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초자연적 목적
먼저 성 치프리아노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보편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부터 그 일치를 얻는 한 백성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주님의 기도”, De Dominica Oratione)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인 오늘, 강론이 교회에 관한 것이라 하여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우리 가톨릭 신앙의 근본적인 신비, 곧 본질에 있어 하나이시고 위격에 있어 셋이신 하느님의 신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부들은 언제나 교회를 삼위일체를 중심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이 명료한 말씀을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에 거하십니다. 성령뿐 아니라 성부와 성자께서도 그러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회는 하느님의 성전, 곧 삼위일체 전체의 성전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엔키리디온”, Enchiridion)
다음 주일 우리가 다시 모일 때에는, 성모 교회의 또 다른 놀라운 측면,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노래한 뒤 신경 안에서 곧 고백하게 될 그 표지들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가 하나뿐임을 고백합니다.
진실로 교회를 사랑한 모든 이들은 이 네 가지 표지를 우리 거룩한 신앙의 가장 형언할 수 없는 신비, 곧 지극히 복되신 삼위일체와 연결지을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하느님의 교회를 믿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가르침을 받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알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성 요한 다마스케노, “이콘 반박론”, Contra Icon)
어려운 시기
교회가 크고 심오한 신비임을, 이 땅에서 결코 온전히 파악될 수 없는 신비임을 우리는 자주 묵상하여 마음에서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이성이 홀로 그것을 설명하려 한다면, 어떤 계율을 지키고 비슷하게 생각하는 이들의 모임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한 교회가 아닙니다.
거룩한 교회 안에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행실의 규범과 우리의 기도와 형제애의 의미를 발견하며, 이미 세상을 떠나 연옥에서 정화되고 있는 모든 형제들 —연옥의 교회— 과의 친교, 또는 세 번 거룩하신 하느님을 영원히 사랑하며 이미 지복직관을 누리고 있는 이들 —승리의 교회— 과의 친교를 발견합니다. 교회는 이 땅에 머무르는 동시에 역사를 초월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품 안에서 태어난 교회는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계속하여 마리아를 어머니로 찬양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초자연적 성격을 굳게 확언합시다. 필요하다면 큰 소리로 그것을 고백합시다. 오늘날 —교회 안에, 심지어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 근본적인 진리들을 잊어버리고, 하나도 아니고 거룩하지도 않으며 베드로의 반석 위에 서 있지 않기에 사도로부터 이어오지도 않고 부당한 개별주의와 인간의 변덕으로 갈라져 있어 보편되지도 않은 교회의 이미지를 제시하려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교회를 세우신 이래로, 우리의 이 어머니는 끊임없는 박해를 겪어 왔습니다. 어떤 시대에는 공공연하게 공격이 조직되었고, 오늘날 많은 경우에는 은밀한 박해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교회에 대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는 기질로도 습관으로도 비관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셨는데 어찌 비관주의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발출은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임하시어 교회의 첫 공적 발현을 이루셨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 —우리를 “당신 눈동자처럼”(신명 32,10) 돌보아 주시는 그 자애로우신 아버지, 성경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생생한 표현으로 전해 주는 그대로— 께서는 당신의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드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성령을 통하여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교회는 오늘날 어려운 나날을 살고 있습니다. 영혼들에게 커다란 혼란의 시기입니다. 혼란의 아우성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역사 내내 있어 왔던 온갖 오류들이 요란하게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신앙. 우리에게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다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는 그 자체 안에 지니고 또 자신의 주위에 펼치는 자신만의 변증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진리를 바라보며 교회를 관상하고 연구하는 이는,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나 교회가 나타나는 구체적 방식과는 무관하게, 교회가 그 자체 안에 보편적이고 유일하며 해방을 주고 필요하며 신적인 빛의 메시지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오로 6세, 1966년 6월 23일)
이단의 목소리를 들을 때 —저는 완곡한 표현을 결코 좋아한 적이 없으니, 그것은 바로 이단입니다— 혼인의 거룩함과 사제직의 거룩함이 거리낌 없이 공격받는 것을 볼 때, 우리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와 종신 동정성이 —하느님께서 그분께 주신 다른 모든 특은과 탁월함과 더불어— 공격받는 것을 볼 때,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이라는 영구한 기적이, 베드로의 수위권이, 우리 주님의 부활 그 자체가 공격받는 것을 볼 때, 어찌 온 영혼이 슬픔으로 가득 차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확신을 가지십시오: “거룩한 교회는 부패할 수 없습니다. 그 기초가 흔들리면 교회도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흔들리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흔들리지 않으시는 한, 교회는 세상 끝날까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시편 상해” 103편, Enarrationes in Psalmos 103).
