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2호
“제자들을 보시고..." (Videns eos...), 영적 생활과 겸손에 관한 편지, 1931년 3월 24일
서문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마르 6,48)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예수님께서 신성한 권능을 행사하시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며, 주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신 곳으로 배를 가져가기 위해 바람을 거슬러 노를 젓고 있는 제자들을 만나러 가시는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인간의 정열과 실수로 풍랑에 휩싸인 바다를 항해하며 때로는 우리의 모든 나약함을 느끼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구원의 배를 완성하기로 굳게 결심합니다. 때로는 역풍의 힘에 직면하여 우리 인간의 무력함의 목소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납니다.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사람들이 저를 짓밟고 온종일 몰아치며 억누릅니다. 저의 적들이 온종일 짓밟습니다. 정녕 저를 몰아치는 자들이 많기도 합니다, 지고하신 분이시여! (시편 56,2).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필요할 때마다 사랑의 전능하심으로 임재하셔서 우리 마음을 평화와 안전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마르6,50-51).
겸손의 필요성.
나는 당신의 신성한 부름이 당신에게 가져다주는 기쁨과 함께 친밀하고 진실한 겸손을 느끼게 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희망과 위대한 정신에 양립 할 뿐만 아니라 최선의 방어와 보증입니다.
“모든 안위가 칭찬받을 만한 것은 아니며, 오직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안위만이 칭찬받을 만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보가 강인함과 관대함의 조건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우리 각자는 성경에 나오는 거인과 같습니다.
“그 상의 머리는 순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청동이며, 아랫다리는 쇠이고, 발은 일부는 쇠로, 일부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인간 기초의 이 약한 점을 잊지 말고 신중하고 겸손하여 그 거대한 조각상에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떨어져 나와, 쇠와 진흙으로 된 그 상의 발을 쳐서 부수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쇠, 진흙, 청동, 은, 금이 다 부서져서, 여름 타작마당의 겨처럼 되어 바람에 날려가 버리니,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을 친 돌은 거대한 산이 되어 온 세상을 채웠습니다." (다니 2,32-35).
자녀 여러분, 성령께서 성 바오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 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 (1코린 10,12-13).
은총으로 인간은 완전하게 되었다, 신격화되었다.
영혼은 신격화됩니다. 새로운 삶은 이전 삶과 너무 대조적이며 주변에서 자주 접하는 삶과도 대조적입니다! 믿음은 은총의 상태에 있는 영혼이 진정으로 신성한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2베드 1,4)
인간에 대한 이 신학적 개념은 하느님이 인간과 다른 만큼이나 순수한 인간 및 자연 개념과 다릅니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체 안에서도 은혜 안에서 영혼의 영향을 통해 이 신성화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감히 제가 거룩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내가 거룩한 사람으로서 거룩하다고 말하고 나를 거룩하게 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면 나는 교만하고 거짓말쟁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한 자를 거룩하다고 이해한다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리스도의 몸도 땅 끝에서 머리와 머리 아래서 외치는 마지막 사람까지도 감히 말하되, 나는 거룩하니라. (성 아우구스티노).
겸손의 깊은 기초가 없는 그러한 신격화는 어떤 경우에는 가정과 진정한 희망의 타락, 교만, 그리고 조만간 자신의 약점에 대한 예기치 않은 경험에 직면하여 영적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자녀 여러분에게 숨길 수 없습니다.
저는 종종 바람에 의해 들어 올려져 꼭대기에 황금빛 구름을 형성하는 먼지를 예로 들곤 하는데, 이는 태양의 반사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혜는 우리를 높이 끌어올리고 선하심, 지혜, 효능, 아름다움, 즉 하느님의 모든 경이로움을 우리 안에 울려 퍼지게 합니다. 여러분과 내가 우리 자신을 티끌과 비참한 존재로 알고 있다면, 주님은 나머지를 주십니다. 그것은 내 영혼을 채우는 배려입니다.
하지만 겸손하지 않은 신격화는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신격화가 기업적이라면 더더욱 나쁩니다!
주님, “정녕 당신께서는 가련한 백성은 구원하시지만 거만한 눈들은 끌어내리십니다.” (시편 18,28).
내적 삶의 항해와 영적 일의 항해에서, 주님께서는 그분의 사도들에게 번영의 시간들을 허락하시고, 요소들, 그들 자신의 불행들과 환경의 장애물들은 벙어리가 된다: 혼은 그 자신과 주변 사람들 안에서, 신성한 아름다움과 힘을 즐기며, 여전히 흔들리는 믿음 안에서 만족과 평화와 안전으로 가득 차게 된다. 특히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종종 폭풍이 덜한 바다를 통해 수년 동안 그들을 인도하여 첫 번째 결정에서 그들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갓 태어난 아이들과 같이 아직 그들이 줄 수 없는 것을 처음부터 요구하지 않고, 그들이 갓난아이처럼 유아이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시금석은 겸손이기 때문에 자기 신격화는 눈을 멀게 하고, 우리가 진흙 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없다면, 나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신격화가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인식을 잃지 않는 한 그것은 선한 것이며, 영혼이 자신에게 주어진 영적 위대함을 자신의 행위, 공덕, 탁월함 등에 돌리면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겸손, 겸손! 우리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진흙으로 만들어졌고 우리의 교만과 비참함을 조금 알고 있으며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겸손은 성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두 가지 방법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경건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완전한 영적 경험을 할 때 발생하며, 육체의 약함이나 미덕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악을 바라는 사람들 또는 그들을 공격하는 악한 생각 때문에 자신에 대해 더 겸손하고 복종적으로 느낍니다. 반면에 다른 하나는 지성이 거룩한 은총으로 깊이 있고 충만하게 깨달음을 얻었을 때, 영혼은 일종의 자연스러운 겸손을 갖게 됩니다. 신성한 은혜에 의해 더 충만해지고 풍성 해지면 항상 하느님의 명령을 온전히 이행하더라도 더 이상 영광에 대한 욕망이 부풀어 오르지 않고 오히려 복종과 신성한 겸손으로 가득 찬 방식으로 모든 사람보다 열등한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포티우스의 디아도쿠스).
겸손의 토대 위에 구축하다.
건물의 기초를 만들기 위해서는 때때로 땅을 깊게 파서 큰 철제 지지대를 만들고 바위 위에 놓일 때까지 가라앉혀야 합니다. 그러나 단단한 땅이 바로 발견된다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반석은 경건, 신성한 아들됨, 하느님의 손에 맡기는 것, 성실함, 그리고 평범한 삶의 끊임없는 현실에 머리를 두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 저의 하느님, 이 몸 피신하는 저의 바위 저의 방패, 제 구원의 뿔, 저의 성채이십니다." (시편 18,2-3).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우리 주 예수님 자신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마태 7,24-27).
자녀들아, 저는 이제 여러분이 깊고 진실한 겸손을 쌓는 데 도움이 될 몇 가지 고려 사항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혜와 교훈을 업신여기는 자는 불쌍하다. 그들의 희망은 헛되고 노동은 벌이가 되지 않으며 그들의 작업은 결실이 없다." (지혜서 삼장, 11절). 그러나, "거룩한 이들에게 그 노고에 맞는 상급을 주고 그들을 놀라운 길로 이끌었다. 낮에는 그들에게 그늘이 되어 주고 밤에는 별빛이 되어 주었다." (지혜서 10,17).
저는 우리 인생의 항해를 통해 내적 또는 외적 번영의 시기가 있으며 심지어 장기간 지속될 수도 있지만, 오직 천국에서만 평화가 확정적이고 완전한 평온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10,34).
인간은 자연이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적 완전성을 스스로 실현하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지며, 결코 완전히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주어진 측면에서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관련하여 최고가 될 수도 있고, 아마도 그 특정 자연 활동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성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는 항상 완전함의 본질 인 자선 안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자선은 그 자체의 특별한 이유에 따라 무한한 자선, 즉 성령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증가에 끝이 없습니다. 자선을 증가시키는 원인, 즉 하느님도 그 힘이 무한합니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주체의 입장에서도 자선이 증가하더라도 더 증가할 수 있는 능력도 증가하기 때문에이 증가에 끝을 둘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생에서는 자선의 증가에 제한을 둘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바오로의 간증을 들으라.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필리 3,12).
