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제4호

[신앙을 전할 때의 애덕에 관한 편지입니다. 라틴어 첫 구절은 Vos autem이며, 1933년 7월 16일자로 되어 있습니다. 1966년 1월에 인쇄되었습니다.]

1. Vos autem dixi amicos, quia omnia quaecumque audivi a Patre meo, nota feci vobis1.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우리가 사도직에서 걸어가야 할 길을 가리켜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온 세상 구석구석에 전하고, 이 땅에 하느님의 길들을 열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그분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사업인 오푸스데이에 부르시면서, 모든 영혼을 이해하고 너그러이 헤아리며 섬세한 사랑으로 대하도록 이끄는 사도직의 방식도 주셨습니다.

우리의 사도직은 우정과 신뢰의 사도직입니다. 우리는 성령과 함께 언제나 이렇게 되풀이하고자 합니다. Ego cogito cogitationes pacis et non afflictionis2. “나는 평화를 생각하지, 재앙을 생각하지 않는다.” 화합을 추구하고 사랑의 분위기를 이루려는 생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내리려면 그러한 분위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애덕은 형제애를 묶어 주는 끈이며 평화의 토대이고, 일치를 굳건하게 하며 영속하게 하는 힘입니다. 애덕은 믿음과 희망보다 크고, 순교와 모든 업적보다 앞서며,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3†

모든 곳에서 모든 영혼과 함께. 평화와 사랑의 씨를 뿌리기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정신인 이 정신을 우리에게 바라셨습니다. 그분께서 군중과 함께 계시려고 끊임없이 애쓰시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아무도 물리치지 않으시는 그분을 바라보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는 모든 이에게 건네실 말씀이 있고, 모든 이를 향하여 지극히 온유한 입을 여십니다. 사람들과 함께 사시는 하느님이라는 이 놀랍고도 유일무이한 사실을 통하여, 그들을 가르치시고 진리를 일러 주시며 기쁨과 희망의 소식을 전하십니다.

때로는 배에 오르시어 물가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말씀하시고, 때로는 모든 사람이 잘 들을 수 있도록 산 위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때로는 떠들썩한 잔치 자리에서, 고요한 집 안에서, 곡식밭 사이를 걸으시면서, 올리브 나무 아래 앉으셔서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각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바다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는 그물과 물고기를, 땅을 일구는 이들에게는 씨앗과 포도밭을 예로 드십니다. 집안일을 하는 여인에게는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말씀하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그 여인이 야곱의 우물에 길으러 온 물을 계기로 말씀을 나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맞아들이시고, 사람들이 초대하면 응하십니다. 초대를 받지 않으셨을 때에도 때로는 스스로 찾아가십니다. Zachaee, festinans descende, quia hodie in domo tua oportet me manere4.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며5, 아무도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모든 이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기꺼이 내어 주십니다. 아낌없이 쏟아부으시는 이 사랑은 완전한 번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억지로 설득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 곁에서, 사람들 가운데 계시면서, 참된 평화와 진정한 기쁨을 찾아 당신을 따르도록 온유하게 이끄십니다.††

자녀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바로 그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기 때문입니다. Caritas Christi urget nos6.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애덕의 빛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너그러운 사랑으로, 스승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을 바라보며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너그러이 헤아리며 누구의 적도 되지 않으려는 열망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영혼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거의 외침과도 같은 사도의 이 말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Caritas mea cum omnibus vobis in Christo Iesu!7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애덕으로 세상에 평화와 기쁨의 씨를 뿌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존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얻어 주신 자유, 곧 각 사람의 자유를 사랑하고 지켜 주면서 말입니다.8

하느님의 사업인 오푸스데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이 인간의 권리를 존중하도록 초대하기 위하여 태어났습니다. 저는 제 자녀들이 그렇게 양성되기를 바라며, 여러분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일치에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자발적인 관대함이 따라야 합니다. 이 관대함은 모든 일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충실한 군사로서 자신을 온전히 바치며, 진심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저는 온전히 진실한 마음으로, 기쁘게, 제가 가진 모든 것과 함께 저 자신을 바쳤습니다.”9†††

이해와 일치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끊임없는 사도직을 위한 준비여야 합니다. 심장이 끊임없이 뛰는 것처럼 우리의 사도직도 그러해야 합니다. 자녀 여러분, 주님께서는 평화에 관한 말은 많지만 평화는 없는 시대에 우리를 당신의 사업으로 부르셨습니다. 영혼 안에도, 제도 안에도, 사회생활 안에도, 민족들 사이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평등과 민주주의에 관한 말은 끊이지 않지만, 닫혀 있고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신분의 장벽이 존재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이해를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않는 시대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때로는 선의로 행동하고 애덕을 실천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애덕은 무엇을 주는 데 있기보다 이해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유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광신적이고 완고한 이들이, 정작 자기들에게 피해를 입은 이들을 폭력적이고 공격적이라고 몰아세우며 미리 자신을 감싸는 시대입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일치에 관한 말은 많이 들리지만, 일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조차 이보다 더 큰 분열을 상상하기 어려울 듯한 때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와 환경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고, 꾸준하며, 일로써 입증되는 모범이어야 합니다. 올곧고 부지런하며, 모든 영혼을 향한 이해와 사랑으로 가득한 삶이어야 합니다.

Exiit qui seminat seminare semen suum10. “씨 뿌리는 사람이 자기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씨를 뿌리고, 올바른 가르침을 전하며, 이 땅의 모든 정직한 일과 관심사에 참여하여,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좋은 모범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그분께서는 coepit facere et docere11, 먼저 행하시고 그다음에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리 한가운데에서, 대학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참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아주 특별하게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적당히 자신을 내어 주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바치라는 부르심입니다.

