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존재들 가운데 으뜸이시듯이,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에 대해서도 주권을 지니시며 모든 것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시어,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당신께로 이끄십니다.”2
이제 우리는 얼마 전 자기 영혼 안에서 “et ego, si exaltatus fuero a terra, omnia traham ad meipsum”3, 곧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것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던 그 가난한 사제의 감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그 순간 주님께서 이 성경 말씀에 부여하고자 하신 뜻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의 정점에 그리스도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온갖 일에서 일상의 노동을 통하여 이 땅을 하느님과 화해시켜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세속적인 것이, 세속적인 것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거룩한 것이 되고 만물의 궁극적 목적이신 하느님께 봉헌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의 성화
이 가르침이 새로운 것으로 들렸고 지금도 그렇게 들리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긴 수 세기의 공백이 있습니다. 곧 각자가 자기 직업과 신분 안에서 일상의 일을 성화하여 그리스도인의 완덕을 추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수 세기 동안 노동은 천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신학적 역량이 뛰어난 사람들조차 노동을 인간의 성덕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겼습니다.
자녀 여러분, 저는 말씀드립니다. 인간의 정직한 일이라면, 그것이 중요한 일이든 보잘것없는 일이든, 성화될 수도 없고 사람을 성화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며 배제하는 이가 있다면, 여러분은 그에게 하느님께서 그를 당신의 사업인 오푸스데이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들의 생각에서 이 오류를 없애려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고통도 겪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적 노동이든 육체노동이든 온갖 분야의 인간 노동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외침이 한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때가 올 것입니다. “Cantate Domino canticum novum: cantate Domino omnis terra.”4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 온 땅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잘못 이해하거나 잊어 온 사람들의 의식에 새로운 길을 내려면, 여러분은 일을 사랑해야 합니다. 일하지 않고서는 성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일은 우리가 성화해야 할 대상이며, 성화를 위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충실해야 하고, 굳세어야 하며, 온순하게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적인 덕과 넓은 마음과 성실함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여러분에게 특별한 일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머리는 하늘에 닿게 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발은, 두 발바닥은 땅을 굳게 딛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이 땅과 인간의 노동을 통하여 우리의 창조주이신 주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이미 세월을 넘어, 마지막 자녀에 이르기까지 제 모든 자녀가 각자의 직업에 종사하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들은 예술가의 지혜와 시인의 행복과 스승의 확신을 지니고, 웅변보다 더 설득력 있는 삼가는 태도로 일할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자기 직업과 신분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완덕을 추구하면서 온 인류의 선익을 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모든 일을 사랑해야 합니다. 일은 영혼들의 성화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일, 곧 인간의 모든 정직한 일이 수단이라면,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거대한 사도직의 바다, 이 인간적이며 신적인 지평에 그 누구도 경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법에 따라 우리의 이 사도직을 교회법적으로 구체화할 때가 오면, 우리는 똑같이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해안이 없는 바다라고 말입니다. 다만 구체적인 활동을 명시하는 것이 관례이므로, 어떤 특정한 활동을 제시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세상의 유일한 사명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임을 알고 믿습니다. 이 삶은 창조주의 영원한 나라를 드러내는 한에서만 존재 이유를 갖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씁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5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도 이렇게 읽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6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는 일할 의무가 있습니다. 일은 하느님의 명령이며, 우리는 기쁘게 하느님께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Servite Domino in laetitia.7†††
일상의 직무 안에서 이루는 개인의 성화
이렇게 일은 초자연적인 것이 됩니다. 그 목적이 하느님이며, 그분을 생각하면서 순종의 행위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일과 휴식, 눈물과 미소, 곧 우리 삶 전체를 하느님을 섬기는 일로 바꾸어야 합니다. 밭고랑에서든 작업장에서든 연구실에서든 공적 활동에서든, 우리는 익숙한 삶의 자리에서 충실히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성화의 도구와 사도적 모범으로 바꾸되, 교회나 오푸스데이를 결코 이용하지 말고 각자 개인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의 일과 가정과 사회 안에서 성덕을 추구할 개인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성덕에 부름받았습니다. 스승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8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이 쓴 말을 보십시오. “사실 모든 사람은 똑같은 높이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온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 것은 수도자만 더 큰 완덕을 추구할 의무가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제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9††††
우리는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이해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곧 일하는 사람들과, 일하면 자기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분명한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랑으로 하느님께,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온 인류에게 드려야 하는 봉사가 바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해하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합니다. “Qui parce seminat, parce et metet: et qui seminat in benedictionibus, de benedictionibus et metet.”10 “조금 뿌리는 이는 조금 거두고, 넉넉히 뿌리는 이는 넉넉히 거둘 것입니다.” 저는 지금 사도의 말씀을 빌려, 많이 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초자연적인 시각으로 일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의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제 마음의 아픔, 커다란 아픔 하나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벌써 네 해 동안 같은 말을 하는데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아무것도 스며들지 못하도록 막아 놓은 것 같습니다.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고도 그토록 영웅적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대함이 온전하다 하더라도,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피 한 방울, 생명의 마지막 숨결까지 모두 내어 주시며 희생 제물로 당신을 바치신 하느님이자 사람이신 분의 무한하고 사랑 넘치는 관대함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없지 않더라도, 우리 역시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인색함 없이 자신을 내어 드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일하는 가운데 사도직에 부름받음
마태오 성인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모든 질병과 허약함을 고쳐 주셨다. 그분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여기저기 버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참으로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당신의 수확 밭으로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11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한탄하시는 하느님 아드님의 이 외침은 우리의 마음을 찢어 놓습니다. 저와 함께 수확의 주님께 청하십시오. 모든 인종과 모든 직업과 모든 사회 계층에서 일꾼들을 보내시어, 이러한 초자연적 정신으로 오푸스데이에서 일하게 해 주시도록 청하십시오. Rogate ergo Dominum messis, ut mittat operarios in messem suam! 그러면 많은 영혼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완덕을 추구하려는 열망을 우리 안에 불붙이는 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어떻게 느끼고 알아차릴 수 있는지 물으신다면, 저는 그것이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치 우리 안에 빛이 켜지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가장 고귀한 힘을 어떤 활동에 바치게 하는 신비로운 충동이며, 그 활동은 실천을 거듭하면서 하나의 소임으로 구체화됩니다. 모든 것을 휩쓰는 눈사태와도 같은 이 생명력을 사람들은 성소라고 부릅니다.
성소는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삶의 한 자리를 택하게 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도 희망에 가득 차, 설렘과 기쁨으로 그 자리를 지키게 합니다. 성소는 일에 사명의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 존재를 고귀하고 가치 있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위로 영혼 안에, 여러분의 영혼과 제 영혼 안에 들어오십니다. 바로 이것이 부르심입니다.
묵시록의 말씀이 현실이 됩니다. “보라, 나는 네 마음의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12 하느님의 이 부르심은 참으로 귀중합니다. 마태오 성인이 복음서 13장에서 전하는 비유가 저절로 떠오릅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다시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13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속한 것으로 귀하게 여길 줄 안다면, 우리의 부르심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보석입니다.†††††††
이 부르심은 모든 사람이 발견하는 것이 아닌, 숨겨진 보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선택하신 이들이 그것을 발견합니다. “많이 맡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14 하느님의 그 은총을 느꼈을 때, 숨겨진 보물의 비유를 잊지 마십시오. Quem qui invenit homo, abscondit, et prae gaudio illius vadit, et vendit universa quae habet, et emit agrum illum.15*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감추어 두는 것은 참으로 인간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기를 바라시는 이들을 어떻게 찾아오시는지 보십시오. 어부였던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그들이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Venite post me, et faciam vos fieri piscatores hominum.”16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continuo, 곧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부르심을 받지 않은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마태오 성인이 8장 19–20절에서 전합니다. 그는 “Magister, 스승님, sequar te quocumque ieris,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자녀 여러분, 하느님을 섬기면서 마주하는 위험과 반대와 고된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주님, 먼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러 가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고 대답하셨습니다.17 또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 주십시오.”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18††††††††
계속하기 전에, 영혼 안에 그 빛을 지닌 여러분,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완덕을 추구하도록 내적으로 이끌리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부르심으로 영적인 유대나 약속에 매인 사람은, 스스로 속지 않으려면 그 유대 밖에 있는 어떠한 조언자도, 어떠한 계획도 포기해야 합니다. 달리 행동한다면 사람 수만큼 작은 집단이 생겨나고, 초자연적이고 시민적인 유대는 효력을 잃을 뿐 아니라 해로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순종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 여러분, “venite post me!”19라는 하느님의 외침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체험을 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다른 이들의 영혼을 판단하고 그들에게 조언하려 드는지 모릅니다! 부르심을 받은 데 깊이 감사하십시오. 진리에는, 곧 여러분의 부르심에는 오직 하나의 길만 있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그 길 안에서는 천천히 걸을 수도, 서둘러 걸을 수도, 달릴 수도, 뛰어오를 수도 있습니다. 오푸스데이는 영혼들을 획일적인 틀에 맞추거나, 세상의 현실과 동떨어진 몸짓과 태도와 말의 쇠틀에 사람들을 가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하여 세상 안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 한가운데에서 성덕에 부름받음
이것이 이상향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저는 많은 영혼을 만나 온 경험과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다음 말씀으로 대답합니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사는 사람은 덕을 지킬 수 없으니, 물러나 산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마치 가정을 꾸리고 아내와 함께 살며 자녀를 돌보는 사람은 덕을 갖출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20
수도 성소를 받지 않은 사람은 어떤 신분에 있든, 어떤 정직한 일에 종사하든, 성덕을 얻기 위하여 세상을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지금 차지하고 있는 그 자리에 있어도 좋습니다. 저는 이 부르심, 곧 이 편지에서 말씀드리는 특별한 부르심이 많은 사람을 위한 것임을 확신합니다. 오푸스데이에는 계층에 따른 차별이 없고, 모든 영혼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온갖 종류의 도구가 필요합니다. “Iterum simile est regnum caelorum sagenae missae in mare, et ex omni genere piscium congreganti.”21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유배 중인 히브리 백성의 장차 올 해방을 예고하시면서, 이전에는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지만 이제는 당신 종들을 de terra Aquilonis et de cunctis terris22에서 이끌어 내시겠다고 하실 때, 저는 많은 사람이 차별 없이 오푸스데이에 부름받으리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회 계층에서, 온갖 재능을 지닌 이들 가운데에서, 높은 곳에 있는 이들과 낮은 곳에 있는 이들 가운데에서 그들을 데려오실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다시 빌리면, 땅속 깊은 곳에 있는 이들 가운데에서도 데려오실 것입니다.
예언자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이제 내가 많은 어부를 보내어 그들을 낚아 올리게 하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다음에는 많은 사냥꾼을 보내어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 동굴에서 그들을 사냥하게 하겠다. 그들의 모든 길이 내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23
우리는 “qui omnes homines vult salvos fieri”24, 곧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손에 들린 도구입니다. 제 자녀들은 우리 정신의 참으로 관상적인 양성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을 찾고 만나고 그분과 사귀어야 한다는 필요를 영혼 깊이 느껴야 합니다. 일상의 일을 하며 겪는 수고 한가운데에서 사랑으로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수고는 지상의 관심사이지만, 정화되어 초자연적 차원으로 들어 올려집니다. 또한 자기 삶 전체를 사도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필요를 똑같이 느껴야 합니다. 사도직은 영혼에서 흘러나와 외적인 행위로 드러납니다. “Caritas mea cum omnibus vobis in Christo Iesu.”25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 모두에게 저의 사랑을 보냅니다.”†††††††††††
삶의 일치. 올바른 지향. 하느님의 자녀 됨
방금 쓴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업인 오푸스데이로 부르신 자녀들에게는 삶의 일치가 필요합니다. 이 삶의 일치는 동시에 두 면을 지닙니다. 하나는 우리를 관상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내적인 면이며, 다른 하나는 직업 활동을 통하여 드러나는, 눈에 보이고 외적인 사도직의 면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일하고 기도하는 것이며, 거꾸로 기도하고 일하는 것입니다. 관상과 활동이라는 이 두 개념, 이 두 낱말을 구별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오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마음과 양심 안에서 둘은 같은 것을 뜻하게 됩니다.
토마스 성인의 말씀을 보십시오. “두 가지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의 근거일 때, 영혼이 한 가지에 몰두한다고 해서 다른 한 가지에 몰두하는 것이 방해받거나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 성인들은 하느님을 자신들이 행하거나 아는 모든 것의 근거로 받아들이므로, 감각적인 사물을 지각하거나 다른 어떤 것을 관상하거나 행하는 일에 몰두하더라도 하느님을 관상하는 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26
이 삶의 일치를 잃지 않도록,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을 주님께 두도록 합시다. 우리는 “non quasi hominibus placentes, sed Deo qui probat corda nostra”27, 곧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느님 마음에 들도록 일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현존을 찾아야 합니다. “Quaerite Dominum et confirmamini, quaerite faciem eius semper.”28 “주님을 찾고 힘을 얻어라. 언제나 그분의 얼굴을 찾아라.”