성 바오로는 완벽한 나그네였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길로 인도하는 완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에 놀라지 마십시오:
“달려가자, 푯대를 향하여 힘쓰자, 우리는 이미 달려가고 있다; 지나간 일에 대한 행운의 확신으로 아직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부지런함을 잃지 말자.” (성 아우구스티노).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결함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표는 인생의 여정이 끝날 때까지도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곳입니다. 사람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위해 노력할 수 있으며, 전진하지 않는 사람은 후퇴하고 성장하지 않는 사람은 감소합니다. 집회서에서 우리는 읽습니다.
“나를 먹는 자는 여전히 배고프고, 나를 마시는 자는 여전히 목마르다.” (Si 24,29).
더욱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은총에 대한 반대와 저항의 원리, 즉 개인적인 죄로 인해 곪아 터지는 원죄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내 아들아, 거룩함에 대한 갈망은 우선 우리가 싸워야 할 첫 번째 전선인 게으름에 의해 반대될 것이며,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온화한 멍에를 어깨에 메고 싶지 않은 반항심, 거룩한 자유가 아니라 방탕에 대한 미친 열망, 관능, 그리고 항상 - 세월이 지날수록 더 교묘하게 - 교만에 의해, 그리고 우리의 불행은 결코 혼자 오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악한 성향에 의해 반대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자: 우리는 불행을 겪을 것이다. 우리도 나이가 들면 스무 살 때와 같은 나쁜 성향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금욕적인 투쟁도 마찬가지로 필요할 것이며, 우리는 주님께 겸손을 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욥기7,1). 하지만 평화는 바로 전쟁 속에 있으며, 평화는 승리의 결과입니다!
내 자녀들아, 비참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마음속에 죄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바로 그 물질인 죄에 대한 성향을 품고 있으므로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의인은 일곱 번 쓰러져도 일어납니다.” (잠언 24,16).
우리의 영적 투쟁에는 실패가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수에 직면했을 때, 실수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즉시 반응하여 참회의 행동을 취해야 하며, 이는 피가 상처에 오는 것처럼 빨리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 와서 이물질, 감염균과 효과적으로 싸울 것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너 사람의 아들아, 네 동포에게 말하여라. ‘의인이라도 죄를 짓는 날에는, 그의 의로움이 그를 구해 주지 못한다. 악인이라도 자기의 악을 버리고 돌아서는 날에는, 그 악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의인이라도 죄악을 저지르는 날에는 자기의 의로움으로 살 수 없다." (에제 33,11-12).
인간 성향의 장애물.
우리가 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 포기한 고귀한 인간적인 것들 자체에 대한 성향을 잃지 않고 그것들에 대한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그러한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각자의 자기 봉헌은 관대하고 분리된 자아의 선물이었으며, 우리가 그 자기 봉헌을 지켰기 때문에 충실성은 단순히 관성의 결과가 아니라 지속되는 사랑, 자유, 분리라는 지속적인 선물입니다. 성 토마스는 말합니다:
"내 아들아, 네 항복을 이끌어낸 것과 같은 것을 지켜야 한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마태 13,24).
하느님의 밭은 온 세상이며, 특별한 의미에서 여러분의 영혼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밭은 우리의 밭입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온 세상을 유산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신성화, 위엄,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마태 13,25).
하느님의 원수: 사람들은 하느님의 원수 인 사탄의 개입, 위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나는 우리가 반드시 마귀가 일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단 밑에서 기도하는 것은 저에게 많은 헌신을 줍니다.
“대천사 미카엘, 마귀의 간계와 교활함에 맞서 싸우는 우리를 지켜 주소서”. 개인적, 외적인 많은 것에서 악마의 영향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한 마디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서 교리와 거룩한 생활의 좋은 씨앗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꿈, 나쁜 꿈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파수꾼아, 밤이 얼마나 지났느냐?” (이사야서 21,11).
우리는 경계를 늦추지 말고 경각심을 가져야 하며, 경각심의 울부짖음을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반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일 가운데 나쁜 일이 닥칠 것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태 26,41).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마태13,26).
비유에 대한 신성한 교육학! 비유는 단순한 영혼들에게는 빛나고 분명하지만,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니,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 밭, 원수, 가라지...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가서 기도의 친밀함 속에서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세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싶다고 주님께 말씀드리세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잠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 잠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 하느님의 은혜로 반응할 때입니다. 우리의 포기는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약함 때문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즉시 주님께 말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나는 당신과 함께 강해질 것입니다. 패배는 나의 것이고 승리는 당신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악이 없기를 원합니다. 밭을 갈고 필요한 관심을 받고 아낌없이 뿌려진 씨앗을 받게 될 것입니다.
“원수들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주님. 당신께 피신합니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의 뜻 따르도록 저를 가르치소서.” (시편 143,9-10).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히브 12,1-2).
우리는 어려움을 겪을 것이나, 우리는 가난한 인간 본성의 성향을 극복하고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그것을 사용하고 우리 구주 주님을 신뢰합시다.
낙관적으로 생각하세요. 바오로 성인께서는 바오로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필리 4,4).
자녀 여러분, 사물의 긍정적인 면을 보십시오. 인생에서 가장 끔찍해 보이는 것은 그렇게 어둡고 어둡지 않습니다. 지적하면 비관적 인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의사가 환자를 볼 때 그의 모든 것이 썩었다고 말하지 않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자신감을 갖기를 바랍니다. 상대방을 보지 않고 나쁜 것을 긍정하지 마십시오. 아픈 사람은 즉시 묘지의 시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에게 적절한 치료법을 제공하여 그를 치료할 것입니다. 우리 영 안에는 약전 전체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문제의 장애물.
항상 고요합시다. 우리가 경건하고 성실하다면 지속적인 슬픔은 없을 것이며,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 자신을 위해 발명하는 슬픔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 자녀로서 하느님의 어머니의 품 안에서 기쁨과 평화 속에서 살 것입니다. 때때로 모든 사람은 내면의 세계에서 작은 갈등을 겪고 있으며, 자존심은 그것을 중요하게 만들고 우리의 평화를 빼앗기 위해 그것을 크게 만드는 데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런 사소한 일에주의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이렇게 생각하세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죄인입니다.”
개인적인 문제가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을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에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바치고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슬픔을 사라지게하는 방법입니다. 대부분의 모순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빚진 봉사를 잊어버리고 우리 자신에게 너무 몰두한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자신을 잊고 영혼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하느님께서는 기쁨으로 가득 찬 겸손으로 보상하십니다.
그리고 희생자 사고방식도 없습니다. 희생자는 오직 한 분,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예주 그리스도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침착함과 봉사 정신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2코린 4,15-18).
내면의 어둠의 장애물.
우리는 아마도 또 다른 장애물, 즉 내면의 어둠을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불쌍한 마음이 어둠 속에 있을 수 있으며, 그 어둠은 몇 순간, 며칠, 한 계절, 몇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부르짖을 때입니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으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지시고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크십니다.” (시편 86, 3. 5).
그리고 이제 성 요한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그 엄청난 사건을 묵상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요한9, 1-3).
실명이 온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거룩하고 더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하시려는 수단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 즉 우리의 믿음을 더 신학적으로 만들고 하느님 이외의 다른 이유에 덜 의존하게 만드는 문제입니다.
“지식이 적은 사람이 자신의 이해에 따라 보이는 것보다 많은 지식을 가진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것을 더 확신하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이성으로 보는 것, 즉 착각할 수 있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 즉 속을 수 없는 것을 훨씬 더 확신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요한 9, 6-7).
자신을 정결하게 하면 다시 밝고 빛나는 신성한 시력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낮아지실 때 높이신다. 혼이 스스로 인도 받도록 허용하고, 순종하고, 불굴의 의지로 정화를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산다면, 의심하지 않는 빛으로 보게 될 것이며, 그 전에는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것을 놀랍게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 8,12).
