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제1호
하루하루는, 지극히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주님께서 자비로이 우리에게 맡기신 신성한 사명을 다하려는 우리의 열망을 증언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은 자비의 마음이어서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시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영혼들을 섬기기 위한 우리의 헌신은 우리에게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그 자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일상의 평범한 삶에서 거룩해지도록 부르셨고, 다른 이들에게도 providentes, non coacte, sed spontanee secundum Deum —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억지로 하지 말고 신중하게1 각자가 세상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신분 안에서 거룩해지는 길을 가르치도록 부르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전합니다.2 자녀 여러분, 주님께서는 군중, 곧 모든 사람에게 눈과 마음을 두고 계십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지닌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완덕은 모든 이를 위한 것
우리는 언제나 모든 사람을 향해 마음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고, 도와주고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이에게 관심을 둡니다. 모든 이에게는 구원받아야 할 영혼이 있고,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든 이를 초대하여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완덕을 찾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estote ergo vos perfecti, sicut et Pater vester caelestis perfectus est —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3고 되풀이해 주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는 순교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랐지만 그들만이 아니었다고 썼습니다. 이어서 그는 생생하지만 다소 바로크적인 표현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의 정원에는 순교자들의 장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정녀들의 백합도 있고, 혼인한 이들의 담쟁이도 있으며, 과부들의 제비꽃도 있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이들이여, 아무도 자신의 부르심을 두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4
주님께서는 오푸스데이에 영감을 주시면서 이 진리를 얼마나 힘차게 울려 퍼지게 하셨는지요!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며 보잘것없음을 아는 이의 겸손으로, 베드로와 함께 homo peccator sum —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5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의 손길에 이끌리는 이의 믿음으로, 성덕은 특권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선포하러 왔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부르시고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바라십니다. 어디에 있든 누구나, 신분과 직업과 일이 무엇이든 누구나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도 성덕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영혼에게 수도 성소를 주시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찾기 위하여 세상에서 자신의 신분을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땅의 모든 길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길에는 현세의 문제, 곧 직업·학문·정치·경제 등의 분야를 바라보는 매우 다양한 방식이 공존합니다. 각 사람에게는 개인의 자유가 있고, 그에 따르는 책임도 개인적으로 져야 합니다. 그 책임을 하느님의 교회나 오푸스데이에 돌릴 수는 없으며, 각자는 용기와 논리에 따라 스스로 감당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다양성은 오푸스데이에 문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좋은 정신과 건전한 공동체 생활, 그리고 각자의 정당한 자유에 대한 존중을 드러냅니다. ubi autem Spiritus Domini, ibi libertas —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기6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 앞에서 이 모든 것을 묵상할 때, 마음이 감사로 가득 차는 동시에 사도적 열정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잊지 마십시오. 교리를 전하는 것이 우리의 큰 사명입니다.