동시에 겸손하고 조용해야 하는 이 헌신은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지혜와 완전하심을 더 잘 알게 해 주며, 우리 인간의 작음과 무지와 비참함도 깨닫게 해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자신의 나약함을 보며 다른 이들의 나약함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허물을 덮어 주며, 모든 이와 사귀고자 하는 마음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낯선 이로 남아 있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 여러분, 영혼들을 향한 열정은 우리가 누구의 적도 되지 않게 하고, 크고 보편적이며 가톨릭적인 마음을 지니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날개를 달고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려는 사람들의 활동을 그토록 자주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사소한 다툼과 옹졸한 편 가르기의 닭장 안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지녀야 할 열정은 다음 말씀을 깨닫게 하는 열정입니다. In Christo enim Iesu neque circumcisio aliquid valet neque praeputium, sed nova creatura1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을 행할 기회 앞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영혼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열정입니다.††††

거룩한 단호함과 거룩한 양보. 신앙의 수호. 오류에 빠진 사람을 대하는 태도

여러분이 마주칠 수 있는 어려움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늘 일깨워 드리듯이, 여러분이 속해 있고 계속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습니다.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이 좋으신 하느님께서 이루신 결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의 비유에서처럼 가라지도 뿌렸고, 사람들의 지성을 오염시키는 거짓 가르침도 퍼뜨렸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때로 격렬한 분노까지 일으키며 그리스도와 그분의 거룩한 교회에 반항하게 합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오푸스데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자녀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천둥의 아들들’처럼,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죄인들을 태워 버리게 해 달라고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까?13 아니면 불길한 징조를 알리는 새나 재앙을 예고하는 예언자처럼 끊임없이 한탄해야 하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그것이 우리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정신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Filius hominis non venit animas perdere, sed salvare14.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풀이할 때, 우리가 풍성한 선으로 악을 잠기게 해야 한다고 자주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첫째 의무는 영혼들을 사랑하면서 가르침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정신을 실천하는 원칙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오류에 대해서는 거룩한 단호함을, 오류에 빠진 사람에 대해서는 거룩한 양보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여러분이 가르쳐야 합니다. 단호함을 절제 없는 태도와 혼동하고, 양보를 함부로 내줄 수 없는 권리나 진리를 포기하는 것과 혼동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시고 교회가 지켜 온 진리는, 각자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인간적인 소유물이나 개인 재산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것이 아닙니다. 그 진리는 하느님의 것이며, 교회가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을 양보하거나 잘라 내거나 타협할 권한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룩한 단호함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계시의 유산에 속하는 것, 곧 스스로 속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속이지도 않으시는 하느님을 믿기에 우리가 가톨릭의 진리로 아는 것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진리이며, 진리에는 중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타협하려는 마음에 이끌려 사람들이 요구하는 모든 변화를 우리의 거룩한 가톨릭 신앙에 받아들인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쩌면 모두가 동의하는 무언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막연한 마음의 기울어짐과 열매 없는 감상만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종교 말입니다. 물론 조금만 호의적으로 본다면, 그런 것은 초자연적인 것을 향한 어느 열망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하느님 진리의 보화도 아닐 것입니다. 구원하지도 구속하지도 못하는 인간적인 것,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원칙에서 물러서려는 어리석음, 교리의 차이를 줄이려는 조급함, 예수님께서 당신 교회에 맡기신 불가침의 유산에 관한 양보는 그런 파국으로 이끌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진리는 하나입니다. 인간적인 일에서는 어느 쪽이 옳은지 알아내기 어려울 수 있지만, 신앙의 문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태어나게 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참된 종교는 하나뿐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양보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호합니다. 거룩하게 단호합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듯이, 둘에 둘을 더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에서 양보할 상식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둘 더하기 둘이 셋 반이라고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의 가르침에서 타협하는 것은 진리를 지니고 있지 않거나, 자신이 진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분명한 표시입니다.

또한 우리 종교 전체가 문제 되는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군가 신앙이나 도덕의 한 부분에서 여러분을 타협하게 하려 한다면 속지 마십시오. 하나의 가르침을 이루는 여러 부분은 이론에서나 실천에서나 보통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으며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 전체가 더 살아 있고 참될수록 그러한 관계는 더욱 깊습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만이 전체를 해치지 않고 분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전체는 애초부터 생명력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일치를 결여하는 것은 대개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에게서 왔으며,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듯이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조항을 굳건하고 일관되게 지키든지, 그렇지 않으면 조만간 그 신앙을 고백하기를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성벽 한 곳에 틈이 나면 온 성이 함락될 위험에 놓이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수호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이 진리들에 관하여 교회만이 유일한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모범과 말과 글로, 그리고 여러분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정당한 수단으로 그것을 수호하십시오.

동시에 모든 이의 자유를 사랑하기에,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문제나 학파에 따라 견해가 달라지는 문제에서는 다른 이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문제에서, 다른 모든 현세의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자신의 권한으로 모든 신자에게 하나의 견해를 요구하지 않는 한, 오푸스데이는 결코 집단적인 견해를 지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 사업의 정신은 거룩한 단호함과 더불어 끊임없는 양보도 여러분에게 요구합니다. 그 양보 역시 거룩한 것이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충실함과 교리적 일관성과 신앙의 수호가 침울한 태도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류에 빠진 사람을 없애 버리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어서도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성경 말씀을 제멋대로 적용하여 원수들에게 ignis, et sulphur, et spiritus procellarum15, 곧 불과 유황과 폭풍이 내리기를 바라던 그 딱한 광인처럼 우리는 결코 ‘축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파멸도 바라지 않습니다. 거룩한 단호함은 그저 완고하고 무뚝뚝한 비타협성이 아닙니다. 거룩한 양보가 따르지 않는다면 거룩하지도 않습니다.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향주덕과 함께 네 가지 기본 덕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둘 가운데 어느 것도 거룩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단호함과 네 가지 기본 덕

무엇보다 먼저 현명이 필요합니다. 참된 애덕에 맞게 행동할 줄 알고, 잘못 이해한 열정이 여러분의 단호함에서 거룩함을 앗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강철로 된 큰 망치처럼 힘 있고 굳건해야 합니다. 그러나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푹신한 덮개로 싸인 망치여야 합니다.