하루 가운데 힘겨운 순간이 찾아올 때, 슬픔이 우리 영혼에 스며들려 할 때, 살아가며 일하는 무게를 느낄 때,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며 이렇게 말하십시오. “Miserere mei Domine, quoniam ad te clamavi tota die: laetifica animam servi tui, quoniam ad te Domine animam meam levavi.”29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제가 온종일 당신께 부르짖었습니다. 당신 종의 마음을 기쁘게 하소서. 주님, 제가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렸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분의 종으로서 우리는 사도행전의 이 말씀을 들으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날에는 내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도 예언하리라.”30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바오로 성인이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쓴 말씀을 기쁘게 묵상할 수 있습니다. “내가 또 말합니다. 상속자는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어린아이일 동안에는 종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정해 놓은 때까지 후견인과 관리인들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세상의 원소들 아래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자녀이기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영을 여러분의 마음에 보내셨고,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또한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31†††††††††††††
복음에는 모두가 두려움에 빠진 때에도 용기를 보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남몰래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리마태아의 요셉과, 부유한 사람 니코데모입니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신 가운데, 그분 곁에는 여인들, 곧 그분의 어머니와 거룩한 여인들, 그리고 아직 어린 요한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복음사가들이 전하듯이, 스승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숨어 있던 이들이 다시 나타납니다.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 가게 해 달라고 청하러 왔습니다. 니코데모는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습니다. 상당한 돈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과 사귀며 그분을 사랑했다고 해도, 요한 복음 3장 1–10절의 대목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nisi quis renatus fuerit denuo, non potest videre regnum Dei”, 곧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보거나 거기에 참여할 수 없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니코데모는 “quomodo potest homo nasci, cum sit senex?”, 곧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태어날 수 있습니까?” 하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그 대목 전체를 되풀이하지는 않겠습니다. 니코데모는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tu es magister in Israël et haec ignoras?”, 곧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이런 것도 모르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스승님께서는 “nisi quis renatus fuerit ex aqua et Spiritu Sancto non potest introire in regnum Dei”, 곧 “누구든지 물과 성령의 세례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다른 대목에서는 “sic est omnis qui natus est ex spiritu”, 곧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사랑. 하느님께 대한 신뢰
하느님의 자녀 됨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감사하십시오. 요한 성인이 쓰듯이, 하느님께서 의로우심을 알고, 의롭게 살며 덕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참된 자녀라는 것 역시 알고 있기에 감사하십시오.32
저는 요한 성인과 함께 여러분에게 계속 권고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깊은 사랑을 베푸셨는지 보십시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고, 실제로 그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33 바오로 성인도 이 믿음을 확인해 줍니다. “만물이 존재하는 목적이시며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으로 이끄시면서, 그 자녀들의 구원의 창시자이며 본보기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수난과 죽음으로 완성하시고 제물로 바치신 것은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이들은 모두 한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곧 모두 인간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교회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나는 그분께 온전히 신뢰를 두겠습니다.’ 하시고, 이어서 ‘보십시오, 저와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자녀들입니다.’ 하십니다.”34††††††††††††††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께 대한 신뢰를 잃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큰 부분을 잃는 것이며, 그러면 삶이 고되고 쓰라려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분은 “primogenitus in multis fratribus”35, 곧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이십니다. 또한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앗인 성화 은총이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총을 자기 안에서 내쫓지 않는 한,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가 구별됩니다.”36
그러므로 신뢰로 가득 차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이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세상이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이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37†††††††††††††††
교황님에 대한 사랑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우리의 가장 큰 사랑과 가장 높은 존경, 가장 깊은 공경과 가장 온전한 순종, 가장 큰 애정은 지상에서 하느님을 대리하시는 분, 곧 교황님께도 향해야 합니다. 사랑과 권위의 질서에서 하느님과 우리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 다음에는 교황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늘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저는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저의 하느님, 제 마음에 교황님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베드로에 대하여 완전하고 온전한 신뢰를 지닙시다. 저는 그 신뢰를 잃은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더 정확히 말하면 악마가 몇몇 사람을 통하여 제 안에 의심과 그늘을 심어, 이 신뢰와 사랑을 약하게 만들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자녀 여러분, 작은 일화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기회가 될 때 이를 실천한다면 저는 참 기쁠 것입니다. 저는 여러 해 전부터 매일 길을 걸으며 교황님과 그분의 지향을 위하여 묵주기도 한 신비를 바쳐 왔고 지금도 바칩니다. 교황님께서 미사를 봉헌하실 때, 상상 속에서 그분 곁에 서 봅니다. 저는 교황님의 경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에도 몰랐고 지금도 모릅니다. 묵주기도를 마치면 그분의 손에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모시고 싶은 마음으로 영적 영성체를 합니다.
실제로 교황님 가까이에 있을 행운을 누리는 사람들을 제가 거룩한 부러움으로 바라본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들은 교황님께 마음을 열고 존경과 사랑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님과 맺고 살아가는 이 일치는, 각 교구에서 우리가 그 지역 직권자와도 깊이 일치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는 흔히 우리가 언제나 주교님과 같은 방향으로 수레를 끌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혹시 어느 직권자께서 이를 이해하지 못하시고, 있을 수 없는 충돌을 보려 하신다면 저는 무척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을 건드리지 않는 한 저는 양보하겠습니다. 여러분도 기꺼이 양보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바치는 유일한 동기는, 오푸스데이의 영광이나 개인적인 이익을 구하지 않고 교회와 모든 영혼을 섬기면서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드리고자 하는 열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어려움이 생기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만, 그 가능성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래서 오푸스데이의 시작부터 지역 직권자와, 어떠한 사도적 활동에 종사하든 그 모든 영혼과 이루는 내적이고 외적인 일치를 주님께 얻고자 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날마다 pro unitate apostolatus, 곧 사도직의 일치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온 교회를 위해서는 교황님만이, 교구를 위해서는 성좌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님만이 줄 수 있는 일치입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저는 하느님의 이 정신, 오푸스데이의 정신을 모든 영혼에게 전하기 위하여 세계 구석구석에 자리 잡게 될 경당들과 감실들을 꿈꿉니다. 건물의 외형에 관해서는 여러분이 있는 지역의 관습과 건축 방식을 따르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차고 같은 성당들, 희화화되어 조롱처럼 보이는 성상들을 보면 저는 무척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것들은 결코 우리 경당에 두지 마십시오.
성미술은 하느님께 이끌어야 하고, 거룩한 것을 존중해야 하며, 신심과 경건함을 지향해야 합니다. 수 세기 동안 가장 뛰어난 예술은 종교 예술이었습니다. 이러한 원칙을 따랐고, 모든 면에서 고유한 목적의 본질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현대주의적인 희화화된 성상들은 지나치게 달콤하고 꾸며 놓은 과자 같은 성상들만큼이나 부적절합니다. 추하고 불경스러운 것은 과장되게 경건한 체하거나 유치한 것만큼이나 좋지 않습니다.
이 두 극단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의 신심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 예술로 하느님을 경배하는 데 기여하려는 건축가와 조각가와 화가는 분명한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고 프라 안젤리코처럼 무릎을 꿇고 천국을 그려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존경과 거룩한 정성과 신심을 담아 그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속주의와 성직주의
세속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눈에 띕니다. 교회 밖에서 교회를 공격하는 이들과, 교회를 이용하면서 안에서 교회를 공격하는 이들입니다. 밖에서 공격하는 이들은 세속주의자라고들 합니다. 안에서 공격하는 이들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경건주의자라고 부릅시다. 오푸스데이의 정신은 교회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를 세상의 일에 얽어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자녀이며 하느님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지상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가져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활동에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가톨릭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이미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도적 활동에는 성인들의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경우라면 이미 다른 이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고, 개인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며 거룩한 교회를 섬기게 해 주면 됩니다. 그 반대, 곧 직업 생활과 사회생활과 정치 생활에서 교회의 보호를 받으려고 교회를 이용하는 것은, 제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에 대한 거짓 사랑으로 보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도 정직하지 못하고 추한 처사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올바른 지향을 가진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우리가 하는 사업과 활동과 일에 ‘가톨릭’이라는 명칭이 붙지 않으면 교회의 위신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의견은 저절로 무너집니다. 아무런 설득력도 없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시민들이 그 일을 한다는 것을 누구나 볼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활동이 교회에 영예를 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렇게 하면 우리가 교회 권위에 덜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 못지않게 복종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하는 규정 안에서 언제나 살기를 원하고, 그렇게 살려고 힘씁니다.
우리의 활동이 거의 시작 단계에 있는 지금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성경을 펼쳐 창세기 32장을 읽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야곱이 형 에사우가 자기 가족과 재산을 파괴할까 두려워했을 때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보았으면 합니다. 성경은 그가 자기 사람들과 가축 떼를 두 무리로 나누어 각각 다른 쪽으로 가게 했다고 전합니다. 그는 합리적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에사우가 한 무리를 치러 오더라도 다른 무리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주님께서 오푸스데이를 일으키신 이유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세상 안에서 자기 직업과 신분에 따라 일상의 일을 통하여 성덕을 추구할 의무가 있음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비록 이것이 이유는 아니지만, 오늘의 상황은 지난 여러 세기의 상황과 마찬가지이며 앞으로라고 더 나으리라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야곱이 내린 결정을 매우 현명한 것으로 판단하게 한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았으면 합니다. 한 나라만이 아니라, 지금 그리스도교 국가이거나 한때 그러했던 모든 나라 또는 거의 모든 나라를 둘러보며, 성인의 이름을 붙인 수많은 민간 기업과 상점과 공장과 숙박업소 등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다른 경험을 하신 분들도 존중합니다. 그러나 성인의 이름이나 ‘가톨릭’, ‘그리스도교’라는 명칭이 상한 물건을 가리는 깃발처럼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적지 않게 보면서 저는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말로 자주 하는 이야기를 글로도 적는 데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식료품점에 ‘성 아무개 상점’, ‘성 아무개 상회’ 같은 간판이 걸려 있는 것을 보면, 그런 곳은 실제로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저는 거의 틀릴 염려도 없이 그곳에서는 900그램을 1킬로그램으로 달아 줄 것이라고 곧바로 생각합니다.
섬김. 일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만들기. 교리 전하기
자녀 여러분, 이것은 험담도 아니고 과장도 아닙니다. 제가 본 것 가운데 일부를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자기 사업과 야망을 위해 그리스도교나 가톨릭 신앙을 공적인 수단으로 삼는 이들을 보고는 걸려 넘어지지 않으면서도, 정작 우리에게 걸려 넘어지는 이들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버려 두고, 우리 직업 활동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차분히 생각해 봅시다. 한 가지 지향뿐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는 모든 직업이 지닌 사회적 사명의 중요성이 분명해졌습니다. 자선까지도 사회적인 것이 되었고, 교육까지도 사회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웃을 섬기는 모든 일에는 국가가 자기 손에 넣으려 하는 전문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푸스데이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인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일과 직무를 초자연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초자연적 정신으로 이웃과 조국과 하느님을 참되게 섬겨야 합니다. 교회를 직접 섬기는 경우라면, 성직자 개인을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수를 받지 말고 섬기십시오. 보수를 받지 않으면 교회를 위해 일하지 않는 평신도가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주는 지침,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지침은 이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보수를 받지 마십시오. 오히려 내어 주고, 내어 주고, 또 내어 주십시오. 우리의 온 생애까지도 내어 주십시오.
우리는 섬김에 관하여 말했습니다. 교회와 인류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봉사는 교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괴롭히는 악의 많은 부분은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데서 비롯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르려 하거나 그런 체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건전한 교리를 전하는 대신 다른 이들의 무지를 이용하여 혼란을 뿌리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각 영혼에 새겨 주신 자연법의 존재마저 부인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종교적 무관심이 가득해지는데, 실은 무지나 자만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사탄의 non serviam, 곧 “섬기지 않겠다.”가 아니라, 빛이 완전히 없는 상태입니다.
스스로 현자 행세를 하며 종교와 과학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고, 둘 사이에 메울 수 없어 보이는 심연이 생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갖 형태의 유물론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심 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심연을 메우고 채울 줄 압니다. 오푸스데이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주님의 은총과 공부를 통하여 그 대립이 사라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세속 학문에 신학 지식과 삶의 모범을 결합하여 신앙을 옹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활동은 실제로 교리 교육이며 그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모든 환경에서 교리를 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듣는 이들의 사고방식에 맞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언어의 은사입니다. 언어의 은사는 알맹이가 있는 말을 하도록 요구합니다.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씁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신령한 언어로 말한다 한들,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교리로 가르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38 그러므로 양성받을 의무가 있습니다. 교리에 관하여 충실히 양성받아야 할 의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의 말을 듣는 이들이 나중에는 스스로 표현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바오로 성인은 계속합니다. “여러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한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허공에 대고 말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언어의 은사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도록 요구합니다. 사도는 또 이렇게 가르칩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언어가 있고, 자기 언어가 없는 민족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말의 뜻을 모르면, 나는 내 말을 듣는 사람에게 이방인이 되고, 내게 말하는 사람도 나에게 이방인이 될 것입니다.”39
교리를 추상적으로, 삶과 동떨어지게 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교리와 일관되게 살아가는 삶의 모범으로 신앙을 가장 열렬하게 옹호해야 합니다. 몸소 행하시고 가르치신 우리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Coepit facere et docere.40 교리를 전하는 사도직은 모범이 따르지 않으면 불구이며 불완전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민중의 지혜로 아주 분명하게 표현한 속담이 있습니다. “모범 수사가 가장 훌륭한 설교자다.”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른바 ‘세속의 성인들’이라는 사람들의 성덕을 믿어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흠 없는 삶을 살면서 동시에 무신론자임을 공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바오로 성인을 통하여,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완전하심, 곧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까지도 세상 창조 때부터 피조물들을 통하여 알 수 있게 되어 분명히 드러납니다.”41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잘해야 자연법의 몇몇 계명만 지킬 뿐입니다. 자연법은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요구하므로, 그 계명들조차 모두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삶은 빛을 내지 못합니다. “Lux vera, quae illuminat omnem hominem”42*, 곧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신 그리스도의 빛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려면 그분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이끄시려고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그분과 결합하여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하느님의 생명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 성인이 어떻게 말하는지 들어 보십시오. “Non enim misit Deus Filium suum in mundum ut iudicet mundum, sed ut salvetur mundus per ipsum.”43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세상이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세속적이며 평신도다운 일
하느님께 받은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 사업에 협력하려면, 우리가 보여 주어야 할 모범은 여러분과 저에게 평신도답고 세속적인 방식으로 일할 것을 요구합니다. 성직자에게 고유한 교회 일을 위해서는 이미 사제와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당 안이 아니라 시민 생활의 중심, 거리 한가운데에서 우리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활동 안에, 모범과 교리로써,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두 팔을 벌리는 자세로 현존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는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사제들 곁에서 여러 신심 단체의 일에 헌신하는 평신도들을 기쁘게 바라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모세혈관처럼 모든 환경에 스며들어 사도적 빛을 퍼뜨리는 사도직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평면적이고 평범한 수준에 머물며 적당히 타협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제들 곁에서 교회의 일을 하는 신자들의 삶이 깊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 역시 다른 방식으로 큰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부터 하루가 끝날 때까지, 우리가 만나는 수백 명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이루어집니다. 친척과 집안일을 돕는 사람들, 직장 동료와 고객과 친구들입니다. 우리는 그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아야 하며, 각 사람 안에서 우리의 형제이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낌없이 섬기고 배려하며 사랑과 평화와 기쁨을 나누기가 더 쉬워질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이상이 행동으로 구체화되면 많은 영혼을 교회 가까이 이끌 것입니다. 또한 많은 젊은이와 장년층과 노년층의 사람들이 관대하고 용감하게 우리 곁에 함께 서서, 오푸스데이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동참할 것입니다.
