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낚는 어부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 대륙의 땅을 보고 있었다. 그대는 눈이 빛났고, 마음이 조급함으로 가득 차 그곳 사람들을 생각하며 내게 말했다. “저 바다 건너편에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효과가 없을 리가 있을까요?”

이어서 스스로에게 답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무한한 자비에 유순한 도구를 사용하시고자 합니다.”

그대는 저들이 너무 불쌍하다. 저들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외치고 싶다. 저들은 왜 눈이 멀어 보잘것없는 그대가 본 것을 보지 못하는 건가? 왜 최고를 선호하지 않는 건가?

기도하고 고행하라. 그리고 —그대의 의무다!— 그들을 한 명씩 깨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대처럼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버리지 않고 신성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하라.

그대는 신나서 시작했다. 하지만 서서히 위축되어 갔다…. 계속해서 시야를 좁힌다면 그대는 결국 자신의 초라한 껍데기에 갇히고 말 것이다.

그대는 사도직에 대한 갈망으로 마음을 점점 더 넓혀야 한다! 100명의 영혼 중에 우리는 100명에게 관심이 있다.

주님께서 변함없이 그대에게 보이는 부모의 다정함을 감사하라.

언제나 위대한 모험을 꿈꿔온 그대는 그대를 거룩함으로 인도하는 엄청난 사업에 헌신했다.

거듭 말한다. 사도직의 삶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라.

사도직에 투신할 때, 그것은 언제나 사람들을 행복하게, 아주 행복하게 해주는 것임을 확신하라. 진리와 참다운 기쁨은 분리될 수 없다.

다양한 나라와 인종, 매우 다른 환경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느님 이야기를 할 때, 그대는 그대 사도 성소의 인간적 그리고 초자연적 가치를 체감한다. 마치 주님 제자들의 첫 설교의 기적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것 같다. 낯선 언어로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말을 각자가 마음 속 깊이 자신의 언어로 듣는다. 그리고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1이 기뻐하며 하느님께 나아가는 장면이 새로운 생기를 띠며 그대 생각을 스쳐간다.

내 말을 잘 듣고 전하라. 그리스도교는 사랑이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지극히 긍정적인 대화다. 다른 사람들을 향한 관심, 곧 사도직은 사치품, 극소수만 할 일이 아니다.

이것을 알았으니 기쁨으로 가득차라, 이제 그대 삶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 걸맞게 행동하라.

자연스러움 성실 기쁨. 사도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데 없어서는 안될 조건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께서 첫 열두 사도를 부르신 방식은 이보다 더 단순할 수 없었다.

그 일을 계속하지 않으려고 많은 핑계를 찾는 그대에게 손에 장갑처럼 딱 맞는 생각이 있다. 저 첫 사도들의 인간적 지식은 빈약했지만, 그들은 관중을 얼마나 감동하게 했는가!

절대로 잊지 말라. 우리 각자를 통해 여전히 그분이 일하고 계신다.

사도직 성소는 하느님께서 주신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의 몫을 꾸준히 해야 한다. 기도, 고행, 공부나 일, 우정, 초자연적 시각… 내적 생활!

내가 말하는 ‘우정의 사도직’은 자기희생적이고 진실한 ‘인격적’ 우정, 얼굴을 맞대고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그런 우정을 의미한다.

우정과 신뢰의 사도직에서 첫걸음은 이해와 섬김…. 그리고 교리에 대한 거룩한 비타협이다.

그리스도를 만난 이들은 자신의 좁은 세계에 갇혀서는 안 된다. 그러한 위축은 유감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들은 대신 모두에게 다가가기 위해 부채처럼 펼쳐져야 한다. 저마다 친구 모임을 만들고 넓혀가며 자신의 직업적 명성, 행동, 우정을 통해 그들에게 영향을 줘야 하고, 바로 그 직업적 명성, 행동, 우정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한다.

그대는 사방에 불을 지피는 불씨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타오를 수 없는 환경에서는 영적 온도를 높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대는 비참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고, 주변 사람들의 시간도 낭비하는 것이다.

사도직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늘 선한 사람들을 찾을 것이고 준비된 땅을 발견할 것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확신하라. 그곳에도 그대의 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 자신이 알든 모르든 그리스도를 찾지만, 발견하지 못한 이들이다. 하지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2

강렬하고 꾸준한 사도직을 하지 않는다면, 내적 생활에 열심하다고 하지 말라. 그대가 대한다고 주장하는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 길은 매우 힘들다고 그는 말했고 그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십자가가 참된 길의 확실한 표시임을 기억하며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대 친구는 그 길의 험한 부분만 의식했다. “내 멍에는 편하다.”3 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고려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어라. 그것을 알게 될 때 자신을 내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시간이 없다고? 더욱 좋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시간이 없는 이들에게 관심이 있다.