교회 안의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라는 두 본성이 있듯이, 유비적으로 교회 안에도 인간적 요소와 신적 요소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인간적인 부분의 명백함은 누구에게도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하며, 사람을 말한다는 것은 자유를, 위대함과 비루함의 가능성을, 영웅적 행위와 굴복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그 인간적 부분만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결코 교회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비의 문턱에도 다다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지상의 경험에서 취한 많은 용어를 하느님 나라와 우리 가운데, 곧 교회 안에 있는 그 현존에 적용합니다. 성경은 교회를 우리, 양 떼, 집, 씨앗, 포도밭, 하느님께서 심고 세우시는 밭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압축하는 한 표현을 강조합니다. 곧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에페 4,11-12)
성 바오로는 또한 이렇게 씁니다. “우리도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로마 12,5)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빛나는지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분은 교회의 몸의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콜로 1,18)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고백해 온 믿음입니다. 저와 함께 성 아우구스티노의 이 말씀을 들어 봅시다.
“그때부터 그리스도 전체는 머리와 몸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여러분이 이를 잘 알고 계시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그 머리는 다름 아닌 우리 구세주이시니, 그분은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수난을 겪으시고, 이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뒤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몸은 교회입니다. 이런저런 지역 교회가 아니라 온 세상에 퍼져 있는 교회입니다. 또한 오늘날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보다 앞서 산 이들과 앞으로 세상 끝날까지 살아갈 이들도 그 교회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온 교회는 —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당신의 몸을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이 머리가 몸의 시야 밖에 계시지만, 그럼에도 사랑으로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시편 주해” 56)
이제 여러분은 왜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를 분리할 수 없는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신비체이면서 동시에 법적 단체입니다. “교회가 몸이라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교회는 눈으로 식별됩니다.” (레오 13세, 회칙 “사티스 코니툼”, 724)
교회의 가시적인 몸 안에서 — 이 땅에서 교회를 이루는 우리 인간들의 처신 안에서 — 비참함과 흔들림과 배신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교회가 거기에서 소진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그릇된 행실들과 혼동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 자리에도, 소리 없이 이루어지는 관대함과 영웅적인 신앙 고백과 거룩한 삶들이 부족하지 않으니, 이는 신앙의 형제들과 모든 영혼을 섬기는 데에 기쁘게 스스로를 소진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설령 굴복의 수가 용기의 수를 능가한다 하더라도, 감각으로는 지각하지 못할지언정 명백하고 부인할 수 없는 저 신비적 실재, 곧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 주님 자신이시며 성령의 활동이시며 성부의 사랑 넘치는 현존이라는 실재는 여전히 남아 있음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므로 교회는 분리될 수 없이 인간적이며 신적입니다. “교회는 그 기원에 있어서 신적인 사회이며, 그 목적과 그 목적에 직접 이바지하는 수단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사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인간 공동체입니다.” (레오 13세, 회칙 “사티스 코니툼”, 710) 교회는 세상 안에서 살고 활동하지만, 그 목적과 그 힘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세우신 교회라 할 은사적 교회를, 인간의 작품이자 단순한 역사적 우연의 결과일 법적 또는 제도적 교회와 분리하려는 이들은 중대한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가시적이며 동시에 비가시적이고, 위계적이고 조직된 몸을 지니며, 신적 법에 기초한 근본 구조를 지니고, 그것에 생기를 불어넣고 지탱하며 살아 있게 하는 내밀한 초자연적 생명을 지닌 교회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실 때, 같은 종류이면서도 서로 구별되고 교회를 나눌 수 없는 하나로 만드는 그 유대로 결합되지 않은 여러 공동체들로 이루어지도록 구상하거나 형성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신비로운 건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당신의 것이라고 부르시는 오직 하나의 교회만을 언급하십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마태 16,18) 이 교회 밖에서 달리 상상하는 어떠한 교회도, 그리스도께서 세우지 않으셨으므로, 그분의 참된 교회일 수 없습니다. (레오 13세, 회칙 “사티스 코니툼”, 712)