오푸스데이의 위대한 사도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그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께 곧바로 이르는 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의 자비를 선포하는 이 신적 과업에 부름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misericordias Domini in aeternum cantabo — 저는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7.†††
모든 이에게 이 부르심을 알리기
나는 첫날부터 여러분에게 말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범하거나 유별난 일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이 복된 신적 부르심을 온 세상에 전하고, 많은 이를 초대하여 그 길을 따르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직*를 단순하게, 곧 우리 삶의 모범으로 해야 합니다. 많은 이가, 어쩌면 모든 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하느님께 이르는 길로 바꿀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평범하고 일상적인 자신의 삶을 거룩한 삶으로 만들 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태도에는 자연스러움이 배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의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츠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였다.”8 우리가 지녀야 할 이 수정처럼 맑은 단순함은 결코 단순한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비주의적인 태도나 비밀이 필요하지 않고, 앞으로도 결코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집회서의 말씀도 마음에 새기십시오. non communices homini indocto, ne male de progenie tua loquatur — 무지한 사람에게 너의 사적인 일을 말하지 마라. 그가 네 가문을 헐뜯지 않도록 하여라9.††††
우리가 받은 초자연적 사명은 다른 이들과 구별되어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와 하나 되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조국의 다른 시민들과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단지 다른 이들과 비슷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과 동등합니다. 시민으로서의 관심사, 고유한 직업이나 일, 다른 여러 활동, 생활 환경, 겉으로 드러나는 옷차림과 행동을 그들과 함께 나눕니다. 우리는 평범한 남녀이며, 같은 환경과 처지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료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비유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우리의 사명을 반죽 속에서10 작용하여 마침내 좋은 빵으로 만드는 누룩에 여러 번 비유했습니다. 어릴 적 여름이면 빵 만드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때에는 초자연적인 교훈을 끌어내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인들이 그 반죽으로 수탉 모양의 작은 빵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흥미로웠던 것입니다. 이제 나는 그 모든 과정을 기쁘게 떠올립니다. 앞서 구운 빵에서 남겨 둔 발효 반죽 덩어리인 누룩을 잘 준비하여 물과 체로 친 밀가루에 섞는 일은 참으로 하나의 의식과 같았습니다. 반죽을 다 하고 나면 담요를 덮어 따뜻하게 해 두었고, 더는 부풀 수 없을 만큼 부풀 때까지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런 다음 반죽을 나누어 화덕에 넣으면 구멍이 송송 뚫린 놀라운 빵이 나왔습니다. 누룩이 잘 보존되고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많은 반죽 속에서 스스로 풀어져 사라짐으로써 반죽 전체에 좋은 성질과 가치를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 곧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웁시다. 우리의 삶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최전선에서 싸우고, 눈에 띄지 않은 채 사회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며, 모든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삶입니다. 그 마음들을 좋은 빵으로 바꾸는 위대한 일을 하여, 모든 가정과 모든 민족에게 평화, 곧 기쁨과 평화가 되게 하는 삶입니다. iustitia, et pax, et gaudium in Spiritu Sancto —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11입니다.
그러나 누룩이 되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룩은 반죽 속에 들어가 반죽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합니다.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거듭 말하기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이들과 어떤 점에서도 유별나 보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있던 자리에 머물며 지금의 우리, 곧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적이고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야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
여러분의 삶을 바라보면 그리스도교 초기에 기록된 다음 말씀이 새롭게 현실이 되는 듯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는 지역이나 언어나 관습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도시에 따로 살지도 않고, 별난 말을 쓰지도 않으며, 남들과 동떨어진 생활 방식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실천하는 가르침은 그들 자신이 고안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각자에게 주어진 몫에 따라 그리스인이나 이민족의 도시에 살면서, 옷차림과 음식과 그 밖의 생활 방식에서는 그 지방의 관습을 따릅니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인정하듯 놀랍고도 경탄할 만한 고유한 생활 태도를 보여 줍니다.”12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모범을 마음에 새깁시다. 예수님께서 헤로데 임금 시대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물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이 당황하였고 온 예루살렘도 그와 함께 당황하였습니다.13