위대한 기회를 놓치고 예수님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다고 느낄 때, 이렇게 생각하라. 내게 길을 보여준 이토록 분명한, 섭리적 부르심이 어디에서 오는 건가?

이 사실을 날마다 묵상하라. 사도는 언제나 또 다른 그리스도, 그리스도 자신이 돼야 한다.

그가 자신을 그리스도와 맞대면하게 했다고 그대를 책망하고, “이제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는 평화로이 살기는 글렀어.”라며 분개하며 덧붙인다고 놀라거나 위축되지 말라.

그를 위해 기도하라. 그를 안심시키려는 것은 소용이 없다. 아마도 그의 오래된 불안, 즉 양심의 목소리가 전면에 드러난 것일 것이다.

자기 봉헌에 대해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문제를 꺼냈다고 그들이 분개하는가? 어쩌겠는가? 그대는 사도를 부르는 사도의 소명을 가지고 있다.

그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자연스러워지라고 조언하고 싶다.

너무나도 인위적인 그대의 양성!

남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하느님, 그리스도인의 생활, 소명 등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주저하느냐? 부르시는 것은 그대가 아니라 그분이심을 잊지 말라. “Ego scio quos elegerim”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4

게다가 이러한 거짓 존중 뒤에 안락이나 미지근함이 숨겨져 있다면, 유감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하느님의 우정보다 보잘것없는 인간 우정을 선호하는 것이냐?

그대는 사도직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 또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한 사람은 두려워했고, 다른 사람은 ‘신중한’ 사람과 상담해 나쁜 조언을 받았다….

인내하라. 그래야 나중에 이렇게 변명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Quia nemo nos conduxit”5 “아무도 우리를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대의 거룩한 조바심을 이해하는 동시에, 그대가 오래 생각해야 하는 사람도, 때가 오면 응답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팔 벌려 그들을 기다려라. 풍부한 기도와 고행으로 그대의 거룩한 조바심을 완성시켜라. 그러면 더욱 생기 넘치고 관대한 이들이 올 것이다. 그들은 태만을 떨쳐버렸을 것이고 더욱더 용감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기다리시는지 생각해보라!

믿음은 사도직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건이다. 이는 열매가 맺히기까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남들에게 하느님에 대해 꾸준히 전하는 인내에서 종종 드러난다.

우리가 인내한다면, 주님께서 이를 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적 혁명의 징후가 그대 주변 곳곳에 나타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봉헌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내적 생활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이고, 더 약한 이들은 적어도 경각심을 갖게 될 것이다.

마음이 벅찬 흥분의 나날이다. 세 명이나 더해졌다!

예수님의 말씀이 실현되고 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6

어쩌면 머나먼 새로운 땅에 가서 돌파구를 열 가능성에 흥분된다고, 달에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한 그대 말에 나는 미소 지었다. 그 심정을 매우 잘 알기 때문이다.

주님께 그 사도적 열정을 키워 달라고 간구하라.

잠자는 영혼들을 마주할 때, 그대는 때때로 그들에게 외치고 흔들고 정신 차리게 하여 그들이 빠진 저 끔찍한 무감각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고 싶은 미친 갈망을 느낀다. 그들이 길을 모르고 맹목적으로 방황하는 모습이 너무 슬프다!

나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두고 완전한 사랑에서 눈물을 흘리셨음을7 너무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소명의 사도적 깊이를 날마다 파고들어라. 그분은 이천 년 전, 진실한 마음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모든 이들을 위한 집회 깃발을 세우셨다. 그대와 내가 그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할 수 있도록 말이다. “Ignem veni mittere in terram”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8라고 하신 말씀, 또는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25억 명의 영혼에 대한 생각보다 더 분명한 호소가 있겠는가?

“Hominem no habeo”9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아쉽게도, 쓸모 있고 또 쓸모 있어야 하는 많은 병들고 정신이 마비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주장이다.

주님, 제가 절대로 영혼들에게 무관심하지 않게 하소서.

세상을 다시 한번 불타오르게 할 새로운 성령강림을 나를 도와 함께 청하라.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0

주님, 핏줄이 그대의 지극한 사랑의 성심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어떤 이들에게는 반대의 항구한 근원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는 인내에 대한 간접적이거나 직접적인 유혹의 원천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는 절대적인 무효과의 원인이 되며, 모두에게 완전한 자기 봉헌을 방해하는 무거운 짐이 된다는 점이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땅을 갈아엎어 밭고랑을 내는 쟁기는 씨앗도 열매도 보지 못한다.

