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대한 충실
이번 주일 전례 본문들은 주님께 대한 호소가 이어지는 사슬을 이룹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의지처이시며 우리의 반석이시며 우리의 방패이심을 아룁니다(시편 18,19-20.2-3; 미사 입당송). 본기도 역시 입당송의 그 주제를 이어받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 사랑의 굳건함 안에 머무르는 이들에게서 결코 당신의 빛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성령 강림 후 둘째 주일 본기도).
미사 중에도 우리는 계속 그분께 도움을 청합니다. 환난의 날에 저는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님, 거짓된 입술에서, 속이는 혀에서 제 영혼을 구하소서. 주님! 저는 당신께 피신합니다”. (시편 120,1-2; 시편 7,2)
이렇게 끈질기게 우리에게 당신의 자비를 청하도록 일깨워 주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의 이 다그치심은 우리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 그러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혼란스러운 목소리들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 시대, 방황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영혼이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줄 선한 목자들, 또 다른 그리스도들을 만나지 못하고, 오히려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오는 도둑과 강도”를 만나고 있습니다. (요한 10,8.10)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결함 없이 언제나 착한 목자의 길이요 우리일 것이며, 굳건한 기초요 모든 사람에게 열린 길일 것입니다. 우리는 방금 거룩한 복음에서 이렇게 읽었습니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루카 14,23)
그런데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이 얼떨떨하고 방향을 잃은 채 이 물음에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하고, 어쩌면 교도권이 수세기 동안 정식화해 온 것 — 그리고 훌륭한 교리서들이 본질적인 정확함과 간결함으로 제시해 온 것 — 이 이제는 극복되었으며 새로운 것들로 대체되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일련의 사건과 어려움이 한데 모여 교회의 맑은 얼굴을 흐리게 하려는 듯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장합니다. 교회는 이른바 현대라는 것에 적응하려는 열망 안에 있다고. 다른 이들은 외칩니다. 교회란 인간들의 연대를 향한 갈망일 뿐이며, 우리는 오늘날의 상황에 맞추어 교회를 바꾸어야 한다고.
그들은 틀렸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바로 그 교회이며, 다른 교회일 수 없습니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은 신앙과 신앙의 성사들 위에 세워진 교회의 통치를 위한 하느님의 대리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다른 교회를 세우는 것이 허락되지 않듯이, 다른 신앙을 전하거나 다른 성사를 세우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성사들로 교회가 세워졌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제3부, 64문 2절 이론에 대한 답변 3).
교회는, 초기 공의회들 가운데 하나가 신앙 고백으로 표현하였고 우리가 미사의 신경에서 외우는 저 네 가지 표지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이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그대로, 교회의 본성에서 나오는 교회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그리고 본질적이기에 이는 또한 표지, 곧 그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릴 수 있는 다른 어떤 종류의 인간 모임과도 교회를 구별해 주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한 세기 남짓 전, 비오 9세 교황께서는 이 전통적인 가르침을 간략히 요약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신경에서 우리가 믿어야 한다고 고백하는 그 네 가지 표지 안에서 신적 권위로 세워지고 인식된다. 그리고 그 표지들 하나하나는 나머지 표지들과 결합되어 있어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참으로 가톨릭이라 불리는 교회는 일치와 거룩함과 사도로부터 이어옴이라는 특권으로 함께 빛나야 한다. (비오 9세, 영국 주교들에게 보낸 성무성성 서한, 1864년 9월 16일)
이는 — 거듭 말씀드리지만 —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며, 최근 몇 년 사이 그릇된 일치운동에 이끌려 어떤 이들이 이를 잊었다 하더라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다시금 되풀이한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신경에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고백하는 바로 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를, 우리 구세주께서는 부활하신 뒤 베드로에게 맡기시어 그가 이를 기르게 하시고, 그와 다른 사도들에게 이를 널리 퍼뜨리고 다스리도록 위임하셨으며, 영원히 진리의 기둥과 터전으로 세우셨다. (“인류의 빛” 8항)
교회는 하나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11)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외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1).