그들은 두려워하고 놀랐습니다. 구세주께서 이미 그들 가운데 계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눈에 띄지 않게 지내는 임금, 하느님이시면서 눈에 띄지 않게 지내는 임금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우리가 같은 사회적 처지와 직업에 있는 이들과 어울려, 그저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처럼 알려지지 않은 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을 못해서 알려지지 않거나, 재능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해 알려지지 않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느님께 온전히 헌신한 영혼임을 굳이 사람들이 알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이의 정당한 자유를 존중하는 여러분의 태도를 보면서 사람들이 더 깨끗하고 고결하게 살도록 도움을 받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일관된 모범으로 뒷받침되는 교리를 여러분의 입에서 듣게 하십시오. 그러나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여러분의 헌신은 예수님의 첫 서른 해가 그러했듯 감추어져 눈에 띄지 않게 하십시오.††††††
어떤 비밀도 없는 단순함
내가 말했듯이, 여러분은 주님께 드리는 사랑 가득한 헌신을 단순하고 신중하게 살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의 공격적인 호기심을 경계하고, 여러분의 사도적 삶에서 내밀한 부분에 속하는 모든 일을 극도로 섬세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살기를 바라시는 정신을 잘 알고 있으므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한 가지 당부하고 싶습니다. 신중함은 신비주의적인 태도나 비밀주의가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움입니다. 나는 거듭 말합니다. 오푸스데이에는 어떠한 비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비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비밀주의를 몹시 싫어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와서 “비밀리에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무릎을 꿇으십시오. 나는 고해성사의 비밀 외에는 어떤 비밀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원한다면 친구이자 신사인 사람에게 신뢰를 두고 이야기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무릎을 꿇고 고해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자연스러움입니다. 우리가 세상 한가운데에서 하느님께 헌신한 평범한 그리스도인, 곧 세상 안에 살고 세상에 속하면서도 세속적이지 않은 영혼이라면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이상한 행동은 우리에게도 이상한 행동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듯이 나는 우리의 헌신을 드러내는 특별한 외적 표지를 금지해 왔습니다. 우리가 제복이나 표지를 달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나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목에 스카풀라나 메달을 여러 개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존중합니다. 나도 스카풀라와 메달을 매우 신심 깊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올바른 교리를 갖추고, 사람들이 신앙을 깊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보이려고 여러 표지를 몸에 달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분투하는 이들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르게 행동하려는 노력, 하느님의 일을 이야기할 때 드러나는 기쁨, 사랑을 살아갈 때 품는 열정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부르심의 본질을 잊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게 되고, 사람들 속에서 떨어져 나와 누룩이기를 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구별해야 할 단 한 가지는 우리가 남들과 구별되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눈길을 끌거나 유별난 행동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유별나지 않다는 이유로 우리를 별나다고 여깁니다.
평범한 삶을 거룩하게 하기
여러분과 나의 삶은 이처럼 지극히 평범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같은 일들을 잘하려고 애씁니다. 매 순간의 작은 의무를 이행하면서 세상 안에서 우리의 신성한 사명을 수행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의무를 이행하려고 힘씁니다. 때로는 성공하지 못하여 밤에 양심 성찰을 하면서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늘 저는 주님께 덕행을 바쳐 드리지 못하고 결점들만 바쳐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총으로 언젠가는 저 자신을 승리자라고 부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초자연적 삶, 곧 우리의 신화(神化)는 우리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으로 이끌어서는 안 됩니다. 때로 우리에게 있는 것은 불완전함뿐일 수 있고,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과 의지의 노력으로 그것에 맞서 싸웁니다. 그 싸움, 곧 평범한 삶을 거룩하게 만드는 초자연적 과업에서 인내하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부르심으로 요구하시는 바입니다.
우리의 길은 순교자의 길이 아닙니다. 순교가 닥치면 보물처럼 받아들이겠지만, 우리의 길은 신앙 고백자의 길, 곧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고 드러내는 길입니다. 오푸스데이의 회원들**은 자기 주변 사람들과 직업 동료들이 사는 것과 똑같은 평범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일상의 일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질서 잡힌 사랑, 사랑으로 맡은 일을 완전하게 해내려는 열망과 실천, 모든 이와 더불어 살아가며 opportune et importune —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도움과 인간적인 매력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더 나아가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완덕으로 이끌려는 마음, 세상 사물에 대한 이탈, 사랑하고 실천하는 개인적 가난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일이 지닌 성화의 중요성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이를 섬기기 위하여 모든 이를 이해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관상 생활과 활동 생활을 마침내 우리 본성처럼 하나로 결합해야 합니다. 오푸스데이의 정신이 이를 요구하며, 이 신적 부르심 안에서 하느님을 너그럽게 섬기는 이들에게 그분의 은총이 이를 가능하게 해 줍니다.