현명함이 실천하게 하는 참된 애덕과 사랑은, 필요한 때에 알맞은 방식으로 분별 있게 말하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이웃의 필요와 사정에 민감하게 하면서도 부적절하게 물러서지 않게 할 것입니다. 동시에 여러분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희망을 북돋아 주며, 당신 진리의 충만함 안에 머물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도록 이끌 것입니다.

정의도 필요합니다. 각 사람에게 마땅한 대우를 하고, 피상적인 일반화나 단순화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태도는 큰 해를 끼치고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는 데 많은 장애를 만듭니다. 자녀 여러분,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한쪽 종소리만이 아니라 다른 쪽 종소리도 들어 보지 않으며, 각각의 경우 누가 종을 울리는지 알지 못한다면, 정의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Fortes in fide16, “믿음 안에서 굳건히 서십시오.” 신앙을 용감하게 수호하고, 새로운 것에 쉽게 마음을 빼앗겨 전문가들의 이론에 지나지 않는 것을 널리 퍼뜨리거나 교의처럼 제시하려는 유혹에 맞서며, 다른 이들도 그 유혹에 맞서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언제나 교회의 교도권을 받아들이면서 신앙과 도덕에 대한 이해와 설명을 발전시키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이든 마구 내놓거나, 어쩌면 매우 잠정적이고 아무 근거도 없는 연구상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 것을 퍼뜨릴 만큼 무책임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 여러분, 기이하고 혼란스러운 견해를 퍼뜨려 놓고는, 먹을 것을 탐내는 아이의 순진한 핑계로 책임을 벗어 버리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것을 좋아하는 꼬마가 잼 한 통을 다 먹은 뒤, 단것을 그렇게 많이 먹으면 해로울 줄은 몰랐다고 변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백성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확실하고 명료하며 논란의 여지가 없는 가르침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만을 위한 종교를 만들자는 뜻은 아닙니다. 현실을 바로 보고, 사람들의 지식이 흔히 다음 사람의 수준에 머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 그에게 “세비야의 성 이시도로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성 이시도로요? 아, 알지요! 히랄다 탑을 세운 분이지요.”

절제의 덕은 여러분이 결코 지나치지 않게 하고, 분노에 휩쓸리지 않게 하며, 광신에 빠지지 않게 할 것입니다. 오푸스데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자녀는, 상대가 절뚝거리지 않게 하려면 머리를 때리라고 충고하는 이들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함께 살아갈 의무. 아무도 배척하지 않기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보시다시피 거룩한 양보와 거룩한 단호함을 조화롭게 실천하는 일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고 그분의 은총이 도와주시기에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의 비참함에서 비롯되는 나쁜 성향들이 맞서고, 문제를 성급하고 그릇되게 해결하지 않으려면 여러 요소를 고려해야 하기에 어렵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산토 토리비오 데 리에바나의 성가대석에 둥근 천장의 뼈대를 받치는 듯한 돌받침들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것을 본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한쪽 돌받침에는 개의 머리가, 맞은편 돌받침에는 고양이의 머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흔히 고양이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옛 인간을 뜻하고, 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통하여 태어나게 하신 새 인간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때때로 그 돌받침들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상징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라들, 종교들, 인종들, 사람들은 개와 고양이처럼 늘 다투며 살아가지만, 그 둥근 천장의 무게, 곧 세상의 평화와 안녕을 함께 떠받치며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갈라놓는 것이 있다면, 서로를 이어 주는 것도 언제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서로를 존중하며 다정하고 성실하게 사귀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참된 교회 안에 있는 그분의 자녀인 우리는, 그러한 것을 잘 활용하고 두드러지게 하여 iis qui ignorant et errant17, 곧 진리를 모르고 오류에 빠진 이들을 빛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처신을 설명하려고 어떤 이들이 곧잘 드는 예가 저는 늘 탐탁지 않았습니다. 싱싱한 사과가 담긴 바구니에 썩은 사과 하나를 넣으면 나머지도 썩는다는 예입니다. 자녀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거나 실천하지 않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되, 아무도 배척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나쁜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충분한 영적 수단과 수덕적 수단과 지적 수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푸스데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자녀는 주위 분위기에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의 분위기, 곧 죄인들과 함께 지내시며 그들과 사귀셨던 우리 주 예수님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18††††††††