일치를 향한 이 권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옵니다. “스스로 갈라진 나라마다 망하고, 스스로 갈라진 고을이나 집안마다 버티지 못한다”. (마태오 12,25).
이는 간절한 열망으로 바뀌는 하나의 선포입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요한 10,16).
우리 주님께서는 이 가르침을 얼마나 놀라운 어조로 말씀하셨습니까! 우리가 이를 깨닫도록, 일치를 향한 이 열정이 우리 영혼에 새겨지도록, 그분께서는 말씀과 이미지를 거듭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요한 15,1-5).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이들이, 때로 무성함으로 가득했다가도 이내 말라 버리고 그 열매마저 산 구더기 떼로 변해 버리는 것을 보지 못하십니까?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며 로마와 하나인 교회를 사랑합시다! 성 치프리아노가 쓰듯이, 교회 밖 다른 곳에서 거두는 이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흩어 버리는 것이다”. (성 치프리아노, “가톨릭 교회의 일치에 관하여” 6).
그리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지 마라. 교회보다 강한 것은 없다. 그대의 희망은 교회요, 그대의 구원은 교회요, 그대의 피신처는 교회다. 교회는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넓으며, 결코 늙지 않고 그 힘은 영원하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에우트로피우스의 체포에 관한 강론” 6).
교회의 일치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매우 굳게 결합되어 사는 것으로 옮겨집니다. 어떻게 그리하겠습니까? 교회의 영원한 교도권에 대한 우리의 충실함을 더욱 키움으로써입니다.
베드로의 후계자들에게 성령이 약속된 것은, 그들이 성령의 계시로 새로운 교리를 드러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그 도우심으로 사도들에게서 전해 받은 계시, 곧 신앙의 유산을 거룩하게 지키고 충실하게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이렇게 우리는 일치를 지킬 것입니다. 티 없으신 우리의 이 어머니를 공경하며, 로마 교황을 사랑하며.
교회 안에 남은 이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만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킨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집이 가득 차기를 원하시므로, 그 수는 곧 놀랍게 늘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우리 사랑들의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이를 위하여 이 성소, 곧 우리 영혼을 취하게 하는 이 내밀한 기쁨,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성심의 맑은 감미로움을 바라야 합니다.
우리는 일치 운동적이어야 한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스스로 '일치 운동적'이라 자처하는 몇몇 움직임 배후에 어떤 기만이 숨어 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활동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곧 참포도나무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저는 날마다 주님께, 인종이나 민족이나 문화적 조건이나 재산의 차이를 두지 않고 모든 사람을 향하여 제 영혼에 심어 주신 이 사랑이 계속하여 초자연적인 것이 되도록, 제 마음을 넓혀 주시기를 청합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든 아니든, 무엇인가를 믿는 이든 믿지 않는 이든, 저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모든 이를 진심으로 아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우셨고, 오직 하나의 신부를 두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치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의 일치까지도 바랍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온 세상에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다시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깨끗해지기 위하여 어떤 종류의 정화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간음할 수 없습니다. 그는 부패하지 않고 순결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한 집만이 정결한 부끄러움으로 하나의 신방의 불가침성을 알고 지킵니다. 그 집은 우리를 하느님을 위하여 보존하며, 자신이 낳은 자녀들을 나라를 위하여 예정합니다. 교회에서 갈라서는 이는 누구나 간음하는 여자와 결합하는 것이며, 교회의 약속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저버리는 이는 그리스도의 상급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성 치프리아노).