궁극적으로 우리의 갈등은 겸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세리를 보세요:
"그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더 쉽게 다가오셨습니다. 감히 하늘을 향해 눈을 들지 않은 그는 이미 하늘을 만드신 분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아니면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않는지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면 그가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사랑하면 그가 당신 안에 계실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내적 건조의 장애물.
자녀 여러분, 언젠가 규범을 하며 피곤하고 추위를 느낀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코미디로 보인다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가 자녀들과 노는 것처럼 우리와 함께 놀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시며 여러분과 저는 하느님 앞에서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땅 위에서 뛰놀며.” (잠언 8,31).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놀고 있으며, 하느님은 부모가 자녀와 놀듯이 우리와 함께 놀고 계십니다.
어느 순간, 힘들고 지루한 순간에 우리가 코미디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면, 우리는 이렇게 반응해야 합니다: 신성한 관중과 함께 인간적인 코미디를 할 놀라운 시간이 왔습니다. 관중은 하느님, 즉 성부, 성자, 성령, 축복받은 삼위일체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우리 주 하느님과 함께 천사들과 하느님의 성도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경건의 삶, 희생의 삶, 사랑의 삶을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결을 거스르며 살 때 하느님 앞에서, 사랑으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희극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광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놀아 주시는 주님을 기쁘게하기 위해, 개인적인 만족없이 희생으로 사랑을 위해 희극을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사랑을 위해 사는 것, 지상의 보상을 구걸하지 않고, 비참한 작은 불륜을 찾지 않고, 그것만으로도 자랑스럽고 보람을 느끼는 것, 평범한 산문을 영웅적인 시의 연으로 바꾸는 것,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름답습니다.
실천은 사랑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요한 14,21).
주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꿀과 벌집보다 더 달콤한 그분의 이해할 수없는 판단을 이해하게 하신다면, 하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좋아서가 아니라 의무를 다해야 하기 때문에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일해야 하며, 선한 의지로 일해야 합니다. 영혼을 행복하게 하는 쾌락에 대한 사랑은 주님과 그분의 거룩한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우리의 성향에 반하는 고통과 기쁨에 기초합니다.
유혹의 장애물.
“너를 시험하도록 파견된 자도 나였다.” (토빗기 12,13).
주님은 우리의 모범이시며, 따라서 하느님이신 그분은 우리가 용기로 충만하고 그분과 함께 승리를 확신할 수 있도록 그분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영혼이 떨리는 것을 느끼면, 그럴 때, 당신의 하느님 께 말씀하고 그에게 말하십시오.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는 쇠약한 몸입니다. 저를 고쳐 주소서, 주님, 제 뼈들이 떨고 있습니다. 제 영혼이 몹시도 떨고 있습니다.” (시편 6,3-4).
“너를 창조하신 분, 너를 빚어 만드신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이사야서 43,1).
진흙탕 속에 있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 고민하지 마십시오. 근심하지 마십시오. 당신과 나는 영원 전부터 신성한 부르심에 의해 선택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에페소 1,4).
우리의 불쌍한 개인적 불행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하느님의 도구인 우리는 겸손을 잃지 않고, 우리의 약함을 아는 지식을 잃지 않는다면 효과적일 것입니다. 유혹은 우리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 줍니다.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과 동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유혹은 쉽게 거절할 수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은혜라도 모든 정욕을 물리치고 영생을 얻기에 충분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전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욕과 열정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유혹은 기도와 고행으로 이깁니다. "저는 그들이 아팠을 때 자루옷을 제 의복으로 삼고 단식으로 고행하였으며 기도로 제 가슴을 채웠습니다.” (시편 35, 13).
우리가 신실하다면 세상에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다는 확신을 자기 헌신의 삶으로 이어가세요. 불륜의 거짓 유혹에 맞서 강하고, 온전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세요. 그래서 우리는 시편 낭송자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나를 쓰러뜨리려 그렇게 밀쳤어도 주님께서는 나를 도우셨네.” (시편 118,13).
주님,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유혹이 올 때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힘과 은혜의 도움을 주셔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가 겸손해질 수 있도록 시험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심리적 갈등에 대해 경고하고 싶습니다. 몇 년 전에 착하고 신중하며 경건한 한 수사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마흔 살이 되면 기혼자는 별거를 원하고, 수사는 사제가 되고 싶어 하고, 의사는 변호사가 되고 싶어 하고, 변호사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 하는 등 마치 영적 지진과도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 종교인이 말한 대로 일이 정확히 일어나지는 않거나 적어도 일반적인 규칙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제 아이들이 가능한 악을 인식하고 이 위기를 겪는 사람이 극소수라도 미리 경고 받기를 바랍니다.
형제 중 한명이 이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의 경건을 젊어지게 하고 활력을 불어 넣고 특별한 애정으로 대하고 즐거운 직업을 제공함으로써 그를 도와야 할 것입니다. 정확히 마흔 살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지만 마흔 다섯 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휴식의 계절이 있는지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네 사람이 아니라 모두와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매우 어린아이와 같지만, 유아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흙 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과 피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 오푸스데이에 옵니다. 자신의 손과 발을 놀랍게 발견하는 몇 달 된 아이처럼 인생의 완전한 성숙에서 이것을 깨닫는 것은 우스꽝스러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약점과 연약함을 알고 하느님을 섬기러 왔지만,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드렸다면 사랑은 우리가 불충실 해지는 것을 막아 줄 것입니다.
나머지는 불충실하고 땅에 대한 사랑에 집착하는 것은 슬픔, 수치심, 고통으로 가득 찬 매우 쓰라린 삶의 시작을 의미할 것임을 확신하십시오. 내 자녀들,
에사우처럼 장자권을 팔지 말고, 세월이 지나도 콩 한 접시와 교환하지 않겠다는이 결심을 굳게 지키십시오. 이런 식으로 오랜 세월의 희생적인 사랑을 낭비하는 것은 큰 부끄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세요.
¨제가 맹세하고 실천하니 당신의 의로운 법규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시편 119,106).
항상 우리의 신실함을 보상해 주시고 모든 것이 최선임을 상기시켜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동시에 교만해질 수 있는 끊임없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성 어거스티노의 말씀처럼.
"이런 식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더 큰 선에 기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유익하게 인도 하시므로 길을 잃고 지나치게 도달하는 사람들조차도 더 겸손 해지고 경험이 많아지기 때문에 덕이 발전하도록 만들어집니다. 그들은 의로운 삶의 바로 그 길에서 자신이 걷는 안전을 자신에게 돌리거나 번영의시기에 스스로에게 "우리는 다시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기쁨과 떨림으로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성 어거스티노).
낙담의 장애물.
실수를 극복하기 위해 수년 동안 고군분투했더라도 우리 모두는 실수를 합니다. 고행의 투쟁에서 낙담할 때 우리는 교만해집니다. 우리는 신실해지고자 하는 열망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익한 도구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무익한 종들과 함께 우리가 손을 들고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우리에게 은혜롭게 내미는 손을 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주님은 세상에서 위대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교만한 자만이 자신의 발에 진흙이 묻어 있다는 사실에 놀랄 뿐입니다. 참회와 속죄의 행위, 그리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우리 양심에 있는 결점 외에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결점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합시다. 바로 사랑의 고통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과 겸손의 친밀함 속에서 우리 삶에도 많은 사랑이 있다고 주님께 감히 말합시다. 우리는 잘못이 진짜였지만 진짜는 또한 그분 자신이 우리 안에 넣어 주신 사랑이며, 우리 마음의 모든 힘으로 그분을 섬길 수있게 해준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참회 말을 화살기도로 자주 말하십시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요한 21, 17).
당신의 수호천사에게, 저도 제 수호천사에게, 우리가 상처받고 통회하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잘못을 보고 싶지 말라고 말해 주세요. 퇴비장에 피어난 백합처럼 우리 마음에서 태어난 이 선의를 주님께 전해달라고 부탁하세요.