오류와 오류에 빠진 사람의 구별. 오류에 빠진 이들을 향한 애덕

그릇된 사상도 대개 모든 면에서 그릇된 것은 아닙니다. 보통 그 안에는 좋은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깃발이 되는 진리의 불꽃이 거의 언제나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의 부분은 그 사상 자체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따라서 오류와 뒤섞여 있는 그 좋은 생각들이 충만한 진리를 지닌 그리스도인들을 따라와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뒤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기준은 교리적인 관점에서만 유효합니다. 사람을 직접 대하는 실제 삶에서는 여러분이 오류에 빠진 이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들의 사상에 끌려가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리스도께 데려오고 부드러우면서도 효과적으로 빛과 평화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사업은 무언가에 반대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제가 자주 되풀이하는 것을 여러분은 듣습니다. 물론 오류를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류에 빠진 이들에게도 우리의 사랑과 도움, 성실하고 진실한 사귐이 필요합니다. 단지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것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동료들과 친구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영혼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양보입니다. 물론 관용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단순히 용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하거나 오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덜 나쁜 것이거나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모든 것,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모든 것, 본질에는 관계되지 않지만 의견 충돌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물러서고 양보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결국 다듬을 수 있는 거친 모서리는 다듬어, 오류에 빠진 이들이 빛을 받아들이기 쉽도록 서로 이해할 바탕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타협을 부르짖으며 그리스도의 도덕적 가르침에서 양보하고 싶어 하거나 교의를 훼손하는 데에도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자기 돈과 안락함과 변덕과 명예와 의견을 건드리는 것은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군가 자신들이 개인적 권리라고 여기는 것에 손을 대려 하면 독사처럼 달려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권리가 아니라 자의적인 처사나 뒤엉킨 일, 명확하지 않은 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자기 삶을 끝없는 십자군 원정으로, 끊임없는 신앙 수호로 만듭니다. 그러나 때로는 고집에 사로잡혀, 그 좋은 열망을 애덕과 현명함이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광신에 빠집니다. 의도는 올바르더라도, 진리에 크게 이바지하려던 마음이 변질되어 결국 선보다 해를 더 많이 끼칩니다. 어쩌면 그들이 지키는 것은 자기 의견과 자존심과 굳게 닫힌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라만차의 귀족처럼 풍차밖에 없는 곳에서 거인을 봅니다. 늘 언짢고 까다로우며, 쓰디쓴 열정과 거친 태도를 지닌 사람이 됩니다. 어디에서도 좋은 것을 찾지 못하고 모든 것을 어둡게 보며, 사람들의 정당한 자유를 두려워하고,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한번은 어떤 기자가 체사레 보르자의 무덤을 찾으려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어떤 이들에게는 미움을 받고 다른 이들에게는 찬양받는 유명한 용병대장이었습니다. 그 기자는 그가 성당 문 앞에 묻혔다는 말을 듣고 나바라의 비아나로 갔습니다. 찾아온 목적을 말하자 누군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찾느라 애쓰지 마십시오. 그자는… 내가 파내어 그 유해를 타작마당에 흩어 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을 공격하지도 않지만 수호하지도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안일하고 이기적인 회의주의에 빠져, 다른 이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구실 아래 우유부단함과 무책임 속으로 숨어듭니다. 누군가 장난삼아 쓴 다음 시구는 그들의 태도를 잘 보여 줍니다. 만일 진지하게 쓴 것이라면, 그는 시 쓰는 법을 잘못 이해한 만큼 복음도 잘못 이해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적대적인 세상에는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저마다 제 일이나 챙기세. 나는 내 일, 너는 네 일, 각자 제 구원이나 얻도록 하세.*

모든 이와 사귀기. 귀 기울여 듣기. 자유를 사랑하기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우리는 모든 이와 사귀어야 하며, 어느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를 요구하는 초자연적인 이유는 많고, 이미 여러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다른 이유 하나를 더 일깨워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푸스데이에 들어온다고 해서 세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고, 그 뒤에도 여전히 세상에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취향, 직업과 성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속적으로 살아서는 안 되지만, 여러분은 여전히 세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일터에서, 공부하는 곳에서, 사무실에서, 가정에서 날마다 함께 지내는 수많은 이들과 똑같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함께 살아가는 데서 영혼들을 그리스도 예수님께 가까이 이끌 기회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귐을 피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고 키워 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우정과 신뢰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사도들이기 때문입니다. 동료들과 자신을 갈라놓는 어떤 벽 뒤에도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수도자가 아니므로 물리적으로 그러해서도 안 되며, 모든 이와 맺는 고결하고 진실한 사귐이 영혼들을 위한 활동의 인간적 수단이므로 영적으로도 그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하여 다른 이들을 대하는 여러분의 태도에는 애덕에서 비롯되는 특징이 드러날 것입니다. 세심한 배려와 예의, 다른 이의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 진심 어린 따뜻함과 다정함입니다. 사도께서는 얼마나 분명하게 말씀하십니까! “나는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더 많은 영혼을 얻으려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나 자신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없이 사는 이들을 얻으려고, 나 자신은 하느님의 법을 떠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는 사람이면서도, 율법 없이 사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든 이를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9

그리고 로마 신자들에게 쓰면서 그 이유를 덧붙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누구나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들어 본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이가 없는데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20 자녀 여러분, 그리스도를 전하려면 말하거나 좋은 모범을 보이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귀 기울여 듣는 일도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이끌고자 하는 영혼들과 솔직하고 따뜻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분명 여러분은 은총에 이끌려, 여러분의 입에서 기쁜 소식을 듣기만을 바라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의문과 질문, 서로 견주어 보고 싶은 의견,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사귀며 함께 지내십시오. 그들을 알아가고 여러분 자신도 알릴 수 있도록 하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사업은 광신과 가장 거리가 멀며, 자유를 가장 사랑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길은 기도하고 이해하며 서로 사귀는 것, 그리고 나서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살펴보도록 돕는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모든 이와 함께 살아가기. 오류가 아니라 사람의 친구 되기. 보편적인 사도직

오푸스데이 안에 있는 하느님 자녀들의 삶은 사도직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어떠한 장벽도 넘어서려는 끊임없는 열망이 생겨납니다. 또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모든 형태의 편협함과 강요와 폭력을 없애려는 마음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유로이 당신을 섬기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사도직은 올바를 수 없습니다. 자녀 여러분, 따라서 여러분 각자는 한없는 사랑을 실제 삶에서 실천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모든 이를 이해하고, 너그러이 헤아릴 수 있을 때에는 언제나 그렇게 하십시오. 영혼들을 위한 큰 열정을 지니되, 무뚝뚝한 태도나 거친 몸짓이 없는 다정한 열정을 지니십시오.