교회는 거룩합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의 일치가 어떻게 거룩함으로 이어지는지, 그리고 그 거룩함의 핵심적인 측면 가운데 하나가 한 분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중심으로 한 바로 그 일치라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에페 4,4-6)
거룩함이란 다름 아니라 하느님과의 결합을 뜻합니다. 주님과 더욱 친밀할수록 더욱 거룩해집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시고 세우신 것이며, 이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십니다. 성자의 신부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습니다. 교회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작품이며, 거룩하고 어머니 되시는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 교회이십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원초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완덕과, 또한 최종적, 곧 종말론적인 완덕을 흠모할 수 있습니다. 성 바오로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언급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이는 교회를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고,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에페 5,25-27)
교회의 원초적이고 구성적인 거룩함은 가려질 수는 있어도 결코 파괴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결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8)
제가 말씀드렸듯이, 거의 집단적이라 할 만한 어둠의 순간에는 인간의 눈에 가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겐스 상크타’(gens sancta, 1베드 2,9), 곧 거룩한 민족이라는 칭호를 붙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민족의 구성원인 만큼, 모든 신자는 거룩함에로의 그 소명을 받았으며, 은총에 응답하여 개인적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힘써야 합니다. 온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오늘날에도, 실제로 자신을 거룩하게 만든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젊은이와 노인, 미혼자와 기혼자, 사제와 평신도, 남자와 여자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신자의 개인적 거룩함은 요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함께 살아가는 평범하고 일상적이며 거룩한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세속의 눈에는 죄와 불충실의 잘못이 더 두드러져 보입니다. 그것들이 더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Gens sancta, 곧 비참함을 지닌 피조물들로 이루어진 거룩한 민족—이 외견상의 모순은 교회 신비의 한 측면을 드러냅니다. 신적인 교회는 또한 인간적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은 결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먼지와 재일 뿐입니다.
“그분께서는 저 높은 하늘의 군대를 통솔하시지만, 모든 인간은 먼지와 재일 뿐이다.” (집회 17,31)
주님이신 구세주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공동체가 그 종류에 있어 완전한 사회가 되고, 이 세상에서 구속 사업을 영속시키기 위하여 모든 법적, 사회적 요소를 갖추도록 정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 인간 조건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무엇인가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교회의 법적 구성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악으로 기우는 개개인의 개탄스러운 성향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성향은 신비체의 가장 높은 지체들에게서도 하느님이신 창설자께서 허락하시는 바인데, 이는 양들과 목자들의 덕이 시험받고, 모든 이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공로가 증대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비오 12세, 회칙 “신비체”).
이것이 바로 지금 이곳, 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부의 거룩함은 그 품 안에 결함을 지닌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양립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사회에서 죄인들을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만일 어떤 지체들이 영적인 병을 앓고 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교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줄어들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 지체들을 향한 우리의 연민이 더욱 커져야 합니다.” (비오 12세, 회칙 “신비체”, 1943년 6월 29일).
교회에 속한 사람 누구에게서든 -그 직무상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다 할지라도- 결점과 비참함이 드러날 때, 그 때문에 교회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흔들린다면, 이는 미성숙함을 드러내는 일일 것입니다. 교회는 베드로도 요한도 바오로도 다스리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은 성령이시며, 주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당신 곁에 머무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태 28,20)
성화 은총의 원인이며 표징인 성사를 받는 일에 관하여, 성 토마스가 이 점을 자세히 다루며 하신 말씀을 들어 봅시다: “성사에 나아가는 이는 분명히 교회의 봉사자에게서 그것을 받지만, 이는 그 사람 자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봉사자로서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에게 직무 수행을 허락하는 한, 그의 손에서 성사를 받는 이는 합당하지 못한 봉사자의 죄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봉사자로 삼으신 교회와 친교를 이루는 것입니다.”(성 토마스, 신학대전 III부, q.64, a.6 ad 2)
주님께서 인간적 나약함이 드러나도록 허락하실 때, 우리의 반응은 병들었거나 홀대받는 우리 어머니를 볼 때와 같아야 합니다. 곧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 안팎으로 더 많은 애정의 표시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한다면, 어머니이신 교회의 허물인 양 몇몇 자녀들의 비참함을 떠벌리려는 병적인 관심이 결코 우리 안에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배이신 교회는 그 어떤 “내 탓이오”도 노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야 합니다: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이것이 참된 “내탓주의”이니, 곧 개인적인 것이지, 인간적 결함을 지적하고 과장하여 교회를 공격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거룩하신 어머니 안에서 그러한 결함은 사람들의 행위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 우리가 교회의 원래적이며 구성적인 거룩함이라 부르는 것을 결코 파괴하지도, 건드리지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교회를, 밀과 함께 쭉정이가 쌓여 있는 타작마당에 비유하셨습니다. 그 밀에서 식탁을 위한 빵과 제대를 위한 빵이 나올 것입니다. 또한 교회를 “모든 종류의 물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에 비유하셨으니(마태 13,47), 그물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함께 거두어들이고, 나중에 나쁜 것은 버려질 것입니다.