여러분은 사도직의 지평을 열어 주는 알맞은 말로, 문제를 그리스도인답게 바라보도록 돕는 신중한 조언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법을 가르치는 다정한 대화로 영혼들을 하느님께 가까이 이끌어야 합니다. 나는 이러한 사도직을 때때로 우정과 신뢰의 사도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온전한 삶의 모범으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자신과 같은 이들 가운데서 평범하지만 일관된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겠다는 겸손하면서도 담대한 확신으로, 행동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십시오. 하느님의 도움과 함께 바로 이것이 우리 사도직이 열매를 맺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으며, 하느님과 일치하여 우리의 정신을 살아간다면 아무것도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때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이 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는 하느님의 전능에 의지하여 충실할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나는 내 자녀들이 자기 주변의 분위기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굳센 정신을 갖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오푸스데이에 있는 하느님의 자녀는 활활 타는 숯불과 같아야 합니다. 어디에 있든 불을 붙이거나, 적어도 주변 사람들의 영적 온도를 높여 그들이 열렬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평범한 일 안에서의 완덕
반대로 유별나고 비범한 일을 하고 싶은 유혹이 찾아온다면 그것을 물리치십시오. 우리에게 그런 행동 방식은 잘못이며 길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을 웃게 할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호텔에 가서 대구 요리를 주문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잠시 뒤 종업원이 접시를 가져왔는데, 놀랍게도 대구가 아니라 뱀이 놓여 있습니다. 내가 존경하는 위대한 기적의 성인이라면, 기적으로 가득한 자신의 삶답게 축복을 내려 그 파충류를 맛있게 요리된 대구로 바꾸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런 태도를 온전히 존중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의 방식은 종업원을 불러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이건 형편없군요. 가져가고 내가 주문한 것을 주세요.” 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이유가 있다면, 극기의 행위로 뱀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먹고 하느님께 봉헌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세 번째 태도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종업원을 불러 따귀를 두 대 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우리의 해결책이 아닙니다. 사랑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녀 여러분, 우리에게 비범한 것은 평범한 것, 곧 완전하게 수행된 평범한 일입니다. 늘 미소 짓고, 우리를 괴롭히거나 성가시게 하는 일을 인간적인 품위를 지니고 넘겨버리며, 한없이 너그러워지십시오. 한마디로 우리의 평범한 삶을 끊임없는 기도로 만드십시오.
다른 이들에게는 다른 정신, 이른바 위대한 기적가의 정신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좋게 여기고 존경하지만, 결코 흉내 내지는 않겠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일상 섭리의 정신입니다. 자연을 다스리는 법칙들이 날마다 어김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때때로 예외가 생기는 것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기적적인 현상만을 좇지 마십시오. 오푸스데이의 기적은 날마다 이어지는 소박한 산문을 11음절의 영웅시로 바꾸어 낼 줄 아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길은 아주 분명합니다. 작은 일들입니다. 강인하고 굳센 어른인 우리의 삶을 작은 아이의 모습에 견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 번 보았겠지만, 아이는 들판을 산책하다 작은 꽃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를 꺾습니다. 어른들 눈에는 띄지 않는 작고 소박한 꽃들이지만, 아이는 아이이기에 그것을 발견하고 한데 모아 작은 꽃다발을 만듭니다. 그리고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어머니에게 그것을 드립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입니다. 겉보기에는 늘 똑같은 평범한 삶을 이런 눈으로 바라본다면, 우리 하루의 시간들이 생기를 띠고 저마다 다르며 하나같이 아름다운 놀라움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빛에 눈을 감지만 않으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수많은 작은 일을 통하여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평범한 삶 안에서 우리는 직업과 일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더불어 이 땅의 길을 걸어갑니다. “양은 저마다 제 짝과 함께 간다.”