일반 신자들은 교회 사도직에서 성직자들을 돕는 데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평신도 사도직이 언제나 교계 제도의 사도직에 단순히 참여하는 것이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평신도들, 특히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오푸스데이의 자녀들에게는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으로서 사도직을 수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는 교회법적인 사명을 부여받아서가 아니라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들은 자기 직업과 직무와 가정과 동료들과 친구들을 통하여 이 사명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평신도들이 일반 신자로서 그저 일상의 일에 전념하며 삶으로 모범을 보이고, 모든 상황을 교리를 전하는 기회로 삼을 때 발휘되는 사도적 효과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시야가 좁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고 덧붙이겠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온전히 자신을 바침으로써, 그들이 희미하게만 내다보는 그 모든 효과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cce ego quia vocasti me.44†††††††††††††††††††
우정의 사도직
우정이 지닌 사도적이고 초자연적인 효과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잊은 사람입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른다.”45 하신 그분을 잊었습니다.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베타니아의 가족인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와 맺으신 우정을 잊었습니다. 라자로의 부활에 앞서 요한 성인이 전하는 장면들, 곧 “et lacrimatus est Iesus”46*라는 말씀을 잊었습니다. 두 자매가 라자로의 병을 알리려고 예수님께 보낸, 신뢰 가득한 이 전갈도 잊었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47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성경에는 우정에 관하여 말하는 대목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한 대목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베드로의 첫째 편지 5장 13절에서 베드로는 마르코를 “Marcus filius meus”, 곧 “나의 아들 마르코”라고 부릅니다.
충실하고 사심 없는 우정을 통하여 모범의 사도직은 더욱 효과적이 됩니다. 그러나 모범은 언제나 보여 주어야 합니다. 친구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를 모르는 이들과 우리에게 적대적인 이들에게까지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모범을 통하여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qui pertransiit benefaciendo et sanando omnes”48, 곧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모든 사람을 고쳐 주신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됩니다.††††††††††††††††††††
모범은 좋은 말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하려는 이들은 다음 성경 말씀을 듣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모두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해야 할 것을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묶어 다른 이들의 어깨에 지우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다.’”49
우리는 다른 자리에서도 이미 말했습니다. 말과 행동, 신앙과 행실은 삶의 일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달리 행동하여 허영 때문에, 눈에 띄려고, 요란하게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이 말씀을 듣게 됩니다. “Omnia vero opera sua faciunt ut videantur ab hominibus.”50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야고보는 자신의 공동 서간에서 묻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덧붙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51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인 것이, 말로만 그리스도인이고 실제로는 아닌 것보다 낫습니다. 가르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다만 가르치는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 분의 스승, 말씀하시자 모든 것이 이루어진 그분만이 계십니다. 그분께서 침묵 속에 이루신 일들 또한 아버지께 합당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참으로 이해하는 이는 그분의 침묵까지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하고 침묵으로 자신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52†††††††††††††††††††††
모범을 보일 의무. 교리를 전할 의무
자녀 여러분, 여러분은 모든 영역에서, 시민으로서도 모범을 보일 의무가 있습니다. 자기 의무를 이행하고 권리를 행사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적 활동을 하면서 가톨릭 신자인 시민으로서 국가의 법을 최대한 존중하고 따르며, 언제나 그 법의 범위 안에서 일하고자 노력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고유한 양성을 받은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53 거룩한 당당함으로 모범을 보여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Vir quidem non debet velare caput suum quoniam imago et gloria Dei est.54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55 그러나 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고 물건을 죄다 펼쳐 놓는 잡화상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합니다. 남들이 본다면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을 지키는 집주인의 비유를 설명하신 뒤, 베드로 성인이 주님께 드린 질문을 기억하십시오. 베드로 성인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밀이나 알맞은 양식을 나누어 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누구이겠느냐?”56
그러므로 오푸스데이를 이루는 우리 모두는 주위 사람들에게 하느님 말씀과 교리의 양식을 나누어 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면 스승님께서 상을 약속하시며 하신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곧바로 해당될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자기 직무를 그렇게 수행하고 있는 종!”57* 모범과 말과 글과 우정 등을 통하여 교리를 나누어 주는 이 가르침은 신중하게 행해야 합니다.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이들이 예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태오 성인이 그분에 관하여 전하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Et sine parabolis non loquebatur eis.”58 그분은 듣는 이들이 처한 환경의 사고방식에 맞추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우리가 주위 환경을 헤아려야 한다고 했지, 그 환경, 곧 세속적인 분위기에 동화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비겁함이나 안일함 때문에, 또는 슬프게도 그릇된 욕정을 채우려다가 동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면 낙심한 이들의 무리에 합류하고 맙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를 두고 “저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라 세상의 언어로 말한다.”59 하지 못하게 합시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해당되게 합시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60†††††††††††††††††††††††
우리에게 모범을 보일 의무를 지우는 정의의 이유가 또 있습니다. 오푸스데이의 형제자매들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Ab uno disce omnes”61*라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격언이, 안타깝게도 흔히 판단의 기준이 되곤 합니다. 우리의 모범은 한결같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약점이 있더라도, 모든 것이 사도직의 기회와 교리를 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잘못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약점이 드러나거든,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렸던 말을 되풀이하기를 권합니다. 제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늘 되풀이하는 말입니다. “Domine, tu omnia nosti, tu scis quia amo te.”62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면 우리는 겸손해지고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또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실수와 잘못을 범하게 되리라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엘리야가 우리와 같은 죄 많은 사람이었다고 씁니다. 그런데도 “그가 다시 기도하자 하늘은 비를 내리고 땅은 열매를 맺었습니다.”63
자녀 여러분, 우리 각자의 행동은 개인적인 것이며, 각자가 책임져야 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앞에서도 사회 앞에서도 좋은 모범을 보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주의자가 될 수 없고, 다른 이들을 외면할 수 없으며, 세상에 등을 돌린 채 이기적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책임을 지는 지체입니다.††††††††††††††††††††††††
이 목적, 곧 앞서 말씀드린 교리를 전한다는 목적에 헌신할 때, 다른 모든 구체적인 목적은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며 그 안에 포함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사도적 활동은 평화와 사람들 사이의 협력과 정의에 이바지하고, 전쟁과 고립과 국가적 이기주의와 개인적 이기주의를 막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커다란 인류 가족의 한 부분임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형제들 사이의 원한으로 가득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없애고, 영혼들과 사회 안에 평화와 화합을 굳건히 하는 데 이바지할 것입니다. 곧 관용과 이해와 교류와 사랑을 굳건히 할 것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기. 다른 이들의 자유 존중하기
야고보 사도와 함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람을 차별하는 태도를 결코 함께 지니려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모임에 금반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동시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왔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 눈길을 주며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 스스로 불의한 법정을 세우고 불의하게 판결하는 재판관이 된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시어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모욕한 것입니다. 여러분을 억압하는 자들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64
그렇다고 영향력 있는 이들을 돌볼 의무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대중과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영혼들과 함께 일하려고도 힘써야 합니다. 그들이 위에서 왔든 아래에서 왔든 상관없습니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모범의 사도직은 모든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 사람들을 변화시키게 합니다. “주님은 영이시며,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듯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영으로 빛을 받아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습으로 변모됩니다.”65†††††††††††††††††††††††††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저는 우리를 재촉하는 의무에 관하여 줄곧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Caritas Christi urget nos.66 그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모든 영혼의 구원자로서 이루시는 신적 활동에 협력해야 할 의무입니다. 그 활동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치와 영광 속에서 돌아가셨을 때 완성되었습니다. “Iudaeis quidem scandalum, gentibus autem stultitiam”67, 곧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인 십자가입니다. 이 구원 활동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주님의 때가 올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 의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부르심이라는 지극히 특별한 이유로, 오푸스데이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인 이들에게는 onus et honor, 곧 짐이자 영예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범적인 행동과 교리를 끊임없이 전하는 사도직을 통하여, 우리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을 모셔 가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은 자기 직업 활동 안에서, 그 활동을 바탕으로, 자기 신분 안에서 이 사도직을 수행해야 합니다.
사도적 활동에서 우리는 어떤 형태로도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며, 인간의 어떤 활동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정직한 모든 일과 올바른 모든 직업은 우리에게 성화의 계기이며 매우 효과적인 사도직의 수단이 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영혼들을 이끌어 세상 한가운데에서 진실하고 관대하게 성덕을 추구하게 할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미 말했고 지금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모범을 보여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받은 좋은 씨앗을 그곳에 가져가 하느님의 씨 뿌리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 메시지의 맛을 아직 맛보지 못했거나 잊어버린 영혼들에게 맛을 내는 소금이 되고, 오류나 무지의 어둠 속에 누워 있는 이들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이 일하는 모든 영역에 여러분도 현존해야 합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68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놀라운 봉사 정신으로 현존해야 합니다. 각 나라의 공적 생활을 경솔하게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매우 중대한 잘못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평범한 시민이므로, 그 안에서 평범한 시민으로서 개인적인 자유와 개인적인 책임을 지니고 활동해야 합니다.††††††††††††††††††††††††††
공적 생활에 참여하기. 세속주의도 성직주의도 아닌 길. 오푸스데이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충실하고 사심 없이 공적 생활의 영역에 참여하면 선을 행하고 섬길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립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자녀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이 영역에서 물러나 정치적 과제를 하느님의 법을 모르거나 실천하지 않는 이들, 또는 그분의 거룩한 교회를 적대하는 이들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삶은 사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필연적으로 우리 주 그리스도의 법과 정신에 닿아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직과, 국가가 삶의 질서를 마련하는 일, 곧 정치 활동 사이에 서로 깊이 맞닿는 부분이 있음을 쉽게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69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토록 분명한 계명을 따르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념들을 뒤섞다가, 똑같이 무질서한 두 극단에 이르고 맙니다. 하나는 교회의 정당한 권리를 무시하는 세속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마찬가지로 정당한 국가의 권리를 억누르는 성직주의입니다. 자녀 여러분, 하느님의 자녀이며 두 도성의 시민임을 자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평신도들을 통하여, 이 두 가지 폐단에 맞서야 합니다.†††††††††††††††††††††††††††
고귀한 의미의 정치는 지상 도성의 공동선을 이루기 위한 봉사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공동선의 범위는 매우 넓습니다. 따라서 혼인과 가정과 학교, 최소한으로 필요한 사유 재산, 인간의 존엄과 권리와 의무에 관한 법률처럼 지극히 중요한 법들이 정치 영역에서 논의되고 제정됩니다. 이 모든 문제와 그 밖의 여러 문제는 무엇보다 종교와 관련되므로, 사도라면 무관심하거나 무기력하게 있을 수 없습니다.
오푸스데이는 어떠한 정치 노선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영적이며 사도적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에는 신적인 표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어 우리에게 얻어 주신 자유에 대한 사랑입니다.70 그러므로 오푸스데이는 정당들의 정치 투쟁에 참여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 생활을 해치는 일시적인 다툼을 초월하여 머무는 것은, 우리 초자연적 가정에 칭찬받을 일일 뿐 아니라 엄중한 의무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푸스데이의 목적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사도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녀 여러분 각자가, 자격 없는 이들이나 무능한 이들 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적대하는 이들이 국정을 이끌도록 자리를 비워 준다면, 방금 말씀드렸듯이 잘못을 저지를 뿐 아니라 우리 주님의 대의를 배반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시민들은 모두 자격이 없거나 무능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또 여러분 모두가 날마다 정치적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 곧 대다수는 교회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관하여 확고한 판단 기준을 갖고,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정치적이 아니라 종교적인 건전한 교리를 전할 줄 알며, 끝으로 나라의 정부가 요구할 때 시민의 의무를 올바르게 이행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정치 문제에 헌신하고 싶은 성향을 지닐 것입니다. 그들은 나라의 공적 생활에서 먹고살 자리를 확보하려고 술책과 타협에만 의존하며, 맏아들의 권리를 불콩죽 한 그릇에 팔아 버릴 수도 있는 정치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71* 오히려 직업 생활과 더불어 정치 생활이나 노동조합 활동 안에서 동료 시민들을 섬기려는 열망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지배하려는 열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말씀드립니다. 정치적 소명을 지닌 이들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지 말고 그 영역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십시오. 그곳에서 자신의 성화를 추구하며 교회와 조국을 섬기십시오. 여러분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의 공동선을 구하십시오. 현세의 문제에는 교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도 언제나 충실하게 의무를 이행하고, 자신의 권리가 존중받도록 요구하십시오. 그리고 모두 자유롭게 행동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과 도덕 안에서, 자기 양심의 지시에 따라 인간의 일상적인 일을 하며 성화되고, 자유롭게 결정한 활동에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고유한 하느님 부르심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게 행동하십시오. 우리를 하나로 묶는 유대는 오직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서로, 그리고 각자가 오푸스데이 전체와 맺는 유대는 오직 자기 성화를 추구하는 영역과, 친구들과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는, 역시 순전히 영적인 영역에만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의무를 이행하고 권리를 행사하는 시민들입니다. 오푸스데이 안에서 결합한 것은, 고유한 수덕적 수단과 사도적 방식을 통하여 성덕을 추구하고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서로 영적으로 돕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오푸스데이의 영적 목적은 인종이나 민족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오직 영혼들만을 봅니다. 따라서 정당에 관한 모든 생각이나 정치적 의도는 배제됩니다.
모든 일에서 그렇습니다. 오푸스데이의 정신과 사도직에 속하지 않는 일에서는, 여러분은 신앙과 도덕과 사회 교리에 충실하려는 노력으로만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의 정신이며, 따라서 모든 신자의 정신입니다.