교회의 거룩함이라는 신비 -인간적 비천함의 그림자에 가려질 수 있는 저 원초적 빛- 는 우리 어머니의 아름다움에 대한 의심이나 의혹의 아주 작은 생각조차 물리칩니다. 다른 이들이 그분을 모욕하는 것을 항의 없이 용납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믿음도 사랑도 드러내지 못하는 어떤 이들처럼, 교회 안에서 비판할 약점을 찾지 맙시다. 참된 어머니께 대한 사랑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그 어머니에 대해 냉담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거룩하십니다. 순결하게 태어나셨고 영원토록 티 없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그분의 아름다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 눈을 씻어야 합니다. 그분의 목소리가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우리 귀에서 그 완고함을 없애야 합니다. 그 완고함이 그분의 음성 속에서 사랑 많으신 목자의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거룩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거룩하시니, 이는 몸 안에서 -우리 모두인 그 몸- 그리고 영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영은 성령이시며,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 안에 머무른다면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도 자리 잡고 계십니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지극히 복되신 삼위일체를 기리는 찬가를 떠올리며, 우리는 감히 교회를 향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교회여, 나의 어머니여, 당신은 거룩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거룩하신 분께서 당신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거룩하십니다. 모든 거룩함의 원천이신 성부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거룩하십니다. 신자들의 영혼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께서 당신을 도우시어, 성부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아 하늘의 교회, 영원한 예루살렘에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보편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셨으니, 이것이 제때에 드러난 증거입니다.”(1티모 2,4-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의 교회,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정배는 하나이고 보편됩니다. 곧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여러 세기 전부터 온 세상에 퍼져 있으며, 모든 인종과 사회 계층의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보편성은 지리적 확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이 눈에 보이는 표징이며 믿을 만한 근거가 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교회는 이미 성령 강림 때에 보편적이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상하신 성심에서, 성령께서 타오르게 하시는 불처럼 보편적으로 태어났습니다.
2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보편적”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어느 점에서는 그분의 가르침을 배반하는 분파들과 교회를 구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 치릴로는 이렇게 씁니다: “우리가 교회를 보편적이라 부르는 것은, 교회가 땅 끝에서 끝까지 온 세상에 퍼져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하늘의 것이든 땅의 것이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교의를 아무 결함 없이 보편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통치자든 백성이든, 배운 이든 배우지 못한 이든, 모든 부류의 사람을 올바른 예배에 복속시키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영혼의 것이든 육신의 것이든 모든 종류의 죄를 고치고 낫게 하며, 그 밖에도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행위와 말과 온갖 영적 은사 안에서 모든 형태의 덕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성 치릴로, 교리교육 18, 23)
교회의 보편성은 또한 비가톨릭 신자들이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지에 달려 있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영적이지 않은 문제에 있어서 교회 안에서 권위를 지닌 몇몇 사람들의 의견이, 그들의 사고 경향에 가까운 여론에 의해 고려되거나 -때로는 이용당하는- 사실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이념 안에서 옹호되는 진리의 부분이, 교회의 항구한 가르침 안에서 반향이나 근거를 발견하는 일은 자주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그 교도권이 지키는 계시의 신적 기원을 나타내는 표징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정배는,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많은 곳에서 그러하듯이, 많은 이들에게 고의로 무시당하고 심지어 모욕과 박해를 당할 때에도 보편됩니다.
