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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들어진 흙의 연약함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지만, 교회 교리에 있어서는 흔들리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리를 확고하게 옹호하는 데에 영웅적 용기와 겸손을 보이는 이들이다.
또 다시 예전의 같잖은 생활로 돌아간 그대! 그리고 이후 되돌아왔을 때 겸손이 부족해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그대.
그대가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두 번째 부분에 대해 고집스럽게 무지하여, 여전히 도토리의 불쌍한 행복에 집착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나약함으로 인해 자존심 상한 그대는 용서를 구하기로 결심하지 않는다. 자신을 낮추면 아버지 하느님의 기쁜 환영, 즉 그대의 귀환과 부활의 축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신부님, 신부님의 충고대로 저의 나약함을 웃어넘겨 버리면 —물론 타협하면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말이죠—, 저는 훨씬 기뻐집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슬픔에 젖어 있으면, 길을 잃게 됩니다.”
때때로 그대는 모든 즐거움을 죽이고 희망의 기도로 간신히 극복할 수 있는 낙담의 씨앗에 압도당한다. 괜찮다. 그럴 때일수록 하느님께 더 많은 은혜를 구하고 계속 나아가라! 싸우는 기쁨을 되찾아라, 전투 하나에서 패배하더라도 말이다.
의욕도 바램도 사라지고, 폭풍우가 몰아쳤다. 슬픔의 소나기가 내렸고, 자신이 묶여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싸워 왔는데 나는 여전히 아주, 아주 뒤처져 있구나.”라는 다소 객관적인 사실에서 생겨난 생각들이다.
이 모든 것은 필요한 것들이며 하느님께서 대비하신 것들이다. “Gaudium cum pace”, 즉 참된 기쁨과 평화를 얻으려면, 우리를 낙관론으로 가득 채우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확신과 함께,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대는 조만간 그대 나약함의 증거에 틀림없이 직면하게 될 것이니, 악마가 그때 암시할 것이고 그대가 즉시 거부해야 할 몇 가지 유혹에 대해 미리 경고하고 싶다. 하느님이 그대를 잊으셨다는 생각, 그대의 사도직으로의 부르심이 헛되다는 생각, 세상 고통과 죄의 무게가 사도인 그대의 힘보다 크다는 생각….
이런 것들은 전부 사실이 아니다!
그대는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한다. 그대에게서 묵은 때와 새로운 때를 발견한 것이다. 그대는 온갖 악한 본능과 경향을 매우 생생하게 느끼며 마음에는 불확실성이라는 구름이 끼어 있다. 게다가 가장 원하지 않거나 예상하지 못할 때, 피로로 인해 의지가 약해질 때, 유혹을 느낀다.
그대는 이런 자신을 보는 것이 더 이상 창피한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그분을 위해, 그분 사랑 때문에 아파해야 한다. 이 사랑의 뉘우침이 그대가 깨어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싸움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결함을 자신이 보거나 남이 발견한다고 해서 우울해지는 것은 근거 없는 짓이다.
참된 겸손을 청하라.
동상을 더 높이 세울수록 무너질 때 충격이 강하고 위험하다.
“저는 여전히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하고 그대는 말한다.
전에는 이 사실을 마주할 때마다 얼마나 힘들어했느냐! 하지만 지금은 무뎌지거나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미소 짓는 데 익숙해지고, 점점 더 큰 기쁨으로 투쟁을 새롭게 시작한다.
어리석은 사람만이 완고하다. 그러니 매우 어리석은 사람은 매우 완고할 것이다.
인간사에서는 다른 사람도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들은 그대와 똑같은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다른 빛으로 다른 색조로 다른 윤곽으로 본다.
