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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종교인의 서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도우시는 신성한 하느님에 대한 헌신입니다.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로마 6, 22).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잃고 동료 인간의 종이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의 교회에 대한 봉사의 헌신이 입고 벗을 수 있는 옷과 같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전 생애를 포용하며,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 항상 그것을 포용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흰 코끼리나 다른 희귀하고 혐오스럽거나 경이로운 동물처럼 우리에 갇혀서 보는 이들에게 호기심이나 감탄 또는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이국적인 동물처럼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동료 시민들과 동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거리에서 살거나, 거리로 나가거나, 최소한 창밖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희석하고 사회의 조미료에 그리스도의 소금처럼 군중 속에 녹아 드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독특한 정신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구별도 없이 우리는 친척, 친구, 동료들과 함께 세상의 고귀한 관심사에서 동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일시적인 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마음과 정신을 하늘로 향하게 할 것이며, 인간은 짐승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기쁨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빛과 불이 타오르는 존재여야 합니다. 제단에서 항상 타오르는 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따라 우리는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모두 나에게 오너라.” (마태 11,28).
그리고 우리는 또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여 그들이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할 것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묵시 3, 20).
그러나 진정으로 열심인 그리스도인은 이 두 가지 태도 가운데서 평온함과 균형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면,
“보라,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져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 주겠다.” (묵시 22,12).
성 마태오는 또한 영혼이 그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부활 후 복음서의 놀라운 구절 한 구절만 기억하면 됩니다. 주님은 슬픔에 잠겨 믿음이 흔들리는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엠마오에 도착한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의 의미를 열어 주시고는 마치 떠나려는 듯이 말씀하십니다. 클레오바와 그의 동료는 신성과 인간의 부드러움이 어우러진 말투로 주님께 간청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루카 24, 29).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cartas-2/10/ (2025-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