교회는 정당도 아니고, 사회 이데올로기도 아니며, 화합이나 물질적 발전을 위한 세계적 조직도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활동들과 다른 여러 활동의 고귀함을 인정하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궁핍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 유일하고 참된 악인 죄의 결과로 어떤 형태로든 고통을 겪는 모든 이를 위하여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궁핍한 이들에게나, 이 땅의 재화를 충만히 누리고자 하는 이들에게나, 교회는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오직 한 가지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곧 우리의 운명은 영원하고 초자연적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영원히 구원받고, 오직 그분 안에서만 우리는 이미 이 세상 삶 속에서도 어떤 방식으로 참된 평화와 행복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와 함께 우리 주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이 진리들을 결코 잊지 않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하게 해 주시기를 청하십시오. 가톨릭 교회는 사람들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맺는 거룩함의 열매로써 가톨릭 신자임을 드러낼 것입니다. 거룩함은 어떠한 경계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 어떤 인간적 편협함의 소유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면,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아가려 애쓴다면, 언제 어디서나 의로운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면 -오늘날 종종 유물론적이고 그릇된 뉘앙스로 사용되는 '정의'라는 말의 가장 넓은 의미에서- 그리고 다른 이들의 인격적 자유를 사랑하고 옹호한다면, 우리는 가톨릭 신자임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가톨릭성을 보여 주는 또 다른 분명한 표징을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그대로 성사를 충실히 보존하고 집행하는 것이며, 인간적 왜곡이나 심리적, 사회학적으로 성사를 조건 짓고자 하는 그릇된 시도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다른 이의 권능 아래 있는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오직 자기 권한 안에 있는 것만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성화는 성화하시는 하느님의 권능 아래 있으므로, 어떤 것들이 자신을 성화시켜야 하는지 자기 판단에 따라 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마땅히 하느님의 제정으로 정해져야 하는 것이다.” (성 토마스)
성사의 본질에서 보편성을 제거하려는 그러한 시도들은, 만약 성사가 단지 자연적인 이해와 인식의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 표징이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 계약의 성사는 원인인 동시에 표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사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그대로 일으킨다고 흔히 가르쳐집니다. 그런 까닭에 성사는 거룩한 어떤 것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 단지 표징으로서만이 아니라 원인으로서도 성사라는 이름에 온전히 부합합니다. (성 토마스).
이 가톨릭 교회는 로마의 교회입니다. 저는 이 낱말을 음미합니다. 로마! 저는 스스로 로마인임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로마인이라 함은 보편적, 곧 가톨릭적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저로 하여금 교황님을,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가 즐겨 되풀이하여 부르던 대로 “이 땅 위의 부드러운 그리스도”(il dolce Cristo in terra)를 다정히 사랑하게 이끌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성녀를 더없이 사랑하는 벗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로마 가톨릭 중심으로부터, 이론상으로 다다를 수 없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모든 이가 다다를 수 있고 또 다다라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에게 낯선 이는 아무도 없고, 배제된 이도 아무도 없으며, 멀리 있다고 여겨지는 이도 아무도 없습니다.” (바오로 6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연설)
저는 온 힘을 다하여,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베드로와 바오로의 로마를 공경합니다. 그 로마는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하여 그토록 많은 이들이 떠나간 중심지입니다. 로마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편협함의 표시가 아니라 참된 일치의 표시이며, 마음을 넓혀 모든 이를 찾고 모든 이를 받아들이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열망으로 모든 이에게 마음을 여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마치 기쁨의 노래와도 같은 짧은 말씀을 남겼습니다. “베드로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고, 교회가 있는 곳에는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다스린다.” (성 암브로시오). 왜냐하면 베드로와 교회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야말로 구원이시며, 유일한 길이십니다.