라는 카스티야 속담처럼, 우리의 삶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그 안에서 사랑과 용기, 정의와 진실성, 절제와 가난, 겸손과 순명을 비롯한 모든 덕을 익힐 기회를 주십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광장 같은 어려운 자리에서 덕을 실천하기를 꿈꾸던 이들에게, 그 모든 것을 바로 자기 집에서 친구와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실천할 수 있다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쉬운 일부터 시작합시다. 예컨대 맹세하지 않는 일부터 시작합시다. 이 영적 지혜를 우리 집에서 실천합시다. 참으로 우리를 방해하는 이들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종은 여러분을 화나게 하고, 아내는 언짢은 순간에 여러분의 인내심을 잃게 하며, 아이는 장난과 반항으로 여러분이 위협과 욕설을 터뜨리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집에서 이런 일들에 끊임없이 자극을 받으면서도 맹세에 끌려가지 않는다면, 광장에서도 쉽게 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14
또 하나 단순하고 분명한 일화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오푸스데이를 원하시기 몇 해 전, 나는 옷가지를 여기저기 어지럽게 내던져 두곤 하는 나이 든 사람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그것을 지적하면 그는 “옷은 나를 위한 것이지, 내가 옷을 위한 것은 아니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나중에 하느님께서 나를 오푸스데이로 부르신 뒤 그 일을 떠올리면서, 옷과 내가 사용하는 물건들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들은 하느님을 위하여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나는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오래 쓰면서 가난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일 안에서의 극기. 참된 보속 정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성인이 되도록 오푸스데이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극기 없는 성덕은 없습니다. 우리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에서 극기의 기회를 가장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힘차고 꾸준하며 질서 있게 일하는 데서, 시작한 일을 완전하게 마칠 때까지 끈기 있게 계속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희생정신임을 아는 데서, 시간을 지켜 하루를 영웅적인 순간들로 채우는 데서, 우리가 지니고 사용하는 물건을 아끼는 데서, 봉사의 열망으로 아주 작은 의무까지 정확히 이행하는 데서, 세상 안에서 모든 이가 성덕의 길을 사랑스럽게 걸어가도록 사랑의 세심한 배려를 실천하는 데서 극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미소 한 번이 우리의 보속 정신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녀 여러분, 며칠 동안 큰 희생을 하고 다음 날에는 극기를 그치는 것은 보속 정신이 아닙니다. 날마다 자신을 이기고, 남에게 보이지 않게 수많은 작은 일을 주님께 봉헌할 줄 아는 이가 보속 정신을 지닌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바로 이렇게 희생을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혹은 큰 전투라기보다 오히려 포도밭을 망치는 작은 여우들15임을 알고 있습니다. 작은 것을 무시하는 자는 조금씩 망하기16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썩어 없어질 이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게17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또한 우리의 초자연적 행동 방식이 작은 세부 사항 안에 싸움의 자리를 마련하게 해야 한다고 여러분에게 가르쳤습니다. 일의 질서, 생활 계획의 시간 엄수, 매 순간 마주치는 신분과 직업의 의무에 대한 충실성 안에서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린아이 같은 우리의 싸움 속에서 원수는 지치고 힘을 잃을 것입니다.†††††††
세상 한가운데의 관상가들
우리의 싸움이 작은 일 안에 있다면, 바로 그 작은 일들을 하느님과 대화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에 한 끼를 푸짐하게 먹는 것만으로 충분한 강한 어른처럼, 오랫동안 기도하는 한 번의 시간으로 내적 긴장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기 위하여 작은 음식을 자주 먹어야 하는 어린이와 같습니다. 늘 새로운 양식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하느님과 특별히 만나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심장 박동처럼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화살기도, 사랑의 행위, 감사, 보속의 행위, 영적 영성체가 이어져야 합니다. 길을 걸을 때, 문을 닫거나 열 때, 멀리 교회의 종탑이 보일 때, 일을 시작하고 수행하고 마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향하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길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관상적인 영혼이므로, 평범한 삶 전체를 끊임없는 기도로 만들어야 합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나는 평범한 삶을 거룩하게 하여 그것을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성덕을 위한 수단이자 기회로 만드는 우리 방식의 몇 가지 특징을 여러분에게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작은 일들의 중요성을 소중히 여긴다는 이 조건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목표에 이를 것입니다.