그대는 결심한 후부터 날마다 새로운 발견을 하고 있다. “이 일이 가능할까?” 하고 끊임없이 자문한 후 의심과 실망만 거듭하던 어제를 기억하는지.

이제 그대는 항상 정확하고 합리적이며 명쾌한 답을 얻는다. 그리고 때때로 유치한 그대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첫 열두 제자를 이렇게 돌보셨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주님, 성소를, 더 많은 성소를! 씨를 제가 뿌렸든 다른 누군가가 뿌렸든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손으로 뿌리신 것입니다. 제가 아는 것은 열매가 무르익으리라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Et fructus vester maneat”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을 것이다.”11

분명히 하라. “우리를 낚으려고 한다.”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렇다고 인정하라.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알려라! 그들에게 성소가 없다면, 즉 주님께서 부르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성소가 있다면, 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외롭고 슬프게 끝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는가.

사도로서 그대의 임무는 위대하고 아름답다. 그대는 은총과 인간 자유가 교차하는 곳에 있으며, 몇몇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엄숙한 순간, 즉 그들이 그리스도와 만나는 순간에 참여한다.

그대들은 한명 한명씩 뽑힌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맞는 말이다.

확신하라.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구체적이고 급박한 질문을 안고 우리에게 몰려올 수많은 사람들을 대응하기 위해, 잘 준비해야 한다.

사도 정신을 키우는 효과적 방법: 구체적인 사도적 계획을 토요일부터 토요일까지가 아니라, 오늘부터 내일까지, 지금부터 다음 순간까지 세워라.

그리스도께서는 그대 일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신다. 그러나 그대는 선한 목자가 100번째 양을 찾아 나섰던 것처럼, 누가 부르기를 기다리지 않고 영혼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런 다음 그대 친구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렇게 알려라. 누구도 자신을 채운 후 사도적 열정으로 외부에 흘러넘치지 않는 영적 생활에 만족하면 안 된다고 말이다.

그대를 기다리는 영혼들이 그토록 많은데 그대의 멍청한 관심거리로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교리의 사도직: 그것이 항상 그대의 사도직일 것이다.

성령강림의 경이로움은 모든 길이 성화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한 가지 길의 독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길 하나의 높은 평가로 인해 다른 길이 희생되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성령강림은 무한히 다양한 언어와 방법과 하느님과의 만남의 형태이지, 강압적인 획일성이 아니다.

그대는 내게 이렇게 썼지. “북쪽으로 가던 한 청년이 우리 그룹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광부였습니다. 노래를 잘했고 우리 합창에 목소리를 합쳤지요. 나는 그 친구의 도착역까지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작별하면서 ‘여러분과 여행을 계속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즉시 “mane nobiscum!” “주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12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분의 길’의 동반자인 우리 각자에게서 ‘그분을 보도록’ 다시 한번 믿음을 가지고 간청했다.

대중들은 ‘의로운 불만의 길’로 떠났고 지금도 떠나고 있다.

마음 아픈 사실이지만, 영적 혹은 물적으로 궁핍한 이들 사이에서 우리가 너무 많은 원망을 사지 않았는가!

그리스도를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에게 다시 모시고 갈 필요가 있다. 바로 그들과 계실 때 그분이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교사여. 그대가 많은 시간 동안 공부해서 명확히 알게 된 것을 단시간에 학생들에게 이해시키는 데에 행복을 느끼기를.

‘가르치고 싶은 마음’과 ‘마음으로부터 가르치는 것’은 학생들 사이에 사도직에 적합한 토양인 감사의 마음을 일으킨다.

나는 이 모토를 좋아한다. “각 나그네는 자신이 갈 길을 따르시오.” 하느님이 그대를 위해 표시해 주신 그 길을, 힘들더라도 충실하게 그리고 사랑으로.

신약성경의 가르침 하나하나가 담은 교훈이 얼마나 대단한가!

스승님께서 성부 오른편으로 오르시면서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을 가르쳐라.”13 하셨고, 제자들은 평화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의구심을 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사도들의 여왕인 마리아와 모였다. 그러면서 세상을 구원할 진리의 열정적인 설교자가 되었다.

목차
1

사도 2,9.

성경 인용
목차
2

로마 10,14.

성경 인용
목차
3

마태 11,30.

성경 인용
목차
4

요한 13,18.

성경 인용
목차
5

마태 20,7.

목차
6

요한 15,8.

성경 인용
목차
7

루카 13,34-35 참조.

성경 인용
목차
8

루카 12,49.

성경 인용
목차
9

요한 5,7.

성경 인용
목차
10

루카 14,26.

성경 인용
목차
11

요한 15,16.

성경 인용
목차
12

루카 24,29.

성경 인용
목차
13

마태 28,19-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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