시민의 의무
가톨릭 교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교리와 삶에 대한 충실함은, 자녀 여러분이 조국을 섬기면서 하느님을 섬기도록 이끕니다. 그것은 참으로 확고하고 흔들릴 수 없는 몇 가지 진리로 구체화됩니다.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원칙들로서, 여러분만의, 제 자녀들만의 공통분모가 아니라, 모든 가톨릭 신자와 거룩한 어머니 교회의 모든 충실한 자녀의 공통분모인 vinculum fidei, 곧 신앙의 유대를 이룹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 큰 소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그리스도교 교리서에, 공적 생활에서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든 양보할 수 없는 이 확고한 원칙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쳤으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행동해야 할 의무, 방관하지 말아야 할 의무, 충실하게 그리고 개인의 자유로 공동선을 섬기도록 자기 몫의 협력을 해야 할 의무를 밝혔으면 합니다. 이것이 저의 큰 소망입니다. 그렇게 하면 가톨릭 신자들이 어릴 때부터 이 진리들을 배워, 어른이 되었을 때 실천할 줄 알게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책임감 있고 신심 깊어 보이는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서도, 가정과 종교의 의무만 이행하면 된다고 잘못 생각하며 시민의 의무에 관해서는 거의 들으려 하지 않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기심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양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추덕인 정의의 일부를 이루는 공경의 덕과 그리스도인의 연대 의식이, 온 공동체와 관련된 문제에 참여하고 그 문제를 알고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도 구체화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명확히 말해 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시민이 정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가장 작은 사회에서조차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정치 활동 자체를 포함하여 모든 전문 직무가 높은 전문성과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각자가 살아가는 사회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공동선이 취하는 구체적인 모습에 관하여 최소한의 지식을 갖추도록 요구할 수 있고, 또 요구해야 합니다. 행정과 국가 통치의 실제적이고 제한된 가능성, 곧 그 기술적인 측면에 관해서도 최소한의 이해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 없이는 차분하고 건설적인 비판도, 분별 있는 선택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선을 이루기 위한 깊은 사회적 감각과 협력 정신을 기를 기회가 많이 있어야 합니다. 교리 교육이라는 구체적인 방안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학교 교육, 곧 인간적 양성의 영역에서도 교사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사안에 개인적인 기준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시민적 과제의 영역에서 자유롭고 책임 있게 행동할 의무를 가르친다면 좋겠습니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 개인의 책임을 지는 행동의 자유
그러나 다시 오푸스데이와 자녀 여러분에게로 돌아갑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저도 우리 주님처럼 비유를 즐겨 사용합니다. 특히 배와 그물 같은 고기잡이의 이미지, 복음의 향기가 짙은 이미지들을 빌려 옵니다. 우리는 그물에 잡힌 물고기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소란스러운 세상의 파도 가운데에서 당신 사랑의 그물로 우리를 낚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리의 환경과 일상의 일에서 끌어내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온전히 당신 것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Non rogo ut tollas eos de mundo, sed ut serves eos a malo.”72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더구나 우리를 그리스도께 결합시키고 서로 하나로 묶어 주는 이 그물은 매우 넓어서, 우리가 개인적인 책임을 지니고 자유롭게 움직이게 합니다. 이 그물은 오푸스데이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지닌 아주 작은 공통분모이기 때문입니다. 곧 교회의 교도권을 최대한 충실하게 따르도록 이끄는 가톨릭적 양성입니다.
우리는 물속의 물고기처럼 자유로우면서 그리스도의 그물 안에 잡혀 있으므로, 어떤 사람의 개인적인 잘못도 교회와 혼동하지 않습니다. 또 누구도 우리 개인의 잘못을 교회와 혼동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교회를 정치와, 곧 어느 정도 옳을 수는 있어도 언제나 의견이 갈릴 수 있는 각자의 정치 활동과 얽어매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매우 손쉬운 태도이지만 몹시 부당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각자의 잘못이나 성과에 오푸스데이를 얽어매서도 안 됩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 일부는 그처럼 복잡한 일에서 실수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대한 문제에는 수많은 요소가 작용하며, 그 모든 것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주의나 신중함의 부족 등으로 생겨 피할 수도 있었던 잘못이라 하더라도, 그 책임을 교회나 오푸스데이가 조금이라도 떠맡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런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교회와 오푸스데이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생기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교회와 오푸스데이는 모든 자녀에게 각자의 모든 일을 인간적으로 가능한 한 완전하게 하도록 촉구합니다. 인간적인 완성 없이는 초자연적인 완성을 바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여러분은 공적 생활에 적극적으로, 자유롭게, 책임 있게 참여해야 합니다. 저는 이 영역에서 일할 의무에 관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각자의 사고방식과 나라의 상황과 필요 등에 가장 알맞은 방식으로 일할 의무입니다. 제가 이 주제를 말하는 까닭은 여러분에게 판단 기준을 제시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또 여러분의 아버지로서 그렇게 합니다. 제가 파벌과 집단의 이해관계를 초월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들에 관하여 여러분 각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은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묻지 않을 것입니다. 전 세계 오푸스데이 책임자들도 마찬가지로 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정당한 자유를 지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사이에 매우 다양한 의견이 있음을 저는 압니다. 그리고 거기에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그 모든 의견을 존중합니다. 제 자녀 각자가 현세의 문제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그리스도의 법 안에 있기만 하면 언제나 존중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정치 문제에 관한 제 개인적인 견해를 여러분은 모릅니다. 제가 드러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푸스데이에 사제들이 생기면 그들도 같은 행동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그들의 사명도 저의 사명처럼 오직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여러분이 제 개인적인 견해를 안다 하더라도, 그것을 따라야 할 의무는 전혀 없습니다. 제 의견은 교의가 아닙니다. 교의는 신앙의 유산에 관하여 오직 교회의 교도권만이 확정합니다. 여러분의 의견 역시 교의가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제 자녀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문제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할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것 역시 일관성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 까닭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책임 있는 가톨릭 신자들이 공통분모에서는 완전히 일치하고, 의견이 갈릴 수 있는 문제에서는 서로 다르게 판단하면서 현세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 영역은 자연법의 원칙도, 사회의 참된 공동선도, 교회의 권리도 고려하지 않는 이들의 손에 넘어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존중하는 데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침해할 수 없는 원칙들을 존중하고 의견이 갈릴 수 있는 문제에서 정당한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이 그리스도교 정신이 없으면, 사회에는 평화도 자유도 정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구체적인 정치 문제를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제 사명이 오직 영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오푸스데이의 책임자들은 형제자매들에게 정치적이거나 직업적인 기준, 한마디로 현세의 문제에 관한 기준을 결코 강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톨릭 신자들에게 정치적 지침을 제시할 권리와 의무를 지닌 것은 정규 교계 제도뿐입니다. 실제로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공적 생활의 문제에서 특정한 입장을 취해야 할 필요를 신자들에게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교계 제도가 이렇게 개입하는 것은 결코 성직주의가 아닙니다. 올바르게 양성받은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교회의 선익이 요구할 때 공적인 일에 관한 판단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주교들의 사목 사명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신법에 따라 이러한 개입이 오직 주교들에게 속한다는 것도 압니다. 교황님과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만이 교회 안에서 공적인 통치 직무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Spiritus Sanctus posuit episcopos regere Ecclesiam Dei”73, 곧 성령께서 하느님의 교회를 다스리도록 주교들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의 일치와 자유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가톨릭 신자들을 양성하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지 보십시오. 그 목적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로 이끌면서, 현세의 문제에서는 모든 이를 향한 사랑과 이해 안에서 정당한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유입니다. 의견이 갈릴 수 있는 문제에 더 이상 교의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각자가 자기 관점과 구체적인 이해관계와 개인적인 경험에 따라 사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영역에, 절대적인 진리를 제멋대로 세우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심리 자체에 맞지 않습니다. 더구나 오직 하나의 선택만 가능하게 한 필연적인 결과인 단일 정당은, 한 나라의 공적 생활을 오랫동안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전반적인 운영이 긍정적이었고 부도덕한 일이 없었다 해도, 결국 소진되고 사람들의 호감과 신뢰를 잃기 때문입니다. 저는 솔직히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잘못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처음은 아닐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한 가지 더 주의를 드리겠습니다. 제 정신을 지니고 있다면 공적 생활에서 그렇게 행동하려 하지는 않을 테니, 어쩌면 불필요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당부는 이것입니다. ‘공인된 가톨릭 신자’가 되지 마십시오. 종교를 하느님께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 아니라, 자기가 탐내는 지위와 물질적 이익, 곧 명예와 부와 권력으로 올라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는 가톨릭 신자가 되지 마십시오. 진지한 어떤 분은 그들을 두고, 어쩌면 좀 과장되었겠지만 익살스럽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은 하늘을 향하고, 손은 무엇이든 잡히는 데로 뻗는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가톨릭 신자라고 불리는 것을 하나의 직업으로 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직업에는 누구를 받아들이고 누구를 거부할지 결정하는 권리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이들은 그리스도교 도덕 전체의 기초인 개인적 책임의 원칙을 부정하려 합니다. 정당한 자유를 행사할 수 없는 사람은 선행에 대한 보상을 받을 권리도 없고, 악행이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데 대해 벌을 받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그들은 개인적 책임의 원칙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한 나라의 모든 가톨릭 신자가 하나의 단단한 집단을 이루어, 현세의 문제에 관한 자유로운 의견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의 정당과 하나의 정치 집단을 일제히 지지하기를 요구합니다. 그 ‘공인된 가톨릭 신자들’이 주인 노릇 하는 집단이며, 따라서 그 집단 역시 공적으로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내겁니다.
그러나 어떻게 다른 가톨릭 시민들이 늘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없는 독점에 복종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흔히 속임수라고 부를 만한 수단으로 그렇게 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선의로 행동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속임수란 가톨릭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신앙과 도덕에 관한 필요하고도 합리적인 일치를 내세워, 의견이 갈릴 수 있는 문제에서 쓸데없고 부당한 일치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치밀하게 조직한 정치 운동으로 여론을 혼란스럽게 하여, 자기 나라의 그 구체적인 상황에서 오직 자신들만 교회의 보루이며 방패가 될 수 있다고 믿게 합니다. 때로는 인위적으로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 내고 가능한 한 오래 유지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가톨릭 시민들이 현세의 문제에 관한 자유로운 선택을 희생하고, 공적으로 교회의 수호를 자임한 그 정당을 지지해야 한다고 더 쉽게 확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 속임수가 너무 교묘하여 교회 권위자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신앙을 내건 정당을 어떤 방식으로든 지지하게 된다고 해서 놀라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그 정당의 성격과 신자들의 양심 위에 군림하려는 주장이 공적으로 강화됩니다.
공적으로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내건 모든 정당이 이 속임수에 기초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가톨릭 시민들을 하나로 모으고 힘을 주어, 교회의 이익을 지키고 섬기는 역할을 참으로 수행하는 정당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아주 분명히 보여 주듯이, 공적으로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내건 정당이 교회를 섬기려고 출발했다 해도, 끝내 교회를 이용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공적 생활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특별한 일치가 필요했던 예외적인 상황은 조만간 정상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들이 의무적으로 따라야 하는 단일 정당의 필요성도 사라지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때 흔히 매우 인간적이지만 몹시 불쾌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 정당을 지배하는 ‘공인된 가톨릭 신자들’은 특권적 지위를 잃으려 하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도덕적 협박까지 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교계 제도의 지지를 받아 자기들이 계속 권력을 잡든지, 아니면 모든 것이 무너지든지 둘 중 하나라고 합니다. 교회의 적들에게 길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배타적이고 독재적인 정책으로 가톨릭 신자들이 구성한 다른 모든 조직과 집단을 위축시키고 활동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자기들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곤란한 처지에 놓이고, 공적으로 가톨릭을 내세운 그 정당의 운명에 이중으로 묶여 있다고 느끼는 순간을 맞게 됩니다.
교회를 이용하지 않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해서 놀라지 마십시오. 자녀 여러분, 현세의 권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을 소유하고 행사하는 사람을 흔히 왜곡한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므로 교리적 양성이 부족하고 내적 생활이 빈약한 가톨릭 신자가, 공적 생활에서 얻은 자리를 지키려고 어떤 수단이든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끝내 권력을 유지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자기 양심과 타협하고 그것을 왜곡하는 데까지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말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분명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온 교회가 포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계 제도는 공인된 정당의 수레에 묶인 포로가 되고, 신자들은 정당한 자유의 행사를 가로막힌 포로가 됩니다.
여기서 자녀 여러분, 우리는 모든 사람의 자유를 사랑하고 교회를 섬길 의무를 깨달아야 합니다. 특정 집단의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교회를 이용하는 일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합니다. 교회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은총과 구원의 샘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자기 이익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다스리시도록 기꺼이 희생하며, 순수한 지향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정치에 대한 고귀한 성향을 지닌 제 자녀들은 이러한 마음으로 정치에 나아가야 합니다. 조국을 섬기고, 인간의 자유를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넓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공인된 가톨릭 신자’가 되기를 피하고, 다른 사람들과 같은 수단으로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설 것입니다. 다른 이들과 동등한 평범한 시민이자 책임 있는 가톨릭 신자로서, 다른 가톨릭 신자들과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지키되, 부차적인 일과 의견이 갈릴 수 있는 현세의 문제에서는 교의를 만들어 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 자녀들 사이에 자신들이 사는 사회의 공동선을 이루기 위하여 매 상황에서 어떤 수단이 가장 적합한지에 관하여 언제나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하는 깨끗하고 투명한 이유입니다. 그러한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합니다.
모두 하느님과 모든 사람의 공동선이라는 같은 방향으로 수레를 끌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의 성향은 다르고, 의견이 갈릴 수 있는 현세의 문제에서는 매우 다양하고 심지어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지닐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교회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고, 오푸스데이도 곤란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대화를 나눈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이토록 분명한 생각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듯합니다. 인내합시다. 시간이 흐르게 두고, 하느님께 그들에게 빛을 주시도록 청합시다. 그들도 마침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정치의 위험. 겸손
제가 정치 문제를 이렇게 길게 이야기한 것은, 제 자녀인 여러분에게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과 모든 현세적 과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확고히 할 임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유롭게 공적 업무에 종사하는 이들은 정치의 위험을 깊이 유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미 그 위험들을 언급했습니다. 권력의 행사가 양심을 왜곡할 위험, 다른 이들의 정당한 자유를 존중하지 않을 위험, 교회나 오푸스데이를 곤란하게 만들 위험에 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더 일반적인 위험들도 있습니다. 야망과 격정, 곧 민족주의와 당파심 등에 빠질 위험, 초자연적 시야를 잃고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활동을 잊을 위험입니다.