우리는 오류를 진리와 같은 자리에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애덕의 질서를 지키면서, 오류에 빠진 이들을 넓은 이해심으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이 점을 분명히 새기도록 저는 늘 강조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신앙을 거스르는 오류와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오류를 따르는 이들의 성실한 친구가 될 수는 없겠습니까? 우리의 행실과 가르침이 굳건하다면, 여러 분야에서 그들과 함께 같은 수레를 끌 수는 없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의 모든 길에서 이해와 사랑과 용서의 씨를 뿌리기를 바라십니다. In hoc pulcherrimo caritatis bello, 곧 이 지극히 아름다운 사랑과 용서와 평화의 싸움에서 말입니다.

이 정신을 그저 좋다거나 권할 만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지키라고 내리신 명령이며, 제가 그토록 자주 말씀드리는 mandatum novum21, 곧 새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우리가 모든 영혼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의 사정을 이해하며, 누군가 우리에게 용서가 필요한 일을 하였을 때 용서하도록 요구합니다.

우리의 애덕은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결함을 덮어 줄 만큼 커야 합니다. Veritatem facientes in caritate22, 사랑 안에서 진리를 실천하십시오. 오류에 빠진 사람은 사랑으로 대하되, 신앙에 속하는 것에서는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사랑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전하도록 우리를 당신의 사업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에서 제외될 수 있는 영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보편성을 이해하고 살아갈 때, 모든 피조물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절박한지 깨달을 때, 모든 이를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함을 압니다.23

그리하여 우리의 사도적 열망은 실제 삶이 됩니다. 손이 닿는 일, 날마다 하는 평범한 일에서 시작하여, 추수를 향한 열정이 동심원을 그리듯 점차 넓어집니다. 가정 안에서, 일터에서, 시민 사회에서, 학문과 문화의 강단에서, 의회에서, 사회적 처지가 어떠하든 모든 동료 시민 가운데에서 넓어집니다. 마침내 민족들 사이의 관계에까지 이르고, 매우 다양한 인종과 대륙과 문명을 사랑으로 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공상이나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 속에서 열정을 소모하지 말고, 바로 곁에 있는 일에서 하느님의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권고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서 사랑과 사도직을 향한 열망을 실천할 날이 올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 오푸스데이는 막 태어나고 있고, 여러분이 실제로 활동할 수 있는 범위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보편적이며, 우리의 활동도 실제로 온 세상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초자연적인 사업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

그러나 오늘도 언제나도 우리는 모든 이와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와의 사귐을 통하여 모든 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차별 없이 모든 이와 하나라고 느껴야 합니다. 사람들을 서로 단절된 칸에 나누어 넣거나, 상품이나 곤충 표본이라도 되는 듯 꼬리표를 붙여서는 안 됩니다. 다른 이들과 스스로를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삶은 비참하고 이기적인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출신지나 말하는 방식이나 생활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들도 다른 이들과 같은 시민입니다.”24 그리스도인인 우리, 자녀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alter Christus, 곧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사람이 되시고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으며, 이 땅에서 서른세 해를 사셨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 의인들과 죄인들, 젊은이들과 노인들, 유다인들과 이민족 사람들을 날마다 만나시며 사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리스도께 배우고 그분의 삶을 본받고 싶으십니까? 거룩한 복음서를 펴고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를 들어 봅시다.

루카 복음서 11장은 어느 날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셨다고 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어떠했겠습니까! 제자들은 가까이에 있었고, 아마도 그분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습니다. Domine, doce nos orare, sicut docuit et Ioannes discipulos suos25.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26

자녀 여러분, 이 놀라운 일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고, 그 대화의 열매로 주님께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또 하느님 자비의 위대한 놀라움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며, 자녀가 아버지에게 말하듯 하느님께 말씀드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과의 사귐, 그리고 사람들과의 사귐입니다. 복음서의 수많은 장면 가운데 몇 가지만 보아도, 우리의 우정과 신뢰의 사도직이 하느님 안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한층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만남입니다. 유다인들의 지도자였던 그 사람이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으로서 저희를 가르치신다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아무도 스승님께서 하시는 기적들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27

자녀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겉보기에는 니코데모의 말과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그의 관심을 끌고 마음을 사로잡아 대화를 이끌어 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28

여러분이 잘 아는 그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실패처럼 보이는 순간에, 니코데모는 용감하게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청하러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인에게도 똑같이 하시지 않습니까? Non enim coutuntur Iudaei Samaritanis29, 곧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서로 상종하지 않았는데도, 그분께서는 먼저 다가가 말씀을 건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아시고 그것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날마다 수고롭게 야곱의 우물까지 길으러 가야 하는 물, 그리고 그토록 놀라운 생명의 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Qui autem biberit ex aqua, quam ego dabo ei, non sitiet in aeternum30.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나눈 대화의 열매도 복음서에 나타납니다. 그 죄 많은 여인이 회개하고, 그의 영혼이 변화되어 사도적인 영혼이 됩니다. Venite et videte hominem, qui dixit mihi omnia quaecumque feci: numquid ipse est Christus?31 “와서 보십시오. 제가 한 일을 모두 저에게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다른 많은 사마리아인들도 처음에는 그 여인의 말 때문에 그분을 믿었고32, 나중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의 말 때문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33