믿음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그 축일을 지내는 지극히 복되신 삼위일체께 청하며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합시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나, 삼중으로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신부를 버리시는 일만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목적
성 바오로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된 하느님의 신비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단언합니다.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에페 1,22-23)
하느님의 신비는, 정해진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에페 1,10)
이는 순전한 사랑의 무상함에서 비롯된 헤아릴 수 없는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에페 1,4)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성 바오로 자신도 우리 구세주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라고 선포합니다. (1티모 2,4)
이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교회의 목적입니다. 곧 영혼들을 하나하나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성부께서는 성자를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 20,21)
그래서 교리를 알리고 세례를 주라는 명령이 나오니, 이는 은총을 통하여 지극히 복되신 삼위일체께서 영혼 안에 거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18-20)
이는 성 마태오 복음서의 결말을 이루는 소박하면서도 숭고한 말씀입니다. 그 안에는 신앙의 진리를 선포할 의무와 성사 생활의 절박함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계속 도우시리라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신앙과 그리스도교 윤리의 가르침, 성사의 실천이라는 이 초자연적 실재들을 소홀히 한다면 주님께 충실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명령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교회가 단순히 구원의 한 길이 아니라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6)
그러므로 교회는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수단으로서 필요하다고 단언됩니다. 이미 2세기에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이 집으로 오십시오.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이 집 밖에서, 곧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오리게네스, In Iesu nave)
또한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노아의 방주 밖에서 (홍수를 피해) 살아남은 이가 있었다면, 우리는 교회를 떠난 이도 단죄를 피할 수 있다고 인정할 것입니다.”(성 치프리아노, De catholicae Ecclesiae unitate)
“Extra Ecclesiam, nulla salus”(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는 교부들이 끊임없이 전해 준 경고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인정합니다. “가톨릭 교회 밖에서는 모든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 다만 구원만은 예외입니다. 명예도 가질 수 있고, 성사도 받을 수 있으며, ‘알렐루야’를 노래할 수도 있고, ‘아멘’이라고 응답할 수도 있으며, 복음을 지닐 수도 있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고 그 믿음을 선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안이 아니고서는 결코 구원을 찾을 수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Sermo ad Caesariensis ecclesiae plebem).
그러나 비오 12세께서 스무 해 남짓 전에 한탄하셨듯이, 어떤 이들은 참된 교회에 속해야 할 필요성을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한 헛된 형식으로 축소시키고 있습니다.(비오 12세, 회칙 “인류의 기원”, Humani generis).
이 신앙의 교의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협력하는 활동의 기초를 이루며,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중대한 사도직 책무의 토대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명시적으로 내리신 계명들 가운데, 세례를 통하여 당신의 신비체에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단호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모든 이가 교회에 들어가야 한다는 계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교회를 구원의 수단으로 세우시어 그것 없이는 아무도 천상 영광의 나라에 이를 수 없게 하셨습니다.”(비오 12세, 덴칭거-쇤메처 3868)
교회에 속하지 않는 이는 구원받지 못하며, 세례를 받지 않는 이는 교회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입니다.