교회는 사도적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나약함 위에 -그러나 또한 그들의 충실함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들은 바로 사도들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의 끊임없는 도우심을 약속하셨습니다. 언제나 새롭고 오늘도 유효한 그 잘 알려진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봅시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18-20)
복음 선포는 팔레스티나에서 몇몇 열성적인 이들의 개인적 발의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당시에 아무런 힘도 없었고, 부유하지도 배운 것이 많지도, 인간적으로 영웅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한 줌의 제자들의 어깨 위에 헤아릴 수 없이 크고 신적인 사명을 지우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16)
이천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도, 교회 안에는 사도적 계승이 보존되어 왔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선언하듯이, “주교들은 사도들의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사도(바오로) 자신이 말하듯이, 하느님의 교회를 다스리도록 성령에 의하여 세워졌다.”(트리엔트 공의회, 성품성사에 관한 교리, 제20차 회기, 28)
그리고 사도들 가운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시몬을 특별히 선택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마태 16,18)
그분께서는 또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루카 22,32)
베드로는 로마로 옮겨 가 그곳에 수위권의 자리,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자리를 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적 계승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바로 로마이며, 그런 까닭에 로마는 각별히 사도좌라고 불립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이전의 공의회인 피렌체 공의회의 말을 빌려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신자는 마땅히 믿어야 한다. 곧 거룩한 사도좌와 로마 교황이 온 세상에 대한 수위권을 지니고 있으며, 로마 교황 자신이 복된 베드로, 곧 사도들의 으뜸의 후계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대리자이며 온 교회의 머리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요 스승임을 믿어야 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된 베드로의 인격 안에서 그에게 온 교회를 먹이고 다스리고 통치할 온전한 권한을 넘겨주셨음을 믿어야 한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로마 교황의 최고 권한과 그가 교좌에서(ex cathedra) 말할 때 지니는 무류성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명백한 설립 의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황의 통치를 주교들의 통치와 맞세우거나, 교황 교도권의 타당성을 신자들의 동의 여부로 축소하려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한 일입니까! 권력의 균형이라는 도식만큼 낯선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실용적으로 보인다 해도, 인간이 만든 도식은 우리에게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인간으로서 스스로 절대적 권한을 누리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으뜸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을 순례하는 당신의 신부(교회)를 위하여 당신의 대리자, 곧 로마 교황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 구성에 있어 사도적입니다. 참으로 존재하고 가톨릭이라 불리는 교회는 일치와 거룩함과 사도로부터의 계승이라는 특권으로 함께 빛나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는 하나이며, 온 땅과 모든 민족에 걸쳐 밝고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데, 그 일치의 원리요 뿌리요 결코 그침이 없는 근원은 사도들의 수장이신 복되신 베드로와 로마 교좌에서 그 뒤를 잇는 후계자들의 최고 권위요 가장 뛰어난 수위권입니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베드로 위에 세워져 신앙의 일치와 사랑으로 하나의 연결되고 결속된 몸을 이루어 서 있는 교회 외에 다른 가톨릭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오 9세, 영국 주교들에게 보낸 성무성성 서한, 1864년 9월 16일).
우리는 교황과의 일치 — 이는 곧 베드로와의 일치입니다 — 를 지극한 충실함으로 드러냄으로써, 모든 이의 눈앞에 그 사도성을 더욱 뚜렷하게 나타내는 데 이바지합니다. 로마 교황에 대한 사랑은 우리 안에서 하나의 아름다운 열정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 중에 주님을 가까이한다면, 때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눈물과 고통을 안겨 주는 사건들 속에서도 성령의 활동을 분별할 수 있는 맑은 시선을 지니고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모든 가톨릭 신자의 사도직 사명
교회는 우리가 세례를 통해 그 품 안에 들어간 뒤에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우리는 자연적 생명으로 갓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성화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 더 나아가 온 교회의 믿음은 성령의 활동으로 그 아기에게 유익을 줍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에 일치를 주시고, 한 사람의 선익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 토마스, 신학대전 III부)