또 다른 때에는 부유한 젊은이가,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자면 좋은 집안 출신의 젊은이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3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어째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어떤 계명들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젊은이가 말하였습니다. “그 모든 계명은 어려서부터 지켜 왔습니다. 아직 무엇이 부족합니까?”35

자녀 여러분,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그때야말로 타협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렇게 부유하고, dives erat valde36, 영향력까지 있는 그 젊은이를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에 받아들이려면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협하면 사도직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 듯 보이더라도, 가르침에서는 적당히 타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대답에는 사랑이 가득합니다. 젊은이가 슬퍼하며 떠났을 때 하느님의 마음에서 탄식이 흘러나올 만큼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진리의 엄중함을 감추는 모호함 없이 명료하고 단호합니다. “너에게는 아직 한 가지가 부족하다.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와서 나를 따라라.”37

한 가지 예를 더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신 모범입니다. 사람들과 사귀고 이야기하며 대화하도록 우리를 움직이는, 영혼들을 향한 열정은 죽을 때까지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듯합니다. 골고타 언덕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와 나누시는 감동적이고 가슴 뭉클한 대화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먼저 대화를 시작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형틀 위에 계시는 그분의 모습과 고통은 어떤 말보다 더 힘 있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당신 자신도 구하고 우리도 구해 보시오.”38 악한 강도가 그분을 모독하며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착한 강도가 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같은 형벌을 받으면서도 하느님이 두렵지 않으냐? 우리는 저지른 죄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니, 이렇게 형틀에 매달린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Domine, memento mei, 주님, 주님의 나라에 이르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39 자녀 여러분, 두 죄수의 대화에 응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짧은 대답은 회개한 이에게 구원이 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0†††††††††††††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범

이 몇 가지 예만으로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정신으로 영혼들을 위한 일을 해야 하는지 결코 잊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열망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또한 혈통이나 민족이나 언어나 의견 때문에 갈라지지 않고 살았던 초기 신자들처럼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모든 가톨릭 신자에게, 모든 사람에게 앞서 말씀드린 그 새 계명을 가르쳐야 합니다. 저는 바오로 성인이 코린토 신자들에게 외치시는 소리를 듣는 듯합니다. Divisus est Christus? Numquid Paulus crucifixus est pro vobis? aut in nomine Pauli baptizati estis?41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오로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오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케파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42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이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께 구속되었다는 사실이 사람들 사이의 일치를 이루는 가장 깊은 이유입니다. 다른 명칭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금이나 순은에는 별칭을 붙이지 않습니다. 은이 은이고 금이 금이면, 그저 은과 금이라고 부릅니다. 거기에 수식어를, 때로는 성씨까지 덧붙인다면 그것은 순수한 귀금속이 아니라 값싼 모조품입니다.††††††††††††††

오류에 빠진 이들과의 사귐. 그들의 이유를 알아보기

거듭 말씀드립니다. 애덕의 질서를 지키면서, 무지나 교만 때문에, 또는 다른 이들이 이해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오류에 가까이 가거나 이미 오류에 빠진 이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자녀 여러분,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언제나 악의 때문만은 아닙니다. 스스로 진리를 알아낼 수단이 없어서 잘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방금 듣거나 읽은 것을 생각 없이 되풀이하는 편이 더 편해서, 거짓말을 메아리처럼 되풀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이들도 너그러이 헤아려야 합니다.

그들에게 어떤 이유가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당사자의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판단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비밀의 그늘 속에서, 또 슬프게도 인간이 나약한 탓에 적지 않은 경우에는 익명 뒤에 숨어 중상하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증인과 고발자들의 말을 따라 그렇게 합니다.

자녀 여러분, 제가 드리는 이 권고가 오직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저 자신이 몸소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뒤로 교회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단죄하는 성직자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복음서가 세례자 요한의 설교에 관하여 전하는 장면들이 기억나십니까? 얼마나 많은 말이 오갔습니까! ‘그리스도일까? 엘리야일까? 예언자일까?’ 소문이 얼마나 커졌는지,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습니다.43

이때에도 초자연적인 시각이 부족하면, 요한이 사람들을 얻을 기회를 놓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는 나중에 예수님께서 자신에 관하여 하실 증언으로 대답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Ipse est Elias, qui venturus est. Qui habet aures audiendi audiat44. “그가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그러나 요한에게 물으러 온 이들은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실을 고백하고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45 그리고 그의 말은 참으로 광야에 떨어졌습니다. 진리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던 그들이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셨을 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수군거림과 놀라움, 두려움과 시기가 있었습니다. 복음서는 그분의 소문이 “온 유다와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46고 전합니다. 그 소문은 세례자를 따르던 이들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에게 이 모든 일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을 불러 예수님께 보내며 이렇게 여쭈라고 하였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47

세례자 요한의 태도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순수하고 고결하며 사심이 없습니까! 그는 참으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요한은 그들이 스승님과 대화하도록 이끕니다. 그분을 직접 뵙고 사귀게 합니다. 그분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고 감탄할 기회를 마련해 줍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습니다.”48

자녀 여러분, 요한이 그랬듯이 우리도 언제나 의견을 말하기 전에 사실을 알아보는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가 뒷말과 소문의 겉모습에 휩쓸리지 않고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정직하고 행실이 흠잡을 데 없다는 말은, 사실이라 해도 안타깝게도 화젯거리가 되지 못하고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반면 온갖 책략과 부정행위를 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말은, 사실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적어도 추측이나 소문의 형태로 퍼져 나갑니다.†††††††††††††††