여러분이나 저의 개인적인 불행, 우리의 패배로 인해 낙담하지 마세요. 마음을 열고 단순하게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이 우리의 힘이시기 때문에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힘으로 계속 길을 걸어 갑시다.
무질서한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슬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얼마나 큰 실패, 얼마나 작음! 우리가 이런 비참함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슬픔과 낙담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을 통해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면 얼마나 기쁨의 원인이 될까요!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고려할 때 화를 내지 말아야하는 것은 겸손에 속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좋은 것들에 대한 경멸이 겸손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배은망덕에 속합니다. 그리고, 이 경멸에서 게으름이 나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또한 이 경멸에서 영적인 것들에 대한 혐오감, 미지근함, 내면의 삶의 무덤이 나옵니다.
만약 당신이 낙담하고 있고, 특히 자신의 비참함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다면, 온유한 마음으로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겨야 할 때입니다. 어느 날 한 거지가 알렉산더 대왕을 만나러 나와 자선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는 그를 멈추고 다섯 도시의 영주가 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불쌍한 사람은 혼란스럽고 당황한 채 외쳤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자 알레한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너는 네가 누구인지에 따라 요청했고, 나는 내가 누구인지에 따라 베풀었다."
하느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고치신다.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으니. 바로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 (시편 130,1-8).
우리는 흙의 먼지로 만들어졌습니다. 깨지기 쉽고, 부서지기 쉽고, 일정하지 않은 토기 점토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산산조각 난 도자기 냄비를 철사를 이용해 어떻게 고쳐서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지 보셨을 겁니다. 이렇게 다시 조립된 냄비는 훨씬 더 아름답고 특별한 우아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별한 우아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전히 유용하다면 훌륭합니다. 게다가, 이 냄비들은 추론할 수 있다면 결코 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깨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특히 그것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이라면 수선되는 것은 더 이상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들아, 영혼을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는지 말해 주겠어요?
우리의 불쌍한 개인적 불행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가치의 신성한 본질을 지닌 존재, 즉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좋은 도구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작고 비참하다고 느낄수록 진정한 겸손으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든 주님으로부터 공급받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발걸음을 굳건히 하시며 그의 길을 마음에 들어 하시리라. 그는 비틀거려도 쓰러지지 않으리니 주님께서 그의 손을 잡아 주시기 때문이다.” (시편 37,23-24).
때때로 여러분은 성 루카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나인의 장면을 개인적인 삶에서 경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루카 7,12-15).
내면의 삶은 다시 시작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삶은 참회, 사랑, 보속의 많은 행위를하는 것으로 구성됩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높이 기립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구하시어 원수들이 저를 두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주 저의 하느님 제가 당신께 애원하자 저를 낫게 하셨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제 목숨을 저승에서 건지시고 저를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리셨습니다.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께 충실한 이들아. 거룩하신 그 이름을 찬송하여라.” (시편30,2-5).
실패의 장애물.
어떤 때는 손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처럼 새롭게 들려오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귀 기울이며 다시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루카 5,4-8).
어부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위엄 앞에서 우리의 교만으로 인한 실패를 염두에 두고 우리가 처한 비참함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베드로와 똑같이 말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불쌍한 죄인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분과 저에게 반복합니다.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루카 5,10). 이제부터 너희는 신성한 명령과 신성한 사명과 신성한 효능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너희 진흙 발이 깨지지 않을 것이니, 이는 너희가 그 불일치를 알기 때문이며, 너희가 지혜로울 것이니, 이는 너희가 오직 하느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너희 가운데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고 입증할 수 있느냐?" (요한 8,46).
밤이되어 양심성찰을 하고 계산을 하고 합산해 보면, 저는 가난하고 겸손한 종입니다! 나는 여러 번 말합니다.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시편 51,19).
나는 비굴한 겸손으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가난하고 쓸모없는 종으로 여기고 통회하고 굴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보시면 우리를 멸시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가장 사랑스러운 마음의 풍요로움과 큰 힘에 우리를 그분 자신과 일치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한 신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신성을 가질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자신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보라 나는 너희 죄를 사하고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하느님이라 내가 너희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자비에 합당하거니와 너희는 기억하여 스스로 고칠 기회를 삼으라 하셨느니라. 바오로는 이것을 알면서도 하느님이 잊어버린 죄를 항상 기억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에 사도라고 부르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나는 그 중 으뜸입니다. 성 바오로는 과거형으로 말하지 않고 현재형으로 말 하였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죄가 용서되었지만 바오로는 그 죄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무효화하신 것을 그는 자신이 공개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택함의 그릇이라고 부르시고 그는 자신을 첫 번째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자신의 죄를 잊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할 수 있었을까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 바오로는 자신이 마지막 사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복음 전도의 사명을 느낍니다. 당신과 나처럼. 당신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불쌍한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는 더 이상 그분을 화나게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저지른 모든 사악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칭찬하고 우리가 죄인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면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보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겸손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생각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저는 기적과 같았으며 당신은 저의 굳센 피신처이셨습니다." (시편 71,7).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동처럼 되었지만, 나의 하느님, 당신은 나의 힘이 되신다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의 능력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2코린 12,7-10).
하느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고자 하실 때, 그 일이 그분의 일임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부족한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소함의 압도적인 무게를 잘 알고 있는 여러분과 저는 주님께 말해야 합니다.
제가 비록 비참해 보일지라도 주님 손에 들린 신성한 도구라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저는 거룩한 교회를 섬기며 살아오는 동안 제가 한 일들은 제가 직접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저를 사용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요한 3,27).
요한복음에 나오는 몇 가지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요한 13,36-38).
그러므로 우리는 불타는 마음으로 주님께: 예, 우리는 주님께 충실 할 것이며 어떤 희생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주님께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께 말할 것입니다. "당신의 은혜로; 어머니, 당신의 도움으로 저는 너무 연약하고 실수하고 작은 실수를 너무 많이해서 당신이 저를 버리면 더 큰 실수를 할 수있는 제 자신을 봅니다!”
내 자녀들아, 자신을 낮추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 열두 제자의 발에 입맞추셨을 때 우리의 발에 입맞추신 것을 보십시오. 그분은 그분 자신이고 우리는 불쌍한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신실하고 겸손하다면 우리는 깨끗하고, 순종할 것입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효과적일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할수록 우리는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우리는 명령하러 온 것이 아니라 순종하러 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섬기러 왔습니다. 세례자의 말씀을 여러 번 묵상하세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 20,28).
“위대해지고 싶다면 작은 것부터 시작하고, 하늘에 닿을 만한 건물을 짓고 싶다면 먼저 겸손의 기초를 닦는 것을 생각하세요. 지어야 할 덩어리가 크고 건물이 높을수록 기초를 더 깊게 파야 합니다. 그리고 건축 중인 건물은 위로 올라가는 반면, 기초를 파는 사람은 아래로 내려갑니다. 그런 다음 건물은 올라 가기 전에 스스로를 낮추고 굴욕 후에 정상을 세웁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결함은 겸손의 이유입니다. 겸손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성실합시다. 자신에 대해서 성실합시다.
겸손의 원천이기 때문에 결함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내가 당신의 결함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놀라지 마십시오. 위대한 카스티야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목의 기초이자 토대이며, 겸손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인내하고 싶다면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려면 정직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이끌어주는 사람들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필리 1,10).
무엇이 최선인지 분별하는 법을 알게 하시고, 끝까지 순수하고 범죄하지 않게 하소서. 이것이 우리가 인내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진실하게 지내도록 합시다. 사람들은 익명을 선호하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 정직해지는 것은 어렵습니다. 공적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하는 사람들은 종종 익명의 편지를 많이받습니다. 하느님에 관한 한, 익명을 유지하기를 원하고 개인적인 기도와 양심성찰에서 아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군중의 혼란 속에서 감히 위대한 행렬이 지나갈 때 더러운 모욕과 악당을 던지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지고 공개적으로 얼굴을 마주보고 혼자 있다면 침묵에 겁을 먹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익명 성과 비겁함으로 이어지는 불성실은 거리의 소란 속에서 알 수없는 손을 들어 대성당의 고딕 양식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을 돌로 부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자유와 개인적 책임을 사랑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 사상은 자유로운 행위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자신을 알게합니다. 매일 양심을 시험하는 것은 우리에게 자기 지식과 진정한 겸손을 줄 것이며 결과적으로 하늘로부터 인내를 얻을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어둠이 나를 뒤덮고 내 주위의 빛이 밤이 되었으면! 하여도 암흑인 듯 광명인 듯 어둠도 당신께는 어둡지 않고 밤도 낮처럼 빛납니다." (시편 139,1-12).
