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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가시덤불에 집착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등을 돌렸기 때문에 자신이 비참한 사람이 될 것임을 알고 자신의 자유 의지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모두에게 불행이 있다고 다시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행은 결코 하느님의 부르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전사들이 갑옷 안에 자신을 배치한 것처럼 그 부르심을 환영하고 그 신성한 선함 안에 자신을 배치하도록 이끌어야합니다.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1사무 3,6).

우리의 방어입니다. 우리는 불행이 있다고 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그 불행을 이겨내야 합니다.

어려움과 유혹이 올 때 마귀는 종종 이런 식으로 우리를 추리하게 만듭니다. 이런 불행이 있는 데, 이것은 하느님이 당신을 부르지 않으시는 신호이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추론의 궤변을 인식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으니 이런 잘못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로 나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항복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언젠가 우리가 선택한 길에 충실하기 위해 필요한 은혜에 대한 칭호이자 권리, 말하자면 권리를 우리에게 부여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기꺼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은혜가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과 협력해야 합니다.

그 협력에는 인내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 포함되며, 인내의 일부는 시련, 어려움, 유혹 및 자신의 불행을 견뎌내는 인내입니다.

“황금의 유혹을 받고도 온전한 이는 누구인가? 이 일이 그에게 자랑거리가 되리라. 죄를 지을 수 있는데도 짓지 않고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는데도 저지르지 않는 그는 누구인가? 이 때문에 그의 재산은 확고해지고 회중이 그의 자선을 낱낱이 이야기하리라.” (집회 3,10).

창조주께서는 영원부터 완전한 봉헌의 삶을 위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에페 1,4).

우리 중 누구도 그분의 신성한 부르심을 의심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빛이 있고, 우리의 연약함과 그분의 전능하심이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 기꺼이 주신 내면의 힘이 있으며, 그분의 빛과 함께 우리의 가난한 본성의 어둠도 함께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정확한 영감으로 우리를 찾으시는데, 우리는 의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심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다른 시간에 고려한 수천 가지 이유 외에도 외적인 표징, 즉 우리가 인간적인 동기없이 그분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여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지 않으셨다면, 오푸스 데이에서 자기 희생적인 일을 하는 우리는 정신병원에 들어가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정신이기 때문에 이 부름이 신성한 것임을 확신시켜주는 육체적, 외적인 무언가가 있습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 (루카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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