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
자기애를 뿌리째 뽑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는 것. 여기에 유익과 행복의 비결이 있다.
그대는 그분을 따른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항상 ‘그대’의 계획에 따라 ‘그대’의 힘으로만 ‘그대’가 하려 한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다. “Sine Me nihil!” 1 “너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대가 자신의 ‘권리’라고 부르고 내가 그대의 ‘교만할 권리’로 번역한 그것을 무시했다. 가련한 이 바보! 그대를 공격하는 자가 강력해서 막지 못하고 수백 번 얻어맞는 고통을 느꼈으나, 그대는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지 않고 있다.
이제는 그대의 양심이 지적한다, 그대가 교만하고 비겁하다고 말이다. 하느님께 감사드려라. 그대가 ‘겸손의 의무’를 어렴풋이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언제나 그대, 그대, 그대로 가득하다. 그런데 그분, 그분, 그분으로 채워지고 “in nomine Domini”, 하느님의 이름과 그분의 힘으로 행동할 때까지 그대는 절대로 효과를 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중심으로만 돌면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는가?
직업적 출세에 대한 조급하고 무질서한 열망은 ‘남을 위한 봉사’를 가장한 자기애를 감출 수 있다. 우리는 거짓으로 —거짓, 맞다— 어떤 기회, 어떤 유리한 상황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만든다.
예수님께로 눈을 돌려라. 그분은 ‘길’이다. 그분의 드러나지 않은 시절에도 공생활을 앞당길 ‘아주 유리한’ 기회와 상황이 있었다. 예를 들어, 열두 살 때 율법학자들이 그의 질문과 대답에 놀랐을 때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기다린다. 그분은 순종한다!
온 세상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려는 거룩한 열망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계획이 암시될 때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주님께서 달리 요청하시지 않는 한, 그대 또한 순종하고 드러나지 않고 빛나지 않는 그 일을 맡을 차례임을 명심하라. 하느님은 그분의 때와 방법이 있으시다.
돈, 혈통, 지위, 직책, 지능 등으로 주어진 특권을 악용하여 불우한 사람들을 모욕하는 모든 이들은 자신들의 교만과 오만을 드러낸다.
교만은 사탄이 당기는 줄에 따라 헛되고 생각 없는 꼭두각시처럼 행동하는 ‘아주 남자다운’ 사람을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게 하고 만다.
거만이나 단순한 허영심 때문에, 많이들 자신의 개인적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이기 위한 ‘암시장’ 을 유지한다.
지위. 위인가 아래인가?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대는 완전한 헌신으로 도움이 되려고, 섬기러 왔다고 장담했다. 이에 알맞게 행동하라.
그대는 말하고, 비판하고… 그대 없이는 아무것도 잘 되지 않는 듯하다. 미안하지만, 그대는 오만한 독재자처럼 행동한다.
한 친구가 그대를 따로 불러 그대의 행동을 망치는 점들을 충직하고 친절하게 지적하면, 그대에게는 그 친구가 옳지 않다는 확신이 선다.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존심의 자녀인 이런 그릇된 확신을 가지고는, 그대는 평생 고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대가 불쌍하다. 거룩함을 추구할 결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악의적이다, 의심이 많다, 복잡하다, 불신에 찼다, 교활하다…. 불쾌하더라도, 모두 그대에게 해당되는 수식어다.
바로잡아라! 왜 다른 사람은 항상 나쁘고 그대는 착해야 하는가?
그대는 외롭고 불평이 많고 만사가 짜증난다. 이기심이 그대를 형제자매들로부터 고립시키고, 그대가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늘 드러나게 주목받으려는 그대!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주목받으려는 그대!
그대는 왜 모든 말에 숨은 의도가 있다고 상상하느냐? 그대의 과민함으로 은총의 활동을 늘 가로막고 있다. 은총은 그리스도의 이상에 자신의 행동을 맞추려고 투쟁하는 이들의 말을 통해 온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
그대가 남들이 늘 그대에게 신경 써주면서 살아야 한다고 확신하는 한, 남들을 섬기려고 —숨고 사라지려고— 결심하지 않는 한, 형제, 동료, 친구와의 관계는 끊임없는 서운함과 실망과 짜증… 곧 교만의 원천이 될 것이다.
과시를 혐오하라. 허영심을 거부하라. 매일, 매 순간 교만과 싸워라.