자신에게 진실해지는 것은 여전히 더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장사는 사람을 제값에 사서 본인이 생각하는 가격에 파는 것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진정성은 어렵습니다. 교만은 기억에 폭력을 가하고 기억을 가리고, 자신이 저지른 악을 선으로 덮을 정당성을 찾아내어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양심의 목소리를 점점 더 약해지고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는 논증과 이유를 쌓아갑니다.
“의지는 선 또는 명백한 선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선하지 않은 것이 어떤 식으로든 선과 닮지 않으면 의지는 결코 악을 향해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열정이나 그릇된 의지는 이해를 강요하고, 성급하게 동의하게 만들거나, 반대되는 특정 측면에 대한 고려를 회피하여 다른 한편으로 선호하는 다른 측면을 포용하고 그 성향을 선으로 장식합니다.
겸손이 없으면 양심은 변형됩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깊이 겸손하지 않으면 양심에 기형이 생기기 쉽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살면서 나약함 때문에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생각, 분명한 양심: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나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겸손이 적을수록 이러한 변형의 결과는 더 심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에 대한 이러한 주관적인 확신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새로운 도덕의 전령사, 이러한 악의 주장에 대한 선교사 및 예언자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십자군의 열정으로 자신의 오류를 전파하고 새로운 교리에서 서투른 행동의 정당성을 발견한 약한 사람들을 뒤따라 가며, 따라서 겸손한 사람에게는 즐거운 의무 인 교정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느낍니다.
"너희에게 예언하는 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마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그들은 제 마음에서 나온 환시를 말하고 있을 뿐 주님의 입에서 나온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나를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줄곧 말한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평화를 누릴 것이라고 하신다.” 제 고집스러운 마음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도 말한다. “재앙이 너희에게 닥칠 리 없다. 이제 내가 거짓 꿈을 예언하고 거짓말과 허황된 말로 내 백성을 잘못 인도하는 예언자들에게 맞서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결코 그들을 보낸 적이 없으며 그들에게 명령한 적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예레 23, 16-17. 32).
이 성경 말씀을 읽은 후 평범한 영혼이 분별하기 어렵다고 말하면, 나는 당신에게 확실한 기준을 줄 것입니다. 우선 축복받은 동정녀에 대한 사랑과 진정한 겸손의 시금석 인 순종입니다.
영적 지도에 대한 성실성.
우리는 성인이 되기 위해 오프스데이에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직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로움을 입히려 하지 않고 단순함으로 우리의 약점을 인정할 것이며, 엄청나게 눈을 멀게 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거꾸로 보게 만드는 교만을 피할 것입니다. 내 자녀 여러분, 여러분 자신에게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행동하십시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헌신의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겸손해야 하고, 영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 영혼의 모든 구석구석에 공기를 불어넣어야 합니다.
우리의 고행에는 복음의 단순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복잡하게 만들어 우리의 마음을 모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짧은 시간이라도 하느님 앞에서 단순한 마음과 성실함에서 멀어지게 하는 연속성의 해결책을 우리 삶에서 창조함으로써 성령의 활동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걱정하는 경우, 우리는 벙어리 악마에 대해 미리 경고하면서 그것을 말합니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모든 것을 말하면 항상 이길 수 있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침묵하는 사람은 사탄과 비밀이 있고 사탄을 친구로 삼는 것은 나쁜 일이기 때문에 설명됩니다.
매우 성실하라 말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허락하지 말라.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길이 엉키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많은 것이 됩니다. 고백하러 간 집시의 이야기를 기억하십시오. 신부님, 저는 고삐를 훔쳤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노새가 있었고 그 뒤에는 또 다른 고삐, 또 다른 노새, 그리고 최대 20 마리의 노새가 있었습니다.
내 아이들아, 다른 많은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삐가 부여되자마자 다른 모든 것, 전체가 부끄러운 것들이 나중에 옵니다.
어렸을 때 저를 많이 괴롭혔던 두 가지가 있었는데, 바로 방문 온 어머니의 여자 친구들에게 볼에 인사하는 것과 새 옷을 입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다정하게 말씀하셨지요.
호세 마리아야, 부끄러워할 것은 오직 죄지을 때.
수년이 지난 후 저는 그 말에 매우 깊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악마는 우리의 수치심을 빼앗아 실수를 저지르게 한 다음 실수에 대해 말하지 않도록 다시 돌려줍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커피 테이블 주위에서 과장하여 자랑하는 것과 같은 실수 일 것입니다.
저는 매우 성실하게 임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알고 싶지 않은 일이 당신에게 일어날 때,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 선한 목자에게 즉시 달려 가서 말하십시오. 사람이 큰 돌을 등에 짊어지고 걷고 주머니에 무게가 100 그램 인 작은 돌이 가득 차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을 마드리드에 배치하면 그가 걸어야 하는 거리가 “푸에르타 델 솔”에서 “쿠아트로 카미노스까지”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가 여행의 끝에 도달하면 그는 주머니에서 자갈을 하나씩 꺼내지 않고 큰 돌을 먼저 내려 놓을 것입니다. 내 아이들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우리를 짓누르는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행동 방식은 큰 어리석음이며 불성실의 원칙입니다.
아무것도 또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쓴 열매가 오면 그렇게 말하십시오. 모든 구제책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크고 큰 범죄였을지라도. 모든 것을 말 하십시오. 그러면 해결될 것입니다. 당신의 말을 듣는 사람은 자신도 흙으로 만들어졌고, 실수라면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고통은 양심의 가책이나 잘못된 양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더욱 진솔하게 말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은 가장 악마적인 유혹입니다. 우리가 진실하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과 수치심은 인내의 가장 큰 적입니다. 우리는 진흙으로 만들어졌지만 우리가 말하면 진흙은 청동의 힘을 얻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에 옮기면 하느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평온함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서 성도가 되기 위해 이 일에 왔으며, 이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이 병을 고치러 병원에 갔을 때 진찰을 해야 하니 옷을 벗으라고 하는데 싫다고 하고, 어떤 증상이 있느냐고 하는데 말하기 싫다고 하면... 그 사람은 병원으로 데려갈 것이 아니라 정신병원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형성하는 것이 임무인 사람들이 우리의 모든 개인적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느님과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을 형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성실함으로 만 우리는 가능한 한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인 완전성, 인간 완전성, 선을 행하는 인내를 달성할 것입니다.
우리는 즉시, 아낌없이, 우리 자신을 바쳐야 합니다.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1사무 3,6).
배를 불태워 후퇴의 가능성을 없애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성은 우리 영혼의 구석에 숨을 곳이 있는 한 존재할 것입니다.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일 때에도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길을 잃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처음부터 대화를 시작하면 모든 것이 더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영적 평온과 좋은 신성의 시간에는, 산에서 풍부하게 나오는 깨끗한 물을 댐으로 막고, 낮은 물이 올 때 마시고, 밭을 관개하고, 빛과 힘을 생산할 수 있는 좋은 저수지를 가지고 있는 기술자들처럼 행동하십시오. 이제 여러분이 명료함이 풍부하고 충실하고자 하는 열망을 마음 속에서 발견했으므로, 언젠가 주님께서 우리가 어둠에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신다면 복되신 성모 마리아를 부르면서 그 명료함으로 돌아 가기로 굳게 결심하십시오.
죽도록 충성합니다.