여기에 성경의 다음 말씀이 꼭 들어맞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좋게 만드셨고, 세상을 사람들의 논쟁에 맡기셨지만, 인간은 하느님께서 시작부터 끝까지 하신 일을 알아내지 못한다.”74 곧 인간은 세상의 시작부터 끝까지 창조주의 업적 안에서 빛나고 앞으로도 빛날 놀라운 지혜를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정치적 논쟁과 경쟁 속에서 인간은, 모든 선을 이루시고 움직이시는 분이 주님이시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분도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쉽게 잊습니다.††††††††††††††††††††††††††††††††
그 독과 위험들을 피하기 위한 해독제는, 오푸스데이 안에서 하느님의 모든 자녀가 세상 한가운데, 거리 한복판에서 성화되도록 주어진 수덕적 수단에 있습니다. 물론 그 특별한 소명을 지닌 이들은, 언제나 하나의 직업 활동인 그 일을 위험 때문에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 수단은 현세 재화에 참으로 집착하지 않는 가난의 정신과, 인간적인 영광과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겸손의 정신입니다. 이것들은 직업 활동 안에서 관상하는 영혼이 맺는 맛있는 열매입니다.
저는 특히 겸손의 정신을 강조합니다. 제가 끊임없이 되풀이하듯이, 여러분은 자기애와 교만이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보다 영혼에 훨씬 더 교묘하고 해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75 후자의 위험들은 더 쉽게 알아차리고 맞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녀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공적 생활의 분위기에 가득한 헛된 영광과 교만의 연기에 현혹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바오로 성인이 우리에게 하는 말을 보십시오. “Nemo se seducat. Si quis videtur inter vos sapiens esse in hoc saeculo, stultus fiat ut sit sapiens.”76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느님 앞에서 지혜롭게 되기 위하여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이가 되십시오.”†††††††††††††††††††††††††††††††††
제 말을 이해하십시오. 여러분의 겸손은 수도자들의 겸손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수도자들은 주님께 세상을 떠나 contemptus saeculi, 곧 현세의 것들을 하찮게 여기는 삶에 부름받았습니다. 그 지상의 것들이 그 자체로 하느님께 죄가 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렇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여러분의 겸손은 세상을 사랑해야 하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섬기도록 인간에게 주신 모든 현세의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겸손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겸손은 세상에 속하되 세속적으로 살지 않도록 부름받은 영혼들의 겸손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일의 도구인 현세의 것들이 마음에 달라붙어, 사랑의 완성을 향한 영적 진보를 방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겸손이어야 합니다.
권력과 지휘권과 권위, 그리고 이 사회적 직무들에 반드시 따르며 그것들을 뒷받침해야 하는 명예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한가운데에서 성화되어야 하는 평신도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선하고 긍정적인 것이며, 그 본성상 인간의 선익과 하느님의 영광을 지향합니다. 필요악도 아니고 차악도 아닙니다. 조건이 같다면,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보다 멀리하는 것이 더 완전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바오로 성인의 가르침은 아주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은 위에 있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권위는 없으며, 세상에 있는 권위들은 하느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위에 불순종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질서와 뜻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 통치자는 여러분의 유익을 위하여 세워진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 여러분이 세금을 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로 그 일을 하면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꾼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에게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십시오. 조세를 내야 할 이에게는 조세를, 관세를 내야 할 이에게는 관세를, 두려워해야 할 이에게는 두려움을, 존경해야 할 이에게는 존경을 드리십시오.”77 그보다 앞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빌라도에게 “위에서 주어지지 않았다면 너는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78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권력은 필요하고 선한 것이면서도, 타락한 인간, 곧 pronus ad peccatum, 죄로 기울어진 인간에게는 집착과 허영과 자만과 하느님을 잊음의 또 다른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악의 때문에 나쁜 것으로 바뀔 수 있는 다른 많은 선한 것들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적인 일 안에서 성화되어야 하는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깨어 있으면서 끊임없이 지향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이 하느님 부르심의 일부인 이 직업 활동을 자유롭게 선택했다면,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바른 지향. 집착에서 벗어나기. 다른 이들의 의견 존중하기
여기서 우리 가정 안에서 언제나 살아야 하는 올바른 지향과 하느님을 섬기는 참된 겸손의 영웅적인 표현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제 모든 자녀가 가장 잘되어 가는 개인적인 일을, 정치 활동일 수도 있습니다, 기꺼이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직의 선익이 요구하고 오푸스데이 안에서 권한을 지닌 이들이 그렇게 결정한다면, 겉으로는 덜 빛나는 다른 직업적 과제에 헌신할 준비를 말합니다.
이러한 항구한 결심은 집착에서 벗어나 있음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우리의 일이 하느님과 모든 영혼을 섬기는 것임을 알기만 하면, 여기서 일하든 저기서 일하든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제 자녀들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느님 마음에 들도록 하는 법을 배우며, 권력을 향한 무절제한 욕망과 개인적인 야망에 물들지 않도록 합니다.
그들은 양보할 줄 알고, 다른 이들의 정당한 의견을 존중할 줄 알며, 모든 일에서, 특히 공적 생활에서 오푸스데이 안의 하느님 자녀다운 방식으로 행동할 줄 압니다. 그러므로 자기 사명이 사람들의 감사나 명예를 기대하지 않고 섬기는 것임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마음에 들기를 바랄 것입니다. Cui servire regnare est, 그분을 섬기는 것이 곧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틀림없이 더욱 효과적으로 일할 것이며, 무엇보다 자기의 모든 활동 안에서 성화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활동들을 매우 넓은 범위에 영향을 미치는 성화와 사도직의 도구로 바꿀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가 모범의 사도직과, 자유롭고 책임 있는 개인의 행동과, 결코 ‘공인된 가톨릭 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관하여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환경에 더 효과적으로 사도직을 펼치고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더 쉽게 보여 주려면, 오푸스데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비밀을 몹시 싫어합니다. 비밀은 흔히 악을 행하거나 책임을 흐리는 데 쓰일 뿐입니다. 저는 고해성사의 비밀 외에는 어떤 비밀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비밀로 무엇인가 이야기하려고 제게 오는 이들에게 저는 언제나 그렇게 말합니다.
물론 지금은 이 하느님의 일, 우리의 오푸스데이가 시작되는 때이므로, 우리의 길을 경솔하게 퍼뜨리지 않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 새로움을 이해할 준비가 된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일시적 태도는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잉태되어 자라는 동안의 비밀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세상에 나오기 전에 길든 짧든 일정한 보호 기간이 필요합니다. 처음 자라고 성숙할 수 있게 하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자연은 식물과 동물과 인간에게 그렇게 합니다. 그러므로 활동을 시작한 살아 있는 유기체인 오푸스데이를 우리가 같은 마음으로 돌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모든 사도적 단체는 대개 이렇게, 요란함도 소음도 없이 시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니면 다행스럽게도, 오푸스데이에 관해 떠들어 대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맡게 되리라는 것이 벌써 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타오르게 하신 하느님의 불을 주위의 모든 영혼에게, 가장 멀리 있는 이들에게까지 옮겨 붙이려는 거룩한 조바심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교회의 승인이 있기까지는, 언제나 그래 왔듯이 지역 직권자와 뜻을 같이하여 신중하게 행동하면서, 오푸스데이의 실상을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방식으로 알려야 합니다. 다만 이런 행동 방식이 결코 비밀을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십시오. 우리는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일하고 있으며, 실제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들만 우리의 오푸스데이를 모를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어떤 이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제가 판단을 가혹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제 자녀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 놀랍게 자신을 바친다는 이유로, 등에 대략 ‘나는 착한 사람임을 알아주십시오.’라고 적힌 큼지막한 표지를 달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우리가 수도자가 아니며 앞으로도 결코 수도자가 되지 않을 것이고, 법적으로나 교회법적으로나 신자 단체의 구성원들처럼 초자연적인 정신으로 일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의사가 제3회원이라고 해서, 명함에 ‘아무개, 프란치스코회 제3회원, 의학박사’라고 쓰게 할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 방식을 비밀주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정체를 숨기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저 자연스러움입니다. 우리가 아닌 것을 가장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시민들과 똑같은 일반 그리스도인입니다.
자연스럽게 일하기. 개인적 겸손. 공동체적 겸손의 영웅성
그러므로 효과적으로 일하려면 자연스럽게, 요란함 없이, 주의를 끌려 하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일해야 합니다. 자녀를 그리스도교적으로 교육하는 훌륭한 아버지, 친구에게 그리스도교 정신이 담긴 조언을 해 주는 좋은 친구, 노동자들이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보살핌을 받도록 힘쓰는 기업가나 상인이 눈에 띄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조용히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은밀한 수수께끼나 비밀스러운 행동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이용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이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데 필요하지 않으며, 양심과 행동이 투명한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일하십시오. 개인적인 겸손이 너무나 깊어, 반드시 공동체적 겸손으로 이어지게 하십시오. 오푸스데이와 형제자매들의 거룩한 삶에 마땅히 돌아갈 존경과 사랑을 각자 자기 몫으로 받으려 하지 마십시오.
이 공동체적 겸손은 영웅적이며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푸스데이에 속한 이들이 세상에서 자기와 같은 사람들 사이에 드러나지 않은 채 살게 하고, 뿌린 좋은 씨앗 때문에 박수를 받으려 하지 않게 합니다. 제 자녀들의 삶에서 필연적으로 퍼져 나와야 하는 bonus odor Christi79를, 다른 사람들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끝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데 봉헌된 영혼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그분의 이 말씀을 삶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선행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80
향주덕인 희망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상을 매우 소중히 여기게 하므로, 우리는 공동체적 겸손이 부족하여 그 상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박수를 구하다가 예수님의 다른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Amen, dico vobis, quia receperunt mercedem suam.”81 “그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 참으로 서글픈 거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찬받거나 떠들썩하게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겸손하게, 내적인 기쁨으로 일하기를 원합니다. Servite Domino in laetitia.82 과시나 요란한 표현으로 넘쳐흐르지 않기에 오히려 본래의 힘을 잃지 않는 사도적 열정을 지니고 일하기를 원합니다. 모든 직업과 인간의 모든 과제 안에, 깃발을 휘날리거나 눈에 띄는 표지를 달지 않고 거룩하게 살면서 동료들과 사회에 영혼들의 선익을 위한 영향을 미치는 뛰어난 남녀들의 무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오푸스데이의 유일한 열망입니다.††††††††††††††††††††††††††††††††††††
모든 영혼을 이해하기. 차별하지 않기. 모든 영혼을 구원하기
저는 언제나 이렇게 말합니다. 세 사람 몫의 일을 하면서 삼천 사람의 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지만, 우리는 삼천 사람 몫의 일을 하면서 세 사람만큼의 소리만 내기를 원한다고 말입니다. 누구를 깎아내리려는 말은 아닙니다. 사도직을 수행하는 우리의 이러한 소박함과 다른 의견들도 존중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일치에 언제나 외적인 대중 집회나 요란한 집단행동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일치는 대회나 고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신중한 절제는 결코 비밀주의가 아니며, 허세에 대한 해독제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개인뿐 아니라 오푸스데이 전체가 공동체적으로도 지니기를 바라시는 겸손을 지키는 길입니다. 동시에 각자가 가정과 직장과 사회의 자기 환경에서 수행하는 모범의 사도직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드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삶 전체가 사도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과 사귀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모든 장벽을 넘으려는 끊임없는 열망이 생겨납니다. 여러분도 지금 이를 체험하고 있으며, 뒤에 올 모든 형제자매들도 체험할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어떠한 형태의 불관용과 강요와 폭력도 사라지게 하려는 그리스도인의 염려가 우리 안에 생깁니다. 사도적 활동에서도, 더 정확히 말하면 무엇보다 사도적 활동에서, 우리는 강요의 기미조차 없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당신을 섬기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사도직은 올바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해하십시오. 때로는 이해하려 하지 않는 이들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모든 영혼에 대한 사랑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허물을 헤아려 주며, 용서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인간의 비참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결함을 덮어 주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놀라운 사랑이어야 합니다. Veritatem facientes in caritate.83 사랑 안에서 복음의 진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데에 있기보다 이해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해받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제가 몸소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겠습니다. 저는 언제나 저를 이해하도록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이해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언제나 다른 이들을 이해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넓고 보편적이며 가톨릭적인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어떤 일시적인 충동이 아닙니다. 이런 행동 방식은 오푸스데이의 본질 자체에 속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땅의 모든 길에 두시어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과 평화의 씨앗을 뿌리게 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누구의 적이라고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오푸스데이는 결코 차별할 수 없고, 누구도 사도직에서 배제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목적, 곧 하느님께서 오푸스데이가 이 땅에 있기를 바라신 이유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따라 살면서도, 그분처럼 peccatores salvos facere84, 곧 모든 죄인을 구원하러 파견되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바오로 성인이 제시하는 것과 달라서는 안 됩니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 이것은 우리의 구원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고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85
바오로 성인 자신이 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 줍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이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86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실천하도록 가르친 정신입니다. 실제적인 다양성과 열린 마음과 한없는 기꺼움을 참으로 드러내는 정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도록 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시간이 흐르면서 이 땅의 모든 구석에서 펼쳐질 수많은 인간적 과제 안에서, 자신의 일을 통하여 언제나 이 가르침을 살아야 합니다. 참된 일치와 모든 사람 사이의 진실한 교류를 증진하는 데 기여해야 합니다.††††††††††††††††††††††††††††††††††††††
때로는 눈앞의 광경이 낙담스럽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해할 줄 모르는 온 세상에 비하여, 여러분의 노력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작은지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두 쪽으로 갈라져, 한쪽이 다른 쪽을 헐뜯는 데 몰두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바로 분열과 몰이해가 넘쳐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걷는 모든 길에 우리가 있기를 바라십니다. 몸소 그리스도의 이해를 실천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살도록 가르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며칠 안에 모든 것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더 말씀드리자면, 슬픈 일이지만,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이러한 일치의 분위기를 완전히 이루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이 목표를 눈앞에 두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충실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순응한다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데까지 이를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이를 것입니다.