“복음이 선포된 이후로는, 의화가 재생의 씻음이나 그에 대한 열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Decretum de iustificatione, 덴칭거-쇤메처 1524)
이는 교회가 끊임없이 요구하는 바입니다. 이 요구는 한편으로 우리 영혼 안에 사도적 열정의 가시를 심어 주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분명히 드러내 줍니다. 성 토마스가 이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봅시다.
“세례성사는 두 가지 방식으로 결여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로도 열망으로도 받지 않은 경우로서, 세례를 받지도 않고 받기를 원하지도 않는 이의 경우입니다.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에게 있어 이러한 태도는 성사에 대한 경멸을 내포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으로 세례가 결여된 이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성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그리스도께 결합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구원은 오직 그분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례성사 자체는 결여되었으나 그것을 향한 열망은 결여되지 않은 경우로서, 세례받기를 원하였으나 성사를 받기 전에 죽음을 맞이한 이의 경우입니다. 이러한 이는 실제 세례 없이도, 오직 그 성사를 향한 열망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 열망은 사랑으로 활동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권능을 가시적 성사에만 매어 두지 않으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내적으로 거룩하게 하십니다.”(성 토마스, “신학대전”, Summa Theologiae III, q.68, a.2)
영원하고 초자연적인 행복은 전적으로 거저 주어지는 것으로서 어떠한 명목으로도 누구에게 빚진 것이 아니며, 죄를 지은 뒤에는 더더욱 그러하지만, 우리 주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그것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관대하심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극히 거룩한 종교에 관하여 극복할 수 없는 무지 속에 있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마음에 새겨 두신 자연법과 그 계율들을 정성껏 지키며, 하느님께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고 정직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간다면, 하느님의 빛과 은총의 활동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비오 9세, 덴칭거-쇤메처 1677)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영혼들을 무리로 다루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 대하십니다. 구체적인 경우에 있어 영원한 구원이나 단죄를 이 땅에서 판단하는 것은 그 누구의 몫도 아닙니다.
그러나 양심이 잘못을 통해 뒤틀리고, 죄 안에서 완고해지며, 하느님의 구원 활동에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신앙의 진리들과 도덕 규범들을 선포할 필요성이 여기서 나옵니다. 또한 성사들의 필요성도 여기서 나오는데, 이 모든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은총의 도구적 원인이자 우리의 타락한 본성 상태에서 비롯되는 비참함을 치유하는 치료제로 제정하신 것입니다.(성 토마스, “신학대전”, S. Th. III, q.61-62) 이로부터 또한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자주 받는 것이 유익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따라서 교회 안의 모든 이가, 특히 사목자들이 지닌 엄청난 책임이 성 바오로의 권고와 함께 분명히 확정됩니다. “나는 하느님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그대에게 엄숙히 명령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때가 오면 사람들은 건전한 가르침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정욕에 맞는 것을 듣고자 하는 지나친 욕구에 이끌려 자기들 좋을 대로 수많은 스승들을 끌어모으며, 진리에서 귀를 돌려 꾸며 낸 이야기로 기울어질 것입니다.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2티모 4,1-5)
시련의 시기
사도의 이 예언적인 말씀이 얼마나 여러 번 이루어졌는지 저는 이루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눈먼 사람만이 오늘날 이 말씀이 거의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과 교회의 계명에 관한 가르침이 배척되고, 참행복의 내용은 정치사회적 방향으로 왜곡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겸손하고 온유하며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이는 무지한 사람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것을 고집하는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정결의 멍에를 견디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신적 계율을 조롱할 수많은 방법이 고안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한 가지 징후가 있으니, 바로 교회의 초자연적 목적을 바꾸려는 시도입니다. ‘정의’라는 말로 어떤 이들은 더 이상 거룩한 삶을 이해하지 않고, 그리스도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어느 정도 마르크스주의에 물든 특정한 정치 투쟁을 이해합니다. ‘해방’이라는 말로는 죄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의 싸움을 인정하지 않고, 그 자체로는 고귀하고 정당할 수 있으나 유일하게 필요한 것(루카 10,42), 곧 한 사람 한 사람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왜곡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인간적 과업을 이해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태 15,8). 하느님을 등지는 데서 비롯되는 눈멂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교회상을 “만들어” 냅니다. 제대의 지성한 성사 — 갈바리아 희생 제사의 갱신 — 조차 모독당하거나, 사람들 사이의 이른바 친교를 나타내는 한낱 상징으로 격하되고 있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존귀한 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내어 주지 않으셨다면 영혼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이라는 이 끊임없는 기적을 어떻게 업신여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모시고, 그분을 흠숭하며, 장차 올 영광의 보증으로서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기로 결심하도록 하시려고 그곳에 머물러 계십니다.