성령께서 교회에 부여하시는 그 초자연적 모성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세례로 이루어지는 영적 재생은 어떤 면에서 육체적 출생과 비슷합니다. 어머니 태중에 있는 아기들이 스스로 양분을 얻지 못하고 어머니의 자양분으로 자라나듯이, 아직 이성을 쓸 줄 모르고 마치 어머니이신 교회의 품 안에 있는 아기와 같은 이 작은 이들도, 스스로가 아니라 교회의 활동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성 토마스, 신학대전 III부).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나오는 교회의 사제적 권능은 그 온전한 위대함으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제직의 원천이십니다. 율법의 사제는 그분의 예표와 같았지만, 새 법의 사제는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활동합니다. 이는 2코린 2,10에서 말하는 바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인가 용서해 준 사람을 나도 용서합니다. 사실 내가 무엇을 용서하였다면, 그리스도 앞에서 여러분을 위하여 용서한 것입니다.” (성 토마스, 신학대전 III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구원 중개는 성품성사를 통해 교회 안에서 영속됩니다. 이 성사는 그에 따르는 인호와 은총으로 말미암아, 모든 영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활동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어떤 이가 다른 이가 할 수 없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선함이나 악함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은 지니고 다른 사람은 지니지 못한 획득된 권능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축성의 권능을 받지 못하였기에, 그의 개인적 선함이 아무리 크다 해도 축성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성 토마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직무가 있지만, 그 목적은 오직 하나, 곧 사람들의 성화입니다. 그리고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로 받은 인호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 사명에 참여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사명인 이 교회의 사명에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영혼들의 구원에 열심이 없는 사람, 그리스도의 이름과 가르침이 알려지고 사랑받도록 온 힘을 다해 애쓰지 않는 사람은 교회의 사도성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수동적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게 바라시는 바를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구원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직은 교계제도나 사제, 수도자만의 배타적 사명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불러,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그 은총의 흐름의 도구가 되어 모범과 말로 그것을 전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지녔던 대담함과 자신들의 사명에 대한 확신, 그리고 희생을 감수하는 기쁨에 감동합니다. 그들은 군중을 찾지 않습니다. 비록 군중이 모여든다 해도,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곧 각각의 구체적인 영혼을 향합니다. 필리포스는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베드로는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에게, 바오로는 세르지오 파울로에게…
그들은 스승에게서 그것을 배웠습니다. 마을 광장 한가운데서 일거리를 기다리던 일꾼들의 그 비유를 기억해 보십시오. 포도밭 주인이 날이 이미 저물어 갈 무렵에 가 보니, 여전히 손을 놀리며 서 있는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였습니다. (마태 20,6-7)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에 관해 전해 주지 않아서 그분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느님 없이 살아도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알지 못한 채, 벳자타 못의 병자처럼 누워 있습니다. 구원을 주는 그 물로, 영혼에 기쁨을 주는 가르침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 잘못은 흔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되뇔지도 모릅니다. (요한 5,7)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구원의 가르침을 전하는 데 헌신하기를 우리에게 맡기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가톨릭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의 신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혼들에 대한 그 열망을 나누고 있습니까? 내가 속해 있는 이 교회, 그 안에서 다른 누구도 나 대신할 수 없는 특정한 사명을 이루어야 할 이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이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결코 우리에게 낯설거나 외적이거나 우리의 가장 깊은 생각과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표지들에 관한 이 묵상을 여기서 마칩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 내용이 우리 영혼에 새겨져, 우리에게 은총의 생명을 주시고 날마다 끊임없는 정성으로 우리를 길러 주시는 이 거룩하신 어머니를 더욱 사랑하도록, 분명하고 확실하며 신적인 기준을 우리 안에 굳게 다지게 될 것입니다.
혹시 교회를 모욕하는 말이나 외침을 듣게 되거든, 인간미와 애덕을 가지고 그 사랑 없는 이들에게, 그런 어머니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고 밝혀 주십시오. 지금은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교회를 공격합니다. 교회의 나라, 곧 그 스승이며 창설자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밀이 겨 사이에서 신음하는 동안, 이삭이 가라지 사이에서 탄식하는 동안, 자비의 그릇들이 진노의 그릇들 사이에서 슬퍼하는 동안, 나리꽃이 가시덤불 사이에서 우는 동안, “그 이름이 언제 죽고 사라질 것인가?” 하고 말하는 원수들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사라지고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없을 때가 올 것이라고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말할 때, 그들 자신은 어김없이 죽어 사라집니다. 그리고 교회는 남아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시편 강해 70).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부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개선한 교회는 이미 그분 곁에서, 아버지의 오른편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우리를 부릅니다. 우리는 아직 신앙의 어스름 속에서만 어렴풋이 보는 그 실재, 곧 하나이고 거룩하고 가톨릭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그들은 이미 온전히 보고 있습니다.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amar-a-la-iglesia/gyohoee-daehan-cusir/ (2026-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