프랑스 작가가 만들어 낸 어떤 인물***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그는 자기 집 복도에서 사자를 사냥하려 했지만, 당연히 사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평범하고 일상적입니다. 큰일로 주님을 섬기려는 것은 복도에서 사자를 사냥하러 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이야기 속 사냥꾼처럼 우리도 빈손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큰일은 대개 상상 속에서만 나타날 뿐,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우리를 움직인다면, 삶을 살아가는 동안 세심하게 돌볼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고, 작은 봉사를 할 기회가 얼마나 많으며, 대수롭지 않은 어려움에 얼마나 큰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수고가 들지만 분명한 지향, 곧 교회와 교황, 여러분의 형제자매와 모든 영혼을 위하여 봉헌하는 작은 일들입니다.
자녀 여러분, 다시 한번 말합니다. 우리가 작은 일을 업신여긴다면 길을 잘못 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큰 것은 작은 일들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작은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세부 사항을 돌보십시오. 이것은 강박이나 집착이 아닙니다. 애정이며 정결한 사랑이고, 매 순간 지니는 초자연적 감각이며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올바른 지향을 품고, 이 땅에서 미소나 감사의 눈길을 기대하지 말고 언제나 작은 일에 충실하십시오.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간다면 삶으로 풍성한 사도직을 수행하고, 길 끝에서 예수님의 다음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quia super pauca fuisti fidelis, super multa te constituam: intra in gaudium domini tui —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18.
우리의 삶은 단순하고 평범하지만, 우리의 정신이 요구하는 대로 산다면 동시에 영웅적인 삶이 됩니다. 성덕은 결코 평범한 수준에 머무르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나아가는 길을 더 쉽고 덜 영웅적인 것으로 만들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어떤 신분과 처지에서도, 이 땅의 고귀한 일들 한가운데에서도 모든 이가 성인이 될 수 있으며 성덕은 다가갈 수 있는 것임을 모든 사람에게 일깨우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동시에 목표가 매우 높다는 것도 선포해야 합니다. estote perfecti, sicut Pater vester caelestis perfectus est —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19. 우리의 삶은 평범한 일상 안에서 인내하는 영웅적 삶입니다.
늘 되풀이되는 삶은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같은 일을 하는 것이 밋밋하고 단조로우며 매력 없이 보인다면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새로운 하루마다 다른 빛깔과 울림과 조화를 지닙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우리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지치지 맙시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모든 피조물을 섬기도록 이 가련한 삶의 매 순간을 써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삶에서 사랑할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고, 스쳐 가는 바람처럼 짧기 때문입니다.20
어떤 이는 평범한 삶 안에서 하느님께 드릴 것이 거의 없고,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작은 아이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습니다. 머리가 떨어진 장난감 병정, 실이 없는 실패, 작은 돌멩이 몇 개, 단추 두 개처럼 자기 주머니 속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모든 보물을 드립니다. 아버지는 선물의 유치함을 따지지 않습니다. 고마워하며 한없는 애정으로 아이를 가슴에 꼭 안아 줍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그렇게 합시다. 그런 어린아이 같은 일, 그런 작은 일은 사랑이 크기에 큰일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길입니다. 사랑으로 날마다 매 순간의 작은 일들을 영웅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개인적 겸손과 공동체적 겸손
겸손해집시다.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찾읍시다. 조용하고 감추어진 우리의 헌신 생활은 끊임없이 겸손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우리 삶의 토대이며, 사도직이 열매를 맺게 하는 수단이자 조건입니다. 교만과 허영은 축제 때의 등불처럼 빛나고 흔들리며 모든 이의 눈에 띄는 부르심을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등불은 사실 하룻밤만 타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꺼져 버립니다.