지금은 시련의 때입니다. 우리는 “끊이지 않는 외침으로”(이사 58,1 참조) 주님께 이 시련을 줄여 주시고, 당신 교회를 자비로이 굽어보시며, 목자들의 영혼과 모든 신자의 영혼에 초자연적 빛을 새로이 베풀어 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고 애쓸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혼자서든 공동체로서든— 결코 영원한 구원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교회를 향한 자녀다운 사랑.
오늘날 우리는 예루살렘의 유력 인사들 앞에서 성 베드로가 외쳤던 그 말씀을 큰 소리로 되풀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1-12)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를 세우신 반석인 초대 교황께서는 주님을 향한 효성 어린 신심과 당신께 맡겨진 작은 양 떼에 대한 깊은 배려에 이끌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서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이신 교회에 대해 얼마나 경건함 없이 이야기하는지 보셨습니까? 옛 교부들의 글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불타는 사랑의 찬사를 읽을 때면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모릅니다!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합시다. 그분의 교회를 사랑합시다. 그분은 아버지로서, 교회는 어머니로서 사랑합시다. 아무도 ‘그렇습니다, 저는 아직도 우상들에게 가고, 귀신 들린 자들과 마법사들에게 묻습니다만, 하느님의 교회를 떠나지는 않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어머니께는 매달려 있으면서 아버지께는 모욕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마법사들에게 묻지 않고, 귀신 들린 자들에게 캐묻지 않으며, 신성 모독적인 점을 치지 않고, 마귀들을 경배하러 가지 않으며, 돌로 만든 신들을 섬기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도나투스파에 속해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를 모욕하지 않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모욕하는 그 어머니의 원한을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터인데 말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시편 상해」 88, 2, 14; PL 37, 1140).
그리고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간략히 선언한 바 있습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습니다.”(성 치프리아노, 앞의 책; PL 4, 502).
오늘날 많은 이가 거룩한 어머니이신 교회에 관한 참된 교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시민 사회에서 구상되는 방식의, 아니 차라리 오늘날 증진시키려 하는 방식의 민주주의 —모든 면에서 모두가 평등한 체제— 를 도입하려는 어리석음으로 교회라는 제도를 “재창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제정에 따라 교회가 교황과 주교, 사제, 부제, 그리고 평신도인 재속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원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위계적인 제도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교계 제도로 조직된 사회”라고 부르며(교회헌장, Lumen gentium, 8항), 그 안에서 교역자들은 거룩한 권한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칩니다(교회헌장, Lumen gentium, 18항). 이 위계 제도는 자유와 양립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자녀들의 자유에 봉사합니다(로마 8,21 참조).
민주주의라는 말은 교회 안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위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계 제도란 거룩한 통치와 신성한 질서를 뜻하는 것이지, 결코 인간적인 자의성이나 비인간적인 전제 정치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 위계 질서를 세우셨으며, 이는 결코 폭정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권위 그 자체가 하나의 봉사이며, 순종 또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평등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순간부터 우리는 모두 평등합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하느님, 곧 우리 아버지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에서는 교황과 갓 교회에 들어온 가장 어린 신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근본적인 평등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에 관해 교회의 헌정 질서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명백한 뜻에 따라 우리에게는 직무의 다양성이 주어져 있으며, 여기에는 또한 서로 다른 자격, 곧 성품성사를 통해 거룩한 교역자들에게 부여되는 지워지지 않는 표지도 포함됩니다. 이 서품의 정점에는 베드로의 후계자가 계시고, 그와 함께, 또 그 아래에서 모든 주교가 있어, 거룩하게 하고 다스리고 가르치는 세 가지 사명을 수행합니다.
