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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우리는 동료들과 친구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영혼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양보입니다. 물론 관용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단순히 용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하거나 오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덜 나쁜 것이거나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모든 것,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모든 것, 본질에는 관계되지 않지만 의견 충돌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물러서고 양보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결국 다듬을 수 있는 거친 모서리는 다듬어, 오류에 빠진 이들이 빛을 받아들이기 쉽도록 서로 이해할 바탕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타협을 부르짖으며 그리스도의 도덕적 가르침에서 양보하고 싶어 하거나 교의를 훼손하는 데에도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자기 돈과 안락함과 변덕과 명예와 의견을 건드리는 것은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군가 자신들이 개인적 권리라고 여기는 것에 손을 대려 하면 독사처럼 달려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권리가 아니라 자의적인 처사나 뒤엉킨 일, 명확하지 않은 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자기 삶을 끝없는 십자군 원정으로, 끊임없는 신앙 수호로 만듭니다. 그러나 때로는 고집에 사로잡혀, 그 좋은 열망을 애덕과 현명함이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광신에 빠집니다. 의도는 올바르더라도, 진리에 크게 이바지하려던 마음이 변질되어 결국 선보다 해를 더 많이 끼칩니다. 어쩌면 그들이 지키는 것은 자기 의견과 자존심과 굳게 닫힌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라만차의 귀족처럼 풍차밖에 없는 곳에서 거인을 봅니다. 늘 언짢고 까다로우며, 쓰디쓴 열정과 거친 태도를 지닌 사람이 됩니다. 어디에서도 좋은 것을 찾지 못하고 모든 것을 어둡게 보며, 사람들의 정당한 자유를 두려워하고,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한번은 어떤 기자가 체사레 보르자의 무덤을 찾으려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어떤 이들에게는 미움을 받고 다른 이들에게는 찬양받는 유명한 용병대장이었습니다. 그 기자는 그가 성당 문 앞에 묻혔다는 말을 듣고 나바라의 비아나로 갔습니다. 찾아온 목적을 말하자 누군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찾느라 애쓰지 마십시오. 그자는… 내가 파내어 그 유해를 타작마당에 흩어 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을 공격하지도 않지만 수호하지도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안일하고 이기적인 회의주의에 빠져, 다른 이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구실 아래 우유부단함과 무책임 속으로 숨어듭니다. 누군가 장난삼아 쓴 다음 시구는 그들의 태도를 잘 보여 줍니다. 만일 진지하게 쓴 것이라면, 그는 시 쓰는 법을 잘못 이해한 만큼 복음도 잘못 이해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적대적인 세상에는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저마다 제 일이나 챙기세. 나는 내 일, 너는 네 일, 각자 제 구원이나 얻도록 하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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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헨시오 아판 데 리베라(Fulgencio Afán de Ribera), La virtud al uso y mística á la moda, destierro de la hipocresía en frase de eshortacion á ella, embolismo moral(1729), Madrid, Ibarra, 1820, 56–57쪽.(스페인어판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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