그보다는 경당의 어스름 속에서 감실 곁을 지키는 등불처럼, 하느님의 눈앞에서 힘 있게 한쪽 구석에서 자신을 태우기를 바라십시오.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여러분의 모범과 교리와 일, 평온함과 기쁨으로 사람들, 곧 친구와 동료와 친척과 여러분의 형제자매들을 동반하십시오.
vita vestra est abscondita cum Christo in Deo —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21. 사람들을 의식하지 말고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오푸스데이의 열망이었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러할 것입니다. 인간적인 영광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오푸스데이에 이름조차 없어서 그 역사를 오직 하느님만 아시기를 바랐다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비밀주의를 몹시 싫어하고 어느 나라에서나 언제나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일하고자 하므로, 이름을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자녀 여러분, 이것은 여러분 각자의 열망이기도 해야 합니다.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가며, 서른 해 동안 숨어 지내면서 그저 목수의 아들로 알려지셨던 그리스도22를 본받으십시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면서도 기꺼이 자신을 그분의 종이라고 부르신 마리아를 본받으십시오. ecce ancilla Domini —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23.†††††††††
주님께서는 우리가 겸손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렇다고 직업과 평범한 일에서, 그리고 물론 영적 생활에서 마땅히 도달해야 할 곳에 이르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반드시 그곳에 이르러야 하지만 자신을 찾지 말고 올바른 지향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이나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예와 영광과 섬김을 위하여 삽니다. 오직 이것만이 우리를 움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과, 성덕에 이르려는 여러분의 싸움과, 심지어 여러분의 인간적 재능까지 활용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늘 기억하십시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24 모든 영광과 모든 영예를 그분께 드리십시오. soli Deo honor et gloria in saecula saeculorum — 영원무궁토록 오직 하느님께 영예와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25.
사도의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십시오.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믿음을 갖도록 이끈 일꾼일 따름이며, 각자 주님께서 정해 주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26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보여 주는 표지임을 잊지 마십시오. 성 요한이 제자들의 한 무리를 소개하면서 전하는 복음 구절을 나는 무척 사랑합니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27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눈에 띄지 않았던 그 두 제자에게 나는 큰 호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평생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나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사도가 되면서 자신을 감추고 사라지는 삶입니다. 때로 힘이 들더라도 사라지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illum oportet crescere, me autem minui —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28.††††††††††
부르심과 함께 받은 신성한 사명에 대한 자각
자녀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신성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첫날부터 여러분에게 이 지고한 특별한 사랑의 표지, 모든 사람을 섬기라는 이 신적 부르심에 감사하라고 권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도적 열정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고, 우리 자신을 잊으며 기쁜 희생으로 온 인류를 돌보기를 바라십니다. 개인적인 문제로 괴로워하는 이들 대부분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에 그러합니다. 자신을 내어 주고, 또 내어 주고, 거듭 내어 주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고 그들을 섬기십시오. 이것이 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빛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봉사는 기쁘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푸스데이에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있는 곳마다 내적 평화에서 비롯되는 좋은 유머가 사라지지 않게 하십시오. 내적 평화와 헌신에서 나오는 유머입니다. 다른 이를 섬기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은 매우 큰 힘을 지녀서, 하느님께서는 영적 기쁨으로 가득한 겸손으로 보상해 주십니다.