이렇게 거듭 강조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앙과 윤리에 관한 진리는 다수결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에게 맡기신 신앙의 유산 —데포지툼 피데이(depositum fidei)— 을 이루며, 그 해설과 권위 있는 가르침은 교회의 교도권에 맡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묶어 주는 연대의 유대를 더욱 자각하게 되었다고 해서, 시대에 발맞추기 위해 교회의 헌정 질서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시대는 성직자든 아니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구성과 교리와 윤리에서 그리스도께 충실하게 남아 있을 때에만 영혼들에게 구원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산상 설교를 잊어버린 채— 이 땅에서 인간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생각을 배격합시다. 우리는 교회의 유일한 사명이 영혼들을 낙원의 영원한 영광으로 이끄는 데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지니는 근원적 역할을 무시하는 그 어떤 자연주의적 해법도 배격합시다. 인간 생활 안에서 영적 가치의 중요성을 퇴색시키려는 유물론적 견해도 배격합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교회의 목적을 지상 국가의 목적과 동일시하려 하며, 교회의 본질과 제도와 활동을 현세 사회의 그것과 비슷한 특성으로 혼동하는 세속화 이론들도 배격합시다.
하느님 지혜의 심연.
오늘 서간에서 읽은 성 바오로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께 무엇을 드린 적이 있어 그분의 보답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로마 11,33-36)
하느님 말씀의 빛으로 볼 때, 주님께서 세우신 것을 바꾸려 드는 인간의 계획들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입니까!
그러나 저는 오늘날 도처에서 확인되는 인간의 기이한 능력을 여러분께 숨기지 않겠습니다. 하느님을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인간은 다른 이들에게 사납게 달려들어, 악의 무서운 도구가 되고, 죄의 계기와 유혹자가 되며, 본질적으로 악한 행위를 선한 것처럼 내세워 저지르게 만드는 혼란의 씨를 뿌립니다.
무지는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신앙과 윤리에 관한 가장 조야한 무지가 때로는 겉보기에 신학적인 거창한 이름으로 위장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방금 복음에서 들은 대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내리신 명령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19 참조)— 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현재성을 지닙니다.
우리는 외면할 수 없고, 팔짱을 끼고 있을 수 없으며, 우리 자신 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평화와 평온과 교리의 위대한 싸움에 나아갑시다.
우리는 이해심을 지녀야 하며, 모든 것을 애정 어린 애덕의 외투로 덮어야 합니다. 그 애덕은 우리를 신앙 안에 굳건히 세우고, 우리의 희망을 북돋우며, 어떤 이들이 내세우는 그러한 모습이 교회가 아니라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주는 애덕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것이며, 오직 한 가지 목적, 곧 영혼들의 구원만을 추구합니다. 주님께 다가가, 얼굴을 마주하고 기도로 그분과 이야기합시다. 우리 개인의 비참함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고, 우리의 죄와, 어쩌면 이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이 하느님을 얼마나 중대하게 거스르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다른 이들의 죄를 보속합시다.
이번 주일 거룩한 미사 중에, 갈바리아의 피 흘리신 희생 제사가 피 없이 갱신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사제이시며 제물로서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홀로 버려두지 않기를, 우리 마음 안에 십자가 곁에서 그분과 함께 있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이 솟아나기를, 그리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세상에 평화를, 교회에 평화를, 양심에 평화를 돌려주시기를 청하는 우리의 부르짖음이 더욱 커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행한다면, 십자가 곁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복되신 손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 이르고, 그분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amar-a-la-iglesia/gyohoeyi-cojayeonjeog-mogjeog/ (2026-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