신앙과 윤리에서만은 논박의 여지가 없는 기준, 곧 우리 어머니인 교회의 기준이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스무 살이던 적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미성년자처럼 가족에 의해 제약을 당한 적이 전혀 없다고 믿느냐? 그대가 직면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피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그들은 지금 그대가 겪고 있는 똑같은 상황을 겪었고 관대한 인내로 자기 이기심을 짓밟았다. 양보 가능할 때는 양보했고, 불가능할 때는 오만하지 않고 상처주지 않으면서 —침착한 겸손으로— 충성하여 은총의 도움으로 성숙해졌다.
이념적으로 그대는 매우 가톨릭적이다. 그대는 기숙사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미사가 12시에 있지 않고, 수업이 오후에 있어 저녁 식사 후 코냑 한두 잔을 마시며 공부할 수 없어서 유감이다! 이런 그대의 ‘천주교’는 진실과 일치하지 않으며 단순한 편의주의에 불과하다.
그대 나이에 그런 사고를 할 수 없다는 걸 모르겠느냐? 그대의 편안함과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남들의 필요와 주변 현실에 맞춰라. 그러면 그대는 ‘천주교’를 진지하게 생활화할 것이다.
어느 성당에 성인상을 기증했던 사람이 말했다. “이 성인의 모든 것은 제 덕분입니다.”
단순한 풍자라고 생각하지 말라. 적어도 그대의 행동으로 볼 때, 그대 또한 펜던트 몇 개 착용하고 판에 박힌 듯한 신심 관습을 실천한다고 하느님께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나의 착한 행실을 보고!” 아니, 그대는 남들이 그대의 자질을 볼 수 있도록 그 행실을 싸구려 장신구 바구니에 담고 다니는 것 같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가?
게다가 “그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2 하신 예수님 명령의 두 번째 부분을 잊지 마라.
“나 자신에게, 내게 합당한 찬사를 보내며.” 책의 첫 페이지에 그가 쓴 글이다. 그리고 다른 많은 가련한 사람들도 그들 삶의 마지막 페이지에 똑같이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대와 내가 이렇게 살거나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진지한 자기성찰을 해보자.
교회에 관한 일이나 사람들 —네 형제자매들— 앞에서 결코 우월한 태도를 취하지 말라…. 대신 이런 태도는 사회적 활동에서 하느님과 영혼의 이익을 지키는 일에 필요할 수 있다. 그 경우에는 더 이상 우월함이 아니라, 차분하고 겸손한 확신을 가지고 실천할 믿음과 용기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선한 의도에는 항상 겸손이 뒤따르게 하라. 선한 의도에는 종종 가혹한 판단, 양보가 거의 불가능한 고집, 그리고 어느 정도의 개인, 국가 또는 집단 자부심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잘못을 깨닫게 될 때, 낙심하지 말라. 잘못에 대해 반응하라. 결실이 없는 것은 —특히 회개하는 경우에— 잘못의 결과라기보다는 교만의 결과다.
넘어졌다면 더욱 큰 희망을 안고 일어서라…. 잘못을 바로잡는다면 자신을 알게 되고 자신이 겸손해지는 데에 도움을 얻는다. 자기애만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아무 쓸모 없다.” 비관적이고 거짓된 말이다. 원하기만 하면 우리는 근본적 전제조건인 하느님의 은총으로, 많은 사업에서 유용한 도구로 쓸모 있을 것이다.
그자의 거만함을 보며 저 하느님의 사람이 한 가혹하지만 솔직한 말이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그는 교만이라는 악마의 가죽을 입고 있다.”
그리고 이와 대조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교하신 미덕, “quia mitis sum et humilis corde”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3—, 복되신 삼위일체의 시선을 그분 어머니이자 우리 어머니인 분께로 끌어들인 그 덕, 곧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느끼는 겸손을 입고 싶은 진실된 갈망이 마음에 생겼다.
주님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한 마디 책망도 없이, 사랑의 눈길로 회심시키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넘어진 후에도 그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3 라고 말씀드리고 우리의 생활을 고칠 수 있기를 바란다.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book-subject/surco/3987/ (2026-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