우리 종교를 모르는 이들, 가톨릭 신앙을 떠난 이들과의 대화

이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듯 보이고 성급하게 판단하는 이들에게도 이해심을 지니십시오. 여러분의 사랑과 올곧은 모범은 그들에게 가장 좋은 자극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나쁜 성향과 우리 모두에게 있는 오류에 기우는 경향에 맞서 싸우고 이겨 내는 모습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영혼들이든, 선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편견은 바로 사귐이 부족한 데서,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솔직한 대화가 없는 데서 생겨납니다. 우리가 먼저 그런 대화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거부하더라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우리를 성화하기 때문입니다. 분별 있는 환자는 자신을 치료하기 위하여 의사가 사용한 수술 칼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사랑과 진실하고 고결한 사귐은 우리 종교를 모르는 이들과 가톨릭 신앙을 떠난 이들에게도 향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들을 우리 곁에 받아들일 것입니다. 가르침은 우리의 것이 아니므로 거기에서는 양보하지 않되, 사람들에게는 양보할 것입니다. 우리 활동의 한가운데에서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일하도록 그들을 초대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의 중심에 그들을 맞아들이고,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업을 이루는 그분의 손과 팔이 될 큰 기회를 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러한 태도가 그들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 신앙으로, 또는 잃어버린 신앙으로 가까이 이끄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신앙을 잃어버린 데에는 그들 자신의 탓이 그리 크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의 사랑은 더욱 커져야 합니다. 진실한 친구로서 대화하며 계속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들이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을 미리 헤아려 올바른 길에 더욱 굳건히 서도록 도와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 자신의 신앙을 학문적으로도 튼튼히 다져야 합니다. 교리에 대한 이해와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는 은사 없이 이런 문제들을 놓고 대화하려는 시도는 열매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롭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확실한 원칙에 바탕을 둔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깊이 있는 양성을 시급히 받아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준비되어 있다면 오류에 빠진 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 해 동안, 어쩌면 평생 빛을 모르고 지내다가 우리의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가리켜 “개종한 사람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면 저는 참으로 슬픕니다.

그들을 더 사랑하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의심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49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하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을 저버리지 않도록, 좋지 않은 것을 좋은 것이라며 내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갓 태어난 아이들과도 같으므로, 불안정함이나 지나치게 뜨거운 열의 때문에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올바른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에게도 적대하지 않기. 모든 이를 이해하기. 용서할 줄 알기

우리의 사랑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맞서는 이들과도 함께 지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을 알게 하는 선을 그들에게 베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사도직의 방법에 현혹되지는 마십시오. 영혼들을 얻겠다는 좋은 뜻에 사로잡혀 분별을 잃는 사람들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간다는 구실로, 경솔한 타협과 양보와 절충에 속아, 자신들이 맞서 싸우려던 오류의 모래 늪에 결국 빠지고 맙니다.

우리는 모든 이에게 선을 베풀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어쩌면 그분을 미워하는 이들에게도 그렇습니다. 더구나 후자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척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다정하게 대하고, 신앙을 찾도록 도우며, 거듭 말씀드리지만 풍성한 선으로 악을 잠기게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누구도 원수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악의로 교회에 맞선다면, 올곧고 굳건하면서도 다정한 우리의 인간적 처신만이, 그들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진리를 발견하거나 적어도 존중하도록 이끄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공격이 무지에서 비롯된다면, 모범으로 뒷받침된 우리의 가르침이 그들의 눈을 덮은 너울을 벗겨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교회의 거룩한 권리를 수호하겠지만, 상처를 주거나 모욕하지 않고, 의심이나 원한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힘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맞섭니까? 아무에게도 맞서지 않습니다. 악마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악마가 아닌 모든 이는, 아무리 악하거나 악해 보일지라도 저는 사랑합니다. 저는 누구에게도 적대감을 품지 않으며, 지금까지도 그러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이나 도덕에 어긋나는 사상은 거부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사상을 따르는 모든 이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맞아들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한 오류는 잘못된 양성의 결과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딱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진리를 가르쳐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경우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심판 날에 많은 영혼이 하느님께, 못가의 병자가 대답한 것처럼 “Hominem non habeo50, 저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합니다. 또는 일거리를 얻지 못한 일꾼들이 포도밭 주인의 질문에 대답한 것처럼 “Nemo nos conduxit51, 아무도 우리를 불러 일하게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의 오류에 책임이 있고, 의식적으로 악에 머물렀다 하더라도, 그 불행한 영혼들의 깊은 곳에는 하느님만이 헤아리실 수 있는 깊은 무지가 있습니다. 당신을 죽이는 이들을 감싸 주시며 십자가에서 외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Pater, dimitte illis: non enim sciunt quid faciunt52.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아무도 배척하지 맙시다.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지옥의 문 앞까지라도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너머로는 가지 않습니다. 그 너머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정신

이것이 우리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든 사상과 모든 사회적 처지의 사람들에게 우리 집의 문을 열어 이 정신을 언제나 드러낼 것입니다. 모든 이를 맞아들일 준비가 된 마음과 두 팔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판단하는 사명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형제답게 대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의 우정에서 제외되는 영혼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든 하느님의 사업을 찾아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모두 사랑받고 이해받으며 따뜻하게 대접받는다고 느껴야 합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외진 곳에서 악을 행하는 맨 마지막의 딱한 사람까지도 저는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영혼을 구할 수 있다면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여러분은 맑은 정신과 지금 받는 양성을 바탕으로, 각각의 경우에 무엇이 본질인지, 무엇에서 양보해서는 안 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이들이 변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 가운데 실제로는 특정 시대나 관습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들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분별은 기꺼이 양보하도록 여러분을 도와줄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들의 선익이 걸려 있다면, 한층 더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일들에서도 양보할 것입니다. 사실 거의 모든 일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거듭 강조합니다. 그릇된 연민에 속지 마십시오. 진리를 전하려는 열망으로 움직이는 듯 보이는 많은 사람이 손대서는 안 되는 것에서 양보합니다. 그러면서 어머니이신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부정적이고, 때로는 가혹하고 무자비한 비판에 지나지 않는 것을, 오류에 빠진 이들에 대한 이해라고 부릅니다.