이 사랑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저는 우리의 고유한 사도적 방식들 안에 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그것들은 오푸스데이의 초자연적 정신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입니다. 첫째는 여러분이 알듯이, 모든 사회 계층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우정과 신뢰를 나누는 활동입니다. 그 젊은이들은 지금 무르익어 내일의 현실이 될 희망입니다.
다음은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덕을 끊임없이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격과 사고방식과 취향이 서로 달라 생기는 피할 수 없는 마찰을, 남들이 모르게 기쁘게 하느님께 봉헌하십시오. “Cum omni humilitate et mansuetudine, cum patientia supportantes invicem in caritate.”87 “온갖 겸손과 온유로,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십시오.”†††††††††††††††††††††††††††††††††††††††
누구도 굴욕감을 느끼게 하지 않기. 거룩한 양보
그 어려움들을 과장하지 마십시오. 관상하는 영혼은 주위 사람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줄 알며, 형제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겪는 불편을 어렵지 않게 참아 냅니다. 더구나 참아 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른 이들을 세워 주는 일입니다. 한없는 사랑과, 모든 개인적인 일과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는 모든 일에서 양보하고 내어 주는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성인과 함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믿음이 더 강한 우리는 덜 굳센 이들의 약점을 떠맡아야 하며, 헛되이 자기만족을 좇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여러분 각자는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하여 그를 성장시키도록, 이웃을 기쁘게 해 주려고 힘써야 합니다.”88
또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에게, 함께 살아가며 사랑 안에서 다른 이들을 세워 주는 데 필수적인 실천 원칙을 가르쳤습니다. 논쟁하지 마십시오. 논리로 다른 이들을 굴복시켜 설득하려 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이 반대편처럼 말하는 이의 옳음을 인정하며 양보할 때, 굴욕감을 느끼지 않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아직 약하거나 충분히 배우지 못한 이를 사랑으로 대하고, 의견을 두고 다투지 마십시오.”89 진리는 차분하고 긍정적으로, 논쟁하거나 모욕하지 않고 제시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체면을 지킬 길을 언제나 남겨 두십시오. 그래서 자기가 잘못 알았거나 양성이나 정보가 부족했음을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때로는 가장 섬세한 사랑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떤 새로운 진리를 스스로 발견했다고 확신하게 해 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논쟁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글로 된 교리 자료를 제공하여 문제를 차분히 공부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자신을 내어 주는 마음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오로 성인이 청했던 것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서로 같은 생각과 마음으로 언제나 하나가 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90
이러한 헌신과 이해와 사랑은 자신의 권리를 잊고,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과 모든 개인적인 일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데까지 양보하고 내어 주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Discite a me quia mitis sum et humilis corde.”91 이 온유와 겸손과, 모든 개인적인 일에서의 거룩한 양보를 살려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분께서는 “semetipsum exinanivit formam servi accipiens, in similitudinem hominum factus et habitu inventus ut homo”92, 곧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셨으며 인간의 처지에 놓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자기 비움에는 한계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거룩한 양보는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에까지 이르렀습니다. “Humiliavit semetipsum factus obediens usque ad mortem, mortem autem crucis.”93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원하지 않아도 당신의 친구라고 부르시는 사람들입니다. “Vos autem dixi amicos.”94 그분께서는 시련의 순간에 당신을 홀로 버려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Amice, ad quid venisti?”95 “친구야, 무엇 하러 왔느냐?” 당신을 넘기러 온 유다에게까지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어, 비참함이 가득해도 충실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과 당신의 친구가 되기를 거부하는 이들까지 사랑하시어, 학대와 모욕과 십자가형을 기꺼이 받으십니다. “Maiorem hac dilectionem nemo habet, ut animam suam ponat quis pro amicis suis.”96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거룩한 단호함. 개인적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양보의 모범만 보여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속한 일에서는 거룩한 단호함의 아주 분명한 모범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류와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그 엄중한 꾸짖음을 보십시오! 또한 당신 앞에서 창조주를 모독하는 일이 아무런 제지 없이 벌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성전에서 장사꾼들이 저지르는 폐단에 맞서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분노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 안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내쫓기 시작하시며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97
우리도 막을 수 있는 경우라면,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필요하다면 거룩한 강제도 사용할 것입니다. 다만 방식에서는 가능한 한 모든 온유함을 다하고, 언제나 양심의 정당한 자유를 존중해야 합니다. 곧 우리가 개인적인 이익을 지키려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여 행동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Zelus domus tuae comedit me”98, 곧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킵니다.” 또한 사람들을 사랑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그들을 오류에서 벗어나게 하여, 어리석게 자기 영혼을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때로는 다른 이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돕기 위하여, 우리도 마음고생을 하고 그들도 마음고생을 하게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을 잘못 해석하고 불쾌하게 반응하는 것까지 감수할 준비가 없다면, 우리는 사도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성인들이 필연적으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성인이라고 여기지는 않지만 성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인인 남녀들은, 제가 사랑하는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를 보십시오, 모범과 말로 죄와 타협한 양심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합니다.
깨끗한 삶을 원하지 않는 이들에게, 우리가 마음을 지키는 섬세함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꾸짖음이자 자극처럼 느껴져야 합니다. 영혼이 자신을 방치하거나 잠들게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좋습니다. 제 자녀 가운데 주위 사람들의 영혼에 이런 반응을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언제나 호감만 얻으려는 사람은 자신도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무질서에 공범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사십시오. “Inflammatum est cor meum, et renes mei commutati sunt: zelus domus tuae comedit me.”99 “제 마음이 불타고 제 속이 뒤흔들립니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키기 때문입니다.”†††††††††††††††††††††††††††††††††††††††††††
다정한 태도. 모든 사람과의 우정
성인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열정은 결코 쓰라린 열정이어서는 안 되고, 그의 충고는 결코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며, 그의 모범은 친구들의 얼굴을 때리는 도덕적 따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제가 말씀드린 사람들에 대한 거룩한 양보가 모든 것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어떤 선한 사람들에게는 때때로 정당하게 적용되는 “성인 한 사람을 견디려면 성인 두 사람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제 자녀 누구에게도 적용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태도는 정반대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할 줄 모르거나 다정하게 대할 줄 몰라서 누군가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싸움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오로 성인의 권고를 따릅시다. “가능하다면 여러분의 힘이 닿는 데까지,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100
다른 이들이 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평화롭게 지내려고 힘씁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마십시오. (…)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하느님 앞에서뿐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선을 행하도록 힘쓰십시오.”101 우리는 누구도 원수로 대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원수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적극적으로 친구가 되고 친구를 얻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게 하려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계속 친구들을 얻으시려고 우리를, 사람들과 맺는 우리의 관계와 그분께서 주신 사랑하고 사랑받는 능력을 쓰고자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다른 요한, 당신께서 각별히 사랑하실 친구를 만나셨던 것과 같습니다. 친밀했던 최후의 만찬 밤에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는 그 요한입니다. Erat ergo recumbens unus ex discipulis eius in sinu Iesu, quem diligebat Iesus.102
우리는 모든 직장 동료와 우리 환경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 가운데에서 친구를 사귀려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더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나약한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고백하는 신앙에 따라 살지 않는 이들이 우리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이해를 다하여 그들에게 다가가, 진실하고 참되며 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우정을 건네야 합니다.
그들의 영향을 받을 위험 때문에 물러서지 마십시오. 우리의 관상 생활과, 우리 정신과 신심 생활 규범과 관습에 대한 충실함은 그리스도교적이지 않은 그들의 오류와 모범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와 그들 사이에 계십니다. 마침내 우리는 풍성한 선으로 악을 덮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일이 쉽지 않으므로 낙심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가톨릭 신자이든 아니든, 그릇되게 사는 그리스도인의 회심은 이교도의 회심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전자는 우리가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관하여 하는 모든 말을 잘못되고 왜곡된 방식으로 이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앞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희화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 꾸준한 기도로 맞서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그들에게도 회심하여 하느님께 이를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여러분의 행실을 통하여 그들이 여러분에게 가르침을 받게 하십시오. (…) 그들의 모독에는 여러분의 기도로, 그들의 잘못된 길에는 굳센 믿음으로, 그들의 거친 태도에는 여러분의 온유함으로 맞서십시오. (…) 우리의 다정함으로 그들의 형제임을 보여 줍시다. 우리는 오직 주님을 본받으려고 힘써야 합니다.”103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우리의 열린 정신과 모든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의 궁극적인 동기가 무엇인지 보십시오. 그것은 사도적 열망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앙을 모르거나 실천하지 않는 이들을 피한다면, 그들은 우리의 모범을 볼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비참함이 아무리 많더라도, 우리 삶에 비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 줄 수 없을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과 함께 지옥의 문 앞까지라도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너머로는 안 됩니다. 그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충실한 우정으로 그들을 이끌고, 가장 멀리 있는 이들까지도 우리 집에 맞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우 사랑하는 ad fidem 사도직, 곧 신앙으로 이끄는 사도직의 한 부분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친구들이 우리 경당의 전례에 참석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도직은 때가 되면 공식적인 승인을 받으리라고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너무 쉽게 해 주기보다 스스로 원하도록 하여, 우리 사도직의 으뜸가는 특징인 개인의 자유가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이 활동을 돕기 위해서는, 우리 센터나 집에 공격적이거나 군사적인 뜻, 승리나 영광의 뜻을 담을 수 있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 우리 정신에 더 잘 맞습니다. Deo omnis gloria!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 저는 다른 이들이 달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기꺼이 존중합니다. 그러나 오푸스데이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폭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로 보호받고 있음을 느끼며, 수없이 체험한 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In umbra manus suae protexit me.”104 “주님께서는 당신 손 그늘로 나를 덮어 주셨다.”††††††††††††††††††††††††††††††††††††††††††††††
다른 시민들과 함께하는 사도적 활동
지극히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지금까지 저는 각자가 자신의 환경에서 일상의 일과 직업과 직무를 수행하며 실천해야 할 개인 사도직의 몇 가지 측면을 묵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제 자녀들은 세계 곳곳에서 다른 형태의 사도직도 수행할 것입니다. 자신들이 일하는 나라의 법 안에서, 평범한 시민으로서 다른 시민들과 협력할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시민들과, 반드시 언제나 가톨릭 신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힘을 합쳐 뚜렷한 사도적 목적을 지닌 직업 활동을 함께 펼칠 것입니다. 그 목적이 오로지 영적인 성격만을 띠지는 않더라도, 교리를 전하는 데 직접 이바지하는 활동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우리의 사도직입니다.
대개는 예를 들어 문화와 자선과 언론과 영화 등의 활동일 것입니다. 적절하다고 판단되면 예외가 있을 수는 있지만, 공적으로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내건 활동이어서는 안 됩니다. 일반적으로는 방금 말씀드린 제 자녀들의 개인 사도직과 같은 특징을 지녀야 합니다. 시민들이 동등한 시민들 사이에서 하는, 세속적이고 평신도다운 직업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톨릭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가톨릭인 것입니다. 개인적인 행동에서도, 함께하는 활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끝으로 오푸스데이가 공식적으로 책임지는 또 다른 형태의 사도직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제 자녀들이 수행하는, 온전히 그리고 오직 사도적인 성격을 지닌 직업 활동일 것입니다. 오푸스데이에 속한 이들이 공동으로 수행하므로, 우리는 이를 공동 사도직 사업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각 장소와 시대의 상황과 영혼들의 필요에 따라 그 형태는 매우 다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회 계층을 위한 양성 센터, 피정과 종교 교육 강좌를 위한 집, 대학생 기숙사, 노동자와 농민 등을 위한 직업 교육 및 복지 센터 등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도적 활동들을 맡을 제 딸들과 아들들은 그것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아 전념해야 합니다. 오푸스데이에 속한 모든 이에게 예외 없이 직업 활동은 자신과 다른 이들의 성화를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공동 사도직 사업에서 하는 일은 직접적이고 전적으로 사도적인 목적을 지니더라도, 그들의 일상적인 직업 활동일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교사와 의사와 행정 담당자와 학생 기숙사 책임자 등 많은 다른 시민들이 하는 것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때로 제 자녀들이 공동 사도직 사업에서 책임을 맡거나 양성이나 지원 업무에 전념하려고 평소의 직업을 떠나야 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도 일반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떠난 것은 아니며, 새로운 일은 언제나 직업 활동일 것입니다. 가족과 경제와 사회적 이유 등으로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자주 직업 활동을 바꾸는 일은 어디서나 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치 같은 직업에는 이미 다른 일을 해 왔고 여전히 그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종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공동 사도직 사업의 물리적 장소, 곧 터전이 되는 집과 센터는 대개 우리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여러 이유로 소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가난하므로 그럴 수도 없습니다. 오푸스데이는 시작인 지금 가난하며 앞으로도 언제나 가난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더 많은 사도적 활동과 새로운 시도, 당신을 섬기기 위한 더 많은 재정과 인력의 투입을 끊임없이 요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임대한 집이나 국가 소유의 건물, 또는 제 자녀들 일부와 우리를 도우려는 다른 시민들이 함께 만든 법인이 소유한 장소에서 일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하므로, 제 딸들과 아들들은 하느님 앞에서 매우 큰 책임감을 가지고 이 활동들을 운영할 것입니다. 제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규범에 명시적으로 예상되어 있지 않은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여러분이 제게 수없이 들은 이 원칙, 이 확실한 기준이 그들을 이끌 것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가난하고 자녀가 많은 가정의 아버지나 어머니라면 어떻게 할지 생각하고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 공동 사도직 사업들은 순전히 영적이고 사도적인 목적 외에 다른 어떤 목적도 갖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이 오직 초자연적인 오푸스데이가 그 활동의 가톨릭 교리가 확실히 건전하도록 책임지는 것이 가능하고 또 필요합니다. 그 활동들은 현세의 문제에 관하여 공동체의 교설이나 의견을 퍼뜨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수없이 말씀드렸듯이, 그런 공동체적 교설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공동체로서는 고유한 의견이 없습니다. 각자는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믿음의 내용만 있습니다. 아무런 유보 없이 받아들이는 교회의 가르침이며,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우리의 포부는 섬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부르심, 그리고 충실하고 감사하는 자녀로서 교회를 섬기려는 열망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초자연적 포부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인간적인 야망이나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과도 가장 철저하게 반대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려고 일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사라지고, 우리의 희생으로 인간의 모든 활동의 정점에 그리스도를 모시려고 일합니다.