자녀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매 순간 우리의 작은 의무에 충성하며, 우리가 매우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 즉 영원한 내세를 기다리는 동안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는 데 헌신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뿐입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시다.” (1베드 1, 24-25).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히브 9,27).
어떤 사람은 유아기에 죽고, 어떤 사람은 여러분처럼 젊을 때 죽고, 어떤 사람은 완전히 성숙할 때 죽고, 어떤 사람은 노년에 이르러 죽습니다. 우리는 짧은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개인적 성화와 사도직에 진정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가 받은 재능을 책임감을 가지고 충실하고 충성스럽게 잘 관리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신성한 부르심은 우리에게 무형적이고, 확고하고, 순결하고, 즐겁고, 믿음과 순결, 도에 대한 확실한 충실함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 24,13).
그래서 우리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신앙에 충실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군중에게 빵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이신 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요한 6,26).
주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은 그분의 신성을 드러내어 우리가 믿음을 갖도록 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요한 6,28-30).
믿으려는 의지와 영혼의 겸손한 기질이 부족하면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보지 못하고, 지성은 초자연적 인 감각없이 안도감 없이 평면에서 움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의 빵과 성체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들은 계속해서 땅의 빵을 생각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요한 6,34).
그리고 그가 객관적인 초자연적 내용을 회피할 가능성 없이 믿어야 할 신비를 정확한 용어로 그들에게 제안할 때, 그가 그들에게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은혜를 주는 신학 적 신앙 행위를 요구할 때, 그들은 떠납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66-69).
이제 저는 여러분과 저에게 베드로의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을 구합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한 따름입니다. (갈라 5,6)
사랑을 위한 순결에의 충실.
나의 자녀들아, 거룩한 순결을 사랑하십시오. 우리의 순결은 즐거운 확언이며,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에 헌신하는 우리의 헌신의 논리적 결과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애정을 피조물에게 둘 수도 있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온전하고 젊고 활기차고 깨끗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기꺼이, 매우 초자연적인 이유로, 주님의 은총에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우리는 고귀하고 거룩한 결혼 상태에 대해 큰 존경과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혼인성사는 큰 신비입니다”. (에페 5,32).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창조력에 대한 놀라운 참여로서 또 다른 직업의 길로 봅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 고귀하고 깨끗한 사도적 독신에 대한 소명이 더 높다는 것은 신앙의 특정 교리입니다.
천사는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천사가 아니라 깨끗하고 강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하느님의 은혜로 나아갈 것입니다!
지상의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위해, 우리 조상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충실한 삶으로 행한 일을 우리도 사랑의 사랑을 위해 행합시다. 그러므로 거룩한 순결이여, 많이 사랑하고, 공정한 사랑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부르면 우리는 이 신성한 일의 방식에서 인내하고 즐겁고 초자연적으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껴지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우리는 흙으로 만들어졌으니까요.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2코린 4,7).
신성한 보물을 담는 흙 그릇. 지금은 당신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때를 대비하여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를 위해,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시간을 사용하고 교만을 다스리고, 이타적으로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상상력을 억제하기로 결심하는 등, 작지만 효과적인 많은 세부 사항에서 당신의 헌신의 질을 보호하고 동시에 드러내는 충실을 당신에게 요청합니다.
어느 시점에서 내면의 투쟁이 더 어려워지면 우리의 사랑이 진짜임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항복을 맛보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패배하는 것은 사기, 비참한 속임수와 같을 것입니다. 바오로 성인의 외침을 잊지 마세요.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로마 7,24).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영혼으로 신성한 대답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2코린 12,9).
하느님의 은혜로 아낌없이 주신 젊은 시절의 사랑은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충실함은 사랑의 완성입니다. 하느님에게 주어진 영혼의 삶에서 모든 문제의 밑바닥에는 항상 부패와 불결의 지점이 있습니다. 충실함이 완전하고 깨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즐겁고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소명에 대한 충실성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충실하세요. 그것은 제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충실하다면 영혼과 거룩한 교회에 대한 우리의 봉사는 풍성한 영적 열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인생에서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소명이나 사랑에 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도 이런 식으로 추론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의무의 짐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의무도 전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만함의 반응이며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에서 자신을 악마로 만드는 것입니다.
"선의 타락은 매우 나쁘다.'라는 오래된 전통 격언이 있습니다. 오직 은혜를 겸비한 겸손만이 이러한 타락, 즉 최고에서 최악으로 넘어가는 짧은 순간을 막을 수 있습니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루카 11,24-26).
한 가지를 포기했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미친 사람의 논리입니다. 우리는 보물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이유로든 그 과정에서 보물의 일부, 심지어 상당한 부분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우리 자신에도 불구하고 남은 것을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가장 합리적인 태도는 더 이상 아무것도 잃지 않도록 지금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것에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잃어버린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남은 것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겸손하고 통회하는 보살핌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고 심지어 그것을 능가하게 만들 것입니다.
"회개자의 회개 강도가 죄로 인해 넘어진 상태보다 더 큰 은혜의 상태에 비례할 수 있기 때문에, 회개자는 때때로 이전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고 일어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길의 가시덤불에 집착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등을 돌렸기 때문에 자신이 비참한 사람이 될 것임을 알고 자신의 자유 의지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모두에게 불행이 있다고 다시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행은 결코 하느님의 부르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전사들이 갑옷 안에 자신을 배치한 것처럼 그 부르심을 환영하고 그 신성한 선함 안에 자신을 배치하도록 이끌어야합니다.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1사무 3,6).
우리의 방어입니다. 우리는 불행이 있다고 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그 불행을 이겨내야 합니다.
어려움과 유혹이 올 때 마귀는 종종 이런 식으로 우리를 추리하게 만듭니다. 이런 불행이 있는 데, 이것은 하느님이 당신을 부르지 않으시는 신호이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추론의 궤변을 인식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으니 이런 잘못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로 나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항복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언젠가 우리가 선택한 길에 충실하기 위해 필요한 은혜에 대한 칭호이자 권리, 말하자면 권리를 우리에게 부여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기꺼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은혜가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과 협력해야 합니다.
그 협력에는 인내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 포함되며, 인내의 일부는 시련, 어려움, 유혹 및 자신의 불행을 견뎌내는 인내입니다.
“황금의 유혹을 받고도 온전한 이는 누구인가? 이 일이 그에게 자랑거리가 되리라. 죄를 지을 수 있는데도 짓지 않고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는데도 저지르지 않는 그는 누구인가? 이 때문에 그의 재산은 확고해지고 회중이 그의 자선을 낱낱이 이야기하리라.” (집회 3,10).
창조주께서는 영원부터 완전한 봉헌의 삶을 위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에페 1,4).
우리 중 누구도 그분의 신성한 부르심을 의심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빛이 있고, 우리의 연약함과 그분의 전능하심이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 기꺼이 주신 내면의 힘이 있으며, 그분의 빛과 함께 우리의 가난한 본성의 어둠도 함께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정확한 영감으로 우리를 찾으시는데, 우리는 의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심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다른 시간에 고려한 수천 가지 이유 외에도 외적인 표징, 즉 우리가 인간적인 동기없이 그분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여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지 않으셨다면, 오푸스 데이에서 자기 희생적인 일을 하는 우리는 정신병원에 들어가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정신이기 때문에 이 부름이 신성한 것임을 확신시켜주는 육체적, 외적인 무언가가 있습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 (루카 18,22).
우리는 평생 충성하려고 노력하고, 우리가 충성스럽지 않다고 느끼면 언제든지 투챙하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면 승리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투챙에서 지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불행을 그분의 발 앞에 내려놓읍시다. 그러면 그분이 얼마나 높이 서 계시는지,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지상 생활을 신성화하도록 어떻게 도와주실지 보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최고의 순간에도, 우리 존재의 가장 숭고한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합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더 이상 놀라게 할 수 없도록 우리에게는 거룩한 복음의 증언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사랑과 신성한 확신이 쏟아지는 분위기 속에서, 가장 친밀하고,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사랑받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루카 22,24).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연약함을 느낄 때 놀라지 맙시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연약함 속에서도 인내하며 모든 민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성인이 되었던 사람들을 기억합시다. 싸우고 걸을 준비를 합시다.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매일 조금씩 수정하다.