가련한 교만한 자들은, 자기애로 엄청나게 키운,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는 수많은 하찮은 것들로 고통받는다.
다른 사람은 스무 살이던 적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미성년자처럼 가족에 의해 제약을 당한 적이 전혀 없다고 믿느냐? 그대가 직면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피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그들은 지금 그대가 겪고 있는 똑같은 상황을 겪었고 관대한 인내로 자기 이기심을 짓밟았다. 양보 가능할 때는 양보했고, 불가능할 때는 오만하지 않고 상처주지 않으면서 —침착한 겸손으로— 충성하여 은총의 도움으로 성숙해졌다.
이념적으로 그대는 매우 가톨릭적이다. 그대는 기숙사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미사가 12시에 있지 않고, 수업이 오후에 있어 저녁 식사 후 코냑 한두 잔을 마시며 공부할 수 없어서 유감이다! 이런 그대의 ‘천주교’는 진실과 일치하지 않으며 단순한 편의주의에 불과하다.
그대 나이에 그런 사고를 할 수 없다는 걸 모르겠느냐? 그대의 편안함과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남들의 필요와 주변 현실에 맞춰라. 그러면 그대는 ‘천주교’를 진지하게 생활화할 것이다.
어느 성당에 성인상을 기증했던 사람이 말했다. “이 성인의 모든 것은 제 덕분입니다.”
단순한 풍자라고 생각하지 말라. 적어도 그대의 행동으로 볼 때, 그대 또한 펜던트 몇 개 착용하고 판에 박힌 듯한 신심 관습을 실천한다고 하느님께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나의 착한 행실을 보고!” 아니, 그대는 남들이 그대의 자질을 볼 수 있도록 그 행실을 싸구려 장신구 바구니에 담고 다니는 것 같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가?
게다가 “그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2 하신 예수님 명령의 두 번째 부분을 잊지 마라.
“나 자신에게, 내게 합당한 찬사를 보내며.” 책의 첫 페이지에 그가 쓴 글이다. 그리고 다른 많은 가련한 사람들도 그들 삶의 마지막 페이지에 똑같이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대와 내가 이렇게 살거나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진지한 자기성찰을 해보자.
교회에 관한 일이나 사람들 —네 형제자매들— 앞에서 결코 우월한 태도를 취하지 말라…. 대신 이런 태도는 사회적 활동에서 하느님과 영혼의 이익을 지키는 일에 필요할 수 있다. 그 경우에는 더 이상 우월함이 아니라, 차분하고 겸손한 확신을 가지고 실천할 믿음과 용기이기 때문이다.
당사자 앞에서 그 사람을 찬양하거나 그의 자질을 칭찬하는 것은 무분별하고 유치하고 어리석다.
그러다간 허영심을 부추기고, 모든 것을 받으셔야 마땅한 하느님으로부터 영광을 ‘빼앗을’ 수도 있다.
그대의 선한 의도에는 항상 겸손이 뒤따르게 하라. 선한 의도에는 종종 가혹한 판단, 양보가 거의 불가능한 고집, 그리고 어느 정도의 개인, 국가 또는 집단 자부심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잘못을 깨닫게 될 때, 낙심하지 말라. 잘못에 대해 반응하라. 결실이 없는 것은 —특히 회개하는 경우에— 잘못의 결과라기보다는 교만의 결과다.
넘어졌다면 더욱 큰 희망을 안고 일어서라…. 잘못을 바로잡는다면 자신을 알게 되고 자신이 겸손해지는 데에 도움을 얻는다. 자기애만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아무 쓸모 없다.” 비관적이고 거짓된 말이다. 원하기만 하면 우리는 근본적 전제조건인 하느님의 은총으로, 많은 사업에서 유용한 도구로 쓸모 있을 것이다.
그자의 거만함을 보며 저 하느님의 사람이 한 가혹하지만 솔직한 말이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그는 교만이라는 악마의 가죽을 입고 있다.”
그리고 이와 대조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교하신 미덕, “quia mitis sum et humilis corde”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3—, 복되신 삼위일체의 시선을 그분 어머니이자 우리 어머니인 분께로 끌어들인 그 덕, 곧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느끼는 겸손을 입고 싶은 진실된 갈망이 마음에 생겼다.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surco/gyoman/ (2026-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