그토록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의 빛과 따뜻함으로 이끄는 것보다 더 큰 만족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아무도 평범한 삶의 가치를 가르쳐 주지 않아 일상을 헛되고 무의미하게 여기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우리까지도 마음에 두셨다는 위대한 진리를 이해하고 경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이에게 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첫 열두 제자를 찾으셨듯이, 사마리아 여인과 자캐오를 찾으셨듯이 여러분도 찾으십니다.” 중풍 병자에게 하신 것처럼 surge et ambula — “일어나 걸어라”29 하시며 주님께서 기다리신다고 말하십시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에게 하신 것처럼 tibi dico, surge! —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30 하시며 안일함과 나태함과 죽음에서 일어나라고 말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어떤 이들에게는 또 다른 부르심을 주십니다. 나는 그 부르심을 사랑하고 공경하지만, 그것은 나와 여러분의 부르심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세상에서 떠나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있던 곳, 자신의 자리와 환경과 직업에 그대로 머물러, 평범한 사람인 동시에 세상의 빛과 땅의 소금31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자녀 여러분, 믿음을 지니십시오. 성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쓴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modicum fermentum totam massam corrumpit —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립니다32. 하느님을 사랑하며 일치하고, 예수님과 신뢰 가득한 관계를 맺고,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 자녀다운 신심을 바치십시오. 여러분이 충실하다면, 주님께서는 조용하고 겸손한 여러분의 헌신을 열매 맺게 하시어 여러분의 손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성 루카가 전한 장면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33
자녀 여러분, date, et dabitur vobis: mensuram bonam, et confertam, et coagitatam, et supereffluentem dabunt in sinum vestrum —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34. 많이 내어 주면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이해하십시오. 그러면 마침내 우리도 이해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이를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마침내 우리도 모든 이에게 사랑받게 될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영혼을, 나 자신까지도 움직인 주님의 외침을 언제나 마음으로 들으십시오. ignem veni mittere in terram, et quid volo nisi ut accendatur? —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35 여러분과 내가 그 신적 불에 타오르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정화되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맞서 싸우고 그리스도인의 완덕, 곧 올바른 신화(神化)를 얻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인 그 사랑과 자신을 아는 겸손을 지닐 때에만, 우리는 주님께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다고 말씀드릴 자격을 얻게 됩니다. non verbo neque lingua, sed opere et veritate — 말과 혀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36 그렇게 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때에만 참된 자기 증여의 외침,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외침으로 그분의 부르심에 대답할 줄 알게 됩니다. ecce ego, quia vocasti me! —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부르셨지요!”37.††††††††††††
여러분의 아버지가 사랑을 담아 축복합니다.
마드리드, 1930년 3월 24일
마태 5,48.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 Sermo — “설교” 304, 2 (PL 38, col. 1396).
루카 5,8.
2코린 3,17.
† 성경 인용: 루카 복음서 5,8;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3,17
* ‘사도직’: 이 말은 수세기 동안 복음 전파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과 교회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성 호세마리아에게 이 말은 다른 이들의 자유를 세심하게 존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분을 섬기는 데 자신을 바치려는 열망을 전한다는 정확한 의미를 지닙니다(편집자 주).
욥 1,1.
집회 8,5.
† 성경 인용: 욥기 1,1; 집회서 8,5
Ad Diognetum — “디오그네토스에게 보낸 편지” 5, 1-4 (SC 33, p. 63).
마태 2,1-3.
† 성경 인용: 마태오 복음서 2,1-3
** ‘회원들’: 오늘날에는 ‘구성원들’ 또는 ‘신자들’이라고 부르는 편입니다. | opportune et importune — ‘기회가 좋든 나쁘든’: 참조: 2티모 4,2(편집자 주).
아가 2,15.
집회 19,1.
1코린 15,53.
† 성경 인용: 아가 2,15; 집회서 19,1;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5,53
콜로 3,3.
마태 13,55.
루카 1,38.
† 성경 인용: 마태오 복음서 13,55; 루카 복음서 1,38;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3,3
마태 5,16.
1티모 1,17.
1코린 3,4-7.
요한 21,2.
요한 3,30.
† 성경 인용: 마태오 복음서 5,16; 요한 복음서 3,30; 21,2;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3,4-7;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17
참조: 마르 2,9.
루카 7,14.
마태 5,13-14.
† 성경 인용: 루카 복음서 7,14; 마태오 복음서 5,13-14; 마르코 복음서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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