항구에 도착하기 위해 공해에서 배들이 하는 것처럼, 매일 조금씩 바로잡아 가며 끊임없이, 기쁘게 나아갑니다. 성도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선의와 성실함을 가지고 내면의 삶에서, 투쟁에서, 때로는 승리하고 때로는 패배하면서, 희망이시며 믿음이시며 사랑이신 하느님을 대하려고 노력하면서 바로잡으려 노력했습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투쟁을 기뻐하시며, 이는 우리가 내면의 삶, 즉 그리스도인의 완성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확실한 신호입니다.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세요.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르 10,35-39).
영광에 이르는 길은 죽음의 해협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로마 6,3-4).
자녀 여러분, 존과 제임스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으로 가득 차십시오.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필리 1,6).
우리가 협력한다면, 하느님의 힘을 확신하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제 피신처 하느님이시건만...” (시편 43,2).
우리의 교육학은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구성되며, 상식과 초자연적 감각으로 행동하는 것, 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이 교육학의 다른 표현들 중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큰 신뢰, 타인에 대한 신뢰, 우리 자신에 대한 불신. 자신의 판단을 쉽게 믿지 마십시오.
귀금속을 시험하는 것처럼, 우리의 판단이 정금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특히 우리를 도울 직위의 은혜를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고려하여, 인간과 초자연적인 문제에서 우리의 판단이 정금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전에 한 실언을 기꺼이 바로잡아야 합니다. 바로잡는 것은 굴욕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초자연적인 교육학 안에 있는 의로움으로 가득 찬 행위입니다.
“한 사람의 초자연적 선이, 온 우주의 자연적 선보다 낫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애정과 행위에 객관적인 위계를 부여하는 믿음과 초자연적 비전을 항상 우리의 지성 안에 두도록 하느님께 구해야 합니다. 이 기준은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준을 구해야 합니다.
성 요한이 쓴 것을 나와 함께 보라.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요한 4,5-6).
주님께서 피곤해하시는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게다가 주님은 배고프십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옆 마을로 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목이 마르십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요한 4,7).
그 후, 그리스도의 사제적 영혼이 잃어버린 양들을 회복하기 위해 피곤함과 배고픔과 갈증을 잊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그 모든 매혹적인 대화.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시자, 제자들은 서로 “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리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요한 4,31-34).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느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우리는 모든 영혼 앞에서 우리를 잊거나, 적어도 두 번째로 두는 방법을 알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스스로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수행하고, 그분의 가장 거룩한 뜻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도록 격려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스스로 보여 주십니다. 항상 이러한 열망으로, 우리를 고려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뿌리까지 시들었습니다. 제자들은 놀랐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르 11,22-24).
믿음은 우리의 사도적 열매를 맺는 무한한 원천이 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요한 7,38).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로마 교황청의 교도권에 대한 충실한 충실함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벙어리, 소경, 절름발이, 병든 자, 그리고 주님께 온 많은 사람들을 고치셨으니,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마태 15,32).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며 사흘 동안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 일부는 주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 치료사 나 땅의 강력한 사람을 따르는 것처럼 주님을 따랐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에 이런 의도로 주님을 찾았다는 증거가 부족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미로 그분을 붙잡게 하였다.” (루카 20,20).
그렇게 사흘 동안 인내한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빵이 배가 되는 위대한 기적을 행하셨다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지 않으실지 생각해 보십시오. 곤경에 처했을 때, 자신의 궁핍함을 느낄 때, 자신감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주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고 우리가 3일 이상 사랑과 희생으로 주님을 따랐다고 말하십시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장애물에 직면하여 믿음으로 성장하십시오. 루카 성인의 말씀처럼 백부장의 행동을 살펴보세요.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 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루카 7,6-7).
어려움과 좌절은 우리가 기도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순간 사라집니다. 다음 사항을 명심하면서 겸손하고 솔직하게 예수님과 대화합시다. "흠 없이 걷는 이는 안전하게 걸어갑니다." (잠언 10,9).
곧 빛과 평화, 평온과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진흙이 아직 우리 날개에 남아 있어도 우리는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면 수치심과 참회, 진흙이 떨어지고 우리는 믿음과 행함의 높이에서 독수리처럼 날게 될 것입니다.
집회서에서 말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합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을 만드신 주님을 찾는 일에 마음을 쏟고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서 기도한다. 기도 중에 입을 열어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한다. 위대하신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는 지각의 영을 충만히 받으리라. 그리하여 그분 지혜의 말씀을 쏟아 내고 기도 중에 그분께 감사를 드리리라. 그는 의견과 슬기를 올바로 갖추고 그분의 신비를 묵상하리라." (집회 39,6-11).
기도는 우리에게 선하고 겸손하며 거룩한 신성을 주며, 어떤 환경에서도 위험 없이 일할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이렇게 지속적이고 끈기 있게 신성을 따름으로써, 주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은사, 즉 선한 신성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인내하면 이 평화의 군대, 함께 구속하는 백성이 어떻게 수적으로나 거룩하게 성장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성인이 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내 자녀들아, 기쁨과 노력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한 세상에서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 (로마 8,28).
인생에서 죽음을 제외한 모든 것은 준비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죽음은 곧 삶입니다. 성실함과 초자연적인 감각, 유머가 있다면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라바는 살인자이자 말썽꾸러기였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를 죽음에서 구해 주었습니다. 디마스는 도둑이자 범죄자였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회개의 말 한마디, 단순하고 신뢰하는 기도 한 마디로 예수님은 그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바로잡아라, 바로잡기에 너무 늦지 않았으니 즉시 바로 잡으십시오.
내 아들아! 오푸스데이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왔고 앞으로도 올 것입니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마태 20,9).
포도원의 일꾼들처럼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지 수년이 지난 영혼이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 저에게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 일꾼을 위한 자리는 항상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충실하다면, 거룩함은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몇 분의 사랑,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손과 발을 묶는 것만으로 영광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배신도 없고 속임수도 없는, 모든 사랑, 모든 아름다움, 모든 위대함, 모든 과학... 그리고 속임수도 없는 위대한 사랑이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립니다. 그것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않고 우리를 만족시킬 것입니다.
사도 시대부터 우리에게서 그 희망을 빼앗으려는 이단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1코린 15,12-14. 19).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세상의 바다를 항해하는 이 항해의 모든 어려움을 감당합시다. 우리와 사랑하기를 원하는 모든 영혼의 열망은 하느님, 즉 천국의 영광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어떤 것도 가치가 없습니다. 천국에 가려면 우리는 충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실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넘어지더라도 싸워야 하고, 우리의 길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우리는 일어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거룩함을 책임진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외톨이가 넘어지면 그에게는 불행!" (코헬 4,10).
우리 자신이 같은 사슬의 고리라는 것을 알고 책임감이 부족하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사업에서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진정으로 말해야 합니다:
"나라는 연결 고리가 끊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끊어지면 하느님과 거룩한 교회, 형제자매들을 배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고리의 힘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보석으로 세팅된 금과 백금으로 된 고리가 있다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혼자가 아니며, 하느님의 자녀는 하나의 구절이 아닙니다. 우리는 동일한 서사시, 신성한 시의 한 구절이며, 그 통일성, 조화, 효능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불행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들을 승리로 이끌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제가 인내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 모두의 실수를 인정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할 때, 우리는 겸손해지고 교회와 함께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복된 탓이여!” (성 토요일 전례).
이런 식으로 우리는 평온을 얻고, 우리 자신의 거룩함과 다른 사람들의 거룩함을 사랑하고 살도록 서로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카드의 힘, 즉 혼자 설 수는 없지만 서로 기대어 서있는 성을 형성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약점, 우리의 약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의지하십니다. 그리고 자선이 우리를 하나로 묶는다면 그분은 또한 모두의 힘을 믿으십니다. 사랑은 우리의 걸음의 정직함, 선한 영의 정체성을 보장하는 축복받은 형제적 교정을 축복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마태 18,15).