그들 역시 이해하려는 마음을 잃지 마십시오. 그러나 동시에 차분하고 절도 있게, 굳건하게 진리를 수호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여러분을 두고 호교론을 편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더라도 그러하십시오.

여러분의 이러한 태도에서 태어날 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열매는 놀라울 것입니다. 우리가 충실하다면, 하느님의 사업은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위대한 도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충실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실하시며, 우리를 굳세게 하시고 악한 영에게서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53

저는 세기를 넘어 이어지는 오푸스데이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언제나 젊고, 생기 있고, 아름다우며, 풍성한 열매를 맺는 모습입니다.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도록 그 평화를 수호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사회 안에서 인간과 가정과 교회의 권리가 인정되도록 이바지할 것입니다. 우리의 활동은 형제들 사이의 증오와 민족들 사이의 의심을 줄일 것입니다. 제 딸들과 아들들은 fortes in fide54, 믿음 안에서 굳건히 서서, 지극히 부드러운 향유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든 상처에 발라 줄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살아 숨 쉬지만 세상에서는 그토록 잊힌 듯한 이 정신을, 주님께서 우리의 초자연적인 사업에 바라셨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성모 마리아께 감사드리십시오. 그리고 구속 사업에 협력하고 사도직을 수행하려는 열망을 새롭게 하십시오. 얼마나 큰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서 이 사업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것을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55

주님께서 제 자녀들을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마드리드, 1933년 7월 16일

목차
1

요한 15,15.

2

예레 29,11 참조.

3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노 성인, “인내의 유익”(De bono patientiae), 15(CSEL 8, 407–408쪽).

†

† 성경 참조: 요한 15,15; 예레 29,11

성경 인용
목차
4

루카 19,5.

5

1티모 2,4.

††

† 성경 참조: 1티모 2,4; 루카 19,5

성경 인용
목차
6

2코린 5,14 참조.

7

1코린 16,24.

8

갈라 4,31.

9

1역대 2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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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참조: 2코린 5,14; 갈라 4,31; 1코린 16,24; 1역대 29,17

성경 인용
목차
10

루카 8,5.

11

사도 1,1 참조.

12

갈라 6,15. “in Christo … nova creatura”: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스페인어판 편집자 번역)

††††

† 성경 참조: 루카 8,5; 사도 1,1; 갈라 6,15

성경 인용
목차
13

루카 9,54 참조.

14

루카 9,56(Vg).

†††††

† 성경 참조: 루카 9,54; 루카 9,56

성경 인용
목차
15

시편 11[10],6(Nv).

††††††

† 성경 참조: 시편 11,6

성경 인용
목차
16

1베드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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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참조: 1베드 5,9

성경 인용
목차
17

히브 5,2.

18

루카 15,2 참조.

††††††††

† 성경 참조: 루카 15,2; 히브 5,2

성경 인용
목차
*

* 풀헨시오 아판 데 리베라(Fulgencio Afán de Ribera), La virtud al uso y mística á la moda, destierro de la hipocresía en frase de eshortacion á ella, embolismo moral(1729), Madrid, Ibarra, 1820, 56–57쪽.(스페인어판 편집자 주)

목차
19

1코린 9,19–22.

20

로마 10,13–14.

†††††††††

† 성경 참조: 로마 10,13–14; 1코린 9,19–22

성경 인용
목차
21

요한 13,34.

22

에페 4,15 참조.

††††††††††

† 성경 참조: 에페 4,15; 요한 13,34

성경 인용
목차
23

1코린 9,22.

†††††††††††

† 성경 참조: 1코린 9,22

성경 인용
목차
24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Ad Diognetum), 5, 1.5(SC 33, 63쪽).

목차
25

루카 11,1.

26

루카 11,2.

††††††††††††

† 성경 참조: 루카 11,1; 루카 11,2

성경 인용
목차
27

요한 3,2.

28

요한 3,3.

29

요한 4,9.

30

요한 4,13.

31

요한 4,29.

32

요한 4,39.

33

요한 4,42.

34

루카 18,18.

35

마태 19,17–20.

36

루카 18,23.

37

루카 18,22.

38

루카 23,39.

39

루카 23,40–42.

40

루카 23,43.

†††††††††††††

† 성경 참조: 루카 18,22; 루카 18,23; 마태 19,17–20; 루카 18,18; 루카 23,39; 루카 23,40–42; 루카 23,43; 요한 3,2; 요한 3,3; 요한 4,9; 요한 4,13; 요한 4,29; 요한 4,39; 요한 4,42

성경 인용
목차
41

1코린 1,13.

42

1코린 1,12.

††††††††††††††

† 성경 참조: 1코린 1,12; 1코린 1,13

성경 인용
목차
43

요한 1,19.

44

마태 11,14–15.

45

요한 1,20.23.

46

루카 7,17.

47

루카 7,18–19.

48

루카 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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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참조: 마태 11,14–15; 루카 7,17; 루카 7,18–19; 루카 7,22; 요한 1,19; 요한 1,20; 요한 1,23

성경 인용
목차
49

루카 15,7.

성경 인용
목차
50

요한 5,7.

51

마태 20,7.

52

루카 23,34.

†††††††††††††††††

† 성경 참조: 요한 5,7; 마태 20,7; 루카 23,34

성경 인용
목차
53

2테살 3,3.

54

1베드 5,9.

55

필리 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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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참조: 1베드 5,9; 필리 1,6; 2테살 3,3

성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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