우리의 표어는 세례자 요한의 말입니다. “Illum oportet crescere, me autem minui.”105 “그리스도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큰 포부, 오푸스데이의 참된 영광은 인간적인 영광 없이 살아, 오직 하느님께만 영광이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Soli Deo honor et gloria.106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바라보았습니다. 다른 자리에서 인용한 바오로 성인의 놀라운 말씀으로 돌아가, 다시 그분을 바라봅시다. “(…) 우리는 인간적인 자기만족에 이끌려서는 안 됩니다. (…)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만족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기록된 대로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저에게 쏟아졌습니다.’”107†††††††††††††††††††††††††††††††††††††††††††††††
우리는 박수를 받으려고 사도직에 나서지 않습니다. 가톨릭 신자로 살기 어려울 때에는 교회를 위하여 앞에 나서고, 가톨릭 신자라고 자처하는 것이 유행일 때에는 드러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실제로 많은 환경에서는 자신을 가톨릭 신자라고 밝히지 않더라도, 참된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만으로 온갖 모욕과 공격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로 먹고사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고 때때로 말씀드렸지만, 필요하다면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으면서도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덧붙이듯이, 가톨릭 신자라는 간판으로 먹고사는 일은 더욱더 싫어한다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섬기려는 포부에는 아주 분명한 구체적인 표현들이 있습니다. 이를 우리의 지배적인 열정, 우리의 거룩한 광기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것에서 꼴찌가 되되, 사랑에서는 첫째가 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 묵상 중에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예수님, 제가 누구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해 주소서! 제가 주님의 종들 가운데 맨 마지막이라는 것을 압니다. 제가 비참함으로 가득하다는 것도 압니다. 주님께서는 제 수많은 잘못과 태만을 용서해 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8
영혼들을 향한 열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 사업에 협력하여 그분과 함께 모든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을 지닙니다. 우리는 ipse Christus, 곧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렇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dedit redemptionem semetipsum pro omnibus”109, 곧 모든 사람을 위한 몸값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되신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이시며 Refugium peccatorum, 죄인의 피난처이신 분과 결합하고, 지상의 그리스도의 대리자, ‘지상의 온유하신 그리스도’이신 교황님께 충실히 결합하여, 우리는 교회가 지닌 구원의 수단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려는 포부를 지닙니다. 그리하여 제가 1928년 거룩한 수호천사들의 날부터 되풀이해 온 그 화살기도를 실현하려 합니다. Omnes cum Petro ad Iesum per Mariam!††††††††††††††††††††††††††††††††††††††††††††††††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죄를 보속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분과 함께 구원 사업에 협력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바오로 성인이 시편 39편의 말씀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하는지 보십시오. “당신께서는 희생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저에게 죽을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보십시오, 제가 왔습니다. 두루마리 첫머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하느님,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제가 왔습니다.’”110
우리는 우리의 삶과, 아무런 유보도 흥정도 없는 헌신을 속죄로 바치고자 합니다. 우리 자신의 죄를 위하여, 우리의 형제들인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모든 시대에 저질러진 죄와 세상 끝날까지 저질러질 죄를 위하여 바치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응답할 줄 모르고 주님께 받은 특별한 사랑을 배반하는 가톨릭 신자들,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들의 죄를 위하여 바치고자 합니다.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기, 모든 영혼을 그리스도께 얻어 드리기, 예수 성심께 가해진 모욕을 넉넉히 보속하기, 이것이 우리의 포부입니다. 이토록 신적인 광기와 우리 속을 집어삼키는 열정, zelus domus tuae comedit me111를 지니고 있는데, 어떤 인간적인 야망이 우리의 삶의 길에 달라붙을 수 있겠습니까? 오푸스데이의 이 정신을 지킨다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자신을 드러내거나 사회적 지위를 높이거나 직책과 명예와 인정을 얻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받아들이더라도 자신의 뜻과는 달리,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만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애를 만족시키려고 이런 인간적인 야망에 이끌린다면, 우리가 그렇게 했다고 거짓으로 말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려는 바람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Nemo potest duobus dominis servire”112, 곧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허영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저는 갓 서품을 받았을 때 이런 좋은 충고를 들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출세하고 싶다면 진지하게 일하는 것은 무엇이든 조심해서 피하고, 무엇보다 분명한 글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이미 그 말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 저의 주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제 잘못과 개인적인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출세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오푸스데이의 시작: 오직 하느님의 분명한 뜻에 순종하여
저는 아무리 나무랄 데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적인 야망을 내포한 모든 것을 그토록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비로 죄인인 저를 쓰시어 오푸스데이를 설립하고자 하셨다면, 그것은 제 뜻과는 달리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새로운 단체를 세우려는 일부 사람들의 집념을 언제나 얼마나 꺼려 왔는지 압니다. 물론 교회가 판단하는 매우 초자연적인 이유에 근거한 경우는 다릅니다. 저는 단체와 설립자가 이미 너무 많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습게 여겨지는 이유로 불필요한 것을 만들어 내게 하는 일종의 설립 강박의 위험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사랑이 부족한 생각이었겠지만, 때로는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고, 무엇인가 새것을 만들어 ‘설립자’라고 불리는 것이 핵심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도적 활동을 잘게 나누고 목적을 자주 바꾸는 여러 단체가 늘어났습니다. 그 이름과 목적은 보기에, 작은 무리의 우두머리라도 되려는 마음에서 나온 듯했습니다. 저는 아주 작고 구체적인 목적을 내세워 기묘한 복장과 수도 공동체들이 생겨나는 것을 보며 속으로 꽤 재미있어했던 것을 고백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죄가 되었다면 용서를 청합니다. 그 공동체들은 수도복의 색깔이나 허리에 두르는 끈이나 띠만 다를 뿐,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공동체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사시인 과부의 금발 머리 손녀들을 위한, 아무개 신부가 세운 성녀 아무개 에메렌시아나의 딸들의 단체.’ 제가 타락한 젊은 여성들을 바로잡으려고 세워진 단체들을 알고 있다고 해서 놀라지 마십시오. 이는 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단체들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설립 당시의 활동을 그만두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여성들이 이전보다 줄어서가 아니라, 편의를 좇아 학비를 받는 학교나 비슷한 활동으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저는 여러 번, 연극 같은 행동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무릎을 꿇고 자녀 여러분에게 용서를 청하고 싶은 충동과 바람을 느꼈습니다. 단체를 설립하는 데 대한 그 거부감 때문에, 오푸스데이를 세워야 할 충분하고 확실한 이유가 있었는데도 할 수 있는 한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28년 10월 2일부터 그 내적 투쟁 가운데에서도, 오푸스데이의 사도적 활동을 시작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려고 일해 왔다는 사실이 우리 주 하느님 앞에서 저를 변호해 주기를 바랍니다. 세 해가 지난 지금 저는, 그때 그런 고통을 겪고 지금도 그 완전한 거부감을 계속 느끼도록 주님께서 바라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고 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외적인 증거 하나를 언제나 더 지니게 하시려는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사도직은 봉사입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이것이 저의 정신이며 여러분의 정신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오푸스데이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내어 주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모든 개인적인 야망을 포기하려고 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 안에서 효과적으로 일하고,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충실한 작은 당나귀처럼 일하려면 누구나 무엇인가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Ut iumentum! 충실한 작은 당나귀의 유일한 포부는 섬기고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가 기다리는 유일한 상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상입니다. “Quia tu reddes unicuique iuxta opera sua”113, 곧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행실대로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여러분이 이곳 오푸스데이에 있는 것은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섬기려는 순수하고 관대한 열망을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희생도 기꺼이 감수하며, 인간적인 보상을 전혀 구하지 않고 교회를 위하여 조용히 일하게 하는 참된 열정을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고귀한 포부로 가득 차십시오. 마음속의 이 거룩한 준비 자세를 더욱 굳게 하십시오. 해야 할 일이 무한히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 하느님께 섬기려는 열망을 더해 주십사고 청해야 합니다. “Messis quidem multa, operarii autem pauci”114, 곧 일꾼은 적고 수확할 것은 많기 때문입니다. 사도적 활동의 바다는 해안이 없는데, 세상에는 섬기려는 영혼이 참으로 적습니다! 섬기려는 우리마저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 여러분, 우리의 삶은 짧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이러한 봉사를 드릴 수 있는 이 땅에서 살아갈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번개가 번쩍일 때 우리는 태어나고, 그 빛이 아직 남아 있을 때 우리는 죽는다. 삶이란 이토록 짧구나!”115* 시편 작가는 더 훌륭하게 씁니다. “Homo, sicut foenum dies eius, tamquam flos agri, sic efflorebit.”116 “인간의 나날은 풀과 같고, 들의 꽃처럼 피어난다.” 아침 햇살의 첫 입맞춤에 피어나 저녁이면 시드는 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성인은 “tempus breve est”117, 곧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섬기십시오. 사도직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초자연적 영역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구로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Omnia possum in eo, qui me confortat!”118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선하심으로 이 무능한 도구들을 쓰기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목적은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내어 맡기고, 하느님께서 당신 피조물들을 통하여, 선택하신 영혼을 통하여 구원 사업을 이루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뿐입니다.
사도는 세례로 그리스도께 접붙여지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고 느끼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견진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싸울 힘을 받고, 세상 안에서 자신의 활동으로 하느님을 섬기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왕직과 예언자직과 사제직에 참여함으로써, 사람들을 하느님께 이끌고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며 기도와 보속으로 그들의 구원에 협력할 수 있게 된 사람입니다.
섬길 준비가 된 그리스도인은 형제인 사람들에게 인도자이며 스승이며 사제입니다. 그들에게 또 다른 그리스도, alter Christus, 더 정확히는 제가 흔히 말씀드리듯이 ipse Christus119*가 됩니다. 그러나 거듭 강조합니다. 자기만의 일을 벌이거나 개인적인 야망을 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도록 그분을 섬기고, 사람들도 섬기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Non venit ministrari, sed ministrare.120†††††††††††††††††††††††††††††††††††††††††††††††††††
개인적인 현세의 야망 없이 일하기. 더 깊은 겸손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사도직 대상은 모든 인종과 모든 사회적 처지의 모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에게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각 환경에서 먼저 지식인들에게 다가갑니다. 사회 깊숙이 다가가려는 모든 시도는 반드시 그들을 거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를 지니고, 실질적인 힘이 있는 모든 운동에 활력을 주며, 인간 사회의 문화적이고 기술적이며 예술적인 발전에 형태와 질서를 부여하는 이들이 지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저는 모든 현세의 야망에서 벗어나, 섬기는 일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섬기는 일에 종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숭고한 사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가치가 없고, 아무것도 실체가 없으며, 아무것도 보람이 없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바로 사람들의 박수와 허영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모든 욕망을 업신여기는 법을 배웠기에, 겸손이라는 보화를 지키려는 우리의 열망은 더욱 주의 깊고 섬세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우 미묘한 위험,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원수의 계략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는 우리가 더 효과적으로 일하는 것을 볼수록, 우리를 속이려는 노력을 배로 늘립니다. 자녀 여러분,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영혼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이 미묘한 위험은 일종의 숨은 교만입니다. 자신이 놀랍고 신적인 일의 도구임을 안다는 데서 생겨나는 교만입니다. 자기 사도직을 통하여 일어나는 기적들을 보며, 말없이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멀었던 지성이 다시 보고, 마비되었던 의지가 다시 움직이며, 돌 같던 마음이 살처럼 부드러워져 초자연적인 사랑과 인간적인 애정을 품게 되는 것을 봅니다. 나병과 죄의 얼룩으로 뒤덮였던 양심이 깨끗해지고, 완전히 죽어 썩어 가던 영혼들이, iam foetet, quatriduanus est enim121, 초자연적인 생명을 되찾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수많은 인간적 장애물을 넘고, 수많은 몰이해를 이기며, 수많은 환경에 다가갑니다. 활동은 갈수록 넓고 다양해지며, 갈수록 효과적이 됩니다. (…) 자녀 여러분, 이 모든 것은 때로 정당하지 않지만 가능한 자기만족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매우 섬세한 양심을 지니고 즉시 대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어떤 봉사를 했든, 그 때문에 교만한 생각을 단 한순간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바로 그 순간 초자연적인 효과를 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만하며 스스로에게 흡족해하는 종들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기의 무가치함을 확신하고, 은총의 일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거룩한 열망으로 가득 찬 종들을 원하십니다. “Servite Domino in timore, et exsultate ei cum tremore; aprehendite disciplinam, nequando irascatur Dominus, et pereatis de via iusta.”122 “주님을 경외하며 섬기고, 떨며 그분 안에서 기뻐하여라.” 여기서 경외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 자녀의 사랑이며, 떨림은 제 표현으로 옮기자면 사랑의 감동입니다. “혹여 주님께서 노하시어 너희가 바른길에서 벗어나 멸망하지 않도록 하여라.” 길을 잃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이 성경 말씀을 어떻게 풀이하는지 보십시오. “‘정의의 길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지 않고, ‘정의의 길에서 벗어나 멸망하지 않도록 하여라.’라고 합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정의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경외심으로, 곧 교만하지 않게 하느님을 섬기라고 경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교만해지지 말고 겸손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높은 것을 탐내지 말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로마 12,16)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기뻐하되 떨리는 마음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어떤 것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거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랑하는 이는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2코린 10,17–18). 바른길을 걸을 수 있는 은총을 자기 공으로 돌려, 이미 걷기 시작한 그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123†††††††††††††††††††††††††††††††††††††††††††††††††††††
하느님께서 우리의 손을 통하여 이루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방해만 했을 뿐이며, 잘해야 주님의 손에 들린 가난한 도구였을 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보다 더 잘 일하고, 더 많이 희생하고, 더 꾸준히 기도한 다른 영혼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보다 여러분과 저를 더 많이 쓰고자 하셨습니다. 일하시는 분이 당신이심을 드러내시고, 도구들은 중요하지 않거나 아주 조금 중요할 뿐임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어리석은 이들을 선택하시어 지혜로운 이들을 부끄럽게 하셨고, 세상의 약한 이들을 선택하시어 강한 이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또한 세상의 비천하고 천대받는 것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선택하시어 대단해 보이는 것들을 무력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2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주님을 섬기는 데 많이 일했다고 생각될 때에는 그분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말씀을 되풀이하십시오. “Servi inutiles sumus; quod debuimus facere, fecimus.”125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루가 끝나 양심 성찰을 하면서 제가 언제나 내리는 결론은 pauper servus et humilis!, 곧 가난하고 겸손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주님, 호세마리아는 호세마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겸손은 진리이므로, 여러분도 그렇듯이 저 역시 많은 경우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님, 저는 제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만 생각했고, 주님을 위하여 다른 이들을 위해 일하는 데만 마음을 쏟았습니다!” 그러면 관상하는 우리의 영혼은 사도와 함께 외칩니다. “Vivo autem iam non ego: vivit vero in me Christus.”126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겸손 없이는 결코 효과적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은총의 활동에 자신을 신뢰로 내어 맡길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유일한 힘이신 하느님께 끊임없이 달려가려는 마음도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와 동료들의 성화를 위하여 마련해 두신 은혜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Quoniam excelsus Dominus, et humilia respicit”127, 곧 주님께서는 높이 계시지만 낮은 것을 굽어보시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겸손해지려고 싸우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렇게 놀랍도록 효과적으로 일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 손안의 온순한 도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보다 삶의 모범으로 그리스도의 소금과 빛을 온 세상에 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합시다. 이 땅을 하늘로 만들고,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큰 선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보여 줍시다. 그들이 우리의 모범적인 행실을 보면 하늘 나라 자체의 광경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28†††††††††††††††††††††††††††††††††††††††††††††††††††††††
하느님의 빛으로 비추기. 모든 이에게 주어진 성덕의 부르심
이제 여러분과의 긴 대화를 마치려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해 온 묵상은 오푸스데이의 부르심이 지닌 깊이와 아름다움, 오래되었으나 새로운 성격을 조금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수 세기가 흐른 뒤, 주님께서는 우리를 쓰시어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침내 일상생활, 곧 직업 활동의 성화하는 가치를 발견하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모범과 우정과 신뢰를 통하여 교리를 전하는 사도직의 효과를 발견하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오늘날 세상의 모든 구석에서 수많은 언어로, 그리고 누구나 자기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언어의 은사를 지니고, 복음처럼 오래되었으면서 복음처럼 새로운 이 메시지를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옛 교부들의 설교에서 같은 메시지의 흔적을 발견하면 우리의 영혼은 기뻐합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길의 복음적 본질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증거와도 같습니다.