결점과 존재 방식을 가진 지구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할 수 있는 큰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때때로 영혼들이 천천히 걸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그들이 걷고 있어도 그 움직임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격려해야 합니다.
평화와 기쁨을 심는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의 정당한 개인적 자유가 확산되고, 증진되고, 수호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지상의 의무에 대해 자신의 몫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수호하고 모든 사람을 이해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결점과 실수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은혜와 인간의 은혜로 그 결점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어 우리 모두가 품위 있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닐 수 있도록 돕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많은 영혼이 있으며, 우리는 그들의 영적 성장에 장애물이 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을 추구하고 거룩해져야 할 의무가 있으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택하신 선택으로 하느님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도 사업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실망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인간적인 이유 때문에 고군분투합니다. 충성심 때문이라도 좋은 모범을 보이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언젠가 우리의 행위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하지 않은 불행을 겪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주님께 은혜를 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반죽에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함이 필요합니다. 즉, 과거의 실수를 보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일상 생활에서 미덕을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살면 우리는 충실해질 것입니다. 저녁 시험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주님, 저는 항상 당신을 섬기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당신의 사랑을 위해 바쁘게 살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제 자신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주님과 연합.
혼자서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에 유용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요한 15,5).
그러나 주님과 연합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필리 4,13).
실수와 잘못이 있을지라도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잘 알지 못했던 한 지인은 한때 매우 높은 고도의 비행기를 타고 있었지만 비행기가 아니라 날개에 타고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면의 삶이 없는 영혼들이 끊임없이 쓰러지고 고통스럽고 불안정한 사도직의 높이를 통과하는 방법을 이해하도록 그에게 주셨습니다.
이 삶은 싸움이고 전쟁이며 평화의 전쟁으로, 항상 기쁨과 평화로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경건하고, 교양 있고, 근면하고, 스포츠맨이며, 영적인 삶을 사는 오푸스데이의 남성과 여성이라면 그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코린 9,24-25).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주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관상하는 영혼입니다. 낮의 아침의 첫 생각부터 밤의 마지막 생각까지. 우리는 사랑 안에 있고 사랑 안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계속 고정시킵니다.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그분께 나아가고, 그분을 통해 아버지와 성령께 나아갑니다.
어느 순간이라도 불안, 안절부절 못함, 불안이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 다가가 아버지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우리 자신을 그분의 손에 맡긴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믿음, 희망, 신뢰, 사랑을 의미하는 항복입니다.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젊을 때나 늙을 때나, 햇빛이 내리쬐거나 폭풍우가 몰아칠 때나, 지키기 쉬울 때나 힘들 때나, 우리의 생활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끝까지 인내하면 내 아들이 예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의 거룩함을 확신합니다.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잠언 8,31).
우리 하느님은 그분의 피조물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가 주님께 충실하지 않았더라도 주님은 우리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셨습니다. 아이가 애정을 가지고 다가오자마자 어머니가 아이의 불만족스러운 면을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우리가 애정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가 회개하고 참회 성사로 깨끗해질 때 우리가 잘하지 못한 일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 놀라운 진리로 우리는 평온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는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큰 패배였다 할지라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길을 잃을 수 있고 실제로 길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의 투쟁에서 길을 잃었다면 돌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느끼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받아들여질 것을 확신하면서 감사함으로 그분께 돌아갑시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할 때, 사랑의 아버지처럼 사람과 사건을 통해 영혼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일을 시작할 때와 같은 열정으로 일을 끝내는 데 필요한 힘, 심지어 인간의 에너지까지 갖기 위해 비록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적절한 은총을 줍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인내하고 자신감으로 가득 차고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이끄는 신격화는 더 이상 오만의 외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겸손의 외침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연합을 분명히 하는 방법이며 자선의 표현입니다. 우리 자신의 비참함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 피신하고 우리 자신을 신격화하도록 이끕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 있게 대하십시오. 고난의 기쁨.
우리는 하느님을 대하고 하느님을 만집니다. 성 루카가 과다 출혈하는 여인 치유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보세요.
"예수님께서,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모두 자기는 아니라고 하는데, 베드로가, 스승님, 군중이 스승님을 에워싸 밀쳐 대고 있습니다.하였다." (루카8,45).
생명은 그리스도에게서 급류처럼 흘러나오는 신성한 미덕입니다. 내 아들아, 너는 그분께 말씀드리고, 만지고, 매일 먹으며, 성체성사와 기도와 빵과 말씀으로 그분을 대합니다.
몇 년 전, 저는 한 무리의 남성들과 그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유명한 한 남성을 목격했습니다. 사람들은 서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한 소년이 군중 속에서 나와 모두가 감탄하고 있던 그 남자의 수트에 손을 대더니 환한 얼굴로 돌아와 "내가 만졌어요!"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그 이상을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우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관계는 우리의 선한 신성의 기초입니다. 성체성사와 기도는 우리가 모든 영혼을 기쁨으로 섬기며 사는 법을 배우는 의자입니다. 우리는 또한 섬김을 통해 다스리는 법을 배웁니다. 우리는 순종하기를 원함으로써 자유 안에서 순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우리는 다양성과 다양성에 대한 존중, 가장 친밀한 동일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법을 배웁니다.
사도행전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분위기를 한 마디로 표현한 책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 2,42).
믿음과 빵과 말씀으로 우리는 인내하고 승리자라고 불릴 것이며, 땅에서 행복하고 세상 한가운데서 모든 민족의 많은 영혼에게 평화의 길을 열어 준 후 하늘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모든 사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내 자녀들아, 행복하십시오. 내 불쌍한 삶을 바라보면, 나는 만족해서는 안 되지만, 나도 기뻐합니다. 나는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한번 찾으시고, 주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나는 당신과 내가 뿌리 뽑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행복하고 우리는 확실히 뿌리 뽑을 것입니다. 불태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보고 불태우고, 넘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보고 넘겨줄 것이기 때문에 나는 행복합니다.
나의 어머니, 이 아이들과 저에게 투쟁에서 겸손의 복된 선물을 주시면 우리를 진실하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몰입하고 신격화되었다는 느낌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모든 보잘것없음, 모든 비참함, 약점과 결점을 지닌 우리의 불쌍한 인간 본성의 모든 약점을 보고 주님의 은총에 충실할 준비가 되어 위대한 일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는 희생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쁨을 주소서.
저와 함께 말하십시오. 주님, 하늘에 계신 어머니의 도움으로 우리는 충실하고 겸손 할 것이며, 우리에게는 진흙 발이 있으며, 우리 안에서 빛나는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며, 은혜이며, 당신이 원하기 때문에, 당신이 선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는 신성화입니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선하신 분이시다". (시편 106,1).
어떤 폭풍도 성모님의 마음을 난파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폭풍이 올 때 폭풍과 싸우고 가장 다정한 성모 마리아의 확고한 피난처로 가서 안전하도록 합시다. 복되신 동정녀이신 그분은 우리의 안전이며, 지혜의 자리이신 공정한 사랑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은총의 중재자이시며, 우리를 그분의 아들 예수님께로 인도하실 분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슬플 때나 기쁠 때, 또한 여러분의 불행이 어느 정도 명백하고 짓누를 때, 항상 마리아에게 의지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녀는 세상 한가운데서 그녀의 아들 예수님을 섬기는 이 길에서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여, 인간 자녀들의 불행을 너무나 잘 아시는 우리의 어머니이시여. 능력의 공급자이신 거룩하신 마리아님, 우리의 삶을 용서하소서; 빛이어야 할 것이 어둠이었던 것을 용서하소서; 강이어야 할 것이 약했던 것을 용서하소서; 불이어야 할 것이 미지근했던 것을 용서하소서. 우리의 삶의 질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우리가 그렇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당신의 자녀로서 당신과 함께 가족의 좋은 공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옵소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마드리드, 1931년 3월 24일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cartas-1/pyeonji-2beon/ (2025-11-22.)