저는 이 편지에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말을 여러 번 인용했습니다. 이제 그분의 또 다른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저는 결혼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도시를 떠나고 시민들의 일을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되 덕을 실천하십시오. 사실 저는 산속에 가서 사는 이들보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사는 이들이 덕으로 빛나기를 더 바랍니다. 그러면 헤아릴 수 없는 큰 선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계속합니다. “더 밝게 비추도록 모든 등불이 등경 위에 놓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불을 붙여,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 오류에서 벗어나게 합시다. ‘제게는 자녀가 있고 아내가 있으며 집을 돌봐야 해서, 말씀하시는 대로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이 하나도 없더라도 미지근하다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그런 것들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열렬하다면 덕을 실천할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너그럽게 자신을 내어 주려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있다면 나이도 가난도 부도 일도, 그 밖의 어떤 것도 덕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늙은이와 젊은이, 혼인한 이와 자녀를 둔 이, 장인과 군인들이 이미 주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이행했습니다.
다니엘은 젊었고, 요셉은 종이었으며, 아퀼라는 손으로 일하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자색 옷감 장수는 작업장을 운영했고, 어떤 이는 감옥을 지켰으며, 코르넬리우스처럼 백인대장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티모테오처럼 병든 이도 있었고, 오네시모처럼 도망친 종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누구에게도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 종과 자유인, 군인과 민간인 모두가 덕으로 빛났습니다.”129
복음의 뜻을 읽을 줄 알던 이들에게는, 자기 환경을 떠나지 않고 일상생활과 직업 안에서 성덕에 이르라는 모든 이를 향한 부르심이 얼마나 분명했습니까! 그러나 수 세기 동안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직업을 성화하며 직업을 통하여 성화되려는 수덕적 현상은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천하지 않다 보니 이 가르침은 이내 잊혔고, 신학적 성찰은 복음의 다른 측면들을 드러내는 다른 수덕적 현상을 연구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대에 당신의 사업인 오푸스데이를 일으키시어, 모든 사람이 성화되어야 하며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서 일상의 일을 통하여 성화되어야 한다는 진리가 다시는 알려지지 않거나 잊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람이 있는 한 오푸스데이는 존재할 것입니다. 온갖 직업과 직무를 지닌 사람들이 자기 신분과 직업과 직무 안에서 성덕을 추구하며, 거리 한가운데에서 관상하는 영혼으로 사는 이 현상은 언제나 이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방금 말씀드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오푸스데이에는 세상에 적응해야 하는 문제가 결코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시대에 맞추어 새로워져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할 필요도 결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편지에서 설명한 세속적이고 평신도다운 특징을 오푸스데이에 주시어, 단 한 번으로 영원히 시대에 맞는 것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므로 세상에 적응할 필요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진보를 뒤따라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 진보를 이루는 이들이 바로 우리, 곧 자녀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상의 일을 통하여 그 진보를 이루어 갑니다.
충실하십시오. 저도 충실하고 기다릴 줄 알도록 도와주십시오. 서두르지 맙시다. 때가 되면 당신의 사업을 원하신 주님께서 지금은 보이지 않는 법적 형태를 구체화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교회가, 우리가 세상 안에서, 거리 한가운데에서, 맑은 물과 탁 트인 공기 속에서, 특권 없이, 성소의 본질을 지키며 교회를 섬기는 이 신적인 방식을 인정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수도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수도자가 되기를 바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십시오. 많이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전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quodcumque petieritis Patrem in nomine meo, hoc faciam”130, 곧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가 이루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또 “qui coepit in vobis opus bonum, perficiet…”131, 곧 “여러분 안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저는 지금 교회의 공식적인 승인을 구하기보다 믿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리게 하는, 참으로 초자연적인 이유들을 설명했습니다. 지금 승인을 구하면 우리의 하느님 부르심을 수도 성소와 혼동하여, 그 본질을 훼손하기 시작할 명백한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저의 주 예수님께서 제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분명히 여러분은 모두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은 일일 것입니다. 오푸스데이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인 여러분의 양심을 억누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푸스데이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효력으로 자기 사명을 수행하고, 주님께서 이 땅에서 오푸스데이를 원하신 목적에 언제나 응답하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영원토록 그분의 영광을 위한 놀라운 도구가 되리라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십시오. Sit gloria Domini in saeculum!132††††††††††††††††††††††††††††††††††††††††††††††††††††††††
여러분의 아버지가 온 마음으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마드리드, 1932년 1월 9일
에페 1,10(불가타).
리옹의 성 이레네오, Adversus haereses, III, 16, 6(SC 211, 313–314쪽).
요한 12,32.
† 성경 참조: 요한 12,32; 에페 1,10
마태 5,48.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Adversus oppugnatores eorum qui ad monasticam vitam inducunt, 1, III, 14(PG 47, 374단).
† 성경 참조: 마태 5,48
루카 12,48. “quem qui invenit ... emit agrum illum”: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다시 숨겨 두고, 그 발견을 기뻐하며 돌아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산다.”(원문 편집자 번역)
* 마태 13,44(원문 편집자 주).
마태 4,19–20.
마태 8,21–22.
루카 9,61–62.
† 성경 참조: 마태 4,19–20; 마태 8,21–22; 루카 9,61–62; 루카 12,48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In Genesim Homilia, 43, 1(PG 54, 396단).
마태 13,47.
† 성경 참조: 마태 13,47
예레 23,8. “de terra Aquilonis et de cunctis terris”: “북녘 땅과 모든 땅에서.”(원문 편집자 번역)
예레 16,16–17.
1티모 2,4.
1코린 16,24.
† 성경 참조: 1티모 2,4; 예레 16,16–17; 예레 23,8; 1코린 16,24
1테살 2,4.
시편 105[104],4.
시편 86[85],3–4.
† 성경 참조: 시편 86,3–4; 시편 105,4; 1테살 2,4
1요한 2,29.
1요한 3,1–2.
히브 2,10–13.
† 성경 참조: 1요한 3,1–2; 히브 2,10–13; 1요한 2,29
로마 8,29.
1요한 3,9–10.
요한 3,16–17.
† 성경 참조: 요한 3,16–17; 로마 8,29; 1요한 3,9–10
1코린 14,6.
1코린 14,9–11.
사도 1,1 참조.
† 성경 참조: 사도 1,1; 1코린 14,6; 1코린 14,9–11
로마 1,20.
* 요한 1,9(원문 편집자 주).
요한 3,17.
† 성경 참조: 요한 1,9; 요한 3,17; 로마 1,20
요한 15,15 참조.
* 요한 11,35. “et lacrimatus est Iesus”: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원문 편집자 번역)
요한 11,3.
사도 10,38.
† 성경 참조: 요한 15,15; 사도 10,38; 요한 11,35; 요한 11,3
마태 23,1–4.
마태 23,5.
야고 2,14.26.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Epistula ad Ephesios, 15장, 1–2(SC 10, 71쪽).
† 성경 참조: 마태 23,1–4; 마태 23,5; 야고 2,14; 야고 2,26
마태 5,13–14 참조.
1코린 11,7. “vir quidem non debet ... imago et gloria Dei est”: “남자는 하느님의 모습이며 영광이므로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된다.”(원문 편집자 번역)
마태 5,16.
† 성경 참조: 마태 5,16; 마태 5,13–14; 1코린 11,7
루카 12,41–42.
* 루카 12,43(원문 편집자 주).
마태 13,34.
1요한 4,5.
요한 17,18.
† 성경 참조: 마태 13,34; 루카 12,43; 요한 17,18; 1요한 4,5
* “한 사람을 보면 모두를 알 수 있다.”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2, 65–66(원문 편집자 주).
요한 21,17.
야고 5,18.
† 성경 참조: 요한 21,17; 야고 5,18
2코린 5,14 참조.
1코린 1,23.
마태 20,28.
† 성경 참조: 마태 20,28; 2코린 5,14; 1코린 1,23
2코린 2,15 참조. “bonus odor Christi”: “그리스도의 좋은 향기.”(원문 편집자 번역)
† 성경 참조: 2코린 2,15
마태 6,1.
마태 6,16.
시편 100[99],2. “servite Domino in laetitia”: “기쁨으로 주님을 섬겨라.”(원문 편집자 번역)
† 성경 참조: 시편 100,2; 마태 6,1; 마태 6,16
1티모 1,15.
1티모 2,1–4.
1코린 9,22.
† 성경 참조: 1코린 9,22; 1티모 1,15; 1티모 2,1–4
로마 15,1–2.
로마 14,1.
† 성경 참조: 로마 14,1; 로마 15,1–2
로마 15,5–6.
마태 11,29.
필리 2,7.
필리 2,8.
요한 15,15.
마태 26,50.
요한 15,13.
† 성경 참조: 마태 11,29; 요한 15,15; 요한 15,13; 필리 2,7; 마태 26,50; 로마 15,5–6
루카 19,45–46.
요한 2,17.
† 성경 참조: 루카 19,45–46; 요한 2,17
시편 73[72],21; 69[68],10.
† 성경 참조: 시편 69,10; 시편 73,21
로마 12,18.
로마 12,14.17.
† 성경 참조: 로마 12,14; 로마 12,17; 로마 12,18
요한 13,23. “erat ergo recumbens ... quem diligebat Iesus”: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 곧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원문 편집자 번역)
† 성경 참조: 요한 13,23
요한 3,30.
1티모 1,17.
로마 15,1.3.
† 성경 참조: 요한 3,30; 1티모 1,17; 로마 15,1; 로마 15,3
루카 7,47.
1티모 2,6.
† 성경 참조: 로마 7,47; 1티모 2,6
히브 10,5–7. 시편 40[39],7–9 참조.
요한 2,17.
마태 6,24.
† 성경 참조: 마태 6,24; 요한 2,17; 시편 40,7–9; 히브 10,5–7
시편 62[61],13.
마태 9,37.
구스타보 아돌포 베케르, Rimas y Leyendas, 시 제49번, 마드리드, Editex, 2013, 52쪽.
시편 103[102],15.
1코린 7,29.
† 성경 참조: 마태 9,37; 1코린 7,29; 시편 62,13; 시편 103,15
필리 4,13.
“ipse Christus”: “그리스도 자신.”(원문 편집자 번역)
마태 20,28.
† 성경 참조: 마태 20,28; 필리 4,13
요한 11,39. “iam foetet, quatriduanus est enim”: “나흘이나 되었으니 벌써 심한 냄새가 납니다.”(원문 편집자 번역)
† 성경 참조: 요한 11,39
시편 2,11–12.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 De correptione et gratia liber unus, 9장, 24(CSEL 92, 247–248쪽).
† 성경 참조: 시편 2,11–12
1코린 1,27–29.
† 성경 참조: 1코린 1,27–29
루카 17,10.
갈라 2,20.
시편 138[137],6.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In Matthaeum Homilia, 43, 5(PG 57, 463단).
† 성경 참조: 갈라 2,20; 루카 17,10; 시편 138,6
요한 14,13.
필리 1,6.
시편 104[103],31.
† 성경 참조: 필리 1,6; 시